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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환상깨기 1 : 동학란

혁명환상깨기 1 : 동학란 2

열린마당  해새 해새님의 글모음 쪽지 2015-11-03 16:46 4,965
2015.11.03 내 블로그

한때는 나 역시 혁명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증산도판에 인연 닿은 자라면 거진 다 그럴 것이라 본다. 이는 결국 역신해원은 도판에 붙여 두었다는 공사 때문일 테다.

역신은 알다시피 왕조 내지는 적어도 정권을 뒤엎으려 했던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일을 이루지 못하여 품은 원한은 무얼로 풀어줄 것인가. 나라 하나씩을 차려보라고 기운 붙여줄 수밖에 없을 터. 허나 증산께서 짜놓으신 천지공사가 성취되어 나가기 시작하는 시대상황으로서는 가당치않은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 많은 역신들에게 어떻게 나라 하나씩을 일일이 열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100년 안팎에?

해서 증산께서는 종교판에 붙이신 것이다. 종교란 테두리는 그 자체로 왕국이다. 종교인에게 자신이 믿는 종교는 국가보다 더 높은 가치체계이며 당연히 교주는 국가수반보다 더 높은 절대권력이다. 즉 종교판에서 교주는 황제, 간부는 왕후장상, 신도는 백성이 된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러한 종교의 내재적 국권과 인권을 거의 제약없이 인정해주고 있으니 이 또한 증산천지공사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이 간방의 땅에 역신해원판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아주 제대로 펼쳐주셨다는 말이겠다. 기국이 큰 자는 큰 판, 작은 자는 작은 판으로.

역설적으로 나는 그래서 종교판의 형식을 띠는 자체로 해원판에 머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재의 결론일 뿐이니 차후 변화의 여지가 있을지도. 어쨌거나 종교판 특히 증산도판에 인연 닿은 자라면 십중팔구 역신의 기운을 타고 온 자일 터, 선천성 혁명지향증세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각설하고 둔한 지각으로나마 증산천지공사에 대한 깨달음을 조금씩 열어감에 따라 혁명이란 방법론은 백년천지공사의 메인스트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주류인 척 현혹하여 해원판에 유인하고 고착시키는 덫이었던 것이다.

방만한 서론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동학란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간략하게 짚어보자.

구한말의 조선은 전체 인구의 30~40% 이상이 노비(노예)계층이었던 세계사에 유례가 없던 국가였다.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남부에서도 노예는 전체 인구의 10%에 훨씬 못 미쳤다. 이는 노예제도가 있었던 동서고금의 나라들이 거의 다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노비(노예)는 전쟁, 노예사냥 등으로 인한 타민족 혹은 타인종 출신이 아닌 극심한 생활고와 신분제 폐습으로 인한 자국민 출신이었다는 것도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또한 양민들도 반상계층과 지방관리의 지독한 착취로 인해 거의 노비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기초적인 인권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었고 국가 역시 그들을 백성으로 인식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저 양반계급의 재산으로만 취급하였다. 물론 교육의 기회도 전혀 누릴 수 없었을 터였고 따라서 문맹률이 90%대였다고 하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이로써 추정하건대 당시 조선백성의 민도는 계층상하를 막론하고 최악의 지경이었다고 본다. 사대주의와 부유의 허례허식에 빠진 양반계층은 말할 나위가 없고 중인, 양민, 천민계층 역시 수백년에 걸친 패배주의, 속물근성, 노예의식 등이 유전자에까지 각인되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한민족 본연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총기와 기개를 까마득히 망각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수도였던 당시 한양거리와 생활상을 묘사한 문서나 사진 등을 보면 그 국가 인프라와 민도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신생국가를 대하는 듯한 감상이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5년 조선에 왔던 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홈이 쓴 책에는 "조선의 한양은 내가 본 도시중 제일 더럽고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거리가 얼마나 더러우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고 미국인 선교사 아펜셀러도 "한양 거리는 어디를 가나 좁고 불결하며 오물이 길거리에 너저분하다. 서민들의 집은 흙으로 지어진 원시적인 형태였고 가옥들은 모두 작고 낮으며 음침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같은 해 미국인 의사였던 알렌도 조선의 인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리는 비좁은 진흙탕길에 개, 돼지, 소 같은 짐승들의 배설물이 널려 있어서 차마 냄새를 맡고 가기가 역겨웠다. 그런데도 양반을 제외한 서민들 중에는 그 길을 태연히 오가면서 아이, 어른 할것 없이 머리를 헝크러 뜨리고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많았다. 바지는 더러워서 입을 당시 흰색이었는지 검은색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했다. 신발이 없는지 짚신을 신었거나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서양인들이 보았던 조선의 이미지는 이렇게 미개한 나라였던 것이다.

수도 한양이 이럴 정도였으니 지방의 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 증산께서 오셨던 전라도 깡촌은 또 어떠했을 것인가. 당시 조선은 지구상에서 가장 궁벽지고 미개한 나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같은 오지라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남미 등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생태환경으로 미개했을지언정 궁색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사회기간시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지배계층은 이에 대한 장기적 국가재건계획은 전무한 채 오직 정권찬탈 당파쟁론에만 몰두하였고 생산성이라고는 터럭 만큼도 없이 평생을 무위도식하며 일족의 생계와 자산증식을 오직 백성의 고혈 짜내는 것만으로 충당하였으며 백성들 또한 숙명적 노예의식, 패배의식, 속물근성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였다.

조선의 이씨 왕가는 개국초기부터 명의 속국을 자처하였고 고려를 배신하여 무력으로 왕조를 뒤엎은 자신들의 사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력 양성을 원천적으로 제한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명과 굴종적 조약을 맺어 유사시 명의 원군이 조선을 지키게끔 하였다. 임진왜란 직전 왜의 침입에 대비하는 10만양병설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러한 조선-명의 방위조약과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얼개는 유사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다고 본다)

한마디로 조선은 위정자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 국가의 동일 구성원으로서의 연대감이 과연 있기나 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국가재난상황을 맞이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위급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것이 다반사였기도 한 걸 보면 잠재된 역량과 의식은 또한 예사롭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고 본다. 아무튼 구한말의 조선은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절대다수 백성이 혼몽하고 우매하고 무지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반면 일본은 이미 1850년경부터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였고 동학란이 발발할 시점에서는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 1920년경에는 세계에서 3번째 규모의 해군을 보유하였으며 세계해군 발전의 지도적 위치에 이를 정도였다. 물론 증산천지공사적 관점에서 이러한 일본의 대약진은 우리 민족에게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제국열강의 식민지화가 기정사실이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차라리 유일한 고육책이었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물론 숨이 막 넘어가는 환자에게 극히 짧게나마 시간을 벌어주는 생명연장술에 불과했겠다. 혹자는 을사오적이라 하여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세력이 조선을 외세에 넘겼다고 보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질을 도외시한 관점이다. 사실상 그들이 매국행각을 하지 않고 순국열사가 되었더라도 조선의 멸망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조선의 인적 물적 자산현황은 자생, 자활의 임계점을 까마득히 넘어선 상태였다. 더구나 나라를 둘러싼 열강의 틈바구니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란 역시 절대적으로 패망을 담보한 봉기였다. 그들의 최상위 목표는 결국 조선 조정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국제정세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몽매한 시각이었다. 설령 그들이 거사를 성사시켰더라도 조선을 지키기에는 그들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에게는 국제정세를 읽을 수 있는 식견도, 국가간 협상을 할 수 있는 외교역량도, 국가를 재건하고 정책을 입안하여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대안도 지도력도 없었다. 단 한가지 특기할만한 건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에 최제우 선생이 받아내린 시천주와 개벽사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증산께서 진단하셨듯이 태생적 시대적 한계로 그 정신이 온전히 현실역사에 구현되기란 천만부당했던 것이다.

결국 동학란은 민비로 하여금 외세를 끌어들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반도는 열강의 대리전쟁터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학란의 발발이 조선침탈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구실이 되었을 터다.

동학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러한 외적 요인 뿐만 아니라 동학군 내부에도 원인이 있었다. 사실상 이게 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증산께서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고 설파하신 대로 그들에게 동학란은 허울좋은 기치를 내세워 각자의 사욕과 일탈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수십만에 이른다는 동학군 중에서 진정 순수한 정신으로 '혁명'에 임했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전봉준 장군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동학군은 태동 초기에는 기층민의 지지를 대거 끌어내었지만 오래지 않아 기득권 못지 않은 수탈 행위로 인해 민심의 이반을 겪게 되었다. 관군이 동학군을 토벌하는 명목이 비적떼 소탕이었는데 실제 백성들 역시 동학군을 그러한 시각으로 인식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도전(道典)에도 나온다. [이 때 여산 읍내를 지나던 동학군은 모두 읍내 사람들에게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니, 이는 지난번에 동학군들이 북상할 때 그 사람들의 옷을 빼앗은 데 대한 보복이더라. (道典 1:60)] 뿐만 아니라 오늘날 독립투쟁사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안중근 의사도 동학란을 "쌍놈들의 무지한 뭉침"이라 폄하하며 부친과 더불어 동학군 토벌에 나선 바 있다.

결국 동학란은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그들이 내세웠던 만민평등 아젠다와는 전혀 별개로 기득권력의 이동, 착취계급의 물갈이었을 뿐일 터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동학란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세계사의 모든 '혁명'이 되풀이해온 전철이었다고 본다. 근대혁명의 대표적 위상을 차지하는 프랑스대혁명 역시 그러하다. 이 역시 "쌍놈들의 무지한 뭉침"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차기로 미룬다.

각설하고 증산께서는 동학란을 단지 시세상의 불리적 관점으로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한계와 폐단을 직시하였고 그 대안을 천지공사에 고스란히 투영하였던 것이다.


- 2부에서 계속
화송 쪽지 2015-11-08 22:58
잘 읽었습니다.
해새 쪽지 2015-11-09 01:02
화송 이번 여성회 연수 일정에서도 동학에 대해서 새로이 깨닫고 느껴진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연재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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