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의 발효 , 장
김치는 물론이고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등의 장류 역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발효식품이다. 주원료가 콩과 소금인 장은 모든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조미료이자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우리나라에 콩을 주원료로 한 장류가 발달한 것은 기원전 5세기부터 이미 콩을 재배해왔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삼면이 바다인 지리학적 조건은 소금을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리 민족이 이 장류를 얼마나 중요시해왔는지는 민간 풍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여자들에게 집안의 장맛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소임인지 알 수 있다. 장 담그는 날은 길일을 택해 하였으며, 장을 담근 후에는 행여나 부정이 타지 않도록 금줄을 치고 버선본을 거꾸로 붙이는 등 액땜을 위해 온 신경을 썼다.
지금은 장의 종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고 만드는 법도 단순화되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 종류만 20여 종에 달했다고 한다. 예부터 있던 일반적인 장류에는 청장(淸醬), 즙장(汁醬), 담북장(淡北醬), 청국장(淸麴醬), 고초장(苦椒醬) 등이 있고, 이 외에 청태장(靑太醬), 소두장(小豆醬) 등 특수한 장류도 있었다. 흉년이 들어 콩이 부족할 때에는 콩잎, 콩깍지, 느릅나무열매 등도 간장과 된장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장 담그기는 메주를 만들어 띄우고, 장을 담그고 장을 뜨기까지 초겨울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연중행사였다. 간장은 메주와 물, 소금을 원료로 된장에서 추출한 용액으로, 탄수화물 및 단백질을 분해하는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며, 후숙 과정에서는 각종 향미 성분을 생성하는 미생물이 생겨난다. 우리나라 재래식 장류는 이러한 야생의 미생물을 이용하고 있어 기후, 환경, 제조 방식에 따라 맛과 품질이 다양했다.
간장과 된장 만드는 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잘 말린 메주에 소금물을 풀어서 앙금을 가라앉히고 소독한 항아리에 넣고 준비한 소금물을 체에 걸러 붓는다. 항아리를 양지 바른 곳에 놓고 숯, 대추, 고추 등을 띄우고 망사로 잘 봉합한 후 뚜껑을 덮는다. 사흘이 지나면 매일 뚜껑을 열어 볕을 쬐게 하고 한 달 반에서 두 달 후 까맣게 빛깔이 들면 메주를 꺼내 간장과 된장으로 분리한다. 메주를 건져낸 간장물을 체에 걸러 솥에 붓고 달여 거품을 걷어내고 식힌 후 다시 독에 붓는다.
낮에는 뚜껑을 열어 볕을 흠뻑 쪼이고 저녁에는 뚜껑을 덮는다. 메주에서 간장을 너무 많이 뽑으면 된장이 맛이 없다고 하여 메주가루를 일부 남겨두었다가 된장용 메주에 다시 넣어주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우리의 장은 항아리와 함께 관리를 해야 하는데, 오래 보관하려면 잘 달여 잡균을 제거하고 햇볕을 자주 쏘여주며 항아리 위의 곰팡이를 깨끗하게 걷어주어야 한다. 순수한 자연발효식으로 만든 간장은 오래 발효시킬수록 맛이 좋아진다. 음식의 간을 맞춰주면서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된장이 우리 몸에 좋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된장에 대한 각종 연구 자료에 의하면, 콩 속의 사포닌과 토코페롤 성분이 항산화 작용을 해 우리 몸의 노화를 더디게 한다(노화는 산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특히 자연발효시킨 재래된장의 항산화 작용은 더욱 뛰어나다. 된장이 짙은 갈색으로 발효, 숙성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물질이 된장 성분 자체의 산화를 막아 안정된 식품이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인성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로도 이어진다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전문가들이 밝혀낸 된장의 효능은 무궁무진하다.
혈압을 낮춰 고혈압에 효과가 있으며, 콜레스테롤을 제거해줌으로써 혈관을 탄력 있게 한다. 우리 몸, 특히 간 속의 독소를 몸 밖으로 배출시키며 각종 음식물의 독을 푸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체했을 때 된장을 묽게 끓인 국을 먹여 체기를 풀었으며, 아침 공복 때 생수 한 컵에 된장을 2분의 1큰술 정도 풀어 마시면 숙변을 보게 된다고 하니 참고할 만하다.
청국장은 제조법이 중국에서 전해졌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전통적인 청국장은 콩과 볏짚을 이용해 만들 수 있다. 오랫동안 불린 콩을 최소한 6시간 이상 삶아 뜨거울 때 볏짚을 깔고 그릇에 담아 따뜻한 방에서 2, 3일 보온한다. 볏짚에 붙어 있는 야생 미생물이 번식해 실 모양의 끈적한 진이 생기면서 청국장균이 발아 번식하면 소금을 넣고 찧어 청국장을 완성한다. 이 끈적한 물질은 바실러스 균에 의한 것인데, 항암효과와 혈전용해작용을 한다고 한다. 우리 몸의 세포 또는 혈관벽에 부착된 유해한 콜레스테롤을 몸 밖으로 배설하는 역할을 해 동맥경화와 고혈압 예방에 효과적이다.
청국장 1g에 약 10억 마리 이상의 청국장균이 생기는데, 이 균은 우리 장내에서 유익한 미생물의 작용을 도와 설사나 장염을 예방하며 변비를 막아준다. 또한 콩에 풍부한 칼륨이 우리 몸의 나트륨 양을 조절해 혈압을 정상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담북장은 청국장보다 콩을 띄우는 기간이 짧아 콩의 본맛이 많이 남아 있으며, 보통 된장보다 더 담백하다.
고추장(원래 매운 양념을 초장(椒醬)이라 했는데 이후 고추가 들어오자 이를 일컬어 고초(苦椒)라고 적다가 고추․고추장으로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은 고추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임진왜란 직후, 즉 16세기 경부터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어 비교적 역사가 짧다. 하지만 한국인의 힘을 이 매운 고추맛에서 찾을 만큼 고추장은 대표적인 민족 음식으로 통한다. 전통적으로는 쌀, 찹쌀, 보리, 밀로 만든 떡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 소금을 섞어 만든다. 고추 속의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이 체세포를 자극하여 효소를 분비시키고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즙장은 찐 밀과 콩을 섞은 뒤 고온으로 단기간에 발효시켜 만드는 장으로, 주로 여름에 담가 먹었다. 색깔은 된장보다 어두운 노란색이나, 맛은 된장보다 고소하고 단맛이 난다. 주로 쌈장이나 오이, 풋고추를 찍어먹는 장으로 서민층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즙장은 메주와 밀, 콩 등을 빻아 찐 다음 빚어 닥나무 잎을 덮어 띄워 말린 다음, 소금과 물을 섞어 장항아리에 담고 이것을 말똥 속에 묻어 익힌다. 높은 열을 유지하기 위해 퇴비더미 속에서 단기간 발효시키는 것인데, 그래서 즙장은 '말똥즙장'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제조상의 어려움과 밀 경작이 줄어듦에 따라 1900년대 초부터 우리 식탁에서는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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