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육 기초공사 오리알터
1.무자년 팔월 십오일 성모님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도장의 터가 좁다고 하시면서 둘레로 터를 넓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시어 시월 십일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하니 그날 밤에 성모님께서 “비록 터를 넓히는 역사라 할지라도 개기제를 지내야 할 것인즉, 내일은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더라.
이튿날 개기제를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오셔서 “이 자리에 집을 집으면 패운이 곧 들어오게 될 것이니 오리알터 밤나무밭을 사서 새집을 짓도록 하고 이곳에 있는 기왕의 건물도 뒤이어 이축토록 하라”고 명령하시니 웬일인가 하고 크게 걱정하더라.
그때에는 물론 금성. 장대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교세는 아직도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동곡에 성전을 지은 지 이년 남짓하여 더구나 터를 넓히다 말고 새로운 기지를 잡아 그곳에 이사한다 하면 아무리 신명이 시키는 일이라 해도 힘드는 일을 싫어하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의 마음이라 더욱이 공사를 직접 받들어 오는 오십여명의 식구들은 아직도 초근목피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명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닌터에 그러한 인심을 휘어잡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님에 여러 가지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더라.
그러나 명령을 받들을 때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언제고 길을 열렸던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소신하는 바 확고부동한 것이 있었음으로 우선 식구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저 당분간 터 고르는 것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그렇게 하자고만 하여 일을 중지시킨 다음 오리알터 기지를 사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니라. 정사는 비밀리에 염탐해보니 수백 그루의 밤나무가 서있는 그 터는 정읍에 서는 이판옥의 소유 임야로서 그 좌우에 명당을 찾아 쓴 각각의 분묘가 많았고 또 토질이 양호하여 토끼 사육장을 세울 수도 있다 하여 원매자가 적지 않아 묘주는 묘주대로 수년을 두고 삼사인이 반갈아 그 산을 사고자 드나들고 토끼사육장을 세우겠다는 사람도 몇 차례나 드나들어 교섭을 해나오는 중이었으나 산주의 형편이 넉넉하여 도무지 팔 의사가 없어서 허행만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아니라. 이와 같은 형편에 당장에는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음식을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시월 십일 아침 진지상을 올리고 방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함으로 문틈으로 내다보니 양복을 입은 손님이라 공연히 가슴이 떨리더라 그때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안정을 차릴 수 없는 사회상태였고 신앙자간에는 하두 모략중상이 심해서 그동안 몇 번이나 공연한 일에 경을 친 판이라 양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그저 가슴부터 서먹해오던 터이더라.
그러나 찾아온 손님을 밖에 두고 거절할 수도 없어서 맞아 드리고 보니 전번에 차중에서 서로 인사한 바 있는 산주 이씨라 반갑게 맞이하고 점심을 같이 마친 뒤 그는 앞문을 열고 건너편에 내다보이는 율목림을 가르키면서 저것이 나의 소유 임야로서 평수는 약 칠정보나 되는데 수년전부터 몇 사람이 드나들며 매도하라고 조르는 것을 팔 마음이 없어 거절해 나오던 중인데 전일 김선생을 차중에서 만난 뒤로 웬일인지 매일과 같이 같은 사람이 와서 현금까지 내놓으면서 사업관계로 꼭 필요하니 그보다 낳은 산을 구하고 양도 해달라고 조르는 사람, 선산을 삼겠으니 매도하라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번갈아 찾아와서 성화를 대는지라 번잡하기 짝이 없어 팔아버릴 마음을 정하고 어젯밤에 생각하니 선생께서 동곡에 기지를 정했다 하니 치성때에 실과도 필요할 것이며 또한 관리하기에도 용의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이 되니 다른데 팔기 전에 찾아뵙고 말이라도 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하더라
성부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운영하시는 모든 일은 이처럼 척척 사우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 이미 상식화 된 사실이거니와 음식가지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반갑고 신기한 마음 한이 없어 산주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사기를 결정하되 십이월까지만 연기해주면 그간에 대금을 주선하리라고 단 둘이서만 약속하고 그를 배웅해 보내니라.
그러나 아직도 죽과 나무뿌리를 면치 못한 처지에 어찌할 방책이 생각나지를 않아 이러저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온 산주는 전일에 십이월까지 약속했으나 날마다 졸리고만 앉아 있을 수 없은즉 찾아드는 사람들 응대에 딴 일을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니 만일 사지 못할 형편이라면 딴 곳에라도 매도해 버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다시 왔노라고 하더라. 그렇지 않아도 주야로 노심하던 차에 이런 급한 통지를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으나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일주일만 더 참아준다면 그 안에 좌우간 결정을 짓겠다고 사정하여 응답을 받고 백방으로 주선한 끝에 겨우 아는 이의 농우 한 마리를 빌려 원평 장날에 파니 꼭 육만환이라, 그 길로 정읍에 가서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찾아가니 산주는 반갑게 맞아주더라. 지체할 것이 없이 매매에 대한 계약서를 들고 대금을 물으니 다른 원매자들이 팔. 구만원을 보니 알아서 달라고 하기에 육만환에 줄 수 없겠느냐고 떠보았더니 “그럴 수야 있겠소 남이 보는 정도로는 주셔야죠” 하기에 매매계약서를 구만환으로 기입하려 하니 산주는 계약서를 뺏어가더니 오만 오천환이라 기입 하니라. 뜻밖의 일에 “어찌 된 일이요”하고 물으니 이번일은 자청해 하는 일로서 피차간에 서로 신사적으로 상의하는 것이니 이해를 불문하고 드리겠다고 하더라. 성부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미리 깨달을 수 없는 것임을 또한번 명심하면서 남은 돈 오천환은 마침 나와 인사하는 그 집 아들 오형제에게 나누어 주니 사양하는지라, 산주를 대하여 내가 꼭 육만환을 지니고 왔기에 처음 육만환을 말씀드렸다가 선생의 특지로서 오천환이 남은지라 준비해온 금액을 다 드리고 가야 되겠으니 받도록 권하시오, 말하고 나오니라. 이제 성부님께서 말씀하시던 오리알터를 도득할 수 있게 되니 나를 듯 마음이 가벼워지고 언제나 앞길을 열어 주시는 하늘에 감사하여 마지 않더라.
2.무자년을 보내고 기축년을 맞게 되어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정월 이십일에 오리알터에서 개기토록 하라.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삼.사월에는 큰일이 있을 터이니 너희들은 속히 일을 착수하도록 하라”하시고 다시 “너희들은 정월 십사일 저녁나절에 이곳으로부터 오리알터로 건너가는 냇물에 섬 다리 열두개를 놓되 그속에 엽전 한푼씩을 넣을것이며 내 양편에 오색등 하나씩을 달도록 하라. 너희들은 머지않아 이 곳을 발로는 다니자 못하게 될 것이니라” 하시니라.
십사일 저녁무렵에 전일 하명하신대로 실행하고 이십일에 오리알터에 건너가 개기제를 올린 다음 성도와 경주를 데리고 밤나무 숲속에 이곳저곳에 측량 푯말을 세우니 작업은 이튿날부터 시작하니라. 동곡에서 터를 닦다 말고 엉뚱한 산기슭에서 나무를 베고 터를 다듬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행인들과 근처 사람들이 무엇을 할려기에 또 그것을 파재키느냐고 묻는지라. 집칸이나 세울가 하여 터를 닦는다고 대답하니 모두들 그 진펄 속에 집이 무엇이냐고 비웃으며 그 줄기에는 묘 한장도 없는 것을 보지도 않았느냐고 하면서 거기는 지나가는 행인마저 쉬어갈 곳이 못된다고 하며 돈자랑을 할 셈이냐고 비소하는 자 적지 않더라.
하루는 근동에 사는 지사 서씨노인이 찾아와서 어떤 비결에 오리알터에 가활백만지지가 있노라고 하였기에 이곳에 많은 지사들이 들어와서 답산이 빈번하여 묘는 많이 섰으나 이 줄기만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이라고 하며 나도 당지를 찾으려고 이곳에 이사까지 와서 있지만 여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터가 될만한 혈이 없노라고 평하는지라 우리는 객지사람으로서 바쁜 일에 좋고 궂은 것을 가릴 처지가 못되니 아무데나 우선 마음에 내키는 대로 터를 닦을 수밖에 없노라고 대답하니 대사를 경영하려거든 신중을 기해야 되니라고 만류하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은 즉 생각하고 권하는 말도 듣지 않으니 한심할 노릇이라고 하며 하릴없이 돌아가 버리니라.
이와 같이 헐뜯고 비소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일을 착수하여 아는 이가 있나보다고 저희끼리 수군거리고도 하더라. 그러하던 어느 날 다시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나침반을 놓고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전날에는 형편이 없는 진펄이더니 이제 와서는 그 질퍽거리던 물로 간 곳 없고 전장지비한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더라. 서노인은 그 뒤 그 일로 말미암아 노심하던 끝에 패철을 내어 던지고 말았으니 한번은 와서 평생에 그럴듯한 터 하나를 잡아 보지도 못하고 한탄하더니 그 뒤로 득병하여 신음하다가 사망하니라.
3.이월 십오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니 성모께옵서 하명하시되 “너의 아버지 묘각이 그래 가지고는 장구하게 계실 수 없으니 오리알터에 영영 안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니라
4.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미리 당부하신 바 있어 각 기관장을 청하여 대접하고 있자니 밖에서 웬 백발노인이 찾는다고 하여 나가보니 곽봉훈 노장이라. 그는 불교학자로서 수년 전에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팔십 노구로서 전부터 지면이 약간 있었는데 무엇인지 책보에 싼 것을 내 놓으며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을 할 때에 어느 날 김응종이란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가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가 없는데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니다.”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것을 받아서 들고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내력을 말하고 하도 모략이 많은 세상이라 혹 무슨 계략이나 있지 않나 염려되기도 하여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열어서 보기로 결정하고 성전에 들어가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인장이 들어 있어, 한권에는 중화집이라 한자로 쓰여있었고 또 한 권은 전자체로 된 친필집이였으며 인장갑안에 쓰여 있는 글은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銅谷”이었다.
이날이 기축 삼월 초삼일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너무나도 신기한 일에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일은 교중 형제들만이 알 일이 아니라하여 대접 중이던 손님들과 봉훈장을 성전으로 창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니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봉운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십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와 인장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속의 글을 보니 기축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이곳에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이라 하니 정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하더라. 봉운장은 유소시로부터 불경을 읽은 유명한 학승으로 그때 나이 이미 팔십사세였으나 어느 절에고 찾아 들면 우대를 받든 터인데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 본교에 계시게 되니라.
5.이월 십오일 성부께서 하명하여 말씀하시되 “오는 삼월 십오일에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오리알터는 나와 너의 어머니의 영원한 안장지니라. 이날에는 장례라 하지 말고 장사라 하여라 이날 장사는 천하장사 지하장사 인간장사 천지대장사니라”하시니라. 명령을 받으니 일편 기쁘고 일편 서러워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라. 이 한날을 위하여 성인의 피를 홀로 받아 넓고 넓은 대해중에 외로운 일엽편주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죽음길에서 간신히 그 짝을 찾아 피눈물로 결정된 두 알의 진주처럼 천지의 보화를 홀로 간직했건만 아직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숨막히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안고 숨어서 지성으로 기도에 이은 기도의 생활과 잇달아 내리는 명령의 봉행에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길을 생사를 걸고 지나온 피맺히는 과거의 역정이 있지 않았던가 실로 오늘의 이 한 명령을 얻어 모시기 위하여 바쳐나온 반생이라 할진대 오늘이야 말로 반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 아니랴.
그 동안 외로운 화은당선사님을 받들어 정사와 더불어 합심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어 나온 교중형제들의 보람도 이제는 빛날 수 있고 머지않아 열려올 용화극락문을 맨 처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이제 그들에게 완비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소냐. 그러나 돌이켜 현실을 두고 생각하면 넉넉지 못한 경제에 당일일도 걱정이려니와 그동안의 준비가 여간 바쁘지 않은지라 정신을 차리어 눈물을 거두고 영전을 물러나와 형제들로 하여금 각기 분담하여 건축을 서두르고 성묘기지를 닦으며 꽃상여를 만드는 동안 만단 준비에 눈코 뜰 사이도 없이 준비 하니라.
그 뒤 당일 행사절차에 대한 성부의 지시기 계시니 유공한 도생들로 하여금 운상하되 그들에게는 모두 삼베로 양복을 만들어 입히고 상여마다 좌우 삼십명씩 백이십명으로서 운상토록 하라 하시니라. 명령대로 다시 준비를 보충하여 삼베양복 백이십벌과 수백개의 상건이며 상복을 만들고, 당일의 비용과 식량등을 삼월 십사일까지 모두 준비완료하니라. 각지로부터 모여든 교중형제들로 동곡 오리알터 할 것 없이 온 집안이 들썩이는 것을 볼 때 금성 장대시절이며 구미안 동곡시절의 참담하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여 화은당선사님을 바라보니 그도 또한 동감인 듯 울며 웃으며 하니 이날의 감상과 만반의 감회를 표할 길이 없더라
6.삼월 십오일 장사식을 거행하니 삼베양복을 입은 운상군 육십 명이 맨 앞 상여는 하얀 백상여로 성부의 옥체를 모시고 역시 삼베양복을 입은 육십 명의 운상자가 메고 뒤따르는 상여는 오색 꽃 상여로서 성모의 옥체를 모시니라. 그 뒤에 따르는 상주와 수백명의 복 입은 신도들 실로 그날의 장사행렬은 장엄하기 비길데 없더라. 앞에 가는 백상여 운상 채 위에 올라선 인보자가 태극기를 좌우로 서시히 흔들며 천천히 메기는 우주영가의 구절구절을 운상군들은 구슬프게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내어 딛어 나아가고 그 뒤에는 복인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정연하게 열지어 뒤따르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수백장의 만기들이 이러 저리 너울거리는 가운데 끼인 하얗고 울긋불긋한 두 채의 상여는 봉학인 듯 공작인 듯 아름답고 숭고한데 그 안에 성부 성모님의 옥체는 누워 계시고 두 동자를 비롯한 온갖 천지의 신명들이 둘러싸고 옹위하며 따르나니 행열은 구리골로부터 출발하여 구로로 나서 수양산 서편 마루 밑을 돌아 신작로로 올라서서 오리알터 장지에 이르게 되는데 앞에는 만기를 든 수백명의 형제들이 열을 짓고 뒤에는 또한 상보입은 수백명의 형제들이 열을 지으니 장사의 진을 친 듯 온 길에 뻗치니라.
가소로다 가소로다 세상사가 가소로다
이내몸이 생겨나서 삼십구년 낭도타가
초당에 깊이든잠 일몽으로 화해나서
한곳으로 돌아드니 십주연화 분명하다
무기궁에 깊이앉아 사면을 살펴보니
철통같이 굳은속에 일로를 난통이라
태화기운 부여잡고 영심만을 굳게지켜
오는때를 기다리니 홀연뇌풍 상복소리
건곤이 진동하며 무기궁이 요란터니
음양이기 네닦거늘 나도따라 나서오니
삼리화 벌려있고 삼청일월 밝았는데
벽목삼궁 여기로다 음양을 따라나서
청림새 좁은길로 차츰차츰 내려가니
상중하 섯는청림 정이삼월 경이로다
이수를 요양하니 한달에 삼천육백리
삼월이수 마련하니 만팔백리 뿐이로다
천왕씨 목덕운은 만팔천세 하였는데
이네운로 어이하여 만팔백년 뿐이런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다
칠천이백 연기때어 칠십이둔 마련하던
강태공의 조화수단 이금에 안재재요
팔백연화 나열하고 석가여래 무궁도술
자고로 유명하다 미륵전 높은집에
뚜렷이선 저금불은 나를보고 반기는듯
구성산 높은봉에 울고가는 저봉황은
성인이 나게시니 황하수 일천년에
다시한번 맑았구나 동구에 배례하니
적송자 나왔구나 장자방은 어디가고
요지연만 진동하고 서황모의 상존인가
안기생을 보았는가 청춘작반 호환향은
두자미의 지은글귀 나를 두고 일렀던가
양안도화 협거진은 어주자가 지시하니
무릉원이 여기로다 해상에 삼신산은
구름밖에 둘려있고 눈앞에 모악산은
반공에 솟았는데 닦고닦는 제생들은
나의부탁 아니잊고 일일상면 가애로다
백발이 소소하야 선풍이 헌랄이고
금풍이 지저귀로 옥경대에 올랐도다
책자에 치부법문 그다지도 못깨닫고
지동지서 혼침한가 개명장 나는날에
일체개심 하여서라 동자야 비를 들어
동자들아 비를들어 만정락화 쓸어내라
동방일월 대명시에 만세동락 하여보세
(일부생략)
앞뒤로 메기고 받는 운상소리는 좌우산천에 울려 메아리를 부르는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앞서가고 뒤따르는 수백의 도생들이 외우는 염불소리도 장엄한테 발맞춰 엄숙하게 한발두발 뒤어 놓는 운상꾼들의 조련된 행진, 아아 이날이 있고 또 이날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화은당선사님의 고애로운 그 생애는 출천대효로서 보람으로 빛나게 된 것이었고 교중형제들의 지극정성도 그 보람을 찾게 된 것이었으니 화은당선사님과 더불어 굴건하고 상장막대를 짚으면서 정사의 가슴은 오히려 메이질 듯 벅차고만 있더니라.
우리의 장사행렬을 구경하려고 원근으로부터 구름같이 모여든 관객들은 산과 들에 인산 인해를 이루었으니 장지가 있는 수양산은 종일을 두고 사람들로 하여 마치 눈에 덮인듯 하얗게 되었더라.
이튿날에는 풍진이 일고 일기가 몹시 요란하더니 구성산 으로부터 봉황 한 쌍이 내려와서 성부님의 묘소가 있는 수양 영봉 둘레를 빙빙 돌며 소리를 지르더니 얼마 후에 다시 구성산 쪽으로 날아가더라.
그날 청년들과 풍악을 울리고 구릿골을 다녀서 지금의 금평호수 자리에서 춤도 추고 소리도 하여 종일토록 즐겨 노니라. 그러나 성부님의 옥체를 봉안한 곳에 습기가 심하니 식당의 웃방에 모셨다가 오는 사월 구일에 다시 묘소에 보안하라는 지시가 계시어 그대로 하니라.
7.사월 이일 이경우의 부친 이종허 노인이 칠십칠세로 작고하시니 금성곡 장대곡 기초시로부터 현재까지 도장기초를 다지는데 역할을 함께 하면서 왜경의 눈을 피해 단석산에 터를 잡고 성모님의 체백을 이장했던 일이며, 교중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였더니 작고하신 후에는 상의할 곳 전혀 없어 막막한 마음 견줄대 없고 비통한 마음 억제할 수 없었더라.
사월 팔일 기념에 서울로부터 류동열장군 일행이 내려오니 그 이튿날인 구일에는 도청을 비롯한 각 기관으로부터 내림한 귀빈들의 참석하에 다시 전일과 같이 상여를 운상하여 예식을 거행할 때에 과거 십여성상을 두고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모시고자 하던 일편단심으로 많은 고생과 파란곡절을 겪던 것을 생각하고 오늘날 귀빈의 참석 하에 성부님의 옥체를 영영 안장하게 되니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와 하늘을 부르고 통곡하는 화은당선사님의 모습을 대하는 사람마다 눈물을 머금고 유동열 장군은 화은당선사님을 붙들고 그의 충천대효에 감격하여 마지않았고 다른 모든 이들도 감동된 어조로 여러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시더라. 여기에서 유동렬장군을 소개한다.
류동열 장군은 서울에 올라가서 화은당선사님의 부모를 위하는 지극한 효성에 감격해 마지않는다는 뜻에서 진지상에 사용하도록 수저 한벌을 보내주었는데 거기에 새기기를 “봉정증산선생영전지용 류동열”이라 하였더라. 장군은 또 성부님의 도덕 광창을 위하여 김청강 이청음 서화송 이남주 김금석 김국보등 성부님을 받드는 교중 원로들을 비롯한 각 교단 대표들과 상의하여 서울에 증산교통정원을 조직하여 여러가지로 활동하였던 바 그와 정사는 함께 경상도 일대를 순방하면서 지방조직에 힘쓴 바도 있었니라.
그러한 처지에 우리는 서로 남매의 의를 맺었으며, 이듬해에는 장군의 칠십일순 생신을 당하여 초청을 받고 서울에 가니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장관과 유지들이 연석에 동참하여 종일토록 즐기며 그의 생신을 기원하니라. 이튿날에는 장군 스스로 안내를 하면서 서울시내의 명승고적을 구경시켜주고 나더니 어느 식당에서 점심까지 사면서 성부님의 도덕 광창을 위한 사업 전반에 대하여는 자기가 적극 활동할 것인즉 추호도 염려 말라 하고 또 나는 그 동안 신앙에 정신을 않드릴 수 없을만한 여러 가지 신기한 동기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을 돌고 보니 모두들 말할 수 없이 곤란하게 지내면서도 정의 면에서나 신앙 면에서 그렇도록 선량하고 돈돈한 사람들을 처음 보았노라고 함녀서 과연 증산교와 같은 교단은 찾아보기 힘드노라 하며 여러 가지로 말하더라. 정사는 앞으로의 사업진취에 한 지팡이를 얻으듯 반가웁고 감사하기 짝이 없었는데 장군은 불행하게도 육이오사변 당시에 이북으로 납치당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8.오월 단오절에 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이 하강하시와 “성전을 짓고 열석자 금불상을 조상하여 모시라”하시고 “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일에 착수토록 하라” 하시와 그 뒤 성전 건축을 붙일 정지 하는데 유월 십칠일 야반 여러 가지 걱정이 되어 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장과 재목이 벌판에 있음으로 밤 열두 시경에 그 둘레를 순회하고 성묘앞에 참배하고 나니 서편 산봉에서 마치 대포알이 터지는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며 정신이 아득하여 그 자리에 엎디려 그쪽을 바라보니, 한 소나무 밑에서 화광이 비쳐 중천가지 뻗쳐 있음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일꾼을 데리고 가서 그 자리를 파보도록 하였더니 너댓자나 바윗 돌을 떨어내니 바위틈에서 생수가 터지더니 순식간에 구덩이를 채우는지라. 어제 밤의 동기는 이 물을 주시기 위함이었구나 싶어 그 곳을 우물로 정하니 사람마다 놀라더라. 본시 오리알터에는 샘터 될만한 곳이 없어 지사를 불러 찾아보기까지 했으나, 정하지 못한 채 곤란을 받아 나오던 중이었는데 산 기슭에 이와 같이 석간수가 나니 실로 기적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물맛이 아주 감미로와 특수함으로 분석해보니 위생최적이라는 감정이 내려졌는데 하명하시기를 “이 샘은 유정이니라” 하시더라
9.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천지신장이 강림하여 말하기를 “성부님께서 미륵불상으로 지상에 현현하시게 되니, 천상에서도 대회를 열었노라”고 하시면서 “성부님께서 찬상 마리지 일월삼용에 누어 계시다가 열석자의 금불로 화현하시게 되면 그 삼용도 서게 되신다”고 하시더라. 또 “십이월 이십육일에 불상조상을 마치고 예불을 드리도록 하라” 하시더라 또 “기념치성이 끝나면 바로 불상조성을 시작하되 조각자 마음대로는 하지 못할지니 선사님께서 천상에 오르내리시면서 전반 지시를 받도록 도수를 두었는 고로 조각자는 일일히 선사님의 지도를 받아 조각을 하게 될 것인즉 그리 알고 천상에 대하여 치성을 자주 올리기 바란다”고 하시더라.
그 뒤 조각자 김일섭은 선사님의 교시하심에 따라 미륵금불상을 조성하는데 시월 이십칠일에는 개안이 되시는 날이라 개안식을 올리고 나니 천지가 모두 황금색으로 변하여 사람을 보나 산천을 보나 모두 금빛이요 불을 보면 이상하게도 본색으로 보이지 않고 더욱 붉게 보이고 하더니 삼일 후에는 다시 원색으로 보이게 되더라.
그 뒤 성전 단청까지를 끝내게 되었으니 십이월 이십삼일에 준공하여 이십육일을 재생신 기념일로 정하고 불상봉안식을 거행하니라.
이와 같이 삼청성전을 짓고 열석자의 미륵금불을 모시게 됨은 성부님의 명령계시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니 그것은 재세시에 나는 미륵이노라 하신 말씀과 또 나는 장차 열석자의 몸으로 나타나리라 하신 말씀과 또 남겨 놓으신 문명 가운데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이라 하신 말씀들을 모두 이루시기 위한 것이니라. 재 생신을 약속하신 성부님의 문명은 다음과 같으니라.
無奈八字至氣今至願爲大降
欲速不達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九年洪水七年大旱千秋萬歲歲盡
佛 仙 儒
一元數六十三合爲吉凶度數
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
(무내팔자 지기금지원위대강
욕속부달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구년홍수칠년대한 천추만세세진
불 선 유
일원수육십삼합위길흉도수
십이월이십육일재생신)
10.경인년 정월에 동곡 옛 성전을 뜯어다가 서별당으로 개조하고 응접실 및 산문을 사월내로 완축하고 나서 오월사일에 용암리에서 부치는 열다섯 마지기 논에 모내기를 감농하고 점심을 마친 뒤에 돌아와서 성전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니 불상께서 하명하시되 “성전 정문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못을 치도록 하라”고 하시며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는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한 시각을 지체말고 속히 대구를 향하여 떠나도록 하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시니라. 그리하여 선사님께서는 그날 밤에 치마를 무치어 방마다 돌아다니며 자는 사람들을 깨워 성전 앞마당에 모이도록 하신 다음 목수들에게 명하여 긴 통나무를 가져다가 성전 정문에 대고 못을 박도록 하시고 “부모를 위한 일을 하다가 경제상 곤란이 막심하여 경상도 방면으로 구걸차 내려가면서 부득이 이와 같이 철봉하고 떠나오니 내빈 제위께서는 그렇게 짐작하시고 용서하시옵소서”라고 써서 붙이도록 하시고 나서 성부님의 추상같은 명령이 내리시매 하는 수 없이 정사와 더불어 내일은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나 다녀올 동안 어떠한 세상변동이 있을지라도 진심을 지키어 잘 믿고 기다리라고 지시하시니라. 집안 식구들은 뜻밖의 일에 어이 된 일인가 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동족이 밝자 김제를 향하여 집을 나서시니 정사와 이환우 이우형 배달석 네사람이 따라 나서니라.
김제에 나가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수원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이튿날 식전에 대전에 도착하니 온통 인심이 들떠 정신들을 잃을 지경인데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하여 벌써 서울가지 밀고 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불시의 명령의 내리신 뜻을 그제서야 깨달은 우리는 서울방면으로부터 물밀 듯 내려오는 피난민 틈에 끼여 겨우 기차에 올라 대구에 내리게 되니 그곳의 교중 형재 이교태의 장자 종회의 집을 찾아서 가니라. 그 집에서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께서 말씀하시되 큰일 이로다 대구는 최수운이 참사를 당한 자리라 수운은 대혁명 사상가로서 나라를 개명시키고자 하는 사상을 가졌음으로 이번 일도 그가 하는 일이라 하시며 내일은 수운을 위하여 치성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에서 치성을 드리되 창호지에다 이 난리가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범치 못하리라고 서서 설상 앞에 펴놓고 치성 예를 올린 다음 소화하라”고 명령하시니라.
그 이튿날 명령대로 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에 가보니 공원안은 피난민등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치성을 올릴만한 장소가 없더라. 이리 저리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한 모둥이에서 사람이 없고 고요한 곳이 있어 이곳 나무밑에서 진설하고 예를 행하되 사람이 오면 앉아 노는 척 하며 내왕하는 사람들의 거동을 살핀 연후에 행사를 계속하고 하엿나니라. 예를 마친 뒤 하명 계시대로 축문과 지도를 불사르니 수운신사께서 하강하시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 발을 굴리시면서 “이놈들아 물러가거라 대구 부산까지는 못 들어온다”하시며 너희놈들이 대구 이남을 침범하여 끝까지 난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라가 없어진다.”고 호통을 치시더라.
11그날 밤에 집에서 치성준비를 하여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사되 “큰일 났도다 그러나 너희들은 염려를 말고 날이 새면 밀양으로 내려가돌고 하되 우형을 먼저 보내어 거처를 정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우형이 내려가더니 밀양 김덕만이 와서 동반하여 함께 내려가니 종남산 구배리 이화학의 집에 자리를 정하니라. 난리통에 놀랜 동리 사람들은 피난 갈 보따리를 싸놓고 어쩔줄을 몰라 방황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주 헐값으로 소와 돼지를 사서 치성을 올린 다음 동회를 열도록 하여 이번 난리는 대구 이남은 침범하지 못할 것인즉 피난갈 필요가 없노라고 선포하여 모두들 안심케 하고 우리는 그곳 교우들과 더불어 날마다 천지에 대하여 치성을 올리고 북을 울리며 춤을 추고 뛰어 노는데 마산 진해에 떨어지는 폭탄소리가 그 동리까지 울려와서 온 동리가 들썩들썩하더라.
종남산 위에는 마침 미군이 방위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쏘아대는 연발대포 소리에 고을안이 귀먹을 듯 요란스러운데 우리는 약 오백미터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매일같이 공사를 행하되 풍악을 잡히고 수십 명의 인원이 회집하여 일체 행사를 보게 되니라. 주인 이화학은 그 동리의 이장이었는데 매사에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사람으로서 마을 사람들 간에 종남산 호랑이라는 별호로 불리우던 사람으로서 관민간에 모두들 앙시해오던 터이니라. 하루는 미군이 내려와서 우리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화학이 여러 가지로 말하여 아무런 주목을 당하지 않았더라. 그곳은 미군이 담당한 지역이 되어서 경찰은 일체 들어오는 일이 없었으며 제반공사를 진행시키는데 매우 편안하니라. 이윽고는 치성음식을 화학이 들고 미군막에 갔다 주면 자기들도 여러 가지 야전용 음식을 나누어 주어서 아주 재미나게 지낼 수 있었더라. 미군부대에는 한국 군인도 끼어 있어서 자주 내려와서는 미군 식료품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식사를 하고 가기도 하여 군인과 우리는 썩 다정하여 졌음으로 전세에 대한 형편도 잘 살필 수 있었더라.
밀양으로부터 부산에 내려가라는 명령이 내리었음으로 우리는 명령대로 부산에 내려가 누차에 걸친 어머어머한 공사를 해변이며 섬중에서 행하게 되었던 바 남하 생활 수개월이라 그동안 북한의 인민군은 마산 진해까지 침범해 왔으니 물론 본부에도 큰 환을 당했을 것이라고 선사님은 자나깨나 염려하시더니라. 선사님은 본부를 부르시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시기를 매일 두 세차례씩이나 하시니 애끊는 그의 울음소리는 가슴에 사무치더니라. 정사 또한 염려되는 심정 그지없었으나, 선사님을 위로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호소해 마지않으니 본부는 혈심으로 지어낸 성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도 없어졌을 것이며 삼사십명의 청년들도 모두 죽었으리라고 생각이 미쳤을 때 실성할 듯 염려되는 심정 금할 길이 없더라.
12.구월 그믐날 평리 박성근의 집에서 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께서 하명하시기를 “이제는 인민군도 물러가고 차차 평온해 가니 곧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지시하시니라. 얼싸 좋아라 하고 행장을 갖추어 부산을 떠나 삼랑진역에 도착하니 그 이상은 더 올라갈 수가 없던 차에 전주를 싣고 가는 미군 화물차에 근근이 부탁하여 나무더미 위에 올라 앉았는데 차는 세 정거장 만에 하룻밤을 쉬는가 하면 이튿날에는 겨우 한 정거장을 떠났을 뿐으로 또 쉬게 되는데 말을 통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1.무자년 팔월 십오일 성모님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도장의 터가 좁다고 하시면서 둘레로 터를 넓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시어 시월 십일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하니 그날 밤에 성모님께서 “비록 터를 넓히는 역사라 할지라도 개기제를 지내야 할 것인즉, 내일은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더라.
이튿날 개기제를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오셔서 “이 자리에 집을 집으면 패운이 곧 들어오게 될 것이니 오리알터 밤나무밭을 사서 새집을 짓도록 하고 이곳에 있는 기왕의 건물도 뒤이어 이축토록 하라”고 명령하시니 웬일인가 하고 크게 걱정하더라.
그때에는 물론 금성. 장대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교세는 아직도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동곡에 성전을 지은 지 이년 남짓하여 더구나 터를 넓히다 말고 새로운 기지를 잡아 그곳에 이사한다 하면 아무리 신명이 시키는 일이라 해도 힘드는 일을 싫어하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의 마음이라 더욱이 공사를 직접 받들어 오는 오십여명의 식구들은 아직도 초근목피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명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닌터에 그러한 인심을 휘어잡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님에 여러 가지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더라.
그러나 명령을 받들을 때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언제고 길을 열렸던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소신하는 바 확고부동한 것이 있었음으로 우선 식구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저 당분간 터 고르는 것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니 그렇게 하자고만 하여 일을 중지시킨 다음 오리알터 기지를 사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니라. 정사는 비밀리에 염탐해보니 수백 그루의 밤나무가 서있는 그 터는 정읍에 서는 이판옥의 소유 임야로서 그 좌우에 명당을 찾아 쓴 각각의 분묘가 많았고 또 토질이 양호하여 토끼 사육장을 세울 수도 있다 하여 원매자가 적지 않아 묘주는 묘주대로 수년을 두고 삼사인이 반갈아 그 산을 사고자 드나들고 토끼사육장을 세우겠다는 사람도 몇 차례나 드나들어 교섭을 해나오는 중이었으나 산주의 형편이 넉넉하여 도무지 팔 의사가 없어서 허행만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아니라. 이와 같은 형편에 당장에는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음식을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시월 십일 아침 진지상을 올리고 방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함으로 문틈으로 내다보니 양복을 입은 손님이라 공연히 가슴이 떨리더라 그때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안정을 차릴 수 없는 사회상태였고 신앙자간에는 하두 모략중상이 심해서 그동안 몇 번이나 공연한 일에 경을 친 판이라 양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그저 가슴부터 서먹해오던 터이더라.
그러나 찾아온 손님을 밖에 두고 거절할 수도 없어서 맞아 드리고 보니 전번에 차중에서 서로 인사한 바 있는 산주 이씨라 반갑게 맞이하고 점심을 같이 마친 뒤 그는 앞문을 열고 건너편에 내다보이는 율목림을 가르키면서 저것이 나의 소유 임야로서 평수는 약 칠정보나 되는데 수년전부터 몇 사람이 드나들며 매도하라고 조르는 것을 팔 마음이 없어 거절해 나오던 중인데 전일 김선생을 차중에서 만난 뒤로 웬일인지 매일과 같이 같은 사람이 와서 현금까지 내놓으면서 사업관계로 꼭 필요하니 그보다 낳은 산을 구하고 양도 해달라고 조르는 사람, 선산을 삼겠으니 매도하라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번갈아 찾아와서 성화를 대는지라 번잡하기 짝이 없어 팔아버릴 마음을 정하고 어젯밤에 생각하니 선생께서 동곡에 기지를 정했다 하니 치성때에 실과도 필요할 것이며 또한 관리하기에도 용의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이 되니 다른데 팔기 전에 찾아뵙고 말이라도 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하더라
성부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운영하시는 모든 일은 이처럼 척척 사우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 이미 상식화 된 사실이거니와 음식가지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반갑고 신기한 마음 한이 없어 산주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사기를 결정하되 십이월까지만 연기해주면 그간에 대금을 주선하리라고 단 둘이서만 약속하고 그를 배웅해 보내니라.
그러나 아직도 죽과 나무뿌리를 면치 못한 처지에 어찌할 방책이 생각나지를 않아 이러저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온 산주는 전일에 십이월까지 약속했으나 날마다 졸리고만 앉아 있을 수 없은즉 찾아드는 사람들 응대에 딴 일을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니 만일 사지 못할 형편이라면 딴 곳에라도 매도해 버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다시 왔노라고 하더라. 그렇지 않아도 주야로 노심하던 차에 이런 급한 통지를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으나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일주일만 더 참아준다면 그 안에 좌우간 결정을 짓겠다고 사정하여 응답을 받고 백방으로 주선한 끝에 겨우 아는 이의 농우 한 마리를 빌려 원평 장날에 파니 꼭 육만환이라, 그 길로 정읍에 가서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찾아가니 산주는 반갑게 맞아주더라. 지체할 것이 없이 매매에 대한 계약서를 들고 대금을 물으니 다른 원매자들이 팔. 구만원을 보니 알아서 달라고 하기에 육만환에 줄 수 없겠느냐고 떠보았더니 “그럴 수야 있겠소 남이 보는 정도로는 주셔야죠” 하기에 매매계약서를 구만환으로 기입하려 하니 산주는 계약서를 뺏어가더니 오만 오천환이라 기입 하니라. 뜻밖의 일에 “어찌 된 일이요”하고 물으니 이번일은 자청해 하는 일로서 피차간에 서로 신사적으로 상의하는 것이니 이해를 불문하고 드리겠다고 하더라. 성부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미리 깨달을 수 없는 것임을 또한번 명심하면서 남은 돈 오천환은 마침 나와 인사하는 그 집 아들 오형제에게 나누어 주니 사양하는지라, 산주를 대하여 내가 꼭 육만환을 지니고 왔기에 처음 육만환을 말씀드렸다가 선생의 특지로서 오천환이 남은지라 준비해온 금액을 다 드리고 가야 되겠으니 받도록 권하시오, 말하고 나오니라. 이제 성부님께서 말씀하시던 오리알터를 도득할 수 있게 되니 나를 듯 마음이 가벼워지고 언제나 앞길을 열어 주시는 하늘에 감사하여 마지 않더라.
2.무자년을 보내고 기축년을 맞게 되어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정월 이십일에 오리알터에서 개기토록 하라.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삼.사월에는 큰일이 있을 터이니 너희들은 속히 일을 착수하도록 하라”하시고 다시 “너희들은 정월 십사일 저녁나절에 이곳으로부터 오리알터로 건너가는 냇물에 섬 다리 열두개를 놓되 그속에 엽전 한푼씩을 넣을것이며 내 양편에 오색등 하나씩을 달도록 하라. 너희들은 머지않아 이 곳을 발로는 다니자 못하게 될 것이니라” 하시니라.
십사일 저녁무렵에 전일 하명하신대로 실행하고 이십일에 오리알터에 건너가 개기제를 올린 다음 성도와 경주를 데리고 밤나무 숲속에 이곳저곳에 측량 푯말을 세우니 작업은 이튿날부터 시작하니라. 동곡에서 터를 닦다 말고 엉뚱한 산기슭에서 나무를 베고 터를 다듬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행인들과 근처 사람들이 무엇을 할려기에 또 그것을 파재키느냐고 묻는지라. 집칸이나 세울가 하여 터를 닦는다고 대답하니 모두들 그 진펄 속에 집이 무엇이냐고 비웃으며 그 줄기에는 묘 한장도 없는 것을 보지도 않았느냐고 하면서 거기는 지나가는 행인마저 쉬어갈 곳이 못된다고 하며 돈자랑을 할 셈이냐고 비소하는 자 적지 않더라.
하루는 근동에 사는 지사 서씨노인이 찾아와서 어떤 비결에 오리알터에 가활백만지지가 있노라고 하였기에 이곳에 많은 지사들이 들어와서 답산이 빈번하여 묘는 많이 섰으나 이 줄기만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이라고 하며 나도 당지를 찾으려고 이곳에 이사까지 와서 있지만 여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터가 될만한 혈이 없노라고 평하는지라 우리는 객지사람으로서 바쁜 일에 좋고 궂은 것을 가릴 처지가 못되니 아무데나 우선 마음에 내키는 대로 터를 닦을 수밖에 없노라고 대답하니 대사를 경영하려거든 신중을 기해야 되니라고 만류하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은 즉 생각하고 권하는 말도 듣지 않으니 한심할 노릇이라고 하며 하릴없이 돌아가 버리니라.
이와 같이 헐뜯고 비소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일을 착수하여 아는 이가 있나보다고 저희끼리 수군거리고도 하더라. 그러하던 어느 날 다시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나침반을 놓고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전날에는 형편이 없는 진펄이더니 이제 와서는 그 질퍽거리던 물로 간 곳 없고 전장지비한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더라. 서노인은 그 뒤 그 일로 말미암아 노심하던 끝에 패철을 내어 던지고 말았으니 한번은 와서 평생에 그럴듯한 터 하나를 잡아 보지도 못하고 한탄하더니 그 뒤로 득병하여 신음하다가 사망하니라.
3.이월 십오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니 성모께옵서 하명하시되 “너의 아버지 묘각이 그래 가지고는 장구하게 계실 수 없으니 오리알터에 영영 안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니라
4.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미리 당부하신 바 있어 각 기관장을 청하여 대접하고 있자니 밖에서 웬 백발노인이 찾는다고 하여 나가보니 곽봉훈 노장이라. 그는 불교학자로서 수년 전에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팔십 노구로서 전부터 지면이 약간 있었는데 무엇인지 책보에 싼 것을 내 놓으며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을 할 때에 어느 날 김응종이란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가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가 없는데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니다.”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것을 받아서 들고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내력을 말하고 하도 모략이 많은 세상이라 혹 무슨 계략이나 있지 않나 염려되기도 하여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열어서 보기로 결정하고 성전에 들어가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인장이 들어 있어, 한권에는 중화집이라 한자로 쓰여있었고 또 한 권은 전자체로 된 친필집이였으며 인장갑안에 쓰여 있는 글은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銅谷”이었다.
이날이 기축 삼월 초삼일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너무나도 신기한 일에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일은 교중 형제들만이 알 일이 아니라하여 대접 중이던 손님들과 봉훈장을 성전으로 창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니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봉운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십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와 인장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속의 글을 보니 기축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이곳에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이라 하니 정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하더라. 봉운장은 유소시로부터 불경을 읽은 유명한 학승으로 그때 나이 이미 팔십사세였으나 어느 절에고 찾아 들면 우대를 받든 터인데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 본교에 계시게 되니라.
5.이월 십오일 성부께서 하명하여 말씀하시되 “오는 삼월 십오일에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오리알터는 나와 너의 어머니의 영원한 안장지니라. 이날에는 장례라 하지 말고 장사라 하여라 이날 장사는 천하장사 지하장사 인간장사 천지대장사니라”하시니라. 명령을 받으니 일편 기쁘고 일편 서러워 눈물이 마구 쏟아지더라. 이 한날을 위하여 성인의 피를 홀로 받아 넓고 넓은 대해중에 외로운 일엽편주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죽음길에서 간신히 그 짝을 찾아 피눈물로 결정된 두 알의 진주처럼 천지의 보화를 홀로 간직했건만 아직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숨막히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안고 숨어서 지성으로 기도에 이은 기도의 생활과 잇달아 내리는 명령의 봉행에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길을 생사를 걸고 지나온 피맺히는 과거의 역정이 있지 않았던가 실로 오늘의 이 한 명령을 얻어 모시기 위하여 바쳐나온 반생이라 할진대 오늘이야 말로 반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 아니랴.
그 동안 외로운 화은당선사님을 받들어 정사와 더불어 합심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어 나온 교중형제들의 보람도 이제는 빛날 수 있고 머지않아 열려올 용화극락문을 맨 처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이제 그들에게 완비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소냐. 그러나 돌이켜 현실을 두고 생각하면 넉넉지 못한 경제에 당일일도 걱정이려니와 그동안의 준비가 여간 바쁘지 않은지라 정신을 차리어 눈물을 거두고 영전을 물러나와 형제들로 하여금 각기 분담하여 건축을 서두르고 성묘기지를 닦으며 꽃상여를 만드는 동안 만단 준비에 눈코 뜰 사이도 없이 준비 하니라.
그 뒤 당일 행사절차에 대한 성부의 지시기 계시니 유공한 도생들로 하여금 운상하되 그들에게는 모두 삼베로 양복을 만들어 입히고 상여마다 좌우 삼십명씩 백이십명으로서 운상토록 하라 하시니라. 명령대로 다시 준비를 보충하여 삼베양복 백이십벌과 수백개의 상건이며 상복을 만들고, 당일의 비용과 식량등을 삼월 십사일까지 모두 준비완료하니라. 각지로부터 모여든 교중형제들로 동곡 오리알터 할 것 없이 온 집안이 들썩이는 것을 볼 때 금성 장대시절이며 구미안 동곡시절의 참담하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여 화은당선사님을 바라보니 그도 또한 동감인 듯 울며 웃으며 하니 이날의 감상과 만반의 감회를 표할 길이 없더라
6.삼월 십오일 장사식을 거행하니 삼베양복을 입은 운상군 육십 명이 맨 앞 상여는 하얀 백상여로 성부의 옥체를 모시고 역시 삼베양복을 입은 육십 명의 운상자가 메고 뒤따르는 상여는 오색 꽃 상여로서 성모의 옥체를 모시니라. 그 뒤에 따르는 상주와 수백명의 복 입은 신도들 실로 그날의 장사행렬은 장엄하기 비길데 없더라. 앞에 가는 백상여 운상 채 위에 올라선 인보자가 태극기를 좌우로 서시히 흔들며 천천히 메기는 우주영가의 구절구절을 운상군들은 구슬프게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내어 딛어 나아가고 그 뒤에는 복인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정연하게 열지어 뒤따르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수백장의 만기들이 이러 저리 너울거리는 가운데 끼인 하얗고 울긋불긋한 두 채의 상여는 봉학인 듯 공작인 듯 아름답고 숭고한데 그 안에 성부 성모님의 옥체는 누워 계시고 두 동자를 비롯한 온갖 천지의 신명들이 둘러싸고 옹위하며 따르나니 행열은 구리골로부터 출발하여 구로로 나서 수양산 서편 마루 밑을 돌아 신작로로 올라서서 오리알터 장지에 이르게 되는데 앞에는 만기를 든 수백명의 형제들이 열을 짓고 뒤에는 또한 상보입은 수백명의 형제들이 열을 지으니 장사의 진을 친 듯 온 길에 뻗치니라.
가소로다 가소로다 세상사가 가소로다
이내몸이 생겨나서 삼십구년 낭도타가
초당에 깊이든잠 일몽으로 화해나서
한곳으로 돌아드니 십주연화 분명하다
무기궁에 깊이앉아 사면을 살펴보니
철통같이 굳은속에 일로를 난통이라
태화기운 부여잡고 영심만을 굳게지켜
오는때를 기다리니 홀연뇌풍 상복소리
건곤이 진동하며 무기궁이 요란터니
음양이기 네닦거늘 나도따라 나서오니
삼리화 벌려있고 삼청일월 밝았는데
벽목삼궁 여기로다 음양을 따라나서
청림새 좁은길로 차츰차츰 내려가니
상중하 섯는청림 정이삼월 경이로다
이수를 요양하니 한달에 삼천육백리
삼월이수 마련하니 만팔백리 뿐이로다
천왕씨 목덕운은 만팔천세 하였는데
이네운로 어이하여 만팔백년 뿐이런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다
칠천이백 연기때어 칠십이둔 마련하던
강태공의 조화수단 이금에 안재재요
팔백연화 나열하고 석가여래 무궁도술
자고로 유명하다 미륵전 높은집에
뚜렷이선 저금불은 나를보고 반기는듯
구성산 높은봉에 울고가는 저봉황은
성인이 나게시니 황하수 일천년에
다시한번 맑았구나 동구에 배례하니
적송자 나왔구나 장자방은 어디가고
요지연만 진동하고 서황모의 상존인가
안기생을 보았는가 청춘작반 호환향은
두자미의 지은글귀 나를 두고 일렀던가
양안도화 협거진은 어주자가 지시하니
무릉원이 여기로다 해상에 삼신산은
구름밖에 둘려있고 눈앞에 모악산은
반공에 솟았는데 닦고닦는 제생들은
나의부탁 아니잊고 일일상면 가애로다
백발이 소소하야 선풍이 헌랄이고
금풍이 지저귀로 옥경대에 올랐도다
책자에 치부법문 그다지도 못깨닫고
지동지서 혼침한가 개명장 나는날에
일체개심 하여서라 동자야 비를 들어
동자들아 비를들어 만정락화 쓸어내라
동방일월 대명시에 만세동락 하여보세
(일부생략)
앞뒤로 메기고 받는 운상소리는 좌우산천에 울려 메아리를 부르는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앞서가고 뒤따르는 수백의 도생들이 외우는 염불소리도 장엄한테 발맞춰 엄숙하게 한발두발 뒤어 놓는 운상꾼들의 조련된 행진, 아아 이날이 있고 또 이날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화은당선사님의 고애로운 그 생애는 출천대효로서 보람으로 빛나게 된 것이었고 교중형제들의 지극정성도 그 보람을 찾게 된 것이었으니 화은당선사님과 더불어 굴건하고 상장막대를 짚으면서 정사의 가슴은 오히려 메이질 듯 벅차고만 있더니라.
우리의 장사행렬을 구경하려고 원근으로부터 구름같이 모여든 관객들은 산과 들에 인산 인해를 이루었으니 장지가 있는 수양산은 종일을 두고 사람들로 하여 마치 눈에 덮인듯 하얗게 되었더라.
이튿날에는 풍진이 일고 일기가 몹시 요란하더니 구성산 으로부터 봉황 한 쌍이 내려와서 성부님의 묘소가 있는 수양 영봉 둘레를 빙빙 돌며 소리를 지르더니 얼마 후에 다시 구성산 쪽으로 날아가더라.
그날 청년들과 풍악을 울리고 구릿골을 다녀서 지금의 금평호수 자리에서 춤도 추고 소리도 하여 종일토록 즐겨 노니라. 그러나 성부님의 옥체를 봉안한 곳에 습기가 심하니 식당의 웃방에 모셨다가 오는 사월 구일에 다시 묘소에 보안하라는 지시가 계시어 그대로 하니라.
7.사월 이일 이경우의 부친 이종허 노인이 칠십칠세로 작고하시니 금성곡 장대곡 기초시로부터 현재까지 도장기초를 다지는데 역할을 함께 하면서 왜경의 눈을 피해 단석산에 터를 잡고 성모님의 체백을 이장했던 일이며, 교중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였더니 작고하신 후에는 상의할 곳 전혀 없어 막막한 마음 견줄대 없고 비통한 마음 억제할 수 없었더라.
사월 팔일 기념에 서울로부터 류동열장군 일행이 내려오니 그 이튿날인 구일에는 도청을 비롯한 각 기관으로부터 내림한 귀빈들의 참석하에 다시 전일과 같이 상여를 운상하여 예식을 거행할 때에 과거 십여성상을 두고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모시고자 하던 일편단심으로 많은 고생과 파란곡절을 겪던 것을 생각하고 오늘날 귀빈의 참석 하에 성부님의 옥체를 영영 안장하게 되니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와 하늘을 부르고 통곡하는 화은당선사님의 모습을 대하는 사람마다 눈물을 머금고 유동열 장군은 화은당선사님을 붙들고 그의 충천대효에 감격하여 마지않았고 다른 모든 이들도 감동된 어조로 여러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시더라. 여기에서 유동렬장군을 소개한다.
류동열 장군은 서울에 올라가서 화은당선사님의 부모를 위하는 지극한 효성에 감격해 마지않는다는 뜻에서 진지상에 사용하도록 수저 한벌을 보내주었는데 거기에 새기기를 “봉정증산선생영전지용 류동열”이라 하였더라. 장군은 또 성부님의 도덕 광창을 위하여 김청강 이청음 서화송 이남주 김금석 김국보등 성부님을 받드는 교중 원로들을 비롯한 각 교단 대표들과 상의하여 서울에 증산교통정원을 조직하여 여러가지로 활동하였던 바 그와 정사는 함께 경상도 일대를 순방하면서 지방조직에 힘쓴 바도 있었니라.
그러한 처지에 우리는 서로 남매의 의를 맺었으며, 이듬해에는 장군의 칠십일순 생신을 당하여 초청을 받고 서울에 가니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장관과 유지들이 연석에 동참하여 종일토록 즐기며 그의 생신을 기원하니라. 이튿날에는 장군 스스로 안내를 하면서 서울시내의 명승고적을 구경시켜주고 나더니 어느 식당에서 점심까지 사면서 성부님의 도덕 광창을 위한 사업 전반에 대하여는 자기가 적극 활동할 것인즉 추호도 염려 말라 하고 또 나는 그 동안 신앙에 정신을 않드릴 수 없을만한 여러 가지 신기한 동기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을 돌고 보니 모두들 말할 수 없이 곤란하게 지내면서도 정의 면에서나 신앙 면에서 그렇도록 선량하고 돈돈한 사람들을 처음 보았노라고 함녀서 과연 증산교와 같은 교단은 찾아보기 힘드노라 하며 여러 가지로 말하더라. 정사는 앞으로의 사업진취에 한 지팡이를 얻으듯 반가웁고 감사하기 짝이 없었는데 장군은 불행하게도 육이오사변 당시에 이북으로 납치당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8.오월 단오절에 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이 하강하시와 “성전을 짓고 열석자 금불상을 조상하여 모시라”하시고 “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일에 착수토록 하라” 하시와 그 뒤 성전 건축을 붙일 정지 하는데 유월 십칠일 야반 여러 가지 걱정이 되어 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장과 재목이 벌판에 있음으로 밤 열두 시경에 그 둘레를 순회하고 성묘앞에 참배하고 나니 서편 산봉에서 마치 대포알이 터지는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며 정신이 아득하여 그 자리에 엎디려 그쪽을 바라보니, 한 소나무 밑에서 화광이 비쳐 중천가지 뻗쳐 있음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일꾼을 데리고 가서 그 자리를 파보도록 하였더니 너댓자나 바윗 돌을 떨어내니 바위틈에서 생수가 터지더니 순식간에 구덩이를 채우는지라. 어제 밤의 동기는 이 물을 주시기 위함이었구나 싶어 그 곳을 우물로 정하니 사람마다 놀라더라. 본시 오리알터에는 샘터 될만한 곳이 없어 지사를 불러 찾아보기까지 했으나, 정하지 못한 채 곤란을 받아 나오던 중이었는데 산 기슭에 이와 같이 석간수가 나니 실로 기적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물맛이 아주 감미로와 특수함으로 분석해보니 위생최적이라는 감정이 내려졌는데 하명하시기를 “이 샘은 유정이니라” 하시더라
9.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천지신장이 강림하여 말하기를 “성부님께서 미륵불상으로 지상에 현현하시게 되니, 천상에서도 대회를 열었노라”고 하시면서 “성부님께서 찬상 마리지 일월삼용에 누어 계시다가 열석자의 금불로 화현하시게 되면 그 삼용도 서게 되신다”고 하시더라. 또 “십이월 이십육일에 불상조상을 마치고 예불을 드리도록 하라” 하시더라 또 “기념치성이 끝나면 바로 불상조성을 시작하되 조각자 마음대로는 하지 못할지니 선사님께서 천상에 오르내리시면서 전반 지시를 받도록 도수를 두었는 고로 조각자는 일일히 선사님의 지도를 받아 조각을 하게 될 것인즉 그리 알고 천상에 대하여 치성을 자주 올리기 바란다”고 하시더라.
그 뒤 조각자 김일섭은 선사님의 교시하심에 따라 미륵금불상을 조성하는데 시월 이십칠일에는 개안이 되시는 날이라 개안식을 올리고 나니 천지가 모두 황금색으로 변하여 사람을 보나 산천을 보나 모두 금빛이요 불을 보면 이상하게도 본색으로 보이지 않고 더욱 붉게 보이고 하더니 삼일 후에는 다시 원색으로 보이게 되더라.
그 뒤 성전 단청까지를 끝내게 되었으니 십이월 이십삼일에 준공하여 이십육일을 재생신 기념일로 정하고 불상봉안식을 거행하니라.
이와 같이 삼청성전을 짓고 열석자의 미륵금불을 모시게 됨은 성부님의 명령계시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니 그것은 재세시에 나는 미륵이노라 하신 말씀과 또 나는 장차 열석자의 몸으로 나타나리라 하신 말씀과 또 남겨 놓으신 문명 가운데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이라 하신 말씀들을 모두 이루시기 위한 것이니라. 재 생신을 약속하신 성부님의 문명은 다음과 같으니라.
無奈八字至氣今至願爲大降
欲速不達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九年洪水七年大旱千秋萬歲歲盡
佛 仙 儒
一元數六十三合爲吉凶度數
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
(무내팔자 지기금지원위대강
욕속부달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구년홍수칠년대한 천추만세세진
불 선 유
일원수육십삼합위길흉도수
십이월이십육일재생신)
10.경인년 정월에 동곡 옛 성전을 뜯어다가 서별당으로 개조하고 응접실 및 산문을 사월내로 완축하고 나서 오월사일에 용암리에서 부치는 열다섯 마지기 논에 모내기를 감농하고 점심을 마친 뒤에 돌아와서 성전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니 불상께서 하명하시되 “성전 정문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못을 치도록 하라”고 하시며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는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한 시각을 지체말고 속히 대구를 향하여 떠나도록 하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시니라. 그리하여 선사님께서는 그날 밤에 치마를 무치어 방마다 돌아다니며 자는 사람들을 깨워 성전 앞마당에 모이도록 하신 다음 목수들에게 명하여 긴 통나무를 가져다가 성전 정문에 대고 못을 박도록 하시고 “부모를 위한 일을 하다가 경제상 곤란이 막심하여 경상도 방면으로 구걸차 내려가면서 부득이 이와 같이 철봉하고 떠나오니 내빈 제위께서는 그렇게 짐작하시고 용서하시옵소서”라고 써서 붙이도록 하시고 나서 성부님의 추상같은 명령이 내리시매 하는 수 없이 정사와 더불어 내일은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나 다녀올 동안 어떠한 세상변동이 있을지라도 진심을 지키어 잘 믿고 기다리라고 지시하시니라. 집안 식구들은 뜻밖의 일에 어이 된 일인가 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동족이 밝자 김제를 향하여 집을 나서시니 정사와 이환우 이우형 배달석 네사람이 따라 나서니라.
김제에 나가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수원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이튿날 식전에 대전에 도착하니 온통 인심이 들떠 정신들을 잃을 지경인데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하여 벌써 서울가지 밀고 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불시의 명령의 내리신 뜻을 그제서야 깨달은 우리는 서울방면으로부터 물밀 듯 내려오는 피난민 틈에 끼여 겨우 기차에 올라 대구에 내리게 되니 그곳의 교중 형재 이교태의 장자 종회의 집을 찾아서 가니라. 그 집에서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께서 말씀하시되 큰일 이로다 대구는 최수운이 참사를 당한 자리라 수운은 대혁명 사상가로서 나라를 개명시키고자 하는 사상을 가졌음으로 이번 일도 그가 하는 일이라 하시며 내일은 수운을 위하여 치성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에서 치성을 드리되 창호지에다 이 난리가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범치 못하리라고 서서 설상 앞에 펴놓고 치성 예를 올린 다음 소화하라”고 명령하시니라.
그 이튿날 명령대로 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에 가보니 공원안은 피난민등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치성을 올릴만한 장소가 없더라. 이리 저리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한 모둥이에서 사람이 없고 고요한 곳이 있어 이곳 나무밑에서 진설하고 예를 행하되 사람이 오면 앉아 노는 척 하며 내왕하는 사람들의 거동을 살핀 연후에 행사를 계속하고 하엿나니라. 예를 마친 뒤 하명 계시대로 축문과 지도를 불사르니 수운신사께서 하강하시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 발을 굴리시면서 “이놈들아 물러가거라 대구 부산까지는 못 들어온다”하시며 너희놈들이 대구 이남을 침범하여 끝까지 난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라가 없어진다.”고 호통을 치시더라.
11그날 밤에 집에서 치성준비를 하여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사되 “큰일 났도다 그러나 너희들은 염려를 말고 날이 새면 밀양으로 내려가돌고 하되 우형을 먼저 보내어 거처를 정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우형이 내려가더니 밀양 김덕만이 와서 동반하여 함께 내려가니 종남산 구배리 이화학의 집에 자리를 정하니라. 난리통에 놀랜 동리 사람들은 피난 갈 보따리를 싸놓고 어쩔줄을 몰라 방황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주 헐값으로 소와 돼지를 사서 치성을 올린 다음 동회를 열도록 하여 이번 난리는 대구 이남은 침범하지 못할 것인즉 피난갈 필요가 없노라고 선포하여 모두들 안심케 하고 우리는 그곳 교우들과 더불어 날마다 천지에 대하여 치성을 올리고 북을 울리며 춤을 추고 뛰어 노는데 마산 진해에 떨어지는 폭탄소리가 그 동리까지 울려와서 온 동리가 들썩들썩하더라.
종남산 위에는 마침 미군이 방위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쏘아대는 연발대포 소리에 고을안이 귀먹을 듯 요란스러운데 우리는 약 오백미터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매일같이 공사를 행하되 풍악을 잡히고 수십 명의 인원이 회집하여 일체 행사를 보게 되니라. 주인 이화학은 그 동리의 이장이었는데 매사에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사람으로서 마을 사람들 간에 종남산 호랑이라는 별호로 불리우던 사람으로서 관민간에 모두들 앙시해오던 터이니라. 하루는 미군이 내려와서 우리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화학이 여러 가지로 말하여 아무런 주목을 당하지 않았더라. 그곳은 미군이 담당한 지역이 되어서 경찰은 일체 들어오는 일이 없었으며 제반공사를 진행시키는데 매우 편안하니라. 이윽고는 치성음식을 화학이 들고 미군막에 갔다 주면 자기들도 여러 가지 야전용 음식을 나누어 주어서 아주 재미나게 지낼 수 있었더라. 미군부대에는 한국 군인도 끼어 있어서 자주 내려와서는 미군 식료품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식사를 하고 가기도 하여 군인과 우리는 썩 다정하여 졌음으로 전세에 대한 형편도 잘 살필 수 있었더라.
밀양으로부터 부산에 내려가라는 명령이 내리었음으로 우리는 명령대로 부산에 내려가 누차에 걸친 어머어머한 공사를 해변이며 섬중에서 행하게 되었던 바 남하 생활 수개월이라 그동안 북한의 인민군은 마산 진해까지 침범해 왔으니 물론 본부에도 큰 환을 당했을 것이라고 선사님은 자나깨나 염려하시더니라. 선사님은 본부를 부르시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시기를 매일 두 세차례씩이나 하시니 애끊는 그의 울음소리는 가슴에 사무치더니라. 정사 또한 염려되는 심정 그지없었으나, 선사님을 위로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호소해 마지않으니 본부는 혈심으로 지어낸 성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도 없어졌을 것이며 삼사십명의 청년들도 모두 죽었으리라고 생각이 미쳤을 때 실성할 듯 염려되는 심정 금할 길이 없더라.
12.구월 그믐날 평리 박성근의 집에서 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께서 하명하시기를 “이제는 인민군도 물러가고 차차 평온해 가니 곧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지시하시니라. 얼싸 좋아라 하고 행장을 갖추어 부산을 떠나 삼랑진역에 도착하니 그 이상은 더 올라갈 수가 없던 차에 전주를 싣고 가는 미군 화물차에 근근이 부탁하여 나무더미 위에 올라 앉았는데 차는 세 정거장 만에 하룻밤을 쉬는가 하면 이튿날에는 겨우 한 정거장을 떠났을 뿐으로 또 쉬게 되는데 말을 통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