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새님이 동학을 바라보는 견해가 저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해서 해새님 글 몇 군데에 제 의견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동학란(네 저는 동학혁명이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을 상제님께서 부정하신 것도 그런 맥락으로 봅니다. 당시 동학란의 주축세력이었던 농민들이 당대 체제의 피수탈자 계층이었던 것을 상제님이 모르시진 않았겠죠. 하지만 상제님은 그 마음 밑자리를 보시고 "왕후장상의 욕망"을 읽으십니다. 즉 그 난의 뒤끝은 기득권의 교체, 권력의 이동일 뿐 상제님이 설계하신 새세상의 모델은 전혀 아니었다는 겁니다.
상제님은 그 마음 밑자리를 보시고 "왕후장상의 욕망"을 읽으십니다.” 라고 하셨는데
동학운동이 성공해서 기득권의 교체, 권력의 이동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동학민의 원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당시 기득권의 안목으로 자립개방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일본에 의탁하셨겠지만 오히려 저는 미개했던 일본 섬나라에 문물을 전해주었던 스승의 나라이자 은혜국가인 조선에게 취했던 잔인무도한 약탈의 마음 밑자리를 상제님께서 모르시고 의탁하신 것은 아니셨을 텐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상황이 가슴 아프게 다가올 뿐입니다.
동학도에게 일본이 넘어가나 기득권에게서 일본이 넘어가나 조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동학이 성공 했다 해도 오래 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상제님께서 동학의 성공이 잠시나마 왕후장상의 욕망이 되거나 하층계금의 해원마당이 되게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동학의 참 정신은 후천 세상의 정신과 다름이 없고 그 이상은 상제님께서 건설 하시려는 대동세상의 중심 일진데 피수탈자의 해원으로 끝내고 말일이 아니기에 그 당시의 동학을 부정 하신 것이 아닐지요.
또 해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근래 언론에서 소위 '갑질'이라는 명목하에 '가진자들의 횡포'에 관해 부쩍 이슈화를 시키는 경향성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그다지 탐탁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기저에 깔린 매우 불순한 세력의 기획의도를 감지합니다. 상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정도만 하겠는데 아마 제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분명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갑질 횡포를 이슈화 시킨 것이 그 기저에 깔린 매우 불순한 세력의 기획의도가 있다. 라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우리 국민이 이 땅에 살면서 매우 불순한 세력의 기획의도에 이용당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될까요? 갑질 이슈에 불순세력?의 기획의도가 있더라도 미투가 일어나고 숨죽인 을들의 소리를 언제 이렇게 맘 놓고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의 사회현상을 제 2의 동학이라 명명 할 만 한 파천황적인 일들이라 생각 합니다. 미투나 갑질 고발이 일정 부분
부작용은 있을 수 있겠지만 120여 년 전의 동학이나 지금의 동학이나 그 본질을 꿰뚫는 안목이 상제님의 도생들에게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요즘 일고 있는 동학의 바람은 실패 할 수 밖에 없는 힘없고 서러운 슬픈 바람이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시작이라고 생각 하고 싶습니다. 현대사에서 가려지고 숨겨졌던 많은 것이 드러나고 그 원을 풀고 털어내야 만이 다음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털어냄이 없이 그냥 넘어간다면 을들의 원과 한에 발목이 잡혀 십리도 못 가 다시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원한의 이치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 곳곳의 을들이 모두 후천세상으로 넘어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파천황적인 사회현상이 후천시대를 앞에 두고 일어나는 제2의 동학 이라면 “부자는 콩나물 뽑히듯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출발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 사이트에 올린 글입니다
이 주제로 컨텐츠를 풀어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지 거의 2,3년은 넘은 듯 합니다. 하지만 섣불리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제 주변을 돌아볼때 제가 전개하고자는 하는 주장(?)은 아마도 소수-비주류에 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주류측(?)의 비난과 반박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어설프게 꺼내놓았다가 수습도 못한채 제 주장에 대한 불필요한 선입견만 더해놓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나름 쉽게 비유를 들자면 천동설이 주류세계관인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하려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다소 지나친 비유지만 말이죠.
사실 이 주제는 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제가 작업하고자 하는 미디어컨텐츠의 주된 주제입니다. 텍스트 기반의 컨텐츠로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고 판단되어 미디어 기반으로 작업하고자 하는데 이건 텍스트보다는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은 작업과정과 환경을 요하는 것도 사실이죠. 그동안은 도저히 엄두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최근 들어 제 주변여건이 상당히 많이 갖춰지게 되었습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올 여름 안에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서두에 제 주장은 소수-비주류에 속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어쩌면 제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근래들어 간혹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듯한 분들을 온라인에서 접할 때가 있더군요. 그분들 역시 저와 비슷한 이유로 침묵을 지킬 뿐이지 이 주제가 공론화되면 더 많은 분들이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사회인문학의 영역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저부터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도 결국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바탕으로 한 제 나름의 지각을 풀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담론이 무척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각설하고 이번 글에서는 관련하여 짤막한 문제의식(?)만 던져놓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저는 자본주의를 상제님께서 후천세상을 만들기 위해 설계하신 필수불가결의 기반 인프라로 인식합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폐해 내지는 부작용에 대해서 모르는 바도 아니고 부정하지도 않지만 인류사를 돌이켜 볼 때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해 청산되고 개선되었던 체제의 부조리와 악습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하는 문제점들도 엄밀하게 따지고 들면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 인류의 태생적 결함에서 비롯되고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고질적 폐해더라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근래 언론에서 소위 '갑질'이라는 명목하에 '가진자들의 횡포'에 관해 부쩍 이슈화를 시키는 경향성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그다지 탐탁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기저에 깔린 매우 불순한 세력의 기획의도를 감지합니다. 상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정도만 하겠는데 아마 제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분명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진 자의 갑질 내지는 횡포는 동서고금 그 어떤 체제를 막론하고 늘상 있어왔던 폐습입니다. 이건 명백히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본성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비난을 받는 대표적인 오명인 배금주의,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배금주의'라는 명제도 같은 맥락의 오류입니다. 금(자본)을 숭배하고 따르는 것은 인류사를 통틀어 항존해왔던 인간의 본능입니다. 고대인류의 유적에서도 귀금속에 대한 욕망을 읽을 수 있죠.
자본주의란 용어도 짚어봐야 하는 것이 칼 막스가 자본론을 쓰면서 등장한 개념입니다. 그 이전에는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란 말은 칼 막스가 피력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즉 공산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안티테제로 탄생한 개념입니다.
공산주의 : 자본주의 = 선 : 악
그리고 당시 칼 막스가 정의했던 산업혁명기 유럽의 '원시(?) 자본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는 전혀 유전형질부터가 다른 별개의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유인원과 현생인류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단적인 예를 들자면 칼 막스 이론의 핵심인 자본가(수탈자)와 노동자(피수탈자)라는 계급사관적 분류방식은 오늘날 경제체제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기 힘든 이분법적 논리입니다.
칼 막스의 자본론으로 보자면 자본가를 달리 말해 고용주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고용주는 대기업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골목상권의 소상공인들도 고용주의 입지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고전적 자본론의 관점에서 말하는 자본가(수탈자)라고 보지는 않죠.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21세기의 경제시스템은 18세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고 다변화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직도 구시대적 경영원리로 회사를 경영하는 오너들이 분명히 존재하겠습니다만, 또한 분명한 사실은 국가경제시스템이 글로벌친화적이 될수록 경쟁에서 낙오되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기업이 바로 그런 기업이라는 거죠.
제가 최근까지 매우 관심있게 보았던 유튜브채널들이 선진경영기법을 소개하는 곳들이었습니다. 그기서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를 축약하면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는 기업의 핵심가치는 '공익'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수익의 증대, 회사의 확장 등이 아니라 기업이 속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짜 사업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무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선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심리학연구에서도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나오는데 바로 그 지속가능한 발전은 "공통의 목적과 협력"에 기반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제가 이러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가지게 된 확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고대 제왕학을 총결산하기 위해 등장한 플랫폼이라는 것입니다.
자본론에서 칼 막스가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계급이 부르조아였죠. 부르조아는 원래 봉건사회에서는 농민계급이었고 이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왕족과 귀족들이 천대시했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결국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혁명의 주축이 되어 유럽의 왕조시대를 문닫게 한 주된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칼 막스에 이르러 기득권으로 취급받게 되고 프롤레타리아의 적으로 규정되죠. 재미있는 건 칼 막스 자신도 부르조아 집안이었고 죽을 때까지 부르조아적 생활패턴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계급사관의 맹점이 바로 이런 거란 거죠. 부르조아든 프롤레타리아든 시대가 바뀌면 그 위상과 입지가 바뀌어서 갑을관계 역시 바뀐다는 겁니다. 프롤레타리아 역시 그럴 겁니다.
동학란(네 저는 동학혁명이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을 상제님께서 부정하신 것도 그런 맥락으로 봅니다. 당시 동학란의 주축세력이었던 농민들이 당대 체제의 피수탈자 계층이었던 것을 상제님이 모르시진 않았겠죠. 하지만 상제님은 그 마음 밑자리를 보시고 "왕후장상의 욕망"을 읽으십니다. 즉 그 난의 뒤끝은 기득권의 교체, 권력의 이동일 뿐 상제님이 설계하신 새세상의 모델은 전혀 아니었다는 겁니다.
또한 세계사의 관점에서도 동학란의 주축세력들은 격변하는 세운에서 조선왕조를 이끌고 나갈 역량이나 안목이 전혀 없었고 백만분지 일로 설령 그 난이 성공했다 해도 조선을 더 빨리 외세에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을 거라 판단합니다. 당시 조선은 무조건 외세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와중에 일본에 천하통일지기와 일월대명지기를 붙여 조선을 일본에 의탁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던 겁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보다 400년이나 앞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고 구한말 즈음에 이르러서는 서양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게 됩니다. 천지공사적 관점에서 조선을 자본주의 체제로 이끄는 가이드로서 최적격이었다는 거죠.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어차피 글 몇번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다 풀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온라인에는 분명 저보다 훨씬 이에 대해 식견과 내공이 깊으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바람은 제가 앞으로 작업하는 컨텐츠가 그분들의 식견을 이끌어내는 동기만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옥단소는 제가 풀어내고자 하는 컨텐츠를 펼치기엔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적절한 공간을 준비할까 생각중입니다. 그전에라도 제게 어떤 조언이나 제안 등이 있으시다면 적극 환영하는 바입니다.
*
두서없이 쓴 글이라 내용 중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질책 비판 기꺼이 받습니다.
이 주제로 컨텐츠를 풀어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지 거의 2,3년은 넘은 듯 합니다. 하지만 섣불리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제 주변을 돌아볼때 제가 전개하고자는 하는 주장(?)은 아마도 소수-비주류에 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주류측(?)의 비난과 반박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어설프게 꺼내놓았다가 수습도 못한채 제 주장에 대한 불필요한 선입견만 더해놓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나름 쉽게 비유를 들자면 천동설이 주류세계관인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하려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다소 지나친 비유지만 말이죠.
사실 이 주제는 일전에도 말한 바 있는 제가 작업하고자 하는 미디어컨텐츠의 주된 주제입니다. 텍스트 기반의 컨텐츠로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고 판단되어 미디어 기반으로 작업하고자 하는데 이건 텍스트보다는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은 작업과정과 환경을 요하는 것도 사실이죠. 그동안은 도저히 엄두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최근 들어 제 주변여건이 상당히 많이 갖춰지게 되었습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올 여름 안에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서두에 제 주장은 소수-비주류에 속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어쩌면 제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근래들어 간혹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듯한 분들을 온라인에서 접할 때가 있더군요. 그분들 역시 저와 비슷한 이유로 침묵을 지킬 뿐이지 이 주제가 공론화되면 더 많은 분들이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사회인문학의 영역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저부터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도 결국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바탕으로 한 제 나름의 지각을 풀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담론이 무척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각설하고 이번 글에서는 관련하여 짤막한 문제의식(?)만 던져놓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저는 자본주의를 상제님께서 후천세상을 만들기 위해 설계하신 필수불가결의 기반 인프라로 인식합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폐해 내지는 부작용에 대해서 모르는 바도 아니고 부정하지도 않지만 인류사를 돌이켜 볼 때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해 청산되고 개선되었던 체제의 부조리와 악습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하는 문제점들도 엄밀하게 따지고 들면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 인류의 태생적 결함에서 비롯되고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고질적 폐해더라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근래 언론에서 소위 '갑질'이라는 명목하에 '가진자들의 횡포'에 관해 부쩍 이슈화를 시키는 경향성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그다지 탐탁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기저에 깔린 매우 불순한 세력의 기획의도를 감지합니다. 상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 정도만 하겠는데 아마 제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분명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진 자의 갑질 내지는 횡포는 동서고금 그 어떤 체제를 막론하고 늘상 있어왔던 폐습입니다. 이건 명백히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본성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비난을 받는 대표적인 오명인 배금주의,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배금주의'라는 명제도 같은 맥락의 오류입니다. 금(자본)을 숭배하고 따르는 것은 인류사를 통틀어 항존해왔던 인간의 본능입니다. 고대인류의 유적에서도 귀금속에 대한 욕망을 읽을 수 있죠.
자본주의란 용어도 짚어봐야 하는 것이 칼 막스가 자본론을 쓰면서 등장한 개념입니다. 그 이전에는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란 말은 칼 막스가 피력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즉 공산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안티테제로 탄생한 개념입니다.
공산주의 : 자본주의 = 선 : 악
그리고 당시 칼 막스가 정의했던 산업혁명기 유럽의 '원시(?) 자본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는 전혀 유전형질부터가 다른 별개의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유인원과 현생인류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단적인 예를 들자면 칼 막스 이론의 핵심인 자본가(수탈자)와 노동자(피수탈자)라는 계급사관적 분류방식은 오늘날 경제체제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기 힘든 이분법적 논리입니다.
칼 막스의 자본론으로 보자면 자본가를 달리 말해 고용주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고용주는 대기업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골목상권의 소상공인들도 고용주의 입지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고전적 자본론의 관점에서 말하는 자본가(수탈자)라고 보지는 않죠.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21세기의 경제시스템은 18세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고 다변화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직도 구시대적 경영원리로 회사를 경영하는 오너들이 분명히 존재하겠습니다만, 또한 분명한 사실은 국가경제시스템이 글로벌친화적이 될수록 경쟁에서 낙오되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기업이 바로 그런 기업이라는 거죠.
제가 최근까지 매우 관심있게 보았던 유튜브채널들이 선진경영기법을 소개하는 곳들이었습니다. 그기서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를 축약하면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는 기업의 핵심가치는 '공익'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수익의 증대, 회사의 확장 등이 아니라 기업이 속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짜 사업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무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선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심리학연구에서도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나오는데 바로 그 지속가능한 발전은 "공통의 목적과 협력"에 기반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제가 이러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가지게 된 확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고대 제왕학을 총결산하기 위해 등장한 플랫폼이라는 것입니다.
자본론에서 칼 막스가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계급이 부르조아였죠. 부르조아는 원래 봉건사회에서는 농민계급이었고 이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왕족과 귀족들이 천대시했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결국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혁명의 주축이 되어 유럽의 왕조시대를 문닫게 한 주된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칼 막스에 이르러 기득권으로 취급받게 되고 프롤레타리아의 적으로 규정되죠. 재미있는 건 칼 막스 자신도 부르조아 집안이었고 죽을 때까지 부르조아적 생활패턴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계급사관의 맹점이 바로 이런 거란 거죠. 부르조아든 프롤레타리아든 시대가 바뀌면 그 위상과 입지가 바뀌어서 갑을관계 역시 바뀐다는 겁니다. 프롤레타리아 역시 그럴 겁니다.
동학란(네 저는 동학혁명이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을 상제님께서 부정하신 것도 그런 맥락으로 봅니다. 당시 동학란의 주축세력이었던 농민들이 당대 체제의 피수탈자 계층이었던 것을 상제님이 모르시진 않았겠죠. 하지만 상제님은 그 마음 밑자리를 보시고 "왕후장상의 욕망"을 읽으십니다. 즉 그 난의 뒤끝은 기득권의 교체, 권력의 이동일 뿐 상제님이 설계하신 새세상의 모델은 전혀 아니었다는 겁니다.
또한 세계사의 관점에서도 동학란의 주축세력들은 격변하는 세운에서 조선왕조를 이끌고 나갈 역량이나 안목이 전혀 없었고 백만분지 일로 설령 그 난이 성공했다 해도 조선을 더 빨리 외세에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을 거라 판단합니다. 당시 조선은 무조건 외세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와중에 일본에 천하통일지기와 일월대명지기를 붙여 조선을 일본에 의탁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던 겁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보다 400년이나 앞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고 구한말 즈음에 이르러서는 서양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게 됩니다. 천지공사적 관점에서 조선을 자본주의 체제로 이끄는 가이드로서 최적격이었다는 거죠.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어차피 글 몇번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다 풀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온라인에는 분명 저보다 훨씬 이에 대해 식견과 내공이 깊으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바람은 제가 앞으로 작업하는 컨텐츠가 그분들의 식견을 이끌어내는 동기만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옥단소는 제가 풀어내고자 하는 컨텐츠를 펼치기엔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적절한 공간을 준비할까 생각중입니다. 그전에라도 제게 어떤 조언이나 제안 등이 있으시다면 적극 환영하는 바입니다.
*
두서없이 쓴 글이라 내용 중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질책 비판 기꺼이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