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은당 선사의 청년시대
성부의 후계사를 가로채고자 하는 고모의 흉계에 걸려 선사는 한 때 양가의 집에 억류되기도 했었는데, 그들은 선사를 이용하여 교중에서 각파 사이에 기세를 높일 수 있고, 또한 물질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선사를 억류했던 것으로, 조철제가 선사모녀를 양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씨가 양가에게 적지 않은 재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장가까지 보내주었던 것인데 양가 어미는 이것을 기화로 가끔 조씨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조씨는 금품을 제공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는 동안 성부님을 신앙하는 교주였던 조철제와 차경석 사이에 소송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부의 체백을 모시는 자가 장차 재림시에 법통을 이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신앙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성부의 체백을 차지하기 위하여 양교주 사이의 법정재판이 벌어지게 되었다. 재산문제가 아닌 성부님의 체백을 서로 모시는 문제로 소송이 일어나게 되자 사직당국에서는 결국 체백과의 친소관계를 따지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 되자 흉악한 양가어미는 조철제에게 성부의 유가족인 딸을 자기 아들과 혼인을 시켜 사위를 내세우게 되면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조철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선사와 양가가 서로 결혼한 것처럼 호적을 위조함에 이르렀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자, 선사의 가슴은 막막하고 한없이 초조하여갔다. 이렇게 매여 살다가는 후계사는 고사하고 성부님의 도법을 빙자하여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에게 이용만 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주위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새로운 배포를 꾸미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심하고 성모님의 영위도 돌보지 못한 채, 강산을 집삼아 떠도는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서 선사는 성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전라도를 떠나 경상도로 들어가서 안동, 봉화를 거쳐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시고 다시 부산, 대구, 김천, 상주, 문경 등지를 유랑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지나간 세월이 무려 10년이 되었으나, 그동안 뚜렷이 이룬 성과도 없이 전라도로 다시 돌아와 태인 공동묘지에 계신 성모님의 산소를 찾아가서 묘전에 엎드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하니 마음은 찢어질듯하고 사지는 다시 일어설 기력마져 없었다. 그 당시 무의무탁한 선사의 처지로서 생각할 때, 실로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2. 창교와 육기초(六基礎)의 과정(過程)
1) 일기초공사(一基礎公事) : 전주 노송동(全州 老松洞)
(1) 선사 천명(天命)을 받고 일기초를 개척
강순임 선사께서 부모님의 후계사를 이룩하고자 천지대업을 상의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 갖은 고초와 풍상을 무릎쓰고 홀로 팔도 강산을 순력(巡歷)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지나간 세월은 어느덧 십년이 흘렀으니, 비통한 심정은 가눌 길이 없었다. 이에 선사는 모든 것을 단념하시고, 부모의 뒤를 따라 죽을 자리를 택하여 이리(裡里)의 목천포(木川浦)에 이르게 되었다.
영원한 길을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애를 모으는 가슴 속은 실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데, 선사는 얼과 넋을 모아 천지신명과 부모님 영전에 최후의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그 때에 하늘로부터 큰 소리로 꾸짖어 경책하시는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으니 말씀하시되, “나의 혈식(血息)아! 어찌하여 생명을 자처코저 하느냐? 너를 위하여 한 군자(君子)를 데려왔으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이 사람과 동심하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을 의논하라.”하시니 그 말씀은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던 아버님의 말씀이라. 선사는 두손을 쳐들어 얼싸안으려 발버둥치는데, 성부의 영상은 가신 곳이 없고 낯선 사람이 옆에 와서 선사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나도 또한 영남 사람으로 가슴에 사무치는 큰 뜻이 있어 사방을 두루 순력하기 십여 년간인데,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약차 약차 하기로 이곳에 내도하였더니, 과연 꿈속에서 본 바와 같이 부인의 이와 같은 정상을 대하게 되니 이것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닐뿐더러 더욱이 지금 부인은 목숨을 경각에 다투는 비참한 형편에 있으니 어떠한 곡절이 있는지 알바 없으나 무엇보다도 생명이 지중하오니 부디 회심하시와 신명을 안보하소서.”하고 수차례 간곡하게 위로하였다. 이에 선사는 혼미 중에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그와 함께 전주(全州)로 돌아오시니, 그가 바로 경북 청송사람으로 김병철(金炳澈)이니, 후일 구암(鳩岩) 정사(整師)였다.
이리하여 천기 67년(4270, 1937, 丁丑) 9월 17일, 강순임 선사와 김병철 정사는 전주 노송동에 성부님(聖父任)의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받들 터전을 마련하여 지성으로 조석 진지상을 받들어 모시게 되니 바로 일기초이며, 증산선생향원(甑山先生享院)이다.
(2) 선사 천상으로부터 광명체를 받고 관운묘에 가서 치성하다
천기67년(4270, 1937, 丁丑)11월 15일 밤에 공중에서 “나의 복동(福童)아”하고 부르기에 밖에 나가 허공을 향배 사배(四拜)를 드리니 큰 불덩어리 모양으로 생긴 광명체를 내려 주시는데, 선사께서 치마에다 받아 방안에 들어오니 온 방안에 서기가 서리는지라,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심고를 하였다.
그 뒤 어느날 밤에, “남고산성(南固山城) 관운묘(關雲廟)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한숨을 자면 알게 되는 일이 있으리라.”고 하시는 성부님의 말씀이 계심에, 이튿날 관운묘를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한숨을 잤더니 몽중에 운장(雲長)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겁을 내지 말고 수행하라. 나는 중국 사람으로서 조선을 도우려 하노니, 집에 돌아가서 지성으로 기도하라.”고 하심에 돌아와서 지성으로 기도하였다.
(3) 천상으로부터 선학(仙鶴) 두 마리가 내려오다
천기 68년 1월 15일(4271, 1938, 戊寅) 선사님의 생신날 치성을 올리고 나니,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선학(仙鶴) 두 마리가 내려와 방안 현판에 앉더니 일주일 동안 눈에 완연히 보이며 나래를 펄럭이고 소리를 치고 하는데, 하루는 공중으로부터 천명(天命)이 내리시기를, “이 뒤로 어느 때에 가면 태몽이 되어 천상 동자가 포태될 것이니 주의하라.”고 하셨다.
(4) 대원사(大院寺)를 방문하여 비전(秘傳)하는 경문(經文)을 전해 받다.
3월 3일 밤에 성부(聖父)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에 가면 내가 공부할 때 수종하던 박금곡(朴錦谷)이라는 주지가 있을 것이니, 찾아가 말하기를 영남서 왔다 하고 인사를 하면 반가이 맞이할 것이요. 또한 그러고 보면 알게 되는 일이 있을 터이니, 그리 알고 일간에 발정하라.”고 하심으로 수일 후에 행장을 수습하여 대원사 박금곡 주지를 방문하니, 그는 깜짝 놀라 반기면서, “선생님을 뫼신 것과 다름 없나이다.”하고 감개무량해 마지 않았다.
이곳에 사흘간을 머물면서 성부님 재세시의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또한 비전하는 경문(經文)도 받아와서 그 후 여러 가지 행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5) 첫째 천상동자 포태(天上童子 胞胎)와 탄생(誕生)
천기 69년 11월(4272, 1939, 乙卯) 동지치성을 올리고 나니, 천상으로부터 학을 타고 동자가 내려와서 선사 배 속으로 들어가더니 경진(庚辰)년을 지내자 차차 운신하여 7,8월이 되자 몸이 만삭이 되었다.
천기 70년 9월 13일 (4273, 1940, 庚辰)밤에 천상으로부터 의원 내외와 산파(産婆)와 유모(乳母)가 내려와서 해산하게 되었는데, 동자는 유모가 품에 안고 천상으로 올라가고 산실에는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였다. 산모는 14일 동안 산실에 누워있었는데, 밤마다 천상으로부터 유모가 동자를 데리고 내려와서 젖을 먹이고 하였다. 그동안 동자의 성장함이 실로 기적적이어서 말로는 형언할 도리가 없었다.
(6) 둘째 천상동자 포태(天上童子 胞胎)와 탄생(誕生)
천기 71년(4274, 1941, 辛巳)정월에 태몽을 얻어 천상동자를 포태하여 10월 10일 밤에 천상으로부터 의원과 산파, 유모가 내려와 해산하였는데, 유모가 동자를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간 뒤에 거년에 태어난 형 동자(兄 童子)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지상의 젖을 먹으니 정신이 희미하여 못 쓰겠으니 동생은 지상의 젖을 먹이지 않고 천상의 약으로 키우겠다.”고 하면서 그냥 데리고 왔다가 되돌아 올라가니, 선사의 젖이 불어서 아프므로 짜서 버리기가 수년이었다.
2) 이기초 공사(二 基礎公事) : 금성골(金城谷)
(1)이기초 공사 천명(天命)을 내림
천기 72년(4272, 1941, 辛巳), 동지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곳에서 수년 동안을 무사히 지내왔으나 전쟁은 날로 심하여 가고 일제(日帝)는 날로 포악해져가니 너희들이 이곳에서는 이 이상 더 견디어 낼 방책이 없을 것이니 어서 속히 경상도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시었다.
그 당시, 제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천명을 즉시 봉행하지 못하고 정사는 선사를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에 있는 모 금광에서 수년 동안 일할 때 사귄 우경주(禹京周, 舊名 東凖)의 집에 의탁케 하고, 정사는 경상도로 내려와 옛날 신앙 동지였던 김성도(金聖度)를 찾아가 제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증산천사의 도법을 널리 세상에 들어내 놓기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하자고 간청했더니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인 그는 감격하여 눈물겨워 하면서 쾌히 승낙하였다.
김성도와 상의한 끝에 그의 주선으로 백여원의 금액을 준비하여 전라도 완주군 이서면 우경주의 집에 거처하고 있던 선사를 찾으니 그동안 험식이나마 큰 이상 없이 잘 지내고 계시었다. 이튿날로 선사를 모시고 경상도로 다시 내려오려는데, 경주 가족은 그동안 정이들어 따라오겠다고 청하였으나, 제반 여건상 같이 올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고 경상도로 내려와서 김성도의 집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다. 이날밤, 성부님께서 지시하시기를, “너희들이 내가 지시하던 즉시로 왔으면 그 고생이 없었을 텐데, 명령에 순응하지 않으므로 일년 동안을 헛고생을 하였노라. 이제부터 새로운 결심을 하여 성도와 상의하여 공사를 진행하되, 기지(基地)는 금성산(金城山)에 정하라.”고 하시었다.
(2) 이기초 입택(二基礎 入宅)
금성산(金城山)은 경북 의성군(義城郡)에 소재하고 있으며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문중이 수백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정사는 성도와 의논하여 금성산하 동리와 멀리 떨어진 금성골에 이씨 문중에서 세운 용문정(龍門亭) 근처에 있는 수년 동안 비어있던 농막 한 채를 구하여 입택하기로 하였다.
그날밤 성도 집에 돌아오니,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주네 가족을 데려다가 12월 26일 입택토록 하라. 그리고 혈식은 계미 정월 이십사일에 입택토록 하라.”고 하셨다. 정사는 전라도에 있던 경주 가족을 데리고 와서 천기 72년(4275, 1942, 壬午) 12월 26일에 입택시키고, 이듬해 천기 73년(4276, 1943, 癸未) 정월 24일에 금성산음을 찾아 화은당께서 입택하시게 되었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금성(金城) 비봉(飛鳳)의 산천이 진동하고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오니 근동 주민이 모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뒤, 수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가 요란하므로 급기야는 금성산에 객호(客虎)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관청에서 부근 동리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금성산을 포위하고 일대 수색을 전개하였으나 끝내 소리 나는 원인을 찾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여전히 소리는 울려오므로 동리 사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길 뿐 어찌된 일인지를 몰라 궁금해 하였다.
(3) 지상건물을 짓고 지하에 정자형(井字型) 옥경대(玉京臺) 축조(築造)
천기 73년 (4276, 1943, 癸未) 6월 24일 화천 기념치성(化天 記念致誠)을 봉행하고 나니, 우물정자(井字)형 집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리시었다. 정사는 도무지 설계가 서지 않아 연구를 거듭하던 중, 정(井)자를 두고 그 둘레 사방을 막으면 삼삼은 구로 아홉 궁이 되니 이는 곧 아홉 칸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 판단하고 설계를 확정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연자까지 걸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한 노인이 내려와서 건축한 집터를 살펴보고 백기(白旗)를 세워 폐철을 놓아보더니, 그동안 천상일이 바빠서 미처 내려와 일러주지 못했는데 이곳은 집터가 못되니 정자(亭)밑으로 정하라 하면서 그곳에 홍기(紅旗)를 세우면서 이 자리로 하라 하시고 발을 세 번 굴리더니 천상으로 올라 가시더라. 이때는 태평양 전쟁도 마지막 고비에 접어든 때라 재목 구하기도 몹시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에 주인 영감이 하인을 보내어 작업 중지를 통고를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필시 무슨 이치가 내재하리라고 생각하고 정사는 주인 영감을 만났다. 영감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일전에 구암이 집을 짓는다고 하기에 터와 재목을 허락하였을 것인데, 사실인즉, 이 터는 벌써 오래 전부터 종중의 경영 예정지로 되어 있던 곳이며 원래는 타인에게 허락할 수 없는 기지였으나, 세월도 분분한 이때에 마침 구암의 청이 있어 예정지를 타처로 정하고 승낙을 했던 것인데, 어젯밤에 이상한 동기가 있어 나로서는 도저히 이 터를 내어줄 수 없게 되었네, 그러한 즉, 딴 곳에 터를 잡도록 하고 이축 비용은 내가 담당할 것이니 미안하지만 이 터를 물려주어야 되겠다는 걸세. 미안하기 그지없어 말하기가 퍽 난처했던 것이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사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입택을 하였다 할지라도 옮겨야 될 일이라면 옮겨야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부드럽게 응락 하였다. 이에 즉석에서 주인 영감은 정사를 이끌고 새로운 기지를 찾아 보자고 하여 수 개처를 돌아보고 난 뒤, 전날 밤에 천상의 노인이 홍기를 세워 보이던 곳에 페철을 놓아보더니 말하기를, “이 자리는 옛날에 진주 강씨 한 분이 명풍(名風)을 데리고 와서 자기 선영의 묘지로 하겠다고 거액을 주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류하던 터인데 과연 터는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집세울 터와 날짜까지 잡아 주고 가니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할 때 신기하고 영험스러웁기 그지없더라.
그로부터 새 기지를 밤낮으로 닦아 10월 15일에 상량을 하고 12월 26일에 지상 건물을 완공하고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옵서 하강하시와 돌아보시고 “내가 앉을 정도로 지하에 비밀실을 파도록하라.”고 명령하시므로 즉시, 봉행하여 일을 마치고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다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기를, “귀틀을 튼튼히 짜고 마루를 잘 놓도록 하라. 그리고 한쪽 벽밑으로 문호를 내어 왕래하되 외인이 보아도 표가 없게 하고 후원 산밑으로 연속하여 한칸을 더 파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와 같이 명령을 봉행하여 공사를 마치니 갑신(甲申)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성부님께서는 하강하시어, “잘 되었다.”고 칭찬하시고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한 칸씩 파라고 명령하시어서 그대로 봉행하니, 지하실은 어느덧 길이 육간(六間)에다 중간, 좌, 우로 한 칸씩의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 되었다. 그 안에 칸칸이 나무기둥을 세우고 마지막 칸은 길이와 넓이를 아홉자로 하여 옥경대(玉京臺)라 칭하고, 사방에 미닫이를 달며 바닥에는 마루를 놓아 오색으로 단청을 한 다음, 성부.성모님의 영상과 더불어 국조단군(國祖檀君), 운장상제(雲長上帝), 도령 두 분과 소저 두분의 영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크게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날이 가고 밤이 잦으면 알게 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에게 한꺼번에 이러한 지하실을 파도록 명령하면 정신이 아득해서 겁을 집어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인즉, 한칸 한칸 또 한칸씩 파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파고 파고 또 파다가 보니까 이러한 거창한 지하실이 되지 않았느냐?”고 위로의 말씀을 내려 주셨다. 성부님 재세시에,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모두 죽으리라.”는 말씀을 남기셨던 일을 회상함에 감개무량해 마지 않았다.
그 뒤, 하루는 성부님께서, “태극기(太極旗)와 미국기(美國旗)를 그려 높이 걸고 소를 잡아 마당 가운데 진설하고 치성을 올린 다음 지하 중궁(地下中宮)의 영상후면에 걸어두라.”고 하시므로 그대로 치성을 봉행하였는데, 시국은 더욱 악화되어 집집마다 방공굴을 파느라고 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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