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북창 [1506~1549]
정북창(鄭北窓)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때의 이인(異人)으로, 이름은 이고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이다.
*예로부터 생이지지(生而知之)를 말하나, 이는 그릇된 말이라. 천지의 조화로도 풍우를 지으려면 무한한 공부를 들이나니, 공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 같은 재주로도 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하였느니라. (대순전경 p331)
*동짓달에 구릿골에 계실 새 공우가 뵈이러 오는 길에 우연히 흥이 나서 "모시러 가자 모시러 가자 부처님 모시고 우리집으로 돌아오자."라고 노래를 불렀더니, 구릿골에 이르러 상제님께 뵈이니 가라사대 "내가 네집에 가기를 원하느냐." 하시거늘, 공우 기뻐하여 가라사대 "소원이로소이다." 하고 상제님을 모시고 돌아 오다가 용암리 물방아 집에 들어 쉴 새, 상제님 문을 열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높다 높다." 하시거늘 공우가 바라보니 구름이 가득 끼었는 데 하늘이 방석 한닢 넓이 쯤 통하며 바람이 쓸쓸이 불고 눈이 내리거늘, 상제님 공우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니 공우는 그 말씀이 황공하기도 하고 이상히도 여겼더니 또 가라사대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 부지중에 여쭈어 가로대 "바람이 좀더 불리이다." 하였더니 과연 바람이 크게 부는지라. 또 가라사대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며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 또 가로대 "바람이 더 높아지리이다." 하였더니 그때는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모래와 돌을 날리는지라. 상제님 가라사대 "용호대사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 하시니라. (대순전경 pp66-67)
*정미년 11월에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머무르실 때 박공우가 상제님을 뵈려고 오는 길에 저도 모르게 흥이 나서 “모시러 가자. 모시러 가자. 부처님 모시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자.” 하고 연이어 노래를 부르니라. 구릿골에 이르러 상제님께 예를 올리니 빙긋이 웃으시며 “내가 네 집에 함께 가기를 원하느냐?” 하시거늘 공우가 기뻐하며 “지성소원입니다.” 하고 대답하매 상제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시니라. 이에 공우가 상제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용암리 물방앗간에 들어가 잠시 쉬는데 상제님께서 문을 열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높도다, 높도다.” 하시거늘 공우가 바라보니 온 하늘에 구름이 가득 덮이고 바람이 소슬히 불며 눈이 내리는데 다만 한쪽에 방석 넓이만큼 푸른 하늘이 보이더라. 상제님께서 문득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므로 공우가 그 말씀에 황공해하며 한편으로 이상히 여기거늘 또 말씀하시기를 “기운이 적다.” 하시매 공우가 부지중에 “바람이 좀더 불리이다.” 하니 과연 바람이 크게 부니라. 이어 상제님께서 다시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고 또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가 또 아뢰기를 “바람이 더 높아지리이다.” 하니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모래와 돌이 날리더라. 이윽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용호대사(龍虎大師)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 하시니라. (道典 4:88)
궁을가(弓乙歌)
애고 애고 저 백성아 간단말이 어인 일고 고국본토 다버리고 어느 강산 가려는가. 가고 가는 저 백성아 일가친척 어이 할꼬 차시구복 불원하니 천하태평 절로 된다. 부모 처자 다 버리고 길지 찾는 저 백성아 자고창생 피난하여 기만명이 살았던가. 일편수신 아니하고 가고가면 살아날까.
연명(延命)
정북창은 평소에 윤춘년과 친구사이로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윤춘년이 찾아와 물었다.
이보게!
나의 수명이 얼마쯤 남았는지 봐줄 수 있겠는가?
그야 어렵지 않지!
정북창은 잠깐동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3년정도 남았네.
윤춘년은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런데 수명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윤춘년은 놀라 정북창에게 매달렸다.
그게 정말인가?
정북창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하던가?
이보게,
그게 말이 되는가.
3년이라니!
그럼 내 수명을 연장할 방도는 없는 것인가?
있긴 있지.
하지만 자네가 실천하기 어려울게야.
방법이 있다는 정북창의 말에 윤춘년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게 뭔가?
뭐든지 하겠네.
정북창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설명을 했다.
오늘 밤에 도성 동문에 가면 소의 등에 나무를 싣고 가는 한 노인이 보일게야.
그럼 그 노인에게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하게.
그 노인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방법을 가르쳐주기 전까지 절대 물러나선 안되네.
명심하게나.
윤춘년은 정북창의 말을 굳게 믿고 초저녁부터 동문 밖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밤이 되자 과연 한 노인이 소의 등에 나무를 싣고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윤춘년은 다짜고짜 노인에게 매달렸다.
절 좀 살려 주십시오.
아니, 이 사람이?
이것 놓지 못하겠나?
저를 살려줄 방도를 가르쳐주기 전에는 못 놓습니다.
난 갈 길이 바쁘단 말이네.
어서 이것 좀 놓게나!
못 놓습니다.
이 사람이 미친 게로구만!
놓으라질 않나!
죽어도 못 놓습니다.
나 원 참.
도대체 놓지 않고 뭘 하나?
절대로 못 놓겠습니다.
윤춘년이 계속해서 매달리자 그 노인은 결국 윤춘년을 달래며 말했다.
정북창 그 놈의 짓이렸다?
그..렇습니다만...
정북창 그 놈이 멋대로 천기를 누설하였으니 내 그의 수명 30년을 떼어 자네에게 주겠네.
그러니 썩 물러가게나!
윤춘년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무수히 절을 했는데 일어나보니 그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에 윤춘년이 정북창을 찾아가자 정북창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 30년의 수명을 떼어서 자네에게 주었지?
...
그 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태상노군이네.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 것 뿐이니 심려말게.
윤춘년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 했다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앞서 정북창은 스스로 점을 쳐 보고 자신의 수명이 80세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 길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윤춘년에게 30년의 수명을 떼준 뒤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명을 나눠주어 결국 정북창은 단명했다고 전해진다.
최풍헌(崔風憲, ?∼?)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道典 4:7)
최풍헌(崔風憲)은 조선시대 대민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향임(鄕任)의 하나로서 오늘날 면이나 동의 직원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최 풍헌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도력이 남달랐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전설로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평양으로 피난 간 선조에게 최 풍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병권을 3일만 허락하면 왜병을 3일 내에 전멸시키겠습니다.” 그러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러면 최풍헌 네가 병권 없이 왜병을 없애라 라고 한 말씀만 내려주십시오.”라고 청하였으나 이 역시 허락되지 않아서 결국 조화권(造化權)을 쓰지 못해 통탄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상제님께서 하루는 성도들에게 최풍헌(崔風憲)의 옛일을 말씀해 주시니 이러하니라. 최풍헌은 지난 임진란(壬辰亂) 때 전라도 고흥(高興) 사람이라. 풍헌이 밤낮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동리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고 툭하면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거니 모두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니라. 그러나 류 훈장(柳訓長)은 그런 풍헌을 그 때마다 타이를 뿐이니, 이는 풍헌이 일에 임하면 명민하고 지혜가 뛰어나므로 일찍부터 범상치 않게 보아 온 까닭이라. 한번은 고을 현령이 풍헌을 못마땅히 여겨 파면할 구실을 찾으려고 고을 호구대장과 토지대장을 주며 몇 달이 걸릴 일을 “보름 안에 조사해 오라.” 하고 명하니 풍헌이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가 기한이 차매 뜻밖에 한 사람도 빠트리지 않고 정확히 조사하여 올리거늘 조사한 날이 모두 한날한시인데다 수결(手決)까지 쓰여 있어 현령이 크게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라. 몇 달 후에 ‘왜병이 침입하리라.’는 풍설이 널리 퍼져 민심이 크게 소동하거늘 류 훈장이 풍헌에게 피난할 일을 부탁하되 풍헌은 ‘알지 못한다.’며 수차 사양할 뿐이더니 하루는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가산과 전답을 다 팔아서 나에게 맡기라.” 하매 훈장이 풍헌을 믿고 그대로 따르거늘 풍헌이 그 돈으로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히 지내다가 갑자기 한 달 동안 사라져 보이지 않으니라. 훈장은 믿는 바가 있어 모르는 체하며 지내는데 하루는 ‘풍헌이 사망하였다.’는 부고가 이르거늘 훈장이 크게 놀라 풍헌의 집에 찾아간즉 풍헌의 막내아들이 건을 쓰고 곡하며 훈장을 맞으매 “어떻게 돌아가셨냐?” 하고 물으니 “술에 취해 넘어지면서 구정물통에 머리가 박혀서 돌아가셨다.” 하므로 시신을 살펴보니 과연 최 풍헌이라. 훈장이 상제(喪制)를 위로하고 나서 “유언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솔과 더불어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게 하여 지래산(智萊山) 아무 골짜기에 장사지내라 하였습니다.” 하는지라. 훈장이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의논하니 모두 곧이듣지 않고 막내아들 하나만 뜻을 따르거늘 사흘 후에 굴건제복(屈巾祭服)하고 운상하여 지래산 속으로 들어가니 골짜기 위에서 ‘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오라.’는 소리가 들리므로 바라보니 곧 풍헌이라. 이에 상여를 버리고 올라가니 그곳에 가옥을 지어 놓고 양식을 풍부히 마련해 두었더라. 얼마 후 밤이 되어 살던 마을 쪽을 바라보니 불빛이 환하거늘 풍헌이 말하기를 ‘이는 왜병이 침입하여 온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이라.’ 하매 훈장이 더욱 탄복하니라. 그런데 그 골짜기 위에서 본 최풍헌의 얼굴이 본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하니라. (道典 7:85)
정북창(鄭北窓)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때의 이인(異人)으로, 이름은 이고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이다.
*예로부터 생이지지(生而知之)를 말하나, 이는 그릇된 말이라. 천지의 조화로도 풍우를 지으려면 무한한 공부를 들이나니, 공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 같은 재주로도 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하였느니라. (대순전경 p331)
*동짓달에 구릿골에 계실 새 공우가 뵈이러 오는 길에 우연히 흥이 나서 "모시러 가자 모시러 가자 부처님 모시고 우리집으로 돌아오자."라고 노래를 불렀더니, 구릿골에 이르러 상제님께 뵈이니 가라사대 "내가 네집에 가기를 원하느냐." 하시거늘, 공우 기뻐하여 가라사대 "소원이로소이다." 하고 상제님을 모시고 돌아 오다가 용암리 물방아 집에 들어 쉴 새, 상제님 문을 열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높다 높다." 하시거늘 공우가 바라보니 구름이 가득 끼었는 데 하늘이 방석 한닢 넓이 쯤 통하며 바람이 쓸쓸이 불고 눈이 내리거늘, 상제님 공우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니 공우는 그 말씀이 황공하기도 하고 이상히도 여겼더니 또 가라사대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 부지중에 여쭈어 가로대 "바람이 좀더 불리이다." 하였더니 과연 바람이 크게 부는지라. 또 가라사대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며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 또 가로대 "바람이 더 높아지리이다." 하였더니 그때는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모래와 돌을 날리는지라. 상제님 가라사대 "용호대사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 하시니라. (대순전경 pp66-67)
*정미년 11월에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머무르실 때 박공우가 상제님을 뵈려고 오는 길에 저도 모르게 흥이 나서 “모시러 가자. 모시러 가자. 부처님 모시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자.” 하고 연이어 노래를 부르니라. 구릿골에 이르러 상제님께 예를 올리니 빙긋이 웃으시며 “내가 네 집에 함께 가기를 원하느냐?” 하시거늘 공우가 기뻐하며 “지성소원입니다.” 하고 대답하매 상제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시니라. 이에 공우가 상제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용암리 물방앗간에 들어가 잠시 쉬는데 상제님께서 문을 열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높도다, 높도다.” 하시거늘 공우가 바라보니 온 하늘에 구름이 가득 덮이고 바람이 소슬히 불며 눈이 내리는데 다만 한쪽에 방석 넓이만큼 푸른 하늘이 보이더라. 상제님께서 문득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므로 공우가 그 말씀에 황공해하며 한편으로 이상히 여기거늘 또 말씀하시기를 “기운이 적다.” 하시매 공우가 부지중에 “바람이 좀더 불리이다.” 하니 과연 바람이 크게 부니라. 이어 상제님께서 다시 “나와 친구로 지내자.” 하시고 또 “기운이 적다.” 하시거늘 공우가 또 아뢰기를 “바람이 더 높아지리이다.” 하니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모래와 돌이 날리더라. 이윽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용호대사(龍虎大師)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 하시니라. (道典 4:88)
궁을가(弓乙歌)
애고 애고 저 백성아 간단말이 어인 일고 고국본토 다버리고 어느 강산 가려는가. 가고 가는 저 백성아 일가친척 어이 할꼬 차시구복 불원하니 천하태평 절로 된다. 부모 처자 다 버리고 길지 찾는 저 백성아 자고창생 피난하여 기만명이 살았던가. 일편수신 아니하고 가고가면 살아날까.
연명(延命)
정북창은 평소에 윤춘년과 친구사이로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윤춘년이 찾아와 물었다.
이보게!
나의 수명이 얼마쯤 남았는지 봐줄 수 있겠는가?
그야 어렵지 않지!
정북창은 잠깐동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3년정도 남았네.
윤춘년은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런데 수명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윤춘년은 놀라 정북창에게 매달렸다.
그게 정말인가?
정북창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하던가?
이보게,
그게 말이 되는가.
3년이라니!
그럼 내 수명을 연장할 방도는 없는 것인가?
있긴 있지.
하지만 자네가 실천하기 어려울게야.
방법이 있다는 정북창의 말에 윤춘년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게 뭔가?
뭐든지 하겠네.
정북창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설명을 했다.
오늘 밤에 도성 동문에 가면 소의 등에 나무를 싣고 가는 한 노인이 보일게야.
그럼 그 노인에게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하게.
그 노인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방법을 가르쳐주기 전까지 절대 물러나선 안되네.
명심하게나.
윤춘년은 정북창의 말을 굳게 믿고 초저녁부터 동문 밖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밤이 되자 과연 한 노인이 소의 등에 나무를 싣고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윤춘년은 다짜고짜 노인에게 매달렸다.
절 좀 살려 주십시오.
아니, 이 사람이?
이것 놓지 못하겠나?
저를 살려줄 방도를 가르쳐주기 전에는 못 놓습니다.
난 갈 길이 바쁘단 말이네.
어서 이것 좀 놓게나!
못 놓습니다.
이 사람이 미친 게로구만!
놓으라질 않나!
죽어도 못 놓습니다.
나 원 참.
도대체 놓지 않고 뭘 하나?
절대로 못 놓겠습니다.
윤춘년이 계속해서 매달리자 그 노인은 결국 윤춘년을 달래며 말했다.
정북창 그 놈의 짓이렸다?
그..렇습니다만...
정북창 그 놈이 멋대로 천기를 누설하였으니 내 그의 수명 30년을 떼어 자네에게 주겠네.
그러니 썩 물러가게나!
윤춘년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무수히 절을 했는데 일어나보니 그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에 윤춘년이 정북창을 찾아가자 정북창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 30년의 수명을 떼어서 자네에게 주었지?
...
그 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태상노군이네.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 것 뿐이니 심려말게.
윤춘년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 했다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앞서 정북창은 스스로 점을 쳐 보고 자신의 수명이 80세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 길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윤춘년에게 30년의 수명을 떼준 뒤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명을 나눠주어 결국 정북창은 단명했다고 전해진다.
최풍헌(崔風憲, ?∼?)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道典 4:7)
최풍헌(崔風憲)은 조선시대 대민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향임(鄕任)의 하나로서 오늘날 면이나 동의 직원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최 풍헌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도력이 남달랐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전설로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평양으로 피난 간 선조에게 최 풍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병권을 3일만 허락하면 왜병을 3일 내에 전멸시키겠습니다.” 그러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러면 최풍헌 네가 병권 없이 왜병을 없애라 라고 한 말씀만 내려주십시오.”라고 청하였으나 이 역시 허락되지 않아서 결국 조화권(造化權)을 쓰지 못해 통탄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상제님께서 하루는 성도들에게 최풍헌(崔風憲)의 옛일을 말씀해 주시니 이러하니라. 최풍헌은 지난 임진란(壬辰亂) 때 전라도 고흥(高興) 사람이라. 풍헌이 밤낮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동리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고 툭하면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거니 모두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니라. 그러나 류 훈장(柳訓長)은 그런 풍헌을 그 때마다 타이를 뿐이니, 이는 풍헌이 일에 임하면 명민하고 지혜가 뛰어나므로 일찍부터 범상치 않게 보아 온 까닭이라. 한번은 고을 현령이 풍헌을 못마땅히 여겨 파면할 구실을 찾으려고 고을 호구대장과 토지대장을 주며 몇 달이 걸릴 일을 “보름 안에 조사해 오라.” 하고 명하니 풍헌이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가 기한이 차매 뜻밖에 한 사람도 빠트리지 않고 정확히 조사하여 올리거늘 조사한 날이 모두 한날한시인데다 수결(手決)까지 쓰여 있어 현령이 크게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라. 몇 달 후에 ‘왜병이 침입하리라.’는 풍설이 널리 퍼져 민심이 크게 소동하거늘 류 훈장이 풍헌에게 피난할 일을 부탁하되 풍헌은 ‘알지 못한다.’며 수차 사양할 뿐이더니 하루는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가산과 전답을 다 팔아서 나에게 맡기라.” 하매 훈장이 풍헌을 믿고 그대로 따르거늘 풍헌이 그 돈으로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히 지내다가 갑자기 한 달 동안 사라져 보이지 않으니라. 훈장은 믿는 바가 있어 모르는 체하며 지내는데 하루는 ‘풍헌이 사망하였다.’는 부고가 이르거늘 훈장이 크게 놀라 풍헌의 집에 찾아간즉 풍헌의 막내아들이 건을 쓰고 곡하며 훈장을 맞으매 “어떻게 돌아가셨냐?” 하고 물으니 “술에 취해 넘어지면서 구정물통에 머리가 박혀서 돌아가셨다.” 하므로 시신을 살펴보니 과연 최 풍헌이라. 훈장이 상제(喪制)를 위로하고 나서 “유언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솔과 더불어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게 하여 지래산(智萊山) 아무 골짜기에 장사지내라 하였습니다.” 하는지라. 훈장이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의논하니 모두 곧이듣지 않고 막내아들 하나만 뜻을 따르거늘 사흘 후에 굴건제복(屈巾祭服)하고 운상하여 지래산 속으로 들어가니 골짜기 위에서 ‘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오라.’는 소리가 들리므로 바라보니 곧 풍헌이라. 이에 상여를 버리고 올라가니 그곳에 가옥을 지어 놓고 양식을 풍부히 마련해 두었더라. 얼마 후 밤이 되어 살던 마을 쪽을 바라보니 불빛이 환하거늘 풍헌이 말하기를 ‘이는 왜병이 침입하여 온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이라.’ 하매 훈장이 더욱 탄복하니라. 그런데 그 골짜기 위에서 본 최풍헌의 얼굴이 본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하니라. (道典 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