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란 무엇인가?
원문 : http://www.jinbub.com/freetalk/57173
"우리가 해 왔던 것이 과연 포교가 맞기는 했나?"
안 그래도 얼마전부터 기존 포교의 의미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며 생각을 하던 참인데 포교오십년공부종필 논의가 나와서 저도 거들어 봅니다.
각설하고 그동안 도판은 포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봉사잔치만 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매우 극단적 견해일 수 있습니다.
통상 포교 원년을 1860년 최수운 선생이 천상대도문답을 한 해로 잡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이 개념이 포교의 진정한 의미를 정립할 수 있는 실마리로 봅니다. 즉 포교는 시천주(侍天主) 선언이라는 거죠. "천주를 모셔라" 더 확장된 개념으론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미륵불)을 모셔라"
그럼 과도기 교단들은 그동안 이걸 안 해왔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안 해왔습니다.
그들이 해 온 건 시천주가 아니라 시종통(侍宗統)이었죠. 겉으로는 천주(상제)를 내세워왔지만 실상은 종통을 받들라고 한 것이 과도기 교단들의 포교였습니다.
똑같이 천주(상제)를 말한 것 같았지만 최수운 선생과 과도기 교주들의 차이점이 뭐겠습니까? 최수운 선생은 철저히 메신저로서만 남았습니다. 반면 과도기 교주들은 메신저인 척 하면서 자신들이 메세지가 되었던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증산 교단의 공통점이며 또한 이것은 100년이 훌쩍 넘은 이 시점에도 증산 사상이 세계화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상제님께서 공사 보시고 기운붙인 바대로 된 것입니다만.
기독교, 불교 등이 지역종교에서 시작해 세계종교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리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또한 그 교리의 원천인 교조들(예수, 석가)의 위격, 기국, 내공 등이 그만큼 글로벌 규격이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증산상제님은 예수, 석가보다 훨씬 더 큰 위격을 가지신 분이고 그 가르침 또한 비교도 안되는 보편성과 초월성을 가졌는데 왜 세계종교가 안되었냐 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종통교리 때문입니다.
물론 초기 기독교도 베드로냐 바울이냐 같은 교권분쟁도 있었고 더 은밀하게는 영지주의(그노시스)냐 교부신학이냐 같은 교리논쟁도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중심에는 늘 예수가 있었지, 예수에게 종통을 물려받은 대권자는 없었습니다. 신약의 절반 이상이 바울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기독교인 누구도 바울을 오늘날 증산 교단 특유의 대두목의 위격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죠. 바울 자신도 그런 메세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고요.
감히 예상해보건대 만약 바울이 그랬다면 기독교는 오늘날의 위상을 가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석가 이후로 허다한 고승들이 왔다 갔지만 누구도 자신을 메세지로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불교 교리 자체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 있습니마단.
결국 종교든 사상이든 원 컨텐츠(교조)의 완성도만큼 영역을 확장할 수밖에 없는데 과도기 증산 교단은 바로 그 점에서 세계화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셈입니다. 과도기 교단들에서 종통교리를 빼면 뭐가 남습니까? 그들에게 종통교리는 존재기반 그 자체거든요.
제 얘기를 조금 하자면 상제님 진리를 우연적 필연으로 알게 된 후 이를데 없는 환희심에 젖었지만 막상 입도는 달갑지 않았고 거의 타의(신명의 강압)에 의해 입도를 하고 나서도 소위 말하는 '포교'에는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당시는 제가 척도 많고 업장도 세서 그런가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당시 모 교단의 포교 다시 말하면 천하사라는 것이 '증산'을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라 '안산'을 마케팅하는 것이었고 이걸 제 심층의식에서는 거부해왔던 거더군요.
아마 이게 제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모 교단이 한때 해외포교에도 막대한 비용을 쓴 걸로 아는데 근본적으로 그건 안되는 판이었던 겁니다. 서양인들도 처음에는 증산 사상에 매료되어 들어왔다가도 막상 들어와서는 뜬금없는 대행자 맹신교리를 마주하게 되니 이게 뿌리를 내릴 수가 없는 거죠. 이게 사실은 개벽을 빙자한 종말시점교리보다 더 근본적인 반세계화 요소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관점에서 1860년을 포교 원년으로 보는 걸 매우 합당하다 여기고 있고 포교오십년공부종필의 오십년 역시 1860~1909 설을 거의 맞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즉 진정한 포교 기간은 최수운 선생의 천상문답사건부터 상제님의 화천까지라는 거고 그 이유는 그 기간에서만 천주(상제)가 직접 메세지로서 행세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 이후는 초장봉기지세로 등장한 메신저들이 각자가 스스로를 메세지라고 대가리놀음했던 거고 그 세월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봅니다.
상제님께서 "도적 잡는 자를 포교(捕校)라고 부르나니 도를 전할 때에 포교(布敎)라고 일컬으라. 우리 일은 세상의 모든 불의를 맑히려는 일이니 세상에서 영웅이란 칭호를 듣는 자는 다 잡히리라." 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이때 도적을 메세지를 자처하는 메신저들을 말함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래서 포교를 일체의 종통논리를 철저히 배제한 상제님 그 자체만을 알리는 행위라고 나름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되려면 결국 판을 나올 수밖에 없는 거겠죠.
"우리가 해 왔던 것이 과연 포교가 맞기는 했나?"
안 그래도 얼마전부터 기존 포교의 의미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며 생각을 하던 참인데 포교오십년공부종필 논의가 나와서 저도 거들어 봅니다.
각설하고 그동안 도판은 포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봉사잔치만 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매우 극단적 견해일 수 있습니다.
통상 포교 원년을 1860년 최수운 선생이 천상대도문답을 한 해로 잡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이 개념이 포교의 진정한 의미를 정립할 수 있는 실마리로 봅니다. 즉 포교는 시천주(侍天主) 선언이라는 거죠. "천주를 모셔라" 더 확장된 개념으론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미륵불)을 모셔라"
그럼 과도기 교단들은 그동안 이걸 안 해왔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안 해왔습니다.
그들이 해 온 건 시천주가 아니라 시종통(侍宗統)이었죠. 겉으로는 천주(상제)를 내세워왔지만 실상은 종통을 받들라고 한 것이 과도기 교단들의 포교였습니다.
똑같이 천주(상제)를 말한 것 같았지만 최수운 선생과 과도기 교주들의 차이점이 뭐겠습니까? 최수운 선생은 철저히 메신저로서만 남았습니다. 반면 과도기 교주들은 메신저인 척 하면서 자신들이 메세지가 되었던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증산 교단의 공통점이며 또한 이것은 100년이 훌쩍 넘은 이 시점에도 증산 사상이 세계화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상제님께서 공사 보시고 기운붙인 바대로 된 것입니다만.
기독교, 불교 등이 지역종교에서 시작해 세계종교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리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또한 그 교리의 원천인 교조들(예수, 석가)의 위격, 기국, 내공 등이 그만큼 글로벌 규격이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증산상제님은 예수, 석가보다 훨씬 더 큰 위격을 가지신 분이고 그 가르침 또한 비교도 안되는 보편성과 초월성을 가졌는데 왜 세계종교가 안되었냐 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종통교리 때문입니다.
물론 초기 기독교도 베드로냐 바울이냐 같은 교권분쟁도 있었고 더 은밀하게는 영지주의(그노시스)냐 교부신학이냐 같은 교리논쟁도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중심에는 늘 예수가 있었지, 예수에게 종통을 물려받은 대권자는 없었습니다. 신약의 절반 이상이 바울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기독교인 누구도 바울을 오늘날 증산 교단 특유의 대두목의 위격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죠. 바울 자신도 그런 메세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고요.
감히 예상해보건대 만약 바울이 그랬다면 기독교는 오늘날의 위상을 가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석가 이후로 허다한 고승들이 왔다 갔지만 누구도 자신을 메세지로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불교 교리 자체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 있습니마단.
결국 종교든 사상이든 원 컨텐츠(교조)의 완성도만큼 영역을 확장할 수밖에 없는데 과도기 증산 교단은 바로 그 점에서 세계화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셈입니다. 과도기 교단들에서 종통교리를 빼면 뭐가 남습니까? 그들에게 종통교리는 존재기반 그 자체거든요.
제 얘기를 조금 하자면 상제님 진리를 우연적 필연으로 알게 된 후 이를데 없는 환희심에 젖었지만 막상 입도는 달갑지 않았고 거의 타의(신명의 강압)에 의해 입도를 하고 나서도 소위 말하는 '포교'에는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당시는 제가 척도 많고 업장도 세서 그런가보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당시 모 교단의 포교 다시 말하면 천하사라는 것이 '증산'을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라 '안산'을 마케팅하는 것이었고 이걸 제 심층의식에서는 거부해왔던 거더군요.
아마 이게 제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모 교단이 한때 해외포교에도 막대한 비용을 쓴 걸로 아는데 근본적으로 그건 안되는 판이었던 겁니다. 서양인들도 처음에는 증산 사상에 매료되어 들어왔다가도 막상 들어와서는 뜬금없는 대행자 맹신교리를 마주하게 되니 이게 뿌리를 내릴 수가 없는 거죠. 이게 사실은 개벽을 빙자한 종말시점교리보다 더 근본적인 반세계화 요소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관점에서 1860년을 포교 원년으로 보는 걸 매우 합당하다 여기고 있고 포교오십년공부종필의 오십년 역시 1860~1909 설을 거의 맞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즉 진정한 포교 기간은 최수운 선생의 천상문답사건부터 상제님의 화천까지라는 거고 그 이유는 그 기간에서만 천주(상제)가 직접 메세지로서 행세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 이후는 초장봉기지세로 등장한 메신저들이 각자가 스스로를 메세지라고 대가리놀음했던 거고 그 세월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봅니다.
상제님께서 "도적 잡는 자를 포교(捕校)라고 부르나니 도를 전할 때에 포교(布敎)라고 일컬으라. 우리 일은 세상의 모든 불의를 맑히려는 일이니 세상에서 영웅이란 칭호를 듣는 자는 다 잡히리라." 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이때 도적을 메세지를 자처하는 메신저들을 말함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래서 포교를 일체의 종통논리를 철저히 배제한 상제님 그 자체만을 알리는 행위라고 나름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되려면 결국 판을 나올 수밖에 없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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