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송님. 좋은글 감사드리며 좋은밤되세요. ^^
화은당실기<일기초공사中 44~45page>
六 무인년<1938년> 정월십오일~~
또 그해 삼월삼일날 ~~
그뒤 정읍 차교주가 자기집에 와서~~
혹시,, 세번째 차교주<차경석님>이신가요?
차경석님은 1936년에 돌아가신걸로 알고있어서 혹시 오류가 아닌지해서요~
관련이 있는글이 있어서 댓글로 여쭈어봅니다.
그외 한가지가 더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많은 교생님들과 도담을 나눌 기회가 된다면 그때 여쭈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은당실기중에서-화천)
본가를 떠나신 뒤 수개월 후에 소식을 들으니,
김제등지 외가친척을 일일이 방문하시고 나신 뒤,
동독에 있는 수제자 김형렬 댁에서
기유년 유월 이십사일에 화천 하셨다는 통보를 조부께서 받으셨으나,
그 동안 선사 모녀에게는 정상이 너무 딱하다 하여 알리지 않으셨는데,
뒤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모녀의 깊은 서러움은 실로 형언할 길이 없었더니라.
성부께서는 십사대 종손으로서 집안에는 각종 문물이 많이 전하여 내려왔는데
집을 떠나시기 이전에 하루는 관직에 대한 교지며
족보 기타 문집 등 일체의 서책을 마당에 꺼내어
교지에 찍힌 직인 자리만 오려 띠시고 전부 불사르시니,
수십 호 문중 노소가 모여들어 소동이 일어났으나 만류치 못한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로 집안의 모든 사람과 척이 되어 오면서 이윽고는
문중재산까지 다 없애고 하시는 말씀이 “유도의 구습을 없애고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할지니
유도에서는 범절밖에 취할 것이 없노라”고 하시니라.
성부께서 화천하신 뒤로 가세는 더욱 궁핍하여 생계가 곤궁 막심하니
어디다 의탁할 곳 없는 환경 속에서도
관후하신 정씨성모께서는 모든 난관을 겪으면서
유리걸식하여 따님 기르시기에 온갖 마음을 다 기우리시고,
노쇠하신 조부께서는 짚신을 삼아가며
아드님과 크나큰 이상을 생각하고 그의 재림을 기원하여 사시로 치성을 올리시고
축원하는 그 모습은 실로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