증산법종교
▼ 구글로 검색
수정 삭제
2.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

2.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 5

열린마당  활연관통 활연관통님의 글모음 쪽지 2016-08-05 22:00 4,144
20세기 인류 현대사를 관통하는 두 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입니다.

인류는 파시즘, 나치즘, 일본 천황전체주의 같은 우파 전체주의와 싸워 이겼고,
1917년부터 1991년까지 74년을 공산 전체주의와 싸워 이겨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은 6.25때 스탈린 전체주의를 선배세대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막아냈으며, 
전 세계 마지막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이 붕괴되면 북한 사람들이 해원, 상생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인류적 임무를 맡고 있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지금 많은 나라들이 북한을 고립시키는 대북제재에 동참하고 있고 
북한고위직을 비롯해 식당종업원들, 공장직원들까지 연이어 탈북하고 있는 걸 보면 
북한이 머지않아 붕괴할 것임을 세상이 막 일러주고 있는 것 같네요. 

작년 하반기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을 때 
저는 많은 토론회와 자료를 보았고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의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전쟁의 본질은 ‘진실과 거짓의 전쟁’이더군요.
저는 왜 이렇게 한쪽에선 진실을 말하고 다른 쪽에선 진실을 은폐·왜곡하게 된 건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 에 대한 입장차이가 
그러한 진실vs거짓의 대립을 만든 핵심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에 대해서는 이미 소련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그 진실이 드러난 지 오래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역사학계 주류는 진실을 외면해왔습니다. 
그 진실이 기존에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역사서술체계와 완전히 배치되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제대로 교과서에 반영하지 않은 채 계속 학생들에게 팔아왔고 선생님들도 그 교과서 내용대로 가르쳐온 것이죠.
그들은 왜 진실을 은폐해 온 걸까요?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의 원인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상제님의 “연원을 잘 바루라.”는 말씀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을 바로 잡는 것도 
해당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북한 전체주의가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그 과정들을 알게 되면서
‘북한 전체주의 연원에 대한 진실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풀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 선조들, 선배세대 분들이 이 땅에 살아오시며 우리에게 전해주신 소중한 것들을 우리가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해주는 데 있어 역사에 거짓과 왜곡이 있다면 진실을 밝혀 바로잡은 후에 전해줘야 할 것입니다. 
6.25때 우리 선배세대는 전체주의의 최전선에서 싸우며 수백만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냈는데 후손이란 사람들이 북한 전체주의는 옹호하고 대한민국은 폄훼하는 그런 교과서로 공부하고 있는 걸 보신다면 얼마나 통탄스러우실까요.

우선 ‘북한 전체주의’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뉴데일리 박성현주필의 설명글들을 가져와봤습니다.

--------------------------------------------------------------------
(인용시작)

레닌-스탈린-모택동으로 이어지는 [공산 전체주의]가 있고, 
파시즘-나치즘과 같은 [우파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있고, 
[천황은 신이다]라는 일본 민족 종교에 바탕한 
신성(divine) 혹은 [악마적(demonic) 전체주의](=미카도이즘, Mikadoism)가 있다.

[북한 김일성 사교(邪敎) 전체주의]는, 
스탈린 체제를 모방했다는 점에서는 [공산 전체주의]이고,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는 [나치 전체주의]이고, 
김일성을 신으로 모신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천황전체주의]이다. 

비빔밥이 한반도의 발명품이듯,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전체주의를 뒤섞은 짬뽕 역시 한반도의 발명품이다. 

히틀러의 나치 전체주의가 벌인 유태인 대학살.
일본 천황전체주의가 저지른 난징대학살.
월평균 4만명씩 처형한 스탈린 전체주의의 대학살.

모택동 전체주의에 의해 벌어진 [대약진운동](1958~1962).
역시 모택동 전체주의가 주도한 [문화대혁명](1966~1976). 
그리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저질러진 [킬링필드](1975~1979) 아니던가?

[스탈린 대학살]의 희생자는 약 4천5백만명.
[대약진운동]의 희생자는 약 4천5백여만명.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는 약 2천5백만~3천여만명. 
[유태인대학살] 희생자는 약 6백만명.
[킬링필드]의 희생자는 캄보디아 전인구 4분의 1에 달하는 2백여만명.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에서 그런 모택동을 숭배하는 풍조를 퍼뜨렸다. 
리영희는, 이런 학살자를 찬양했다. 386 운동권은, 이런 리영희를 정신적 사부로 모시고 있다.

특히 [대약진운동]과 관련, 영국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논픽션상인 BBC <새뮤얼 존슨상>의 2011년 수상작으로 홍콩대 프랑크 디쾨터 교수(런던대 박사)가 쓴 <마오의 기근>에 따르면, 그동안 2,500만명 정도로 알려진 희생자수가 최근 중국 공산당이 공개하기 시작한 문서를 통해 4,500여만명에 육박한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9월 출간된 이 책은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 <선데이타임스>, <이브닝스탠더드> 등의 <2010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64290


(전체주의란)
["계급투쟁 혹은 민족정복투쟁의 피바다를 건너면, 천국을 한방에 만들 수 있다"라고 믿는 정치 종교로서, 국가권력이 개인의 생활, 느낌, 생각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는 절대 지배 시스템을 지향한다. 
사유재산,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결혼-진로의 자유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보장되는 
우파전체주의(나치즘, 파시즘, 천황전체주의)는 호전적이어서 타 민족을 대량학살함에 반해, 
이와 같은 자유가 전면적으로 박탈되는 공산전체주의는 내부 '인민'을 대량학살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북한 김일성전체주의는 공산주의 이념에서 벗어난 특이한 경우로서, 비록 공산계열의 특성을 가지고는 있으나, 당을 파괴하고 국가를 사유화하며 혈통을 신격화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북한 김일성전체주의의 이같은 특징은 실은 김정일의 작품이며 이는, 그가 (김일성 생전에) 스스로를 '당 중앙'이라 불렀던 것에도 드러난다. 당시 북한 용어에서 '당 중앙'은 곧 김정일을 뜻했다. 이런 측면만 본다면, '김일성전체주의'라는 용어보다는 '김정일전체주의' 혹은 '김가-전체주의'가 더 정확한 용어다.]

http://www.twitlonger.com/show/n_1snq2bs 

(인용끝)
--------------------------------------------------------------------

그러니까 전체주의는 인간을 부속품, 원자재로 삼아 혁명 등의 피바다를 통해 한방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정치종교입니다.

세계적인 정치이론가 블라디미르 티스마네아누는 전체주의를 ‘역사에 강림한 악마’(the devil in history)라고 표현했다 합니다. 위 인용글에서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모택동 한 사람에 의해 죽은 중국인만 남북한 인구수와 맞먹는 7천만~7천5백만 명에 육박하는데 (그것도 공식적인 기록에 남은 숫자만으로도 그 정도) 전체주의가 악마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할 분은 없을 것 같네요.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에 약 200~300만 명이 굶어 죽었으며 매년 수용소에서 몇 만 명씩 죽어가고 있어 북한에서 지금까지 아사, 숙청, 처형된 사람들은 500~600만명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탈북자들 수까지 고려하면 북한 인구는 사실상 1,800만 선으로 급속히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1174/20160602/%EC%9D%B8%EA%B5%AC%ED%86%B5%EA%B3%84%EC%97%90%EC%84%9C-%EC%82%AC%EB%9D%BC%EC%A7%84-600%EB%A7%8C-%EB%AA%85%EC%9D%98-%EB%B6%81%ED%95%9C-%EB%8F%99%ED%8F%AC%EB%93%A4.htm



 


(기독교방송임을 감안하고 보세요)

그런데 이런 북한 전체주의에 대해 그저 3대 세습 독재라는 말로 단순화시키고 
북한의 악행과 인민학살에 대한 실상을 은폐, 침묵하고 
더 나아가 북한을 은근히 옹호해주는 역사학자,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학자, 선생님이 아니라 남한에 있는 사람들 얘깁니다. 
그들은 또한 소련전체주의와 스탈린에 대한 비판도 별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체제인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얘기합니다.



 


영상의 20분부터 보시면 
북한에서 가르치는 왜곡된 역사내용(미국이 한반도분단의 원흉이다)이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증오하게 하고 그런 증오가 곧 북한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도 소련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진 북한의 왜곡된 역사내용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문서가 공개된 후에는 대놓고 그런 주장은 못하고 은근이 다른 표현으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해 왔습니다. 그리고 교과서 검정을 통과하려면 ‘남침(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이라는 표현을 어쩔 수 없이 넣어야 하니까 그런 표현을 교과서에 넣긴 하지만, 배경상황을 설명하면서 은근이 그 남침에 남한도 책임이 있다는 듯이 쓰는 교과서가 많다고 하더군요. 사실과 다른 거짓으로 대한민국(정부)을 헐뜯고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의도가 뭘까요? 
이 글을 끝까지 읽게 되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22분부터 나오는 내용을 보면 북한은 무력·적화통일을 한 후에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민간인들은 모두 죽인다는 방침을 군인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다니 참 무섭네요. 이 자체가 그들은 우리를 함께 할 같은 민족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죠. 그러니까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남북한이 같은 민족임을 내세워 (수많은 북한인민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북한정권도 포용해야 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쓰는 허울좋은 말일 뿐입니다.

동영상의 탈북자 백요셉님도 북한정권과 북한인민을 완전히 구분해서 나누어 봐야하며 
결코 ‘우리민족끼리’라는 말로 북한정권까지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북한정권을 옹호하고 북한핵실험에 대해 제대로 비판도 하지 않으면서
북한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그런 사람들이 
‘인권, 사람이 먼저다’ 이런 말을 하면 그 진정성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죠. 
그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북한 사람들 인권은 인권이 아닌가요? 북한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가요?

탈북자들이 읽고 북한에서 배운 것과 비슷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그런 국사교과서를 만들고 가르치는 분들이 지금까지의 역사학계 주류였다는 게 믿겨 지십니까?
이들은 북한을 공산 전체주의에서 아예 빼버리고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전체주의’라는 용어도 교학사 교과서 한군데에만 등장할 정도죠.

그래도 하늘이 도운건지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작년에 확정되었고, 
또 문제가 되는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라는 교육부의 명령에 불복해 소송을 걸었던 7종검정교과서 집필진들이 결국 패소하여 더 이상 교과서에 문제가 되는 그런 내용을 실을 수 없게 되어 참 다행스럽습니다.

하지만 여소야대정국에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어 좀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교과서에서만 문제된 내용이 수정됐을 뿐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다른 책들엔 아직 민중사관으로 쓰인 내용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어 앞으로 시간을 두고 계속 바꾸어 나가야겠죠.

이제부터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에 대해 박성현님의 글을 인용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뒤이어 북한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국내세력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덧붙여 놓았습니다.

(※ 제가 법종교에 3월에 올린 박성현님의 ‘개인을 발견한 건 기적이다’ 라는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삭제가 됐어요. 
그 동영상 중간에 보면 북한전체주의의 발생학에 대해 쉽게 설명해주시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함께 보시라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 귀한 영상이 왜 삭제된 건지 많이 아쉽습니다. 그 영상을 보신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북한 전체주의는 만주,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들과 독립군들의 비참한 죽음을 이용해 탄생된, 한마디로 ‘사기와 배신으로 점철된 피바다’ 가 그들의 연원이었습니다. 이런 진실이 은폐되기를 원하는 집단에서 삭제를 요청했는지 아니면 최근 전희경사태로 자유경제원과 박성현님의 관계가 불편해져 자유경제원측에서 임의로 삭제한 건진 모르겠지만, 둘 다 영상삭제의 수긍할만한 이유가 될 수는 없겠죠.) 

(※ 1),2),3)번 글의 번호와 제목은 제가 임의로 단 것임을 밝힙니다.)
--------------------------------------------------------------------

1) 북한 전체주의의 연원(발생학)


오직 진실과 생명만 진혼곡이 될 수 있다


<무장투쟁은 배신과 도살의 천국이었다> 

1920년경 연해주-만주에는 우리 동포들이 약 80만 명쯤 살고 있었다. 1930년이 되면 130만 명쯤으로 늘어났다. 이는, 한반도 인구의 5%쯤 되는 숫자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무려 4백 만 명에 해당한다. 국사학자, 역사교사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김일성은 말이야. 만주에서 끝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사람이야. 그러니까 최소한 상당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 김일성이 세운 나라는 친일파가 세운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큰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이런 주장이 바로 종북, 친북, 떼촛불 세력의 십팔번인 항일무장투쟁 대 친일파 논리이다. 그러나 그 당시 연해주-만주에 얽힌 피바다, 배신, 도살의 내막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런 소리를 할 수 없다. 북한의 핵심 지배그룹인 김일성 서클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만주 지역당 출신으로서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했다가 소련 제88국제여단에 합류했던 경력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이들은 연해주-만주 한국 동포들에 대해 소련과 중국이 벌인 비극적 피바다를 백이십프로 이용해 먹은 민족배신자 그룹, 도살자 그룹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이 네 번에 걸쳐 그짓을 했고 중국이 한번에 걸쳐 그 짓을 했다. 김일성 서클은 이중 세 번 동족을 죽음으로 이끈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그래서 민족배신자요 동족 도살자들이다. 자세한 사정을 하나씩 살펴보자. 


<자유시 참변, 1920년 안팎의 연해주-만주 정세, 동포의 분위기>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벌어졌다. 그러자 연해주-만주 지역에서 소련 혁명군을 무찌르기 위해 다국적 반공연합군이 만들어졌다. 10만명 규모 전체 병력의 80%가 일본군이었다. 1918년에서 1922년까지 4년 동안, 일본이 주도하는 다국적 반공연합군과 소련 혁명군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만주-연해주 그리고 시베리아에 걸쳐 벌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시베리아 간섭’(Siberian Intervention)이다. 소련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식민지 지배 열강 국가들이 꾸린 다국적 반공연합군에 맞설 총알받이를 키울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계 각지의 여러 민족들이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이 저항을 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소련과 일본 사이에 대판 전쟁이 벌어지고, 소련 공산당의 두목 레닌이 이렇게 달콤하게 선동하자, 연해주-만주 동포 사이에는 소련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공산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풍토가 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해괴망측한 거짓 동영상 백년전쟁이 엄청나게 띄워주고 있는 이동휘 같은 인물은 아예 이렇게 주장했다.

“독립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을 뭐 하러 둘로 나눠서 하나? 그냥 한 방에 해치워야 돼! 공산 국가로 독립하는 거야! 그게 최고야!” 

이동휘는 레닌의 비위를 맞추어 수십만 달러 상당의 금괴를 받아 자기 배 속으로 꿀꺽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동휘의 레닌 갈취사건이다. 그런데 1920년 6월이 되자 미국, 영국을 포함한 서양 열강의 군대는 완전히 철수하고 일본군만 남아서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반혁명 정부를 계속 지원하는 상황이 되었고 일본조차 곧 전쟁을 끝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에게 이런 메시지를 분명히 보낼 필요가 있었다. 

"너희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만주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우리는 오직 연해주를 포함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만 되찾으면 된다" 

이 메시지를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값비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소련 공산군과 함께 죽기 살기로 일본군과 싸워 온 대한독립군만큼 좋은 희생제물이 없었다. 독립군을 계속 살려두면 만주 및 연해주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뇌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1921년 6월, 소련은 대한독립군 전체를 자유시로 불러들인다. 약 3천 5백 명의 병력이 따듯한 쉼터와 휴식을 기대하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르 강을 넘어 스보보드니라는 평화스런 도시로 들어왔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 도시를 자유시라고 불렀다. 러시아어로 자유를 뜻하는 스보보다라는 명사에서 도시명을 따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시에는 자유가 없었다. 오직 흉측한 배신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련군은 대한독립군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소련군대로 편입될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현장에서 1천명 안팎이 학살되고 나머지는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순수한 독립군의 마지막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만주에서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순수한 독립군이 존재한 적 없다. 그 이후 연해주-만주의 동포들은 어떨 때에는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 또 다른 때에는 소련의 지휘 아래 싸웠다. 그때마다 자유시 참변과 똑 같은 흉측한 배신과 피바다가 무려 네 번이나 더 되풀이 되었다. 


<이승만의 노선 1> 

이승만은 당시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는 당시 전세계에서,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지식인 중의 한 명이었다. 마침 상해 임시정부에 와 있던 1921년 봄 이승만은 무장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공연히 사람만 죽어나가는 무모한 짓이다, 이렇게 역설했다. 이 같은 입바른 소리 때문에 이승만은 거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지경까지 내몰렸다. 이승만은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에만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이 같은 입장은 이미 1908년부터 일관되게 나타난다. ‘일본이 싫어할 짓만 골라서 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함부로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일본이 원하는 행위다. 무장투쟁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일본을 강화시켜 준다. 지금 한반도가 처해있는 국제정세와 열강들의 여론은 결코 무장투쟁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무장투쟁을 벌이면 일본이 속으로 웃는다. 무장투쟁이 가장 심한 지역을 하나씩 골라 군대를 보내고 법령을 정해 무찌른다. 그 결과, 민초의 삶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민초는 차라리 일본의 보호라도 받아서 편안히 살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초의 애국심, 희생정신, 능력이 점차 고갈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원하는 바다. 각자 경제적 힘과 정신적 문화적 역량을 기르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자유시 참변에도 불구하고 연해주-만주 동포들의 공산주의 사랑, 소련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심지어 국내에서까지 공산주의는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이 같은 풍조에 대해 이승만은 1923년에 ‘공산주의의 옳고 그름’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통렬한 경고를 보낸다. 

“공산주의로는 답이 없다. 공산주의에는 다섯 가지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첫째, 공산당은 재산을 분배해서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근로의욕이 떨어져 경제가 망한다.
둘째, 공산당은 기업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기술과 혁신이 정체해서 경제가 망한다.
셋째, 공산당은 지식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사회 자체가 마비된다.
넷째, 공산당은 종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도덕과 인륜이 타락한다.
다섯째, 공산당은 소련이 국제혁명과 인류 진보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일 뿐이며 소련은 하나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승만이 지적한 공산주의의 다섯 가지 문제점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공산권 붕괴를 예언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가 말한 대로, 근로의욕 저하, 기술혁신 정체, 지식층의 몰락, 도덕적 타락, 국가 이기주의..이 다섯 가지가 공산권 붕괴의 근본 원인이다. 이승만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66년 전인 1923년에 이 같은 통찰을 내놓았던 것이다. 


<민생단 학살, 1930년대의 만주 연해주 정세> 

소련이 저지른 자유시 참변보다 더 무참한 일이 1930년대 중반 중국인 공산당원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민생단 학살 사건이다. 중국 공산당의 만주 지역당은 1931년 4월까지 불과 당원 수가 불과 1,190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중 80%가 우리 동포였다. 만주 지역당은 조선동포들에 의해 만들어져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해 9월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워 사실상 만주를 직할통치하기 시작하자 사정이 크게 바뀌었다. 중국인들의 민족 의식이 크게 자극받아 만주 공산당의 몸집이 거대하게 부풀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입당한 중국인 공산당원의 눈에는 동포들이 아니꼽기 짝이 없는 존재로 비춰졌다. 특히 중국 공산당원들은 본능적으로 여러 계층이 참여하는 항일 통일전선을 지향했던 반면에 만주의 한국인 동포 공산당원들은 소련 지시에 충실히 따라 공산주의 혁명을 지향했었다는 근본적인 노선갈등이 있었다. 

마침내 중국 공산당원들은 동포 공산당원들을 일제의 간첩이라고 몰아 붙여 잔인하게 고문하고 작두로 썰고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일제가 조선 놈들을 꼬드겨 민생단이라는 간첩단을 만들어 우리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려 한다” 1932년 겨울부터 2년에 걸쳐 조선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만주 동포들은 한편으로는 일제와 싸우다 죽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공산당원들의 린치에 의해 숨졌다. 

무수히 많은 조선동포가 막무가내로 끌려가서 린치당하고 잔혹하게 죽어 나갔다. 현재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희생자 숫자만도 오백 명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들의 숫자일 뿐이다. 일반 민초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수 천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민생단 사건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출신 중국 공산당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동료 조선인들을 밀고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김일성 서클은 죄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에 대해 김일성 본인은 "중국말을 잘 해서 살아남았다"라는 우스꽝스런 주장을 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동포에게 올가미를 씌워 중국인들에게 넘겨주었던 자들만 살아 남았다. 동족에 대한 배신과 도살이 김일성 서클의 생존 비결이었다. 


<이승만의 노선 2> 

1930년대 전반, 만주에서 일제, 중국 공산당, 그리고 김일성 서클 같은 민족을 배신한 도살자들에 의한 참혹한 삼중 피바다가 펼쳐지고 있었을 때 이승만은 무엇을 했을까?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 이 피바다를 알리는 30 페이지짜리 소책자를 뿌려서 국제연맹에서 일본을 쫓아냈다. 이 소책자의 제목은 코리안즈 인 만추리아, 즉 ‘만주의 한국인들’이다. 

물론 정식 외교관이 아닌 이승만이 혼자 힘으로 이 일을 해 낸 것은 결코 아니다. 만주 상황을 조사한 리튼 위원회의 보고서가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이 중국을 야금야금 먹고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던 열강들의 입장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활동이 일본을 국제적으로 완벽히 고립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제네바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 이승만은 영웅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런데 일본을 쫓아내는 데에 성공한 이승만은 갑자기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부 장관과 만나기로 애써 자리를 만드는 일을 벌인다. 우여곡절 끝에 면담 스케줄이 잡혀 소련에 가지만 갑작스레 면담이 취소되어 문전박대 당하게 된다. 이승만은 서둘러 소련을 빠져 나온다. 그런데 엄청 신이 난 듯 8일 동안 유럽 관광을 다닌다. 이승만 평생 단 한 번의 관광이었다. 미국 뉴욕으로 귀국한 이승만은 자동차로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미주 동포들을 만나고 다닌다. 무엇인가 크게 마음이 고무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까? 왜 심정이 그토록 깊게 출렁였던 것일까? 

비밀은 1930년대 중반 연해주-만주를 둘러싼 일쏘 관계에 있다. 일본이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만주 직할통치 체제를 구축 한 다음 행보가 소련 침공인가, 아니면 중국 본토 침공인가에 따라 한국의 운명이 갈리는 상황이었다. 소련을 치면, 일본은 미국-영국 편이 되고, 한국의 독립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반면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치면, 일본은 미국-영국과 전쟁 모드로 들어가게 되고 한국이 독립할 기회가 성큼 다가오게 된다. 

이승만이 모스크바로 달려갔던 이유는 소련과 일본 사이의 분위기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소련 외무성의 문전박대는, 곧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낮다는 증거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의 다음번 공격 방향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닌가! 이승만은 모스크바에서 소련-일본이 밀월 체제로 갈 가능성을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평생 단 한 번의 관광을 할 만큼 기뻐했다. 


<동북항일연군: 밀월을 위해서는 먼저 힘겨루기부터> 

소련이든 일제든 흉악하기 짝이 없는 전체주의 체제이다. 갱단들이다. 갱단 사이에 평화 체제가 만들어지려면 우선 서로 적당히 협박하고 힘을 겨루는 사전 과정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935년 말부터 이 사전 힘겨루기가 진행되었다. 1935년 말, 스탈린은 문득 만주지역의 항일 무장세력을 죄다 긁어 모아 동북항일연군을 결성할 것을 지시한다. 동북항일연군은 표면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막은 스탈린이 직할 통치하는 부대였다. 스탈린은 동북항일연군을 이용해 일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니들이 우리를 침공하면 만주 전체가 동북항일연군의 게릴라 전쟁터가 되는 거야! 우리가 동북항일연군에게 무제한으로 돈과 무기를 공급할테니까! 그러니 정신 똑 바로 차려! 우리 소련이 아니라중국 본토를 향해 밀고 내려가야 되는 거야! 알간?" 

일본은 스탈린의 메시지를 해독했다. 일본은 1937년 7월, 소련을 침공하는 대신에 중국 본토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중일전쟁이다. 그리고 그 다음달인 1937년 8월,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비밀 불가침조약이 맺어졌다. 1933년에 이승만이 예측했던 대로 소련과 일제는 평화스런 허니문 관계로 진입했다. 


<일소 불가침조약을 위한 첫번째 제물: 동북항일연군> 

이제 동북항일연군의 역할은 끝났다. 스탈린은 1937년 여름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지원을 줄여 말려죽이기 시작했다. 1940년 2월, 백두산 밑 길림성 정우현에서 중국인 게릴라 영웅 양정우가 일본군 기관총에 벌집이 되어 죽는 것을 끝으로 동북항일연군은 끝장났다. 동북항일연군은 4년에 걸쳐 말라 죽는 과정에서 수많은 만주 동포들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 동포들은 스탈린이 동북항일 연군을 말려 죽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고 목숨을 바쳐 동북항일연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동북항일연군과 같은 강력한 대중 기반을 가진 게릴라 조직을 말려죽이려면, 그 게릴라 조직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죽고야 말 자리로 이동하도록, 반드시 죽고야 말 전술을 선택하도록 꼬드기는 배신자가 내부에 있어야 한다. 누가 이런 배신자의 역할을 했을까? 

동북항일연군이 완전히 말라죽은 다음에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군 제88 국제여단'으로 변신한 자들이야말로 동료를 스탈린에게 팔아넘긴 배신자 집단으로 추정된다. 김일성 서클은 죄다 88 국제여단 출신들이다. 그래서 이들이말로 동북항일연군 내부에서 부대의 궤멸을 유도해낸 인간 백정들로 볼 수 밖에 없다. 


<일소 불가침 조약을 위한 두번째 제물: 연해주 동포 학살 및 강제 추방> 

스탈린은 일본과의 평화 밀월체제를 굳히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에 더하여 엄청난 제물을 또 하나 준비했다. 1937년 8월 일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다음날 바로 연해주 동포 20여 만 명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동포 지식인 3천명을 끌어내어 총살해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전체를 옷가방 하나 변변히 챙길 틈도 주지 않고 열차에 콩나물 시루처럼 태워서 중앙 아시아 황무지에 패대기 쳤다. 

영혼이 배배꼬인 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중앙아시아 이주’라고 부른다. 이주? 마치 평화스러운 이민처럼 들리는 단어다. 그러나 이는 "이주"가 아니다. 집단 강제 추방에 의한 집단 학살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독립군 장군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내동댕이쳐져 극장 수위로 일하다 숨졌다. 그래도 홍범도는 행복한 편이었다. 1917년 공산 혁명시절부터 열렬히 소련 공산당을 믿고 지지해 온 연해주 동포들은, 중앙아시아 황무지의 한 복판에서 땅에 구덩이를 파고 온 식구가 껴안고 자다가 얼어 죽었다. 한 줌의 식량을 얻기 위해 가녀린 처녀가 현지인에게 몸을 팔고 미쳐 죽었다. 한국인을 뜻하는 단어인 ‘까레이스키’는 더럽고 추접스런 짐승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스탈린은 우리 동포에게 왜 이런 흉측한 짓을 저질렀을까? 연해주 동포들의 맹렬한 항일 정신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련과 일본 사이에 평화체제가 들어서든 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군을 습격해서 괴롭히고야 말 열혈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일소 평화체제를 깨뜨릴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걸어 다니는 화약고, 그 자체였다. 스탈린은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이 화약고를 제거한 것이다. 


<이승만의 노선 3> 

만주 동포들이 스탈린의 동북항일연군 말려죽이기 전략 덕분에 덧없이 숨져가고 있었을 때, 연해주 동포들이 스탈린의 배신에 의해 중앙 아시아에서 스러져가고 있었을 때, 그리고 김일성 서클이 소련으로 넘어가 88 국제여단 소속으로 정치공작 교육을 받고 있었을 때 이승만은 무엇을 했을까? 미국 지식층 전체를 겨냥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저팬-인사이드-아웃 이란 책이다. ‘일본을 까 뒤집어 벗긴다’ 정도의 뜻을 가진 제목이다. 책으로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체주의’를 비판한 명저다. 또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치심리를 분석한 책이다. 일제 천황-전체주의를 속속들이 분석한 이 책에 대해 세계적 문호 펄벅은 “이 책은 너무나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1941년 여름에 나왔다. 유럽과 중국에서는 전쟁이 한 참 진행중이었을 때였지만 미국은평화주의 여론이 워낙 거세어서 유럽전선이든 태평양 전선이든 아무데에도 참전하지 않고 있었을 때였다. 이승만은, 달콤하고 안이한 평화에 절어있는 미국인들 귀때기를 붙잡고 이렇게 고함쳤다.

“나치와 일제가 전쟁을 처벌이고 있는데, 미국은 평화스럽다고? 이게 평화야? 이런 구역질 나는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봐? 나치든 일제든 온 국민이 광신 상태에 빠져 똘똘 뭉쳐있는 전체주의 전쟁기계야. 저놈들은 지구를 몽땅 정복할 때가지 안 멈춰. 니들, 미국인들이 아무리 평화를 원해도 일본놈들이 전쟁을 일으킬 거야. 그때가 되어서야 니들은 전쟁에 질질 끌려들어갈 테지. 하지만 기억해 둬. 저 독한 전체주의 전쟁기계를 상대로 싸우려면 한국인들을 무장시켜야 돼! 나아가 한국의 독립만이 아시아에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어. 한국인을 무장시켜! 그리고 한국을 독립시켜!” 

이 책이 나온 지 6개월이 지난 1941년 12월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상당한 인세가 들어왔다. 이승만은 이때 처음으로 스물 다섯 살 연하의 아내에게 코트를 사주었다. 이 코트는 지금도 동숭동 이화장에 걸려 있다. 

이승만이 쓴 저팬-인사이드-아웃은 미국 지식층과 정치인 전체에게 한반도란 지역을 알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낙동강에 가라앉은 5만 원혼> 

만주 지역 동포들의 피바다는 1950년 6·25 때에 완성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48년까지 3년 넘게 만주에서 진행된 중국 공산군과 국민군 사이의 국공내전에 수많은 조선동포 청년들이 공산군 측에 참여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노련한 군인으로 성장했다. 공산군과 국민당 군 사이의 만주 싸움이 끝난 1949년부터 이들 중 5만 명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조선의용군이다. 이들이 바로 북한 인민군의 주력 부대가 되어 6·25 남침의 선봉을 맡았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몰살당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에서 시작된 조선동포의 비극은, 스탈린의 첨병이 되어 동포에게 총을 겨누다 몰살당하는 운명으로 마감되었다. 

6·25 군사작전은 그 세밀한 부분까지 소련의 군사고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왜 최정예부대인 조선의용군을 낙동강 전선에서 불태워 버리는 카드로 사용했던 것일까?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용군은 모택동 지지 세력이고 그 지도자는 모택동 부대의 간부를 지낸 무정이었다. 무정은 당시 북한의 2인자였다. 조선의용군이 고스란히 보존되면 북한에서 중국의 입김이 세어지고 소련의 입지가 약화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5만 명의 최정예 부대를 낙동강 전선에서 쓰레기처럼 태워버렸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1950년 12월에 무정을 숙청해 버렸다. "퇴각할 때 살인을 저질렀다"라는 황당한 죄목이었다. 


<무장투쟁에 대한 요약> 

이처럼, 연해주-만주의 무장투쟁 세력과 동포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다섯 번에 걸쳐 철저히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다. 1921년의 자유시 학살, 1930년대 전반기의 민생단 학살, 1930년대 하반기의 동북항일연군 말려죽이기, 1937년 가을-겨울에 일어난 연해주 동포 학살 및 강제 추방, 1950년 가을에 일어난 조선의용군 몰살…한마디로 연해주-만주는 배신의 천국이었다. 김일성 서클은 다섯 번에 걸친 배신 중에서, 민생단 학살, 동북항일연군 말려죽이기, 조선의용군 몰살, 이 세 가지 배신 과정에 바람잡이로 관계되었던 배신자, 도살자 그룹이다. 그들은 스무살 무렵부터 동료 공산주의자들과 열혈 동포를 겨냥한, 공산-전체주의 권력자들의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공작에 봉사해서 이를 몸으로 체득한 사람들이다. 이 추악한 피의 역사가 바로 김일성-전체주의의 족보다. 

레닌-스탈린 전체주의의 뿌리는 19세기 러시아 지식인의 좌절이었다. 모택동 전체주의의 뿌리는 19세기 태평천국의 광기와 살기였다. 이 거대한 역사적-정치문화적 뿌리에서 태어난 전체주의들이다. 그러나 김일성 전체주의는? 김일성 전체주의는, 스탈린 전체주의와 모택동 전체주의로부터 [잔혹한 정치공학]만을 증류시켜 배운 [반역-도살자 써클]이 만들었다. 

북한 전체주의는 그래서 한가지 기막히게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인 명제를 증명했다.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광범위한 민초 지식인과 대중의 깊은 절망과 원한에서 전체주의가 나왔다. 그러나 한반도의 민초 지식인은 오히려 인내, 수용, 적응을 선택했다. 따라서 김일성 전체주의는 한반도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만주-연해주에서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배신과 학살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던 [반역-도살자 서클]이 [전체주의 정치공학]을 익혀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김일성-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대중의 뿌리 없이 순수 정치공학으로 만들어질 때 순수 악마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결: 악마는 죄책감을 강요 한다> 

만주-연해주의 공산주의 운동을 찬양하고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헐뜯는 것이 국사라고 불리고 있다. 이 엉터리 국사는 우리에게 대한민국 자체에 관해 죄책감을 가지도록 강요한다. 이는 곧 삶 자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도록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국사가 아니라 악마의 비지니스다. 악마는, 아무 근거도 없는, 병든 죄책감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살려낸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악마가 강요하는 죄책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 전체에 몇 세대에 걸쳐 죄책감이 누적되면 그 사회는 금이 갈 수 밖에 없다" 

피, 고통, 죽음 그 자체는 결코 진실성, 진정성을 보증하지 못 한다.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현대 철학의 거장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희생자가 많았다는 것과 진실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피는 진실을 증언하지 못 한다. 진실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피야말로 최악의 증인이다." 

만주-연해주의 무장투쟁을 칭송하면서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만든 나라”라고 헐뜯으면 과연 그 억울한 원혼들이 달래질까? 1921년 자유시에서 소련군 기관총에 의해 벌집이 되어 숨진 천명, 그리고 사로잡혀 시들어간 2천오백명의 원혼이 달래질까? 1930년대 초반 중국 공산당원에 의해 갈갈이 찢겨 죽임당한 만주 동포의 원혼이 달래질까?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흉계에 빠진 줄도 모르고 끝까지 동북항일연군으로 싸우다가, 혹은 그를 지원하다가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죽은 동포의 원혼이 달래질까? 1937년 8월 잠자리에서 끌려나가 개울 가에서 머리 뒤통수에 권총알이 박혀 숨진 연해주 지식인 3천명의 원혼이 달래질까? 1937년 겨울 중앙아시아 사막에 패대기쳐진 채 얼어죽고 몸 팔다 미쳐죽고 인생이 시들어간 20만 연해주 동포의 원혼이 달래질까? 1950년 가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은 덕분에 낙동강 푸른 물결 아래 눕게된 5만 조선의용군의 원혼이 달래질까? 

아니다. 대한민국을 친일파의 나라라고 헐뜯고 무장투쟁을 칭송하는 자들은 이 원혼을 달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이 원혼을 만들어낸 공산-전체주의, 그 악마를 찬양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련한 원혼은 오직 이승만과 함께 싸우고 일했던 선배세대들만이 달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배세대의 정신을 계승해서 대한민국을 소중히 아끼는 우리들만이 달랠 수 있다. 

오직 진실과 생명만, 피바다 속에 스러져간 가련한 원혼들을 위한 진혼곡이 될 수 있다. 

https://es-la.facebook.com/notes/%EB%B1%85%EB%AA%A8/%EC%98%A4%EC%A7%81-%EC%A7%84%EC%8B%A4%EA%B3%BC-%EC%83%9D%EB%AA%85%EB%A7%8C-%EC%A7%84%ED%98%BC%EA%B3%A1%EC%9D%B4-%EB%90%A0-%EC%88%98-%EC%9E%88%EB%8B%A4/584828944915784

--------------------------------------------------------------------

2) 1960년 4.19 이후부터 1980년 광주 이전까지 그들의 역사

[그들의 '거룩한' 족보]

70년대 말까지의 학생운동은 '자유민주주의 리버럴' 에너지에 바탕했다. 그러나 그 핵심부로 가서, 까고 까고 파고 파고 내려가면 종북이 나왔다. 통혁당... 남민전...

이 글은 70년대 운동권의 교양프로그램의 구조를 밝히는 글이다. 이런 교양프로그램 중 제2단계를 겪는 사람은, 1979년을 기준으로, 전국을 통틀어 한 학년에 백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중 60~70%는 서울대였다. 이른바 운동권 '역량'이란 그토록 빈곤했다. 그게 40년전의 일이다.
삼겹 구조였다. 가장 내밀한 속살은 [김일성 찬양]이었다. 그 한꺼풀 바깥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가르쳤다. 신영복처럼.... 맨 바깥 꺼풀은 [자유민주주의 리버럴]로 위장되어 있었다.

조금 더 설명해 보자.

제1단계:
처음엔 [박정희 체제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심]을 부추긴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게, 말하자면 '김민기의 아침이슬' 류의 노래다. 그래서 죽어라 노래패 만들기를 했다. 처음 만들어진 게 서울대 '메아리'.... 뱅모가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 뱅모는 김민기의 노래 '잘가오'에 2절을 붙이기도 했다. '이민 간 친구에 대한 우정'을 읊었던 원래의 노래가 2절에 의해 '감옥에 간 친구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70년대 말 당시엔 화끈한 운동권 노래는 없었다. 교내에서 데모가 일어날까 말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침이슬 부르면 잡혀갔으니까, 김민기 노래 정도면 이미 효과에 있어서는 충분히 '화끈했다')

제2단계:
(1) 소련, 중공, 베트남 등의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전쟁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교양'을 진행한다. 이때 잘 사용된 '교재'가 리영희의 책들이다. 리영희는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 보트피플(베트남 난민. 2백만이 탈출해서 1백만이 바다 위에서 숨졌다), 굴락(Gulag, 소련의 집단수용소)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다. 매우 부정직한 사람이다. 지식인이 아닌 것이다.

(2) 수출공업화는 곧 식민지 공업화이며 올바른 경제발전은 '자급자족형 민족경제 개발'이라고 세뇌한다. 이 때 잘 사용된 '교재'가 박현채의 책이다. 조용범의 책도 잘 사용됐다.

(3)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구파들이 나온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경제학]이다. 신영복도 [공산주의 경제학=자본론]을 중심으로 삼은 공산주의자였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경제학이다"라고 생각하는 인종들은 정말 바보스런 사람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도덕철학이다.

"인간이란 계급투쟁의 피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욕망의 덩어리다. 계급투쟁을 끝장내는 마지막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피바다를 끝장내는 마지막 피바다를 벌인다. 이 마지막 계급에 의한 마지막 피바다에 복무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나다움]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이게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철학이다.

이를 받아들인 자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주목할 점은 '운동권'의 '교육프로그램'에는 마르크스주의 도덕철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 자리는 [김일성주의]를 위해 예약된, 비워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주의 도덕철학은 다음과 같이 좀 장황하고 너저분하다. (도덕철학이란, 인간관, 세계관을 뜻할 뿐, '도덕'적일 필요는 전혀 없다)

"인간이란 민족에 의해 규정된다. 민족은 계급에 의해 지도된다. 계급은 당에 의해 지휘된다. 당은 수령에 의해 만들어져 수령에 의해 움직인다. 수령은 뇌수와 같은 존재로서 당, 계급, 민족을 이끈다. 수령이 부여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이 참된 생명이다. 이 한 몸의 생물학적 생명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수령이 부여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받아, 우리는 당의 일꾼이 되며, 계급과 한 몸인 존재가 되며, 민족의 성원이 되며, 인간이 된다. 수령이 부여한 [사회정치적 생명]을 거스르는 순간, 우리는 개보다 못 한 존재일 뿐이다. '개인'은 착각이다. 수령이 부여한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당, 계급, 민족만 존재할 뿐이다. 수령이 부여한 [사회정치적 생명]은 당, 계급, 민족과 더불어 영생한다. 수령이 영생하는 것이다."

이같은 조잡한 정치사교 교리를 도덕철학으로 받들게 만들어야 하기에, 70년대 운동권의 [교양교육]에서 권장하는 마르크스주의 학습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원단 도덕철학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엔 이게 죄다 영어 원서였기에, 별 이상한 괴기스런 종자가 아니라면, 마르크스주의 도덕철학을 찾아서 공부할 놈도 없었다.... 이까닭에 나는 60, 70년대의 난다 긴다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을 우습게 본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도덕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 마르크스주의(경제학)의 대가여!"라고 착각했다...

제3단계:
거의 [간첩 포섭] 수준이다. 여러가지로 [김일성 찬양]을 세뇌한다. 크게 나누면 한국현대사, 기독교 신학, 경제개발/경제정책으로 볼 수 있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는, "6.25 때 주전파는 박헌영이었다. 그는 미제의 간첩과 다름없는 존재로서, 6.25의 실제적 책임자다"라는 거짓말이 핵심이다. 

(진실: 6.25는 스탈린의 작품이고, 얼굴마담 책임자는 김일성이다. 스탈린에 의해 끌려들어 온 최대의 '피해자'는 모택동이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는,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다. 민중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꿈꿨다. 열심당 Zealot 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다"라는 거짓말이 핵심이다. 

(진실: 예수의 가르침 어디에도 계급을 강조한 부분은 없다. 예수는 인류해방을 내다봤지, 민족해방을 내다보지 않았다. 열심당은 바리새 Pharisee 의 극단적 무력부대였으며, 바리새야말로 예수를 잡아죽인 도라이 극단주의 세력이었다.)

경제개발/경제정책에 있어서는, "김일성 리더십은 북한을 동아시아의 체코처럼 부유하고 강력한 근대국가로 만들었다. 주체 노선 덕분이다. 튼튼한 민족경제가 건설됐다."라는 거짓말이 핵심이다.

(진실: 1950년대 말부터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 양쪽에서 삥을 뜯었다. 소련의 경우,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1980년대 중반에 원조를 중단했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망한 해인 1991년에도 원조를 제공했다. 주체경제란, 중-소 양방 삥뜯기 경제에 다름아니다. 소련이 시들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북한 역시 정체에 빠졌다. 개혁개방을 외면했기 때문에 1990년대 후반에는 무려 3백만명이 굶어 죽었다. 지금은 [문명으로부터 이탈해서 일부 평양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2천여만명의 주민이 야만적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괴기스런 정치종교 체제]로 굳혀졌다. 그들이 핵/미사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핵/미사일이 있으면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영원히 삥뜯기를 할 수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1950년대 말 이후 지난 60년동안 삥뜯기가 [그들이 이해하는 유일한 비지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에 비판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흐름은 없었나? 단언한다. 없었다. 소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경우, 겉으로는 비판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은연 중에 [북한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혁명의 파트너/주도세력으로서의 북한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운동권의 깊은 속살로 내려가면...

안과 밖이 모두 종북인 인종들과...
안은 종북인데 밖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인 인종들...
두 인종 밖에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게 1960년 4.19 이후 1980년 광주 이전까지... 
20년 동안 벌어졌던... '깡통진보의 속사정'이다

.http://www.twitlonger.com/show/n_1soo8qe

※ 이 트윗글 밑에 달린 글

RS Lewis ‏@hyeonwoo2018 6월 1일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진실,을 말씀하시는 뱅모님은 대한민국의 축복입니다.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아무도 새삼 이야기 하지 않는 진실이 되겠지요.
90년대 초반, 주사의 세례를 받은 극렬모범 선배가 6개월 징역살고 나와서 둘이 소주한잔 했습니다. 
그때 선배의 말이 제가 그 동네와 결정적으로 아듀 사요나라 결별한 계기가 됐습니다.
"감빵에 있으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운동도 이념도 사상도 그 어느것도 사람을 위한 일,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것'. 운동을 하면서도 난 그걸 몰랐다. 깊이 반성했다"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저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속으로..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 지금까지 그렇게 운동하면서 그걸 빵에 가서야 알았다고. 지금 자랑이야 고백이야? 
그럼 지금까지는 뭘 위해서 그 지랄을 한 거?"
정말이지 술잔 뿌리고 뺨한대 치고 싶은 거 가까스로 참았습니다. 
"지금까지 니 알량한 뽕쟁이 딸질에 인생 갈피 못잡고 저 길로 간 후배들 좀 봐봐 이 생양아치 새끼야.." 
이런 마음이었죠. 그때부터 후배들 꺼내서 술만 주구장창 사줬어요.
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 이거 볼 때마다 늘 떠오르는 태백산맥 술자리의 기억입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정언명령을 전술적 방편으로 모독하고, 자명한 진리(공리)를 거짓증명에 복무시키는 파렴치함이란! 귀한 글 감사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오직 뱅모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 힘 있는 간증입니다. 이런 글 많이 필요합니다.
"김일성주의 도덕철학은 다음과 같이 좀 장황하고 너저분하다"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수령찬양이 거의 노골화 됐습니다. 극렬선배들이 맨투맨으로 검증한 후배들에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떠보기식으로.. 선민주의식 허영심을 부채질하면서..
'제반정세나 당면목적을 차치하고 사상자체로 저딴 허접쓰레기를 하나의 세계관(그것도 무슨 우주적 진리인양)으로 이야기 하는 저 선배의 뇌구조는 뭔가..' 그게 참 궁금했더랬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ㅠ

--------------------------------------------------------------------

3) 1980년 광주5.18이후 1990년대까지 그들의 역사


광주 5.18 이후 1980년 여름에 <학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학림>은 1981년 여름 검거될 당시에 수사기관이 붙인 이름이다. 정확한 명칭으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과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쌍둥이 조직이었다. 이 글의 필자인 박성현은 <전민학련>의 수도권 조직책이었다.

80년 여름에 <학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상황을 좀 참고할 필요가 있다.

80년 겨울, 1960년대 중반 이후 20년 가까이 서울대 학생운동을 지도해 온 지하 인맥이 검거된 사건이 있었다. 이 인맥에 대해 수사기관은 <무림>이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 전체 운동 역량의 90%가 서울대였기 때문에 <무림>은 전체 급진운동 역량의 핵심 인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림>은 80년 봄에 조직 실체가 드러났다. 그래서 <무림>은 "역량을 보존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80년 광주 이후, 80년 여름부터 "동면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동면이냐 저항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전투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기존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던 <무림>에 대해 반발해서 저항을 주장했다. 이들이 <학림>을 만들었다.

<학림>은, 6.25 이후 처음 만들어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전투적 지하 조직]이었다.

영화 <변호인>이 다루는 <부림>은, <학림>의 부산지역 조직으로서 그 안에는 [노동자 파트]와 [학생 파트] 양쪽이 모두 존재했다. <부림>은, 이 글 필자 박성현과 전혀 상관없이, <전민노련>을 만든 이태복이 직접 구축했다. 
이태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 년 가까이 징역을 살고 나와 DJ 정부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했다.

박성현은, 자신이 했던 운동이 [공산주의의 통일전선 노선]을 따랐다고 생각해서,
<학림>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않았고, 민주화운동 보상을 받지도 않았다.

<학림>의 후신이, 80년대 최대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북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 사건으로 꼽히는 <깃발>(1985년 검거)이다.
<깃발>에 의해, 레닌 책이, 6.25 이후 처음으로 번역되어 지하 출판되었다.

<깃발>의 후신이, 1987년에 검거된 <제헌의회> 그룹이다.
이 그룹에 의해 마르크스의 책이, 625 이후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제헌의회> 그룹의 후신은 둘이다.
하나는 민중당(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이며, 다른 하나는 사노맹(박노해 백태웅 조국 은수미 등)이다.

한마디로 <학림>은, PD(북한과 관계없는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권의 출발점이다.

PD는, 90년 경까지는 [김일성주의](NL = 민족해방노선 = 주체사상파)와 맹렬한 사상투쟁을 벌였다.

1980년 출발시기에서 1990년경까지 PD는, 북한을 [제대로된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 경까지는, [평양에 대해 비판적/적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PD)와,
[북한-전체주의를 추종하는 민족해방노선](NL)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6.25이후 35년 이상 숨죽여 왔던 [구세대 종북] 인사들이
대거 지상으로 튀어나오면서 NL이 득세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또한 북한 최고위 간첩 이선실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천문학적 거액을 뿌리면서 <중부지역당>을 조직하면서 NL이 압도적으로 득세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양심적 통일운동 지식인]으로 알려졌던 최고급지식인 원로 김낙중은, 이때 백만달러 이상의 돈과 권총과 난수표를 받아 챙겼다.

이선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PD 성향 (=당시에는 북한-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가졌던 민중당 핵심 인사를 포섭해서, NL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구세대 종북]의 활성화와 북한의 공작에 의해, 90년대 초반 이후, PD는 NL에 완전히 굴종하는 상황이 되었다.

PD를 NL에 굴종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정일이 가장 공을 많이 들여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대남공작이다.

이 굴종은 사실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망을 뜻한다. [김일성-전체주의]는 북한에서는, [숙청]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개잡듯 잡아 죽였다.
대한민국에서는, 거물간첩의 공작과 돈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안락사시켰다.

90년대 초반 이후에 대한민국에는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진짜 급진 좌파-진짜 빨갱이)가 없다. 이름만 PD일 뿐, 모두 [김일성-전체주의] 부역자로 보면 된다.
활연관통 쪽지 2016-08-05 22:27
(글이 조금 잘려서 댓글에 나머지 글을 씁니다.)

이 까닭에 이 글의 필자 박성현은, [빨갱이]나 [급진 좌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박성현의 시각에선, 이들은 모두 급진좌파가 아니라 웰빙이며,
[김일성-전체주의]의 부역자-옹호자-변호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싸움의 전선은,
[전체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
거짓이냐 진실이냐?
굴종이냐 자유통일이냐?
죽음이냐 생명이냐?]가
된다.

이 까닭에 박성현은, 자유민주주의-자유통일-세계시장을 [대한민국의 공화 가치]라고 규정하고,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라 칭한다.

http://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83935
(인용끝)
----------------------------------------------------------------------
해새 쪽지 2016-08-06 16:15
제 개인적으로도 언젠가는 도판내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라 생각합니다. 이 주제가 단순히 정치적 이념적 공방을 넘어서서 상제님의 가리워진 천지공사의 일맥을 드러낸다고 보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법종교에 와서 여러 전각들과 연혁을 공부하면서 제 나름 이에 대해 더한 확신이 생기더군요. 물론 순전히 제 개인의 사견에 불과하겠습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보아 속으로만 묵혀두는 중입니다만 언젠가는 내놓을 때가 오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활연관통님,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활연관통 쪽지 2016-08-06 20:36
해새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해새님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합니다.
묵혀두었다가 잘 발효되면 영양듬뿍한 좋은 걸 법종교분들과 같이 드십시다^^
땡초마귀 쪽지 2016-08-07 16:47
법종교 사이트에 뉴데일리나 일베 논리를 보니 사뭇 뜨악하군요.
활연님이 이 글을 통해 법종교교생들에게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알 수도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지만, 법종교게시판에 이 글을 보니 시골 시외정류장의 화장실에 든 듯한 느낌이라 불편해 지는군요.
활연관통 쪽지 2016-08-07 22:07
땡초마귀 저도 한때 일베에 반감과 편견이 있던 사람으로서 땡초마귀님의 마음이 이해못할바는 아니나
달콤한 거짓보단 추악한 진실이 낫습니다.
뉴데일리와 일베에 그런 진실이 담긴 글이 있기 때문에 그곳의 글을 읽는 것일 뿐
더럽고 상스러운 것을 즐기고 좋아해서 그곳에 가는 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먼저 단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일베에서조차 '쓰레기', '화장실' 이런 글은 정치게시판에서 보기 힘든 단어들인데 땡초마귀님은 그렇게 혐오하시는 일베인들보다 더 공격적이시네요.
저또한 법종교에서 이런 공격적인 글을 보게 되다니 사뭇 뜨악합니다.
댓글 쓰기
770 / 429 / 3,446 / 1,843,606 관리책임 : 증산법종교 미디어실 media@jsbeob.com
증산법종교.com / jsbeob.com
Copyright © 증산법종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