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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8

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8

경전 및 도서  성경신 성경신님의 글모음 쪽지 2015-02-10 15:11 9,566
(12) 도인포태도수(道人胞胎度數)로 천가족(天家族)의 의(義)를 맺다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2월, 성부님의 하명이 계시어 교중 형제, 자매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성모님의 체백에 안치하여 동짓달 초하룻날(11월 1일)까지 10개월간에 걸쳐 공사를 보니, 이것이 도인포태도수(道人胞胎度數)였다. 이때부터 모든 교중 형제,자매들은 이 날을 생일로 삼고 성부, 성모님을 중심으로하여 선사님으로부터 형제, 자매, 숙질의 의(義)를 맺어 천가족의 일원으로서 도행(道行)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세상 사람들도 혈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호부 호형하게되는 풍습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3) 성부님의 묘각(墓閣)인 영대(靈臺)를 건축하다.

 


천기 82년(4285, 1952, 壬辰) 정월 15일에 기념치성을 올리니, 천존신장(天尊神將)과 구목신장(九目神將)이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금년에는 상제님의 묘각을 건축하여 천지도수에 부합되도록 10월 10일에 상량토록하라.”고 하셨다.

상제님 묘각 건축을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가운데서도 도생들은 모악산 산판에 나가 품을 팔아 재목 및 경비를 조달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눈물겨웠다. 이 해 8월에 수리조합에서 금평 수리조합공사 예정지를 측량하여 금평호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측량에 의한 설계는 현재의 댐수위(水位)보다 1m정도 위쪽으로 정해져, 금산사까지 이르는 도로의 설계가 본부 경춘대(景春臺) 자리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들은 기지내에 푯말을 박아 놓았었다.

오래(吾來)터로 성전을 옮기도록 명령하실 때, 냇물에 섬다리를 놓게 하시면서 장차 이 곳은 발로 걸어서는 다닐 수가 없게 되리라. 하셨으며 또 동곡에서 오래터(오리알터)로 이사하지 않으면 곧 패운이 들어온다. 하시더니 우리가 기지를 옮긴 뒤에 그 자리가 수몰지구로 편입되고 말았던 사실을 생각하더라도 필경 설계가 변경되도록 저리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막상 기지내에 푯말이 박히고보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 성전에 예를 올리고 이러한 사정을 심고(心告)하니 성부님께서 하교하시되, “염려말라. 연전에 공사시에 너희가 원평에 다녀온 일이 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화은당의 이마를 깨서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제방자리를 미리 표시한 바 있으니, 천지에서 벌써 정해져 있노라. 동곡의 냇물에 섬다리를 열두개씩 해마다 정월 14일 밤에 놓게한 것 역시 이 저수지 관계라.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앞거리를 바라보고 남조선 뱃길이라. 하며 냇가 변두리 느티나무에 배가 매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동곡마을이 없어지게 되어 거기에는 장차 고기를 낚게 될 것이며, 또 뒷날에 도사들의 별장이나 짓고 살 터가 되리라고 했을 때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인(狂人)으로 여겼지만 그 당시에 벌써 천지도수에 정하여 놓은 것이니라. 그러나 천지사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이니 무사히 풀리게 해 주시기를 불전에 충심으로 발원하도록 하라. 그런다면 신명들이 너희 몸에 힘을 주어 무사히 되리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뒤 정성껏 기도를 올렸더니, 설계가 변경되어 제방자리가 오십여미터나 물러나게 되고 자연히 도로도 현 위치로 물러나게 되었다.

10월 10일 도령의 탄생기념일에 교중 식구들의 피눈물나는 성심의 결정으로써 이루어진 성부님의 묘각인 영대(靈臺)를 지어 이날 상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금평호(金坪湖) 공사를 시작하여 우리의 육기초 축조공사가 끝나니 금평호 공사도 완료되었는데 기이한 것은 우리가 건축공사를 진행하면 저수지공사 또한 진행되고, 우리가 경제 형편상 공사를 중단하게 되면, 금평호 공사도 중단하게 되어 이렇게 7,8년간을 같이 진행하니, 이것은 우리 영대(靈臺)와 음양 대대로 진행되는 영소(靈沼)공사가 천지의 도수 소관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14) 세월가(歲月歌)를 작사하여 노래부르다

 


천기 83년 (4286, 1953, 癸巳) 5월 7일 아침, 불전에 예식을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오늘 저녁까지 세월가(歲月歌)를 지어 진지상을 올릴 때 부르고 소축하도록 하라. 운장이 와서 천상에 접수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지체하지 말고 곧 짓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그날 세월가를 지어 올리니 운장께서, “소축하라. 천상 옥경으로 떠난다.”하시며 승천하셨다.

5월 10일, 성전에 아침 진지상을 올리니, 운장과 천존신장, 선관선녀가 하강하여 말하기를, “육기초 공사는 천상만 못하더니 세월가는 천상보다 잘 지었다.”고 하시며, “너희들은 모두 세월가를 경문과 같이 불러야 하리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세월가를 영가(詠歌)하다가, 천기 90년(4293, 1960, 庚子)에 명칭을 시대가(時代歌)로 바꿔서 노래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歲月) 時代歌

 


一 時代야 歲月이야 開明하온 時乎로다

東靑龍 三八木에 北玄武一六水라

水生木 東南風에 陰痒和合되는구나


二 時代야 歲月이야 風雨霜雪 너머간다

一樹花發 萬樹春에 春和氣和 절로절로

無窮花 이江山에 三淸日月 밝아온다


三 時代야 물결이야 술렁술렁 들어온다

母岳山下 金生水에 萬化歸一 되는구나

靑龍黃道 大開年에 旺氣浮來 太乙船을


四 時代야 歲月이야 修 山陰 절로절로

天절로 地절로 하니 山河大運이 절로절로

心靈神臺 바로가면 先靈蔭德 鳥乙矢口


五 時代야 歲月이야 時乎時乎 祥瑞로다

童子의 비를드러 掃除濁氣 절로절로

時乎時乎 좋은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15) 우명치성(牛鳴致誠)

 


천기 83년 (4286, 1953, 癸巳) 9월 19일 탄강기념치성에 큰소를 쓰라는 명령이 계시어 다른 치성물은 모두 준비되었으나, 우육(牛肉)만은 없었는데, 선사님께서 치성에는 산소를 올리라고 하시며, 소를 몰아 성전앞 뜰에 세우게 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잔을 올릴 때마다 이 소가 삼헌까지 세 번 울어야지 만일에 소가 울지 않으면 너희들이 하는 일이 허사가 되리라.”고 하시었다. 이윽고 치성을 거행하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섰던 소가 초헌으로부터 종헌까지 헌작에 맞추어 세 번이나 큰소리로 우는 것이었으니, 인지명은 양명지종야(人之明洋明之終也)오. 신지명은 우명지종야(神之明 牛鳴之終也)라고 했던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수백명의 신도들은 모두 숨을 죽여 행사를 지켜보고 나서 참으로 현묘(玄妙)한 이치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16) 각 전각의 건립과 당우(唐虞)의 명명(命名)

 


천기 83년 (4286, 1953, 癸巳)에 태평전과 구룡사와 호국사를 건립하여 천기 84년 (4287, 1954, 甲午) 3월 3일에 도내 관,민 유지 수백명을 초청하여 단군 성조의 체상과 수운선생의 체상 및 순국 충의 열사의 위폐를 봉안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년에 걸쳐 여러 채의 건물에 단청을 완료하게 되니, 각 당우의 칭호를 명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단군성상(檀君聖像)을 모신 전각은 단군께서 탄강하신 태백산(太白山)과 도읍터로 정하신 평양(平壤)의 첫글자를 따서 태평전(太平殿)이라 명명하니, 단군성산은 금성골 지하 중궁때부터 모시던 바요. 좌,우에는 단군시대 이후의 창업주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어 반만년에 걸친 민족 역사의 얼과 넋을 찾아 모을 수 있게 하였으며, 묘각은 성부님의 성령이 내왕하시는 곳으로 총묘천지신(塚墓天地神)이라 하시었으니 영대(靈臺)라 하였고 미륵불상을 모신 성전은 천상 삼계를 본떠서 삼청전(三淸殿)이라고 칭하고, 수운신사를 모신 곳은 경주 구미 용담(龜尾龍潭)에서 창도 하셨으므로 구룡사(龜龍祠)라 칭하고, 순국 충의 열사를 모신 곳은 호국사(護國祠)라 칭하여 그 결과를 글로 써서 상고하니 성부님께서, “잘 되었도다. 너의 마음이 곧 내마음이니라.”고 하시었다.

 


(17) 남별당(南別堂) 건립

 


천기 84년 (4287, 1954, 甲午) 오월 단오절에, 선사님께서 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그네를 타며 치성을 올리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동곡 별당을 뜯어온 재목으로 이 자리에 남별당(南別堂)을 지어라.”고 하시며 또, “오늘 개기제(開基祭)를지내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명을 받들어 봉행하고 그 뒤에 터를 닦고보니 구성산(九城山)을 안(案)으로 하는 대지가 되었으며 동곡 별당을 뜯어온 재목으로 남별당을 지었다. 건축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밤이면 호랑이가 내려와서 별당터에서 놀다가 각 성전을 돌아서 가는 적이 수차례 있었으니 신기할 뿐이었다.

 


(18) 경춘대(景春臺)를 건립하다

 


천기 84년 (4287, 1954, 甲午) 가을에 대구에 사는 박귀동(朴貴東)이 납명(納名)하고 거액의 성금(誠金)을 헌납하므로, 그 자금으로 갑오, 을미 양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여 천기 85 (4288, 1955, 乙未) 8월 15일에 경춘대(景春臺)를 준공하니, 안으로는 영대와 삼청전을 대하고 밖으로는 금평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오리알터 기지의 정문(正門)이 되었다.

 


(19) 숭도묘(崇道廟) 건립

 


천기 85년(4288, 1955, 乙未)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각 문중 도선령(道先靈)이 천상공정(天上公庭)에 모여 천지공사에 수종해 왔으나, 지금은 지상에 한자리를 정해야 할 것이라, 각성(各姓), 각가(各哥)의 도선령 사당을 짓고 봉사자(奉詞者)의 명부를 작성하여 각 성별로 위패(位牌)를 봉안하되, 금성골 중궁에 있던 내 영상을 갈라서 선영 위패를 조각하다가 부족하거든 모악산에 가면 한 율목이 있으니 그것을 쓰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먼저 앉아야 선영들이 좌정된다. 모든 선령이 자리를 정하면 나는 나가게 되느니라. 위패에는 본관성씨직선조 하감지위(本貫姓氏直先祖 下鑑之位)라 써서 봉안토록 하라. 그러므로 각가의 선영신들이 지상의 후손들에게 응기하여 성자(聖子), 성손(聖孫)으로 교양하여 다음에 올 용화회상(龍華會上)에 동참할 수 있게 되리라.”고 하시며 또, “당우를 짓되, 그 자금을 각가 각성의 자손들에게 성의를 표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교중의 여러 형제들은 명령을 받들어 성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천기 86년(4289, 1956, 丙申) 12월 26일에 숭도묘(崇道廟)를 건립하고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선령위패를 조각할 때에 성부님과 운장상제 그리고 선사님, 사대선영(四代先靈) 영상을 일일이 거두로 할분하여 위패를 조성하였는데, 영상을 거두로 쪼개는 목수들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렀으며, 위패에 글을 써서 꽃가마에 2위(二位)씩 싣고 영당에서 숭도묘로 봉안하니, 봉안한 위패는 240여위에 이르렀다

천기 87년(4290, 1957, 丁酉) 정월 15일, 숭도묘에 첫 제사를 올리게 되었는데, 각 위마다 술한잔, 건포 한 마리, 떡국 한그릇, 과일 한 접시씩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는 도중, 운장상제와 오악산왕(五嶽山王), 사해용왕(四海龍王), 이 강림하시어 제사지내는 광경을 보시고 춤을 추며 풍류를 하시면서, “잘 되었다.”하시었다.

 


(20) 배도수

 


천기 86년(4289, 1956, 丙申) 가을에 선사님께서 배도수를 봐야하니 배를 만들어 준비하라고 하심에 명령대로 행하여 천기 87년(4290, 1957, 丁酉)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마치고 금평호수에 나가 공사를 보시었다. 이때 제일 앞에 제비선(帝妃船)을 선두로 태을선(太乙船), 용화선(龍華船)이 나란히 뒤따르며 금평호수 중앙터인 오기초지 위에 배를 멈추고 풍물과 가무를 하면서 치성을 올리고 금평호를 일주하는 도중, 갑자기 뇌성벽력과 풍우가 대작하니, 잔잔한 호수가 일변하여 파고가 이척이요 사방에는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더니 다시 날씨가 쾌청하여지므로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배가 하선장에 도착하는 시점이었다. 금평호에서 배를 타고 공사보기를 그 후에도 여러차례 계속하였다.

 


(21) 대령전(大靈殿) 건립

 


천기 87년(4290, 1957, 丁酉) 정월 17일 아침 진지상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천상의 대신명(大神明), 신장(神將)들도 지상에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하나니, 신명사(神明祠)를 금년안에 짓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튿날, 각 지부 대표들과 상의하여 각 지부별로 성금을 각출하도록 결의를 보았는데, 대구에 사는 이구락(李龜洛)이 자기는 도문에 납명한지도 얼마되지 않아 용화도장 건설에 아무런 공적이 없으므로, 이번 신명사는 자기가 단독으로 부담하여 건축하겠다고 간청하므로 그 정성을 받아들여 신명사를 준공하고 각 지부에서 모은 성금은 각 전각의 수리 및 단청 공사비에 충당하였다.

9월 19일 탄강기념치성을 올리고 완공된 신명사를 대령전(大靈殿)이라 명명(命名)하고 태상상제(太上上帝), 옥황상제(玉皇上帝), 관성제군(關聖帝君), 명부대왕(冥府大王), 오악산왕(五嶽山王), 사해용왕(四海龍王), 십이신장(十二神將), 칠성선녀(七星仙女)의 화상(畵像을 봉안하였다. [그 후, 사시토왕(四時土王)과 두분 도령님도 봉안하였다.]

10월에 대령전 수련에 입공(入工)한 이구락은 10일이 지나도 아무런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없었다 하여 딴곳으로 신앙처를 바꾸게 되었으며, 자기가 헌납한 대령전 건축성금 일체의 반환을 요구하므로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아도 하자가 없는 일이었으나, 용화선경세계의 기초를 열어 나가는 공사 절차에 있어 한사람에게라도 척을 지으면 아니될 것이라, 그의 척원을 풀기 위해 교중 대표들과 상의하여 교중 전답을 팔아 돈을 반환해 주었다.

 


(22) 세계평정(世界平定)을 위한 도령형제의 원정(遠征)

 


천기 88년(4291, 1958, 戊戌) 9월 19일, 화천기념치성을 맞아 선사님의 하명으로 소 한 마리, 돼지,개 각 2마리씩 잡아 대령전에 진설하여 치성을 올리는 중에 도령 형제분이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큰 도령은 소련으로 가고 작은 도령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계를 평정하여 평화를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일을 끝마치면 접시 비행기를 타고 경춘대 마당에 내려 올 것이니, 여러 형제숙질께서는 우리 어머니를 잘 모시기를 부탁합니다.”라고 하시며 먼 길을 떠나셨다.

 


(23) 천하전(天廈殿)을 건립하고 영상(靈像)을 봉안하다.

 


천기 88년(4291, 1958, 戊戌) 정월 1일, 신년을 맞아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되, “또 집을 짓도록 하라. 이번에는 높은 자리에 터를 잡아야 되겠은 즉, 처음 기초시에 산중턱에 터를 본 자리가 있느냐?”고 하문하시므로, “있습니다.”라고 상고하니, 또 하명하시되, “술상을 차려서 가자.”고 하시므로 술상을 차려 산중턱으로 올라갔더니 성부님께서 보시고, “터가 썩 좋구나. 이 자리는 대학공부(大學工夫)하는 자리라, 너희들의 겁기를 벗을 집이 될 것이니, 성의껏 지어 공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또, “금성골(金城谷)로부터 전라도까지 집은 열세채를 지으면 될 것이라고 한 일이 있나니, 이 집으로 집 짓는 일은 끝이나리라. 그러한즉, 더욱 정성을 들이도록 하라, 집모양은 구궁(九宮)으로 하여 우물정(井)자 형으로 하되 통로를 두도록 하라. 그 집에서 한 차례에 남,녀 삼십명씩 공부하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로부터 혈심전력을 다하여 집을 짓고 단청을 완료하니, 이 건물을 천하전(天廈殿)이라 명명하였다.

10월 10일 대령전에 모셨던 성부님의 열석자 영상을 천하전으로 옮겨 영상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행사 도중 선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남쪽으로 섰으니 북을 쳐라.”고 하시는 지라. 이에 북을 가지고와서 지니 소리가 나지 않는지라.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또 선사님께서,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시므로, 밖으로 나가서 천기를 살펴보니 천하전 위 하늘에 오색채운을 두른 천등(天燈) 다섯 개가 떠서 한동안 비추다가 남쪽으로 사라져가니, 이를 본 수백명의 도생들은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천하전은 수련도장으로써 무술년 10월 10일 첫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3. 화은당 선사(華恩堂 선사)의 선화(仙化)

 

천기 88년(4291, 1958, 戊戌) 시월, 천하전 영상 봉안식 직후에 선사님께서 득병하시어 자리에 누우셨는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중의 제반 공사를 주제하시었다. 해를 바꾸어 기해년에 들어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3월 6일, 선사님께서 갑자기 치성준비를 지시하시니, 교중형제들은 개 두 마리와 술 다섯말, 밥 두가마니를 위시하여 대소 제물을 장만하였는데, 그날 밤 천하전에서 준비된 제물을 진설하고 천지부모(天地父母)와 제대신장(諸大神將)을 대접하기 위한 대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후 선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많은 신장들이 내려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빙빙돌며 빙글빙글 웃기만하는 것을 보니, 천상에 이미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고 하시었다.

3월 3일, 선사님께서, “나를 요에다 뉘인채 떠밀고 밖으로 나가자.”하심에 그대로 행하니 말씀하시길, “높기도 높구나. 나는 태전(太田)으로 간다.”고 하시더니, 다시 또, “멀기도 멀다.”고 하시며 근 한시간이나 메고 돌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라. 그때 천하전에서 내려온 정성태(鄭成泰)가 ‘밖에 나가 하늘의 구름을 보라’고 하여 나가보니 동쪽으로부터 서쪽하늘로 오색구름이 무지개처럼 뻗치었더라.

이튿날 4월 1일, 선사님이 아주 위독한 지경에 이른것 같다고 모두들 탄식하는데 천하전에서 수공하고 있던 도생이 들어와 하는 말이, “간밤에 천상에 올라가 보니, 선사님께서 천상 대법관(大法官)으로 임명을 받아 우리 인간의 산악과 천지공사에 대한 공로의 유무를 심판 결재하시는 책임을 맡으셨으니, 법석을 마련하여 모든 법관들이 시위하고 기다리고 계시더이다.”라고 하는지라. 모든 식구들은 운명하실 시간이 가까워지는가 싶어 더욱 서러워하였다. 오후 2시에 선사님께서 정사와 본부 도생들을 불러서 두루 살피시고 말씀하시길, “본부 식구들은 물론 일반 형제들도 동요하지 말고 수도나 잘하면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나는 태전으로 간다.”하시고 또, “내가 할 일은 내가 다했으니, 너희들이 할 일은 너희들이 하라.”고 하시고 곧 눈을 바로 뜨시더니 전광을 둘린 듯 빛나는 눈동자를 감지 않으신 채 그대로 선화(仙化)하시었다.

이환우를 위원장으로, 각 지부장을 위원으로 하여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장례식을 9일장으로 정하고 장지는 남별당뒤 수양산 산록에 정하였다.

천기 89년(4292, 1959, 己亥) 4월 8일, 장례식을 거행함에 도중형제들은 물론이요, 각 파의 원로를 비롯한 많은 신도가 모인 가운데, 선사님의 체백이 본교를 떠나는 영결식에는 수백의 만장과 조기는 일산을 이루었고 수양산 일대는 신도들의 통곡소리 하늘을 진동하였다.

선사는 34세 되는 정축(丁丑)년에 현 전주 노송동에서 증산법종교를 창고하시었고, 그 뒤 의성 금성골, 장대골, 김제 구미안, 동곡 등지를 다섯차례나 옮겨가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도수를 확정하기 위한 제반행사에 헌신하시고, 기축(己丑)년에 여섯 번째인 현재의 오리알터에 기지(基地)를 정하시고, 10년간에 거쳐서 제반 전각과 신위(神位) 등을 확정하시고, 도생의 수련을 위한 지침(指針)을 제정하신 후, 기해(己亥) 4월 초하루에 56세를 일기로 선화(仙化)하시었다.

선사는 교조이신 상제님의 천지공사 종결을 위하여 상제님의 외동딸로서 화현(化現)한 천상 선녀이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28년 만인 정축(丁丑)년 9월 17일 본교를 창교하시고, 인신(人身)으로는 부친이요 본체는 미륵존불이신 증산 상제님의 천명계시를 받았으며, 그 후로 천지대신명(天地大神明)과 더불어 일기초로부터 시작하여 육기초인 현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에 있는 오리알터 기지에 본교의 터전을 마무리하고 선화하신 것이다.

정축년부터 기해년까지의 포덕 및 도수행사에서 보인 여러 가지의 기적과 치적은 혈심어린 천지의 성경신이 아니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화은당 선사는 상제님께서 규정하신 천지공사의 큰 강령의 세부적인 도수를 확정하시는 임무를 수명(受命)하고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본교 창교의 과정은 사람의 뜻이 아닌 천의(天意)에 의한 것이며, 이 과업의 성공 또한 신인의 합력(合力)의 결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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