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사 기초공사 구미안
1.을유년 시월 십일에 도령 탄신기념행사를 거행하니 도령 형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참석하여 말하기를 “또 이사를 하되 전주 동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 이날을 기념하는 노래를 지어서 올리고 노래 가락에 맞추어서 춤을 추니 도령 형제 많은 신장을 거느리고 같이 즐기더라. 이날의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수가 칠
기원 구년 을유 시월 십일 구암 소고우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날 다가오니 우리도령 성탄기념
천사대모 조화일맥 조화났네 조화났어
용화대운 대경살세 경축하고 경축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이런일이 어디있나
경진신사 잇달아서 화은당의 몸을빌려
천상도령 태어나니 이런일이 또있을까
얼싸좋다 노래하세 얼씨구나 춤을추세
이런조화 보고서도 우리힘이 미급하여
천상도수 못맞추니 성부성모 걱정하사
호령하고 꾸짖으니 관운장도 떠는 것을
잠만자는 저사람들 어서바삐 일어나소
신급인망 바쁜시호 용화건설 늦어지네
지금때에 못믿어서 망서리고 빈정대면
용화회상 못들어가 땅을치고 한탄하리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런경사 또없느데
어이그리 잠만자노 어서와서 일을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할매어매 원을풀고
할아버지 뜻을이어 세계일가 만들게나
경사로다 경사로다 도령탄신 경사로다
또 이날 공사에 모인 많은 망양신이 들어서면서 그 중 한 신명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 번 공사 때 보리가 섞인 밥을 먹었더니 정성이 부족하여 보는 일에도 많은 지장이 생겼습니다.”고 하며 주먹으로 자기 입을 쥐어박으면서 이 더러운 입 때문에 몸까지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지 천사님 복을 받고자 원하는 자 누구를 막론하고 입을 조심하도록 하라 입이 곧 원수로다.” 하고 외치더라.
2.십이월 초삼일에 기념예식을 거행하니 성모께서 하강하시와 “이사할 준비를 속히 하라. 기지는 도령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그 곳으로 가야 되니라.” 고 하시니라. 선사 “상고하되 경제사정이 여의치를 않아서 이사를 할 수가 없아오니 한 이태동안 이 곳에 머무르면서 준비를 갖춘 다음 이사함이 가할까 하나이다.”라고 사뢰오니 크게 걱정하시면서 “너희들이 금전 가지고 사업할 생각은 말라. 비록 초근목피를 먹으면서라도 사업을 완수해야 천상의 도수를 맞출 수가 있고, 또 그러한 혈심으로 일을 이룩해 놓아야 후일 기념이 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원래 큰 일이란 금전 가지고 못하는 법이며 일을 하기 위하여 금전이 꼭 필요할 때에는 천지에서 지시하여 전주가 나서리라. 금전고의 열쇠는 관운장이 가지고 있으니, 금고를 열면 돈에 몸서리에 칠때가 있을 것이오 또 세계 각국의 초대를 받아 주류할 때도 있으리라. 새 문명 새 도학이 나오면 정부에서 세계에 널리 선포할 것이다. 그때까지 혈심 정력으로 명령대로만 실행해라”고 하시므로 모두 합심하여 이사준비를 서두르니라.
이날 공사에 또 노래를 지어 올리니 다음과 같다.
도수가 팔
유세 을유 십이월 초삼일 구암 소고우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라 어느날고 기원구년 납월삼일
천사대모 겪어오신 만고풍상 뉘가알고
여류세월 지금와서 공부문을 열으시고
지성자만 빼돌리네 진충갈력 닦고닦아
용화대학 입학하세 시험문제 풀어주니
영세불망 하여가자 말을듣고 못행하면
바위에 물주기라 우리형제 명심하세
천용우로 후박하면 만방간에 원망이요
지용수토 후박이면 만물간에 원망이요
인용덕화 후박인데 만사간에 원망이라
천지인이 덕화주장 귀신출입 문호로다
대학지도 명명덕을 밝은길이 대어천지
신명인명 명명이라 명덕지법 시하출고
대인대의 주창하면 감통신명 명덕이요
사유결단 하고보면 연후에사 변화지술
연월일신 푼각윤회 일용행사 봉명하여
원형이정 돌아오니 천사대모 법도로다
길화피어 좋은열매 흉화피어 흉한열매
천지조화 호풍환우 무한공력 결과인데
공부없이 될까부냐 공부하세 공부하세
정북창의 재주로도 산에들어 사흘만에
천하사를 처음알고 강태공의 조화역시
공부없이 못하는걸 알었는가 몰랐는가
진실로서 지은일은 천지또한 못부수고
근거없이 꾸미면은 부서질째 여지없다
성부성모 대법도는 남녀노소 구별않네
야출동문 진평이도 여인삼천 세웠더라
신명불러 복중출입 이몸저몸 고쳐쓰리
입도해서 닦잖으면 화가올까 복이올까
모든일에 불성공은 혈심자가 없는연고
혈심결심 닦아내면 안되는일 없으리라
사업성공 하자면은 위천하자 불고가사
제갈량의 불성공은 유상팔백 연유로다
무엇보다 두려운일 박람박식 겁이난다
부귀자는 불란빈천 강강자는 유약불원
유약빈천 해원시대 판안법을 꾸미려면
들쳐나서 못쓰리니 남모르는 판밖법을
꾸며내어 일을하세 무위이화 용화건설
불언지교 화민정세 거세자를 물론하고
신도라야 이화로다 산하대운 통일하여
인류화평 원동기를 현묘불칙 공이되면
이것저것 무위화라 신도또한 조화하면
무궁선경 꾸며낸다 제도수에 돌아다면
새기운이 전개되리 목석또한 기운붙혀
쓰게되는 대법이라 오직병겁 남겨두어
의통으로 전수하니 약으로는 못나수는
천하대병 무인무도 의통이란 무엇이랴
의통만을 알아두라 참된마음 일심으로
그한마음 간직하여 의통만을 알아두세
세상사람 살고싶어 물밀듯이 찾아오리
성부성모 우리보약 병걸린자 끌으시고
죄걸린자 끌으시니 하신말씀 그말씀이
약인줄을 누가알고 충언일새 귀에걸려
역증나고 불고하니 그행동이 고쳐질까
성부성모 잘믿으라 봉곡참해 입은진묵
원을품고 서양으로 도통신을 인솔하여
문명개발 종역하니 성부님의 해원도수
그를불러 문화개발 종역토록 하셨다네
경주용담 보은신명 지기금지 원위대강
도령지지 정한터에 좌우산천 기절처라
모악회문 기운돌려 부산모산 대를하고
기어드는 계룡봉과 구성봉황 둘러싸고
수양산은 숙여들어 낙양계명 웃는모양
봉래방장 영주봉에 만만세를 불러보고
용화청도 안에두니 용반호거 수구로다
도형정한 농사도수 친산정리 물나서라
봉올봉올 봉올마다 두도령이 정한도수
남조선은 만국활계 청풍명월 금산일세
삼천국에 문명개화 도술운통 구만리라
세계유의 이산인가 기운금천 장물화라
천하지대 모악산하 용화도장 넓은기지
장엄법령 존설하면 모롱마다 선약이라
남조선배 돛을달아 혈식군자 배질로서
고해상에 띄우시니 풍파없이 건너가네
근로대중 일심자만 실어다가 건너놓고
인문공정 열으시니 조화선경 여기로다
화민정세 명령받아 신명시켜 공작감시
불일성지 서들더라 천지록사 모여들어
만복길상 들어낼적 양춘삼월 호시절에
봉우리가 꽃송이라 이번기념 놀고보면
여가없이 못노니라 얼싸좋다 놀고노세
어서바삐 일을하여 용화도장 세워놓고
호천금궐 넓은터에 태극깃발 날리리라
꽃밭두리 이성속에 건들건들 뛰고놀자
3.을유년 과세를 하고 정월 십오일 기념행사를 하니 도령들이 내려와서 “아버지께서는 동곡으로 가셔서 돌아보시고 할아버님 선화지에 터를 잡아 기념각을 짖도록 하시오”하기에 정사는 십칠일에 떠나 그곳에 가서 살펴보니 쓸만한 기지도 없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어 문의조차도 해볼 수가 없어 그대로 원평으로 내려와 유숙하고 수일간을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하루는 오래터에 사는 배달석을 상면하니라. 그는 같은 도인으로서 서로 상종하다가 십 수년간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지내온지라 반가히 인사하고 그 동안 정의를 통정한 후 동곡을 찾아오게 된 목적을 말하니 그는 신환으로 오랫동안 고생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할 것을 기꺼이 승낙 하더라.
원평에 머무는 동안 명령만 믿었으므로 유숙하고 있던 집 주인을 동반하고 김제를 돌아 신태인으로 하여 구태인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경과하고 관운묘에 참배하고 나서 그곳에서 또 하룻밤을 새우고 원평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전자의 두 도령이 전북 칠읍에다 농사 도수를 정한 바 있었음을 회상하여 태인으로부터 원평까지 삽삽리 원평 으로부터 김제까지 삼십리를 잡아 그 안에 농토 삼백마지기를 사서 도중 형제를 이사케 하여 작농케 한다면 제반 일에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더라.
원평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묵은 다음 동곡으로 다시 올라가 기지가 될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여 수류봉 밑에 있는 장씨의 논을 사기로 결정하였으나 아무래도 마음에 합당치 아니하여 다음날 다시 상의하기로 하고 원평으로 내려왔더라. 이튿날 이른 아침에서 달석이 와서 하는 말이 동곡 김씨네 정문이 있던 자리에 사금매입터가 있는데 만평가량이나 된다고 하니 가보자고 하기로 같이 가서 사면을 살펴보니 기지는 되었으므로 살수가 있겠는가 하고 달석에게 물으니, 지주는 태인에 사는 은씨인데 약간의 금액으로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간밤에 한 꿈을 얻었는데 천상으로부터 한 노인이 말을 타고 사금 버헉 위에 내리더니 “정재문”이라 국문으로 써서 붙여주시고 승천하시자 깨었는데 생각하니 예사꿈이 아닌 듯싶었으며 해몽해보니 어제 장씨의 논을 사기로 말했다가 오늘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으나 우리가 찾는 터는 그곳이 아니고 버헉터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천사님이 보내신 것같이 느껴지더라고 말하더라.
광지에 들어서니 온몸이 으쓱하면서 큰 터로 보이기에 달석을 돌아다보고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도 역시 동감이라 그곳으로 완정을 짓고 내려와서 다시 하룻밤을 쉬고나니 식전에 달석이 찾아와서 회색이 만면하여 하는 말이 간밤의 꿈에 또다시 그 노인이 오시더니 “성사문”이라 불러주시고 가셨는데 이제는 문서로서 매매계약을 작성하게 되리라는 뜻인듯 싶으니 안심하라는 것이더라. 그 뒤 과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터를 잡게 되었으니 그 곳이 곧 제 오기초지로서 현재는 금평호수에 수몰되어 경춘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잔잔하게 호수면에는 물오리가 떼지어 날아와서 노닐고 있는 곳이다.
또 그 자리를 두고 성부께서 화룡천년에 진용이 내지 할 대지라고 말씀이 있나니라. 원평 윗 마을 구미안에 작은 농막을 사고 다시 정읍 용호리에 큰 농막을 산 다음 기지는 달석에게 일임하고 장대골에 돌아오니라.
일본으로부터 돌아온 많은 귀환 동포가 사방으로부터 모여 와서 신앙하게 되었으나, 그들의 침식을 담당할 방책이 서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이십여명을 달석에게 보내어 모악산 산판에 일자리를 구해주도록 하였더라.
4.병술 이월 초이렛날 발정 치성을 올리니 도령이 하강하여 “구미란은 사기초지인즉 그 곳에서 공사를 보면서 동곡의 일을 진행하라”고 하니라.
그 뒤 공중에서 윤선이 뜨는 소리가 나고 남조선 뱃길이라는 소리와 또 만세소리가 사흘동안이나 그치지 아니하더라.
이월 이십일에 정사만 미리 올라가 용호리의 집과 구미안의 집을 수리하여 입택하고 구미안에 영상을 모실 수 있도록 다섯 칸 집을 짓게 하고 돌아와서 이월 그믐날 얼마전에 구입했던 화물자동차에 영상을 모시고 장대골을 떠나되 이번에도 정사만 먼저 올라가고 가족들은 뒤에 올라오니라.
정사가 집을 떠나 그날 뜻밖에 경찰대 수십 명이 몰려와서 온 집을 수색하다가 정사가 없으니 대신 양호를 데리고 가서 십오일간을 온갖 문초 끝에 수없이 구타하여 거의 사경에 이르러서야 풀려 나오니 그와 같은 소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이 돈푼이나 얻으려고 우리를 모략한데 연유했던 것이니 대사에 필유마해라 한번 당한 것은 어쩔 수 없어 중태에 빠진 양호의 치료에만 마음을 쓰고 우리를 모략한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구미안은 집이 협소하여 모시고 온 여러 위의 영상을 다 모실 수가 없어서 겨우 성부의 영상만을 모셔 진지상을 받들게 하였을 뿐, 하는 수 없이 다른 많은 영상은 한데 쌓아 모실 수밖에 없었으니 바삐 동곡의 터를 다듬고 성전을 지을 것을 계획 하니라.
영남으로부터 같이 아를 받들 교우 형제들이 따라 올라와서 우선 용호리와 구미안 두집에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니라.
6.사월 십오일 동곡 기지에서 개기 치성을 올리게 되었는데, 전날에 명령이 계시니 “경고문을 작성하여 그 내용을 음양 두장으로 나누어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되 말미에는 지금까지 같이 일을 받들어온 교우 형제들의 성명을 연기할 것이며 몸으로서 전방역사에 종사한 자와, 돈과 책모로서 후방에서 일을 주선한 자로 나누어 좌우 음양을 분명히 구부하고 또 금성 장대 양 기초지에 있어서의 지하중궁 도면을 그려 같이 붙이도록 하라” 하시어 그대로 행하니 치성후에 다시 명령하시기를 “그 글과 도면은 영구히 기념할 초대 기초 역사의 증거가 될 것이니 고운 비단에 올려 성부 영상의 좌우견에 걸어 놓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그때에 지어서 올린 경고문의 내용과 도면은 다음과 같으니라.(도면 48쪽, 86쪽)
경고문
”왼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천사께서 음양이기를 나눠서 써 대화지리에 보합하기로 건도는 대표인 김병철에게 온전히 쓰시니 이에 강건하고 중정하고 순전하고 순일한 이치는 독양이니 불성하는 고로 갑을이 동궁 되고 진사가 조화를 낳게 하니 위대 하도다 건의 원리로 만물이 자뢰하여 비롯하는 고로 천지사로서 간사함을 물리치고 성심을 보존하기로 담당하여 이에 영궁을 경영하여 천지 구궁의 이치로서 밖에 아홉칸을 작성하고 일육 수운으로써 안에 여섯 칸을 작성하여 부합된 즉 십오 도수가 되고 밖의 아홉 칸은 외인 소시가 무방하나 안의 여섯 칸은 외인 소시를 염의하는 고로 밤중에 남모르게 흙을 파며 돌을 깨는 것은 십만근의 일을 하여도 등촉을 들고 산태미를 메고 사다리에 오르내리며 그렇게 하여 역사를 마치니 만약 성심으로 갈력함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랴.
성부께서 하명하사와 “이 글을 나의 왼 어깨에 걸어라”하시니 당시에 열 여덟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정치건 백규태 임용순 김병주 우경주 두동규 조정규 오갑출 오윤환 김용주 김용상 김용하 김병련 양춘기 손량학 전재경 오영환 전영호로써 금성 장대 양기초 공사시 밤중을 이용하여 지하 영궁 축조를 위한 근로에 몸으로서 당참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 하는 도다.
”바른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대법 성부께서 음양이기를 나누어서 혈맥관통의 이치로써 곤도를 혈식 강순임에게 원원히 체로 삼으시니, 이에 황상원길의 이치는 독음이니 불성하는 고로 군자의 행하는 바이니 정축년으로 위시하여 기원이 되는지라, 지극 하도다 곤의 원리여, 곤이 후하여 만물을 싣고 있음은 덕이 합하여 가이 없고 넓고도 광대함은 만물이 다 형통되는 고로 천지의 도수를 영남에 기초하여 영궁을 경영하되 금성산 아래에 터를 잡으니 기원 칠년 계미 가을 구월이라. 그때에 도구 왜인이 정치를 하여 동서양이 전쟁에 골몰하매 금철 소속과 도량 맥직이 모두 한 손의 낭대가 되니 오랑캐를 보되 두렵기 범과 같아 음밀한 책모가 새어나가 펴지게 되면 패하는 고로 자기 물품이라도 남의 것을 도적하는 그와 같이 하고 일동 일정을 밤을 낮삼아 행하여 모자람을 채워 운용하였은즉, 가히 한쪽 어깨에 해당할지라.
성부께서 하명하시와 “이글을 나의 바른 어깨에 걸어라” 하시니 당시에 열여섯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김춘식 이준봉 이준민 조성관 김성도 이환우 신현철 김종한 신대안 임무순 서종태 김만호 정성호 김양호 심선진 신현규로서 금성 장내 양기초 공사에 제반 치성비와 기초공사 비용을 추심 주선 헌납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로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하는도다.
7.재목을 구하여 동곡에 성전을 짓는 동안 세상은 호열자로 교통이 통제되고 제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중 자동차(트럭)마저 잃어버리니 맥이 풀리고 기가 막혀 경황이 없는 가운데 영남으로부터 이거해 와서 날마다 종역하는 식구는 오륙십 명이 되는데, 양식은 떨어지고 나중에는 돈도 없으며 타관이고 본즉, 융통해 쓸 곳도 없으므로 전체 식구가 기아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러나 혈심으로 뭉친 식구들은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며 역사를 계속하였으니 구미안에서는 오륙십 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수용할 길이 없음으로 성전 건축이 끝난 뒤에 동곡에다 우선 일꾼들이 거처할 식당집을 새우기로 하였다.
이곳에 옮아오기전 장대골에서 교중 형제들이 지성어린 현금으로 일년 양식은 넉넉할 정도로 준비가 되었던 것인데 기왕 이삿짐을 싣게 되는 마당이니 자체에서 화물자동차를 구입 운영하면 비용을 벌어서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의견이 모아져서 영덕에 사는 강신창이가 부리는 차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겨우 이삿짐을 두 차례 운반하고 나서 고향에 다니러 간 채 소식이 묘연하니 답답하고 염려스러운 마음 이루 헤아릴 길이 없더라.
기다리다 못한 정사는 부득이 영덕으로 운전수인 강신창을 찾아가보니 그는 중병이 들어 병상에 누운채 꼼짝하지 못하더라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영천에 들어서자 공교롭게도 이륙사건이 나서 일체의 교통이 통제되고 삼엄한 분위기에 쌓였는데 보행하는 사람도 일일이 붙들어서 조사하는 철저한 경계망을 겨우 벗어나 포항에 이르르니라.
그곳에는 수년 동안의 신앙동지 김선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을 찾고 보니 그도 당시 가화가 생겨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 생계 또한 어려운 형편이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동안을 그의 집에 유숙하여 심신의 피로를 풀은 다음 보행으로 길을 떠나 동곡에 돌아오니라.
동곡에 돌아와 보니 그 동안의 의외의 참화를 입어 온 가족이 통분함을 못이겨 하고 있었으니, 일제 치하에 성부를 신앙하다가 치안유지법이며 황실모욕죄 등으로 투옥 당했다가 해방으로 인하여 석바된 적지 않은 신앙자들이 제각기 활거 하여 교판을 꾸미니 여기 저기에서 난립한 군소 교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다하여 그들은 각기 자기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며, 여기에 그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으나 개중에는 마치 일제시의 고등계 형사와도 같은 행세로서, 각 교중의 비밀을 내탐하여 모략하고 중상함으로써 금품을 탈취하는 등 협잡배도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이곳 저곳의 교중을 돌아다니며 무근한 언설로서 교파간의 이간을 획책하여 교파간에 서로 모략과 중상을 일삼게 하였고, 혹자는 그런 무리와 내통하여 어부지리를 꾀하는 군소 교주도 있어 모처럼의 성지인 금산일대는 해원과 보은과 상생을 위주로 하는 성부의 대이념과는 정반대로 서로 찢고 부수는 모략과 중상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던 바 특히 우리 교단은 그 중에서도 그들 모략중상의 주요대상이 되었더라.
그러던 중에 모략배들은 드디어 정사 내외를 사직당국에 구속하도록 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저의에서 흉악하기 짝이 없는 무근지설로 경찰에 무고를 하니,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경찰에서는 우리를 좌익사상의 보호자로 간주하고 무조건 구속하게 되었던바 그것이 마침 정사는 영덕으로 떠나고 집에 없었던 때라, 화은당선사님을 잡아가 원평 지서에서 하룻밤을 경과하는 중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여도 굴하지 않고 어찌하여 무고한 사람을 덮어놓고 잡아다가 이토록 죽을 욕을 보이느냐고 항거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욕을 보이고 이튿날로 도군정경찰부로 이송하고 그곳의 유치장에서는 더욱 심하게 고문하니 사흘 한밤을 선사님의 양쪽손을 철창사이로 밖에 내어 놓고 고량을 채워 그 손가락을 사정없이 치니 명재 경각인데, 사흘째 되던날 밤에 뜻밖에 뇌성이 대발하더니 정신이 회생하는지라 날이 새어 반나절이 되자 불러내어 미국인과 통역하는 이와 취조관이 서로 앉은 자리에서 문초를 하더니 실성한 정신분열증 환자라 하며 놓아주어 다 죽은 몸으로 겨우 귀가 했다는 것이다. 그날이 바로 이륙사건이 발생한 날이라 사방에서 소동이 일어나니 사건관련자의 체포등으로 복잡해진 그들은 시급히 조사를 진행하여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 자들을 놓아주었던 것이니, 이는 오로지 화은당선사님의 재난을 구하고자 하는 천의의 발동이라 아니할 수 없더라.
8.말 못할 재난의 연속과 더불어 식량의 결핍으로 죽느냐 사느냐 하면서도 풀뿌리 나무껍질로 일을 계속하면서 삼사개월을 경과하다가 식구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에 차마 견딜 수 없어 다시 영덕에 내려가 보니 신창은 겨우 일어나서 기동은 하나 그동안 어려운 형편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자동차를 팔아버렸으니 용서하라는 것이더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으로 맥이 풀리고 기가 절려들었으나 당장에 어찌하는 도리가 없어 회정코져 하는데 이번에는 국내에 갑작스럽게 퍼진 호열자로 말미암아 또 교통이 통제되어 다시 포항으로 들어가 돌아오는데 거리마다 금줄을 쳐 놓고 행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는지라. 할 수 없이 신작로를 피하여 산을 타고 걷기를 며칠 동안에 겨우 안의를 지나 육십령 고개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었더라. 그 당시는 좌익과 호열자의 만연을 방지하는 관계로 낮 모르는 사람은 일체 재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단속하던 때라 높은 산 고개를 바에 넘을 수도 없어 생각끝에 고개의 중간에 있는 마을에 찾아 들어 구장집을 방문하여 사정하니 의외로 쾌히 승락 하는지라. 하룻밤을 편히 시고 이튿날 새벽녁에 길을 떠나 고개마루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왠 젊은이 한 사람이 절름거리며 내려오다가, 하는 말이 아예 이 고개를 넘을 생각을 버리고 되돌아가자고 하면서 이 고개 마루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로서 양편에 초소막이 있어 여하한 통행인을 막론하고 철저히 단속함으로 붙들기만 하면 크게 욕을 보이는데 자기도 고개를 넘으려다 이 꼴이 되었노라고 하며, 낭자한 얼굴을 가리키더라.
그러나 정사는 이미 그럴 줄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라 지나가 보는 수밖에 없다 하고 걸음을 계혹하였더니 고갯마루에 이르러서 보니 과연 초소막이 보이는지라 자세히 살펴보니 마침 초소막을 지키는 양편 경찰대원들이 서로 어울려 주점에 있는 여자인지 지나가던 여자인지 알수는 없으나 웬 여자 하나를 둘러싸고 나무 그늘에 술자리를 벌려놓고 희롱하고 있느지라, 그 꼴을 보니 마음에 자신이 생겨나고 하늘이 도와주시는지라 신념이 솟아올랐으나 매사는 급즉완이라 바쁘게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불리한 것 같아서 이럴 경우에는 차라리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 싶어 술가게로 들어가서 국수를 시켜 먹으면서 주인 여자에게 말을 물으니 그의 사투리는 정사 고향 근처의 말이라, 정사를 향하여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니 깜짝 반가워하며 자기 고향도 역시 그 근처라고 하면서 마침 고향 오라버니를 만난 것 같다 하기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형편을 물어본 즉 과연 젊은이의 말이 사실이라 구타를 당한 끝에 죽어간 목숨도 적지 않다는 것으로 자기는 전라도 쪽 고개중턱에 사는데 경찰대에게 불리어 와서 이 곳에서 음식을 팔고 있노라고 하더라. 이 여자에게 경로를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상의를 하였더니 별로 염려 말고 하면서 자기는 경찰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신분인 만큼 남매로 가장하여 오라버니가 고향에 다녀오는 것 같이 꾸미고 서로 그럴 듯한 말을 주고 받으며 수작을 하여 저들이 술과 여자들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눈 앞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점까지 배웅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사의 행장을 이 여자가 들고 따라 나서면서 그야 말로 난경에 하늘과 신의 도움이라는 등 두 사람이 큰소리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고개를 내려오니 주막의 순경들은 힐끗힐끗 쳐다보면서도 두 사람이 하는 수작이 워낙 천연스러운지라 의심하지 않았는지 아무런 말이 없더라. 그리하여 두어 고비를 돌아 초소 막의 시계를 완전히 벗어난 뒤 서로 갈리자니 어떻게나 감사한지 눈물이 솟을 지경에 얼마간의 돈을 꺼내어 주면서 후일 대사를 성공케 하면 은혜를 필히 갚을 것이며 그 동안에도 반드시 천신이 도와 매사에 여의형통하리라고 하며 감사의 뜻으로 약간의 사례를 표하니 여인은 굳이 사양하면서 자기가 넉넉하다면 노수라도 보태어 드려야 할 사정인데, 이것도 큰 인연의 소치일 것이라고 하며 정말로 친 오라버니를 만난 것 같다고 하더라.
장계에 내려오니 해가 저물었는데, 이번에는 유유하게 지서를 찾아 들어 덮어놓고 주임에게 인사를 청하고 숙소의 알선을 부탁하니 의외로 순순히 응하는지라. 순경의 안내를 받아 영남여관에 들었는데, 그날 밤은 마침 여관의 주인 안동김씨의 제사라 야반에 음복음식이 나와 한방에 자던 진안에 산다는 사람과 배불리 먹고, 그길로 길을 떠서 진안에 오니 아직도 날은 새지 않고 어두운지라 계속해서 걸어 곰티재를 넘었는데 때마침 삼복 염천이라 배는 고픈데다 찌는 듯 내려 쪼이는 햇살에 온 몸에는 땀이 나다말고 진이 솟아나서 옷을 만져보니 송장물에 찌들은 원삼과 같은지라 더 이상 견딜수 없어 행장을 풀어 던지고 옷을 미쳐 벗지도 않은채 반석 사이에 고인 청강수같이 맑은 물 속에서 풍덩 뛰어드니 실로 살아난 듯 전신이 소생하는지라.
물속에서 못을 벗어 빨고 반석 위에 깔았다가 납작스름한 돌을 주어 다리미질을 하여 입으니 나를 듯이 개운한 것이 바로 신선 같은 기분이더라. 그 길로 새로운 힘을 얻어 계속 걸어 쑥 고개에 이르니 날이 저물더라. 청도원으로 빠져 나온 산골길에 접어들어 동곡에 오고자 했으나, 그 길에도 거리거리 초막이 있어 통행이 여의치 않은지라 다시 산을 올라 제비봉에 당도하니 이제는 다 왔구나 싶자 일시에 피로한 마음 물 밀 듯 털석 주저앉고 말았더라.
동곡을 내려다보니 집안에 불빛은 훤하게 비치나 그 동안 식구들이 어찌 되었는지 새삼스러운 걱정이 솟구치는데 귀를 기우려 살피니 선사의 말씀하시는 웃음소리와 식구들이 화답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지라 안심하고 뻣뻣이 굳은 다리와 허리를 간신히 펴고 일어나서 산을 내려와 집에 들어서니 모두들 놀라며 반가이 맞아드리더라.
9.두 번이나 죽을 욕을 보고 영남에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다 허행을 하고나니 식구들을 대할 면목이 없는 채 그렇다고 자동차를 잃어버린 내용 이야기를 하지니 식구들의 낙망 할 것이 걱정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그 사이에 먹을 것에 주린 식구들은 수개월을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척수까지 맞추어서 다듬어 놓은 성전에 쓸 재목을 울면서 토막 토막 끊어서 밥그릇, 세수통, 목기접시 따위를 만들어 호밀과 바구어다 죽을 쑤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으며, 벼뒤지처럼 짚날개로 이어둔 십여위의 영상은 그 밑에 쥐가 들랑날랑할 지경이 되었으니 교인의 신앙심에도 틈이 가기 시작하는데 재목 끊는 톱질하는 소리는 나의 목을 썰어내는 소리같고 통메우는 소리는 내 몸을 치는 것 같아 심경은 말할 수 없이 괴뢰워서 죽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다 못하여 모든 영상을 사금 구덩이에 모시고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지르고, 선사님과 정사도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천지와 형제들 앞에 사심으로 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휘발유 한 되를 구하여 감추어놓고 구미안에 술 한 말을 준비하여 안주로 고기도 넉넉하게 사서 준비를 갖춘 다음 팔월 스무 닷샛날 밤에 식구들을 전부 구미안에 가서 술과 고기를 먹고 재미있게 놀라고 하여 보내 놓고 결심한 대로 죽음 길을 떠날 작정을 하고 아침에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와 꾸짖어 명령하시되 “이 몹쓸 것들아 너희들이 또 죽을 생각으로 휘발유를 준비하였으니 그래가지고 어찌 끝까지 천지사를 받들 수 있으랴 너희들은 이길로 경주로 내려가거라 그곳에 있는 팔구인이 모두 일을 맡아 처리할 것이니, 죽드래도 그 사람들한테 가서 통정이나 하고 죽도록 하라”고 호령하시며 “경주로 갈 때에는 성모의 체백을 다시 모시고 떠나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또 잃어버릴 염려가 있느니라.”고 추상같이 호령하시더라.
선사님과 정사는 수년 전 영남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미쳐 봉행하지 못하고 앞뒷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군산 바다에 나가 빠져 죽으려다가 마음을 돌이켜 영남으로 가니, 모든 것이 무위이화로 풀려나가던 일을 생각하고 이제 와서 다시 진퇴양난의 환경에 빠져 또 죽기로 각오했다가 성부 성모님의 염려를 듣게 되니 실로 송구스럽고 황송하기 짝이 없어 엎드려 미급함을 고하고 명령을 봉행할 것을 상고하고 나서 몇일내로 경주를 향하여 길을 뜨니라. 성모님의 체백은 동곡으로 이사 올 때 모시고 가라는 지시가 있어 단석산으로부터 용호리 범어골에 이안하였더니 다시 모시고 경주로 내려 가니라.
경주에 내려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걱정하더라. 그리하여 신대안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게 되는데 교중 형제들이 집집마다 얼마씩을 거두어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고 성모님의 체백은 아직 장지를 결정하시는 계시가 없었으므로 이웃인 신현철의 집 장독대에 모셔놓고 조석 예식과 제반치성을 이곳에서 행하게 되니라.
10.정사는 뒤이어 동곡으로 돌아와서 백방으로 주선해 보나 별다른 묘책이 나서지 않은 채 식구들과 더불어 고생하는 가운데 해를 넘기고 이듬해인 정해 이월에 경주 교우들이 이리저리 주선하여 모은 돈 삼만 오천여환을 가지고 와서 성전 축조공사를 다시 계속하게 되니라 그러나 그 돈도 부족하여 식구들은 다시 초근목피로 죽을 쑤어서 먹으면서 일을 계속 하였다.
안노인들은 이 고을 저 고을로 동냥 길을 드나드는데 동냥을 나간 경주아내가 십여일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지라. 모든 식구가 염려하던 중 하루는 마차에 무엇인지 가득히 담은 가마니를 다섯개나 싣고 오는 것이 아닌가.
반가이 맞아들여 웬일이냐고 물으니 김제. 만경 등지에서 동냥으로 모은 것이 보리. 호밀. 감자등 다섯 가마니가 되었다고 하며 한숨을 쉬니 이 말을 들은 식구들의 비장한 마음을 여기에 표현할 수 없으며 지난날 성부님의 옥체를 찾겠다는 정성으로 추운 겨울날에 홋 옷을 걸친 채 집을 나섰던 일을 비롯하여 언제나 변할 줄 모르는 경주 아내의 일편단심에 감탄하면서 가마니를 붙들고 흐느껴 울었더라.
식모가 구해온 식량으로 반 개월 죽 거리는 되겠다고 생각하였더니 그날 저녁 진지상에 식모가 돌아오면서 준비한 주과포와 백미 한 되로 진지를 지어서 올렸는데 도령형제와 신장들이 하강하더니, 한 신장이 말하기를 “내일 밤에 식모가 구걸해 온 보리 한밀 감자등 한 알도 남기지 말고 밥을 짓고 감자를 삶아서 올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더라. 이튿날 밤에 지시대로 하여 올리니 어제 하강했던 신명들이 내려와서 “요즈음 배가 고프더니 오늘은 배가 부르도다. 성전 짓는데 부역이나 하자”하고 떠나니라. 물린 밤과 감자를 죽게 풀어 삼사일 동안 끼니를 이으니라. 선사님은 경주로부터 동곡에 돌아와서 공사를 행하시니라.
1.을유년 시월 십일에 도령 탄신기념행사를 거행하니 도령 형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참석하여 말하기를 “또 이사를 하되 전주 동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 이날을 기념하는 노래를 지어서 올리고 노래 가락에 맞추어서 춤을 추니 도령 형제 많은 신장을 거느리고 같이 즐기더라. 이날의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수가 칠
기원 구년 을유 시월 십일 구암 소고우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날 다가오니 우리도령 성탄기념
천사대모 조화일맥 조화났네 조화났어
용화대운 대경살세 경축하고 경축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이런일이 어디있나
경진신사 잇달아서 화은당의 몸을빌려
천상도령 태어나니 이런일이 또있을까
얼싸좋다 노래하세 얼씨구나 춤을추세
이런조화 보고서도 우리힘이 미급하여
천상도수 못맞추니 성부성모 걱정하사
호령하고 꾸짖으니 관운장도 떠는 것을
잠만자는 저사람들 어서바삐 일어나소
신급인망 바쁜시호 용화건설 늦어지네
지금때에 못믿어서 망서리고 빈정대면
용화회상 못들어가 땅을치고 한탄하리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런경사 또없느데
어이그리 잠만자노 어서와서 일을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할매어매 원을풀고
할아버지 뜻을이어 세계일가 만들게나
경사로다 경사로다 도령탄신 경사로다
또 이날 공사에 모인 많은 망양신이 들어서면서 그 중 한 신명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 번 공사 때 보리가 섞인 밥을 먹었더니 정성이 부족하여 보는 일에도 많은 지장이 생겼습니다.”고 하며 주먹으로 자기 입을 쥐어박으면서 이 더러운 입 때문에 몸까지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지 천사님 복을 받고자 원하는 자 누구를 막론하고 입을 조심하도록 하라 입이 곧 원수로다.” 하고 외치더라.
2.십이월 초삼일에 기념예식을 거행하니 성모께서 하강하시와 “이사할 준비를 속히 하라. 기지는 도령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그 곳으로 가야 되니라.” 고 하시니라. 선사 “상고하되 경제사정이 여의치를 않아서 이사를 할 수가 없아오니 한 이태동안 이 곳에 머무르면서 준비를 갖춘 다음 이사함이 가할까 하나이다.”라고 사뢰오니 크게 걱정하시면서 “너희들이 금전 가지고 사업할 생각은 말라. 비록 초근목피를 먹으면서라도 사업을 완수해야 천상의 도수를 맞출 수가 있고, 또 그러한 혈심으로 일을 이룩해 놓아야 후일 기념이 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원래 큰 일이란 금전 가지고 못하는 법이며 일을 하기 위하여 금전이 꼭 필요할 때에는 천지에서 지시하여 전주가 나서리라. 금전고의 열쇠는 관운장이 가지고 있으니, 금고를 열면 돈에 몸서리에 칠때가 있을 것이오 또 세계 각국의 초대를 받아 주류할 때도 있으리라. 새 문명 새 도학이 나오면 정부에서 세계에 널리 선포할 것이다. 그때까지 혈심 정력으로 명령대로만 실행해라”고 하시므로 모두 합심하여 이사준비를 서두르니라.
이날 공사에 또 노래를 지어 올리니 다음과 같다.
도수가 팔
유세 을유 십이월 초삼일 구암 소고우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라 어느날고 기원구년 납월삼일
천사대모 겪어오신 만고풍상 뉘가알고
여류세월 지금와서 공부문을 열으시고
지성자만 빼돌리네 진충갈력 닦고닦아
용화대학 입학하세 시험문제 풀어주니
영세불망 하여가자 말을듣고 못행하면
바위에 물주기라 우리형제 명심하세
천용우로 후박하면 만방간에 원망이요
지용수토 후박이면 만물간에 원망이요
인용덕화 후박인데 만사간에 원망이라
천지인이 덕화주장 귀신출입 문호로다
대학지도 명명덕을 밝은길이 대어천지
신명인명 명명이라 명덕지법 시하출고
대인대의 주창하면 감통신명 명덕이요
사유결단 하고보면 연후에사 변화지술
연월일신 푼각윤회 일용행사 봉명하여
원형이정 돌아오니 천사대모 법도로다
길화피어 좋은열매 흉화피어 흉한열매
천지조화 호풍환우 무한공력 결과인데
공부없이 될까부냐 공부하세 공부하세
정북창의 재주로도 산에들어 사흘만에
천하사를 처음알고 강태공의 조화역시
공부없이 못하는걸 알었는가 몰랐는가
진실로서 지은일은 천지또한 못부수고
근거없이 꾸미면은 부서질째 여지없다
성부성모 대법도는 남녀노소 구별않네
야출동문 진평이도 여인삼천 세웠더라
신명불러 복중출입 이몸저몸 고쳐쓰리
입도해서 닦잖으면 화가올까 복이올까
모든일에 불성공은 혈심자가 없는연고
혈심결심 닦아내면 안되는일 없으리라
사업성공 하자면은 위천하자 불고가사
제갈량의 불성공은 유상팔백 연유로다
무엇보다 두려운일 박람박식 겁이난다
부귀자는 불란빈천 강강자는 유약불원
유약빈천 해원시대 판안법을 꾸미려면
들쳐나서 못쓰리니 남모르는 판밖법을
꾸며내어 일을하세 무위이화 용화건설
불언지교 화민정세 거세자를 물론하고
신도라야 이화로다 산하대운 통일하여
인류화평 원동기를 현묘불칙 공이되면
이것저것 무위화라 신도또한 조화하면
무궁선경 꾸며낸다 제도수에 돌아다면
새기운이 전개되리 목석또한 기운붙혀
쓰게되는 대법이라 오직병겁 남겨두어
의통으로 전수하니 약으로는 못나수는
천하대병 무인무도 의통이란 무엇이랴
의통만을 알아두라 참된마음 일심으로
그한마음 간직하여 의통만을 알아두세
세상사람 살고싶어 물밀듯이 찾아오리
성부성모 우리보약 병걸린자 끌으시고
죄걸린자 끌으시니 하신말씀 그말씀이
약인줄을 누가알고 충언일새 귀에걸려
역증나고 불고하니 그행동이 고쳐질까
성부성모 잘믿으라 봉곡참해 입은진묵
원을품고 서양으로 도통신을 인솔하여
문명개발 종역하니 성부님의 해원도수
그를불러 문화개발 종역토록 하셨다네
경주용담 보은신명 지기금지 원위대강
도령지지 정한터에 좌우산천 기절처라
모악회문 기운돌려 부산모산 대를하고
기어드는 계룡봉과 구성봉황 둘러싸고
수양산은 숙여들어 낙양계명 웃는모양
봉래방장 영주봉에 만만세를 불러보고
용화청도 안에두니 용반호거 수구로다
도형정한 농사도수 친산정리 물나서라
봉올봉올 봉올마다 두도령이 정한도수
남조선은 만국활계 청풍명월 금산일세
삼천국에 문명개화 도술운통 구만리라
세계유의 이산인가 기운금천 장물화라
천하지대 모악산하 용화도장 넓은기지
장엄법령 존설하면 모롱마다 선약이라
남조선배 돛을달아 혈식군자 배질로서
고해상에 띄우시니 풍파없이 건너가네
근로대중 일심자만 실어다가 건너놓고
인문공정 열으시니 조화선경 여기로다
화민정세 명령받아 신명시켜 공작감시
불일성지 서들더라 천지록사 모여들어
만복길상 들어낼적 양춘삼월 호시절에
봉우리가 꽃송이라 이번기념 놀고보면
여가없이 못노니라 얼싸좋다 놀고노세
어서바삐 일을하여 용화도장 세워놓고
호천금궐 넓은터에 태극깃발 날리리라
꽃밭두리 이성속에 건들건들 뛰고놀자
3.을유년 과세를 하고 정월 십오일 기념행사를 하니 도령들이 내려와서 “아버지께서는 동곡으로 가셔서 돌아보시고 할아버님 선화지에 터를 잡아 기념각을 짖도록 하시오”하기에 정사는 십칠일에 떠나 그곳에 가서 살펴보니 쓸만한 기지도 없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어 문의조차도 해볼 수가 없어 그대로 원평으로 내려와 유숙하고 수일간을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하루는 오래터에 사는 배달석을 상면하니라. 그는 같은 도인으로서 서로 상종하다가 십 수년간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지내온지라 반가히 인사하고 그 동안 정의를 통정한 후 동곡을 찾아오게 된 목적을 말하니 그는 신환으로 오랫동안 고생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할 것을 기꺼이 승낙 하더라.
원평에 머무는 동안 명령만 믿었으므로 유숙하고 있던 집 주인을 동반하고 김제를 돌아 신태인으로 하여 구태인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경과하고 관운묘에 참배하고 나서 그곳에서 또 하룻밤을 새우고 원평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전자의 두 도령이 전북 칠읍에다 농사 도수를 정한 바 있었음을 회상하여 태인으로부터 원평까지 삽삽리 원평 으로부터 김제까지 삼십리를 잡아 그 안에 농토 삼백마지기를 사서 도중 형제를 이사케 하여 작농케 한다면 제반 일에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더라.
원평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묵은 다음 동곡으로 다시 올라가 기지가 될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여 수류봉 밑에 있는 장씨의 논을 사기로 결정하였으나 아무래도 마음에 합당치 아니하여 다음날 다시 상의하기로 하고 원평으로 내려왔더라. 이튿날 이른 아침에서 달석이 와서 하는 말이 동곡 김씨네 정문이 있던 자리에 사금매입터가 있는데 만평가량이나 된다고 하니 가보자고 하기로 같이 가서 사면을 살펴보니 기지는 되었으므로 살수가 있겠는가 하고 달석에게 물으니, 지주는 태인에 사는 은씨인데 약간의 금액으로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간밤에 한 꿈을 얻었는데 천상으로부터 한 노인이 말을 타고 사금 버헉 위에 내리더니 “정재문”이라 국문으로 써서 붙여주시고 승천하시자 깨었는데 생각하니 예사꿈이 아닌 듯싶었으며 해몽해보니 어제 장씨의 논을 사기로 말했다가 오늘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으나 우리가 찾는 터는 그곳이 아니고 버헉터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천사님이 보내신 것같이 느껴지더라고 말하더라.
광지에 들어서니 온몸이 으쓱하면서 큰 터로 보이기에 달석을 돌아다보고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도 역시 동감이라 그곳으로 완정을 짓고 내려와서 다시 하룻밤을 쉬고나니 식전에 달석이 찾아와서 회색이 만면하여 하는 말이 간밤의 꿈에 또다시 그 노인이 오시더니 “성사문”이라 불러주시고 가셨는데 이제는 문서로서 매매계약을 작성하게 되리라는 뜻인듯 싶으니 안심하라는 것이더라. 그 뒤 과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터를 잡게 되었으니 그 곳이 곧 제 오기초지로서 현재는 금평호수에 수몰되어 경춘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잔잔하게 호수면에는 물오리가 떼지어 날아와서 노닐고 있는 곳이다.
또 그 자리를 두고 성부께서 화룡천년에 진용이 내지 할 대지라고 말씀이 있나니라. 원평 윗 마을 구미안에 작은 농막을 사고 다시 정읍 용호리에 큰 농막을 산 다음 기지는 달석에게 일임하고 장대골에 돌아오니라.
일본으로부터 돌아온 많은 귀환 동포가 사방으로부터 모여 와서 신앙하게 되었으나, 그들의 침식을 담당할 방책이 서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이십여명을 달석에게 보내어 모악산 산판에 일자리를 구해주도록 하였더라.
4.병술 이월 초이렛날 발정 치성을 올리니 도령이 하강하여 “구미란은 사기초지인즉 그 곳에서 공사를 보면서 동곡의 일을 진행하라”고 하니라.
그 뒤 공중에서 윤선이 뜨는 소리가 나고 남조선 뱃길이라는 소리와 또 만세소리가 사흘동안이나 그치지 아니하더라.
이월 이십일에 정사만 미리 올라가 용호리의 집과 구미안의 집을 수리하여 입택하고 구미안에 영상을 모실 수 있도록 다섯 칸 집을 짓게 하고 돌아와서 이월 그믐날 얼마전에 구입했던 화물자동차에 영상을 모시고 장대골을 떠나되 이번에도 정사만 먼저 올라가고 가족들은 뒤에 올라오니라.
정사가 집을 떠나 그날 뜻밖에 경찰대 수십 명이 몰려와서 온 집을 수색하다가 정사가 없으니 대신 양호를 데리고 가서 십오일간을 온갖 문초 끝에 수없이 구타하여 거의 사경에 이르러서야 풀려 나오니 그와 같은 소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이 돈푼이나 얻으려고 우리를 모략한데 연유했던 것이니 대사에 필유마해라 한번 당한 것은 어쩔 수 없어 중태에 빠진 양호의 치료에만 마음을 쓰고 우리를 모략한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구미안은 집이 협소하여 모시고 온 여러 위의 영상을 다 모실 수가 없어서 겨우 성부의 영상만을 모셔 진지상을 받들게 하였을 뿐, 하는 수 없이 다른 많은 영상은 한데 쌓아 모실 수밖에 없었으니 바삐 동곡의 터를 다듬고 성전을 지을 것을 계획 하니라.
영남으로부터 같이 아를 받들 교우 형제들이 따라 올라와서 우선 용호리와 구미안 두집에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니라.
6.사월 십오일 동곡 기지에서 개기 치성을 올리게 되었는데, 전날에 명령이 계시니 “경고문을 작성하여 그 내용을 음양 두장으로 나누어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되 말미에는 지금까지 같이 일을 받들어온 교우 형제들의 성명을 연기할 것이며 몸으로서 전방역사에 종사한 자와, 돈과 책모로서 후방에서 일을 주선한 자로 나누어 좌우 음양을 분명히 구부하고 또 금성 장대 양 기초지에 있어서의 지하중궁 도면을 그려 같이 붙이도록 하라” 하시어 그대로 행하니 치성후에 다시 명령하시기를 “그 글과 도면은 영구히 기념할 초대 기초 역사의 증거가 될 것이니 고운 비단에 올려 성부 영상의 좌우견에 걸어 놓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그때에 지어서 올린 경고문의 내용과 도면은 다음과 같으니라.(도면 48쪽, 86쪽)
경고문
”왼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천사께서 음양이기를 나눠서 써 대화지리에 보합하기로 건도는 대표인 김병철에게 온전히 쓰시니 이에 강건하고 중정하고 순전하고 순일한 이치는 독양이니 불성하는 고로 갑을이 동궁 되고 진사가 조화를 낳게 하니 위대 하도다 건의 원리로 만물이 자뢰하여 비롯하는 고로 천지사로서 간사함을 물리치고 성심을 보존하기로 담당하여 이에 영궁을 경영하여 천지 구궁의 이치로서 밖에 아홉칸을 작성하고 일육 수운으로써 안에 여섯 칸을 작성하여 부합된 즉 십오 도수가 되고 밖의 아홉 칸은 외인 소시가 무방하나 안의 여섯 칸은 외인 소시를 염의하는 고로 밤중에 남모르게 흙을 파며 돌을 깨는 것은 십만근의 일을 하여도 등촉을 들고 산태미를 메고 사다리에 오르내리며 그렇게 하여 역사를 마치니 만약 성심으로 갈력함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랴.
성부께서 하명하사와 “이 글을 나의 왼 어깨에 걸어라”하시니 당시에 열 여덟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정치건 백규태 임용순 김병주 우경주 두동규 조정규 오갑출 오윤환 김용주 김용상 김용하 김병련 양춘기 손량학 전재경 오영환 전영호로써 금성 장대 양기초 공사시 밤중을 이용하여 지하 영궁 축조를 위한 근로에 몸으로서 당참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 하는 도다.
”바른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대법 성부께서 음양이기를 나누어서 혈맥관통의 이치로써 곤도를 혈식 강순임에게 원원히 체로 삼으시니, 이에 황상원길의 이치는 독음이니 불성하는 고로 군자의 행하는 바이니 정축년으로 위시하여 기원이 되는지라, 지극 하도다 곤의 원리여, 곤이 후하여 만물을 싣고 있음은 덕이 합하여 가이 없고 넓고도 광대함은 만물이 다 형통되는 고로 천지의 도수를 영남에 기초하여 영궁을 경영하되 금성산 아래에 터를 잡으니 기원 칠년 계미 가을 구월이라. 그때에 도구 왜인이 정치를 하여 동서양이 전쟁에 골몰하매 금철 소속과 도량 맥직이 모두 한 손의 낭대가 되니 오랑캐를 보되 두렵기 범과 같아 음밀한 책모가 새어나가 펴지게 되면 패하는 고로 자기 물품이라도 남의 것을 도적하는 그와 같이 하고 일동 일정을 밤을 낮삼아 행하여 모자람을 채워 운용하였은즉, 가히 한쪽 어깨에 해당할지라.
성부께서 하명하시와 “이글을 나의 바른 어깨에 걸어라” 하시니 당시에 열여섯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김춘식 이준봉 이준민 조성관 김성도 이환우 신현철 김종한 신대안 임무순 서종태 김만호 정성호 김양호 심선진 신현규로서 금성 장내 양기초 공사에 제반 치성비와 기초공사 비용을 추심 주선 헌납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로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하는도다.
7.재목을 구하여 동곡에 성전을 짓는 동안 세상은 호열자로 교통이 통제되고 제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중 자동차(트럭)마저 잃어버리니 맥이 풀리고 기가 막혀 경황이 없는 가운데 영남으로부터 이거해 와서 날마다 종역하는 식구는 오륙십 명이 되는데, 양식은 떨어지고 나중에는 돈도 없으며 타관이고 본즉, 융통해 쓸 곳도 없으므로 전체 식구가 기아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러나 혈심으로 뭉친 식구들은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며 역사를 계속하였으니 구미안에서는 오륙십 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수용할 길이 없음으로 성전 건축이 끝난 뒤에 동곡에다 우선 일꾼들이 거처할 식당집을 새우기로 하였다.
이곳에 옮아오기전 장대골에서 교중 형제들이 지성어린 현금으로 일년 양식은 넉넉할 정도로 준비가 되었던 것인데 기왕 이삿짐을 싣게 되는 마당이니 자체에서 화물자동차를 구입 운영하면 비용을 벌어서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의견이 모아져서 영덕에 사는 강신창이가 부리는 차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겨우 이삿짐을 두 차례 운반하고 나서 고향에 다니러 간 채 소식이 묘연하니 답답하고 염려스러운 마음 이루 헤아릴 길이 없더라.
기다리다 못한 정사는 부득이 영덕으로 운전수인 강신창을 찾아가보니 그는 중병이 들어 병상에 누운채 꼼짝하지 못하더라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영천에 들어서자 공교롭게도 이륙사건이 나서 일체의 교통이 통제되고 삼엄한 분위기에 쌓였는데 보행하는 사람도 일일이 붙들어서 조사하는 철저한 경계망을 겨우 벗어나 포항에 이르르니라.
그곳에는 수년 동안의 신앙동지 김선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을 찾고 보니 그도 당시 가화가 생겨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 생계 또한 어려운 형편이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동안을 그의 집에 유숙하여 심신의 피로를 풀은 다음 보행으로 길을 떠나 동곡에 돌아오니라.
동곡에 돌아와 보니 그 동안의 의외의 참화를 입어 온 가족이 통분함을 못이겨 하고 있었으니, 일제 치하에 성부를 신앙하다가 치안유지법이며 황실모욕죄 등으로 투옥 당했다가 해방으로 인하여 석바된 적지 않은 신앙자들이 제각기 활거 하여 교판을 꾸미니 여기 저기에서 난립한 군소 교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다하여 그들은 각기 자기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며, 여기에 그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으나 개중에는 마치 일제시의 고등계 형사와도 같은 행세로서, 각 교중의 비밀을 내탐하여 모략하고 중상함으로써 금품을 탈취하는 등 협잡배도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이곳 저곳의 교중을 돌아다니며 무근한 언설로서 교파간의 이간을 획책하여 교파간에 서로 모략과 중상을 일삼게 하였고, 혹자는 그런 무리와 내통하여 어부지리를 꾀하는 군소 교주도 있어 모처럼의 성지인 금산일대는 해원과 보은과 상생을 위주로 하는 성부의 대이념과는 정반대로 서로 찢고 부수는 모략과 중상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던 바 특히 우리 교단은 그 중에서도 그들 모략중상의 주요대상이 되었더라.
그러던 중에 모략배들은 드디어 정사 내외를 사직당국에 구속하도록 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저의에서 흉악하기 짝이 없는 무근지설로 경찰에 무고를 하니,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경찰에서는 우리를 좌익사상의 보호자로 간주하고 무조건 구속하게 되었던바 그것이 마침 정사는 영덕으로 떠나고 집에 없었던 때라, 화은당선사님을 잡아가 원평 지서에서 하룻밤을 경과하는 중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여도 굴하지 않고 어찌하여 무고한 사람을 덮어놓고 잡아다가 이토록 죽을 욕을 보이느냐고 항거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욕을 보이고 이튿날로 도군정경찰부로 이송하고 그곳의 유치장에서는 더욱 심하게 고문하니 사흘 한밤을 선사님의 양쪽손을 철창사이로 밖에 내어 놓고 고량을 채워 그 손가락을 사정없이 치니 명재 경각인데, 사흘째 되던날 밤에 뜻밖에 뇌성이 대발하더니 정신이 회생하는지라 날이 새어 반나절이 되자 불러내어 미국인과 통역하는 이와 취조관이 서로 앉은 자리에서 문초를 하더니 실성한 정신분열증 환자라 하며 놓아주어 다 죽은 몸으로 겨우 귀가 했다는 것이다. 그날이 바로 이륙사건이 발생한 날이라 사방에서 소동이 일어나니 사건관련자의 체포등으로 복잡해진 그들은 시급히 조사를 진행하여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 자들을 놓아주었던 것이니, 이는 오로지 화은당선사님의 재난을 구하고자 하는 천의의 발동이라 아니할 수 없더라.
8.말 못할 재난의 연속과 더불어 식량의 결핍으로 죽느냐 사느냐 하면서도 풀뿌리 나무껍질로 일을 계속하면서 삼사개월을 경과하다가 식구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에 차마 견딜 수 없어 다시 영덕에 내려가 보니 신창은 겨우 일어나서 기동은 하나 그동안 어려운 형편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자동차를 팔아버렸으니 용서하라는 것이더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으로 맥이 풀리고 기가 절려들었으나 당장에 어찌하는 도리가 없어 회정코져 하는데 이번에는 국내에 갑작스럽게 퍼진 호열자로 말미암아 또 교통이 통제되어 다시 포항으로 들어가 돌아오는데 거리마다 금줄을 쳐 놓고 행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는지라. 할 수 없이 신작로를 피하여 산을 타고 걷기를 며칠 동안에 겨우 안의를 지나 육십령 고개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었더라. 그 당시는 좌익과 호열자의 만연을 방지하는 관계로 낮 모르는 사람은 일체 재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단속하던 때라 높은 산 고개를 바에 넘을 수도 없어 생각끝에 고개의 중간에 있는 마을에 찾아 들어 구장집을 방문하여 사정하니 의외로 쾌히 승락 하는지라. 하룻밤을 편히 시고 이튿날 새벽녁에 길을 떠나 고개마루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왠 젊은이 한 사람이 절름거리며 내려오다가, 하는 말이 아예 이 고개를 넘을 생각을 버리고 되돌아가자고 하면서 이 고개 마루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로서 양편에 초소막이 있어 여하한 통행인을 막론하고 철저히 단속함으로 붙들기만 하면 크게 욕을 보이는데 자기도 고개를 넘으려다 이 꼴이 되었노라고 하며, 낭자한 얼굴을 가리키더라.
그러나 정사는 이미 그럴 줄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라 지나가 보는 수밖에 없다 하고 걸음을 계혹하였더니 고갯마루에 이르러서 보니 과연 초소막이 보이는지라 자세히 살펴보니 마침 초소막을 지키는 양편 경찰대원들이 서로 어울려 주점에 있는 여자인지 지나가던 여자인지 알수는 없으나 웬 여자 하나를 둘러싸고 나무 그늘에 술자리를 벌려놓고 희롱하고 있느지라, 그 꼴을 보니 마음에 자신이 생겨나고 하늘이 도와주시는지라 신념이 솟아올랐으나 매사는 급즉완이라 바쁘게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불리한 것 같아서 이럴 경우에는 차라리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 싶어 술가게로 들어가서 국수를 시켜 먹으면서 주인 여자에게 말을 물으니 그의 사투리는 정사 고향 근처의 말이라, 정사를 향하여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니 깜짝 반가워하며 자기 고향도 역시 그 근처라고 하면서 마침 고향 오라버니를 만난 것 같다 하기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형편을 물어본 즉 과연 젊은이의 말이 사실이라 구타를 당한 끝에 죽어간 목숨도 적지 않다는 것으로 자기는 전라도 쪽 고개중턱에 사는데 경찰대에게 불리어 와서 이 곳에서 음식을 팔고 있노라고 하더라. 이 여자에게 경로를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상의를 하였더니 별로 염려 말고 하면서 자기는 경찰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신분인 만큼 남매로 가장하여 오라버니가 고향에 다녀오는 것 같이 꾸미고 서로 그럴 듯한 말을 주고 받으며 수작을 하여 저들이 술과 여자들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눈 앞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점까지 배웅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사의 행장을 이 여자가 들고 따라 나서면서 그야 말로 난경에 하늘과 신의 도움이라는 등 두 사람이 큰소리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고개를 내려오니 주막의 순경들은 힐끗힐끗 쳐다보면서도 두 사람이 하는 수작이 워낙 천연스러운지라 의심하지 않았는지 아무런 말이 없더라. 그리하여 두어 고비를 돌아 초소 막의 시계를 완전히 벗어난 뒤 서로 갈리자니 어떻게나 감사한지 눈물이 솟을 지경에 얼마간의 돈을 꺼내어 주면서 후일 대사를 성공케 하면 은혜를 필히 갚을 것이며 그 동안에도 반드시 천신이 도와 매사에 여의형통하리라고 하며 감사의 뜻으로 약간의 사례를 표하니 여인은 굳이 사양하면서 자기가 넉넉하다면 노수라도 보태어 드려야 할 사정인데, 이것도 큰 인연의 소치일 것이라고 하며 정말로 친 오라버니를 만난 것 같다고 하더라.
장계에 내려오니 해가 저물었는데, 이번에는 유유하게 지서를 찾아 들어 덮어놓고 주임에게 인사를 청하고 숙소의 알선을 부탁하니 의외로 순순히 응하는지라. 순경의 안내를 받아 영남여관에 들었는데, 그날 밤은 마침 여관의 주인 안동김씨의 제사라 야반에 음복음식이 나와 한방에 자던 진안에 산다는 사람과 배불리 먹고, 그길로 길을 떠서 진안에 오니 아직도 날은 새지 않고 어두운지라 계속해서 걸어 곰티재를 넘었는데 때마침 삼복 염천이라 배는 고픈데다 찌는 듯 내려 쪼이는 햇살에 온 몸에는 땀이 나다말고 진이 솟아나서 옷을 만져보니 송장물에 찌들은 원삼과 같은지라 더 이상 견딜수 없어 행장을 풀어 던지고 옷을 미쳐 벗지도 않은채 반석 사이에 고인 청강수같이 맑은 물 속에서 풍덩 뛰어드니 실로 살아난 듯 전신이 소생하는지라.
물속에서 못을 벗어 빨고 반석 위에 깔았다가 납작스름한 돌을 주어 다리미질을 하여 입으니 나를 듯이 개운한 것이 바로 신선 같은 기분이더라. 그 길로 새로운 힘을 얻어 계속 걸어 쑥 고개에 이르니 날이 저물더라. 청도원으로 빠져 나온 산골길에 접어들어 동곡에 오고자 했으나, 그 길에도 거리거리 초막이 있어 통행이 여의치 않은지라 다시 산을 올라 제비봉에 당도하니 이제는 다 왔구나 싶자 일시에 피로한 마음 물 밀 듯 털석 주저앉고 말았더라.
동곡을 내려다보니 집안에 불빛은 훤하게 비치나 그 동안 식구들이 어찌 되었는지 새삼스러운 걱정이 솟구치는데 귀를 기우려 살피니 선사의 말씀하시는 웃음소리와 식구들이 화답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지라 안심하고 뻣뻣이 굳은 다리와 허리를 간신히 펴고 일어나서 산을 내려와 집에 들어서니 모두들 놀라며 반가이 맞아드리더라.
9.두 번이나 죽을 욕을 보고 영남에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다 허행을 하고나니 식구들을 대할 면목이 없는 채 그렇다고 자동차를 잃어버린 내용 이야기를 하지니 식구들의 낙망 할 것이 걱정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그 사이에 먹을 것에 주린 식구들은 수개월을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척수까지 맞추어서 다듬어 놓은 성전에 쓸 재목을 울면서 토막 토막 끊어서 밥그릇, 세수통, 목기접시 따위를 만들어 호밀과 바구어다 죽을 쑤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으며, 벼뒤지처럼 짚날개로 이어둔 십여위의 영상은 그 밑에 쥐가 들랑날랑할 지경이 되었으니 교인의 신앙심에도 틈이 가기 시작하는데 재목 끊는 톱질하는 소리는 나의 목을 썰어내는 소리같고 통메우는 소리는 내 몸을 치는 것 같아 심경은 말할 수 없이 괴뢰워서 죽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다 못하여 모든 영상을 사금 구덩이에 모시고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지르고, 선사님과 정사도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천지와 형제들 앞에 사심으로 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휘발유 한 되를 구하여 감추어놓고 구미안에 술 한 말을 준비하여 안주로 고기도 넉넉하게 사서 준비를 갖춘 다음 팔월 스무 닷샛날 밤에 식구들을 전부 구미안에 가서 술과 고기를 먹고 재미있게 놀라고 하여 보내 놓고 결심한 대로 죽음 길을 떠날 작정을 하고 아침에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와 꾸짖어 명령하시되 “이 몹쓸 것들아 너희들이 또 죽을 생각으로 휘발유를 준비하였으니 그래가지고 어찌 끝까지 천지사를 받들 수 있으랴 너희들은 이길로 경주로 내려가거라 그곳에 있는 팔구인이 모두 일을 맡아 처리할 것이니, 죽드래도 그 사람들한테 가서 통정이나 하고 죽도록 하라”고 호령하시며 “경주로 갈 때에는 성모의 체백을 다시 모시고 떠나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또 잃어버릴 염려가 있느니라.”고 추상같이 호령하시더라.
선사님과 정사는 수년 전 영남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미쳐 봉행하지 못하고 앞뒷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군산 바다에 나가 빠져 죽으려다가 마음을 돌이켜 영남으로 가니, 모든 것이 무위이화로 풀려나가던 일을 생각하고 이제 와서 다시 진퇴양난의 환경에 빠져 또 죽기로 각오했다가 성부 성모님의 염려를 듣게 되니 실로 송구스럽고 황송하기 짝이 없어 엎드려 미급함을 고하고 명령을 봉행할 것을 상고하고 나서 몇일내로 경주를 향하여 길을 뜨니라. 성모님의 체백은 동곡으로 이사 올 때 모시고 가라는 지시가 있어 단석산으로부터 용호리 범어골에 이안하였더니 다시 모시고 경주로 내려 가니라.
경주에 내려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걱정하더라. 그리하여 신대안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게 되는데 교중 형제들이 집집마다 얼마씩을 거두어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고 성모님의 체백은 아직 장지를 결정하시는 계시가 없었으므로 이웃인 신현철의 집 장독대에 모셔놓고 조석 예식과 제반치성을 이곳에서 행하게 되니라.
10.정사는 뒤이어 동곡으로 돌아와서 백방으로 주선해 보나 별다른 묘책이 나서지 않은 채 식구들과 더불어 고생하는 가운데 해를 넘기고 이듬해인 정해 이월에 경주 교우들이 이리저리 주선하여 모은 돈 삼만 오천여환을 가지고 와서 성전 축조공사를 다시 계속하게 되니라 그러나 그 돈도 부족하여 식구들은 다시 초근목피로 죽을 쑤어서 먹으면서 일을 계속 하였다.
안노인들은 이 고을 저 고을로 동냥 길을 드나드는데 동냥을 나간 경주아내가 십여일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지라. 모든 식구가 염려하던 중 하루는 마차에 무엇인지 가득히 담은 가마니를 다섯개나 싣고 오는 것이 아닌가.
반가이 맞아들여 웬일이냐고 물으니 김제. 만경 등지에서 동냥으로 모은 것이 보리. 호밀. 감자등 다섯 가마니가 되었다고 하며 한숨을 쉬니 이 말을 들은 식구들의 비장한 마음을 여기에 표현할 수 없으며 지난날 성부님의 옥체를 찾겠다는 정성으로 추운 겨울날에 홋 옷을 걸친 채 집을 나섰던 일을 비롯하여 언제나 변할 줄 모르는 경주 아내의 일편단심에 감탄하면서 가마니를 붙들고 흐느껴 울었더라.
식모가 구해온 식량으로 반 개월 죽 거리는 되겠다고 생각하였더니 그날 저녁 진지상에 식모가 돌아오면서 준비한 주과포와 백미 한 되로 진지를 지어서 올렸는데 도령형제와 신장들이 하강하더니, 한 신장이 말하기를 “내일 밤에 식모가 구걸해 온 보리 한밀 감자등 한 알도 남기지 말고 밥을 짓고 감자를 삶아서 올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더라. 이튿날 밤에 지시대로 하여 올리니 어제 하강했던 신명들이 내려와서 “요즈음 배가 고프더니 오늘은 배가 부르도다. 성전 짓는데 부역이나 하자”하고 떠나니라. 물린 밤과 감자를 죽게 풀어 삼사일 동안 끼니를 이으니라. 선사님은 경주로부터 동곡에 돌아와서 공사를 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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