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이 기초공사 금성곡
1.신사년 십일월 동지 날 치성을 올리고 나니 천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곳에서 수년 동안을 무사히 지내왔으나 전쟁은 날로 심하여 가고 일제는 날로 포악해져가니 너희들이 이곳에서는 이 이상 더 견디어낼 방책이 없을 것이니 어서 속히 경상도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시더라. 그러나 모아 논 돈 한 푼 없이 부녀를 데리고 고향이라고 찾아든다면 환영은 고사하고 가화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한 일이라.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다섯 달을 그냥 지내고 말았더니 심중의 불안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다, 급기야는 명령계시도 중지되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약속이나 한듯 한결같이 우리를 미워하고 이르는 곳마다 봉변을 당할 뿐이다 그러자니 자연생계 또한 막연하지 않을 수 없더라. 전자에는 아무리 큰 난관에 부딪쳐도 무위이화로 잘 풀리어 수년 동안을 지낼 수 있었던 전주 땅에도 이제는 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성부의 명령을 직각 시행하지 못한 죄과에 대한 응당한 징계현상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초조한 나날을 보내다가 임오년 이월 십일에 선사와 정사는 서로 상의하여 전주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선사는 이리에서 하숙업을 경영하는 친지의 집에 계시게 하고 정사는 전남 장흥에 있는 친구집에 찾아가서 지내면서 차차 영남으로 내려갈 길을 모색하기로 결정하니라.
선사께서 수년 동안 가업삼아 해오시던 양말 꿰매는 보따리를 공장에 갖다 준 다음 선사는 이리를 향하여 떠나시고, 뒤이어 정사 또한 장흥으로 내려가서 친구의 사업을 돕데 되었더라.
정사가 일을 보게 된 집의 주인은 변호사로서 그가 경영하는 기업체에 관한 사무는 일체 총무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그의 처남을 총무로 기용하고 있었는데 총무는 허랑방탕하여 기업체의 사무는 전연 돌보지 않다시피 하던 중이라. 주인은 그러한 처남의 처사에 골치를 앓아 괴롭던 차에 마침 찾아간 정사로 하여금 기업체의 일체 업무감독을 책임 지우게 되었던 것이다.
형편이 이렇게 됨에 열심히 일한다면 성부님의 명령을 다시 봉행할 길도 열리게 되리라 생각하고 성실하게 일을 돌보고 있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주인의 처남이 하루는 많은 무리와 작당하여 장터 소시장으로 정사를 끌고 나가 칠팔 명이 집단으로 사정없이 구타를 하니 중과부적이라 어찌할 수 없이 봉변을 당했는데 한쪽 눈이 빠질 듯 쑤시고 온몸이 저리어 견딜 수 없는 정사를 방천 저쪽으로 던져놓고 저들은 술을 마시면서 하는 말이 “이제 죽게 되었을 것이니 가면서 아주 방천 밑의 냇물에다 던져 놓으리라” 하는지라. 그 자리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근근이 수습하여 눈을 물에 씻고 사오마장을 나아가면 아는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겨우 기다시피 하여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들판을 걸어 나가면서 생각하니 이 역시 천명을 어긴 소치라. 근 육년 간을 통하여 모든 지시를 받들었을 때는 인덕을 입어 무위이화로 지내던 것을 영남으로 가라고 하시는 명령을 어긴 탓이라. 그 모진 구타를 당하면서도 이것이 곧 천벌이라 감수치 않을 수 없으매 구타하는 그들을 원망할 생각은 추후도 없더라.
3.들 가운데를 건너가다가 한 곳에 머물러 동서남북으로 사배를 올리고 천상을 우러러 심고를 올리고 나서 다시 걸어 어떤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약 일개월 동안 조섭하여 약간 치유는 되었으나 가도 오도 못할 형편이라 하는 수 없이 그 집에서 거의 머슴 노릇을 하는 정사는 서글프고 어이없기 그지없더라. 전자에는 상부상조의지로 형제와도 같이 다정하게 지내든 사이었는데 웬일인지 인심이 돌변하여 쌀쌀하기 그지없으니 이는 모두 천명을 받들게 하기 위한 신명들의 역사로서 사람으로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지라.
만사를 체념하고 지내다가 구월에야 근근이 여비를 얻어 짚신에다 동저고리 바람으로 낡은 맥고자를 쓰고 이리를 찾아 도착하여 선사 계시는 하숙집에 당도하니 밤 열두시가 되었더라.
선사께서는 그 동안 이 집에서 친일고무공장에 다니는 직공 수십 명의 식사를 책임지고 계셨음으로 힘에 겨워 몸이 부서질 듯 괴뢰와도 하루를 누워볼 수 없이 지내온지라.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살 도리가 없어 전보나 쳐 달라고 주인한테 애걸하였더니 정사께서 마침 오시기는 하였으나 장차 어찌해야 하오리까” 하고 한탄하시더라. 그렇지 않아도 막막하던 차에 선사의 한탄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혀 이제는 만사가 다 끝났다는 생각 밖에는 딴 생각이 나지 않아 내일로 둘이서 군산 바닷물에 빠져 죽을 도리밖에 없노라 하였더니 선사 또한 동의하심에 그날 밤은 피곤한 몸을 깊이 잠들지 못한 채 하숙집 구석방에서 세우니라.
날이 밝으니 선사는 하숙집 조반을 해주고 나서, 둘이서 잠시 군산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역에 나가 기차표를 사게 되었는데 돈 칠전이 부족한바 어디에서 구할 수도 없어 어쩔 줄을 모르는 채 대합실에 앉아 멍하니 있자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차표를 살 돈이 부족하여 군산에 가지 못하게 되는 것도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소, 생각컨데 우리가 바닷물에 빠져 죽은들 무슨 신통한 일이 있겠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런 죽음을 하게 되면 천지신명도 노하실 것이며 죽어도 좋은 곳에는 가지 못할 것이니, 수중고혼이 되고 보면 원귀가 되어 자손에까지 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며, 또한 고향에서라도 알게 되면 부질없이 중년 남녀가 바닷물에 정사했다 하여 비로소 자자할 것이니, 그런 꼴이 어디 있소, 내가 전주로 들어가서 전당포에 재전당 수속을 하여 약간의 노자와 옷 한 벌을 빼어 올 터이니 무슨 수를 해서라도 경상도로 내려갈 길을 열어봅시다. 만일 매사가 불여의하여 몸을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될 경우가 닥쳐오더라도 경상도 땅에 가서 버려야 옳을 것 같소” 하시는지라. 그 말씀에 뜻이 있음으로 선사를 전주에 가시도록 한 뒤 정사는 동이리역에서 막차가 오기까지 대기하기로 하였더라.
해가 이미 저물어 밤이 되어서야 도착된 막차에 타고 온 선사는 마치 거미 같은 모습으로 차에서 내려오시는지라 복장이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한참동안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자니까 선사께서 “계획대로 되었으니 하숙집으로 가자” 하시는지라 알고 보니 일금 이십 원과 옷 한 벌을 얻어 왔더라.
4.하숙집에 가서 이틀 동안을 쉬면서 서로 상의한 결과 갑자기 고향에 내려간들 별 방책이 없을 듯하니 어느 곳이고 적당한 산골짝에 들어가 돼지우리 같은 산막이라도 한 칸 준비해 놓고 오면 둘이서 솔잎이라도 먹으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기필코 무슨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우선 정사 혼자서 먼저 고향에 다녀오기로 하였더라.
정사가 고향에 다녀 올 동안 선사는 하숙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니 어떤 집에 고생을 무릅쓰고 다녀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시는지라 이리저리 생각하여 보니 전자에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에 있는 모 금광에 광주대리로 수년 동안을 일할 때 사귄 우경주가 지금도 그 광업소에 살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정사는 미리 정황을 살피기 위하여 상개리를 향하여 집을 떠나 상개리에 이르러 보니 경주는 그곳에 그때까지 살고 있었으나 지내는 형편이 말이 아니라 경주형제는 돈벌이로 타관에 나가고 가족은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터라 점심을 먹은 뒤 사정을 이야기하고 고향에 다녀올 동안 선사를 부탁한다고 하였더니 경주의 가족은 거처도 불편하고 식사도 험하여 걱정이라고 하기에 그럼 여려는 말고 사람이란 수시 형편에 따라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고 하며 거듭 부탁을 하고 나서 이리로 돌아 오니라.
경주의 집 주소를 적어 선사에게 드리고 혹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옷고름을 타서 매고 다시 한쪽은 손에 쥐고 가시도록 하여 찾아갈 노정을 일러드린 다음 이튿날 서로 작별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뇌성이 대발하는지라 피차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더니라.
5.선사와 헤어진 뒤 고향땅에 들어서니 오륙년 동안 편지 한 장 부치지 않다가 뜻밖에 돌아간 모습이 하도 남루할 뿐 아니라 경진년 유월 육일에 성부의 인도하심을 입어 시루봉에서 몸을 해부하고 재생신이 된 뒤로 어느 때에 대식욕이 나면 무척 많이 먹게 될 것이라 하시더니 월여 전부터 식욕이 발동하였으나 곤고한 환경에서 양을 채울 도리도 없는 터에 염치를 불구하고 들어선 집안사람들에게 내용을 통정할 수도 없어 차려준 밥상에 오른 간장까지를 다 부어 먹고 빈 그릇만 내놓으니 식당의 제수나 누이동생들은 객지에 다니다가 얼마나 못 먹었으면 저러랴 하여 밥을 많이 담아서 주었으나 그런 정도로서 양을 채울 수는 도저히 없는 형편에 솟아오르는 식욕을 억제하고 다섯 달 동안을 지내자니 비위만 상해 견딜 수 없더라.
생각컨대 그때에 나타난 생리적 변화에 순응할 수 있는 식사조건의 문제로 말미암아 성부님께서 말씀하신바 득체의 기회를 일실한 것 같으며 그 뒤 십여년을 두고 설사를 하게 된 것도 그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딱한 정사 밑에서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어 생각하던 끝에 하루는 서로 통정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신앙동지인 김성도를 찾기로 하였다.
성도는 약 백리 밖에 사는 분으로서 평소에 생사를 같이 할 수 있을 만한 신앙동지였던바 오랜만에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동안 그립던 정회 이루 헤어 릴 수 없었던지라.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니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인 그는 감격하여 눈물겨워 하더라.
이에 정사는 증산천사님의 도법을 널리 세상에 들어 내놓기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하자고 간청했더니 성도는 쾌히 응락 하는지라. 하늘이 결코 무심치 않으심을 새삼 깨닫고 경상도로 내려가라고 그렇게 추상같이 명령하시던 성부의 지시를 생각하여 황송하고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더라.
성도와 상의한 끝에 그의 주선으로 백여원의 금액을 준비하여 그와 더불어 완주군 이서면에 선사를 찾으니 선사는 비록 험식 이나마 몸에 그다지 큰 이상이 업이 잘 지내고 계시더라.
이튿날로 선사를 모시고 경상도로 다시 내려가려는데 경주네 가족은 그 동안 정이 들어 우리를 따라오겠다고 청하는 것이었으나, 제반 준비 관계로 아직은 그럴 수 없다 하여 후일을 약속하고 떠났는데, 경상도에 들어서면서 선사의 몸은 점차 새로운 기력을 얻게 되었으며, 기지를 선정할 때까지는 성도의 집에 유숙하시게 되었더라.
김성도는 우리 부부가 성부의 명령지시도 이행하지 못한 채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할 때에 우리를 구해주고 우리의 힘이 되어준 은인이다. 선사와 더불어 남매의 의를 맺게 되니 하늘에 계시는 성부님께서도 우리의 결연을 가상타 칭찬하시는지라. 이후 교중연원이 성부를 중심하여 서로 형제 자매되는 가족적 분위기를 이룩하게 되는 첫 인연이 되었더라.
6.성도의 집에 여장을 풀은 첫날밤에 성부님의 지시가 계셨으니 “너희들이 내가 지시하던 직시로 왔으며 그 고생이 없었을 터인데 명령에 순응하지 않았으므로 일년 동안을 헛고생을 하였노라. 이제부터 새로운 결심을 하여 성도와 상의하여 공사를 진행하되 기지는 금성산에다 정할지어다.” 하시더라.
금성산은 경북 의성군에 소재하고 있어 영천 이씨의 대 문중이 수 백호를 이루어 세도가 당당한 곳이라. 그 안에 들어가 제반 공사를 받들기가 여의치 않을 뿐 아니라 또한 기지를 얻기도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매사에 성부님께서 친히 도우시는 것을 자각하여 마음을 바로잡고 성도와 의논하여 금성산하 동리와 훨씬 떨어진 곳에 정할 것을 결정하고 현지에 나가 두루 답사한 바, 금성골에 이씨 문중에서 세운 용문정이 있는데 그 옆에 농막 한 채가 있어 수년을 비어 두었고 곁에 또 한 채에는 산직이가 근 십년 동안이나 살며 산을 보고 농사를 지으며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정사는 비어 있는 농막을 얻어 쓸 계획으로 같은 고향사람 정치건을 시켜 이씨 종가에 보내서 교섭하였으니 치건은 정사가 시키는 대로 주인 영감이 만나보자고 하기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사정을 말하니, 주인 영감은 그의 문중과 우리와는 세교가 있음으로 거절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나간다는 풍문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으니 우선 비어있는 집을 수리나 하여 들어가 살도록 하라고 승낙 하여 주더라.
7.그날 밤 성도집에 돌아오니 성부께서 또 명령하시기를 “경주네 가족을 데려다가 십이월 이십육일에 입택 하라. 그리고 혈식은 청송 본가에 가서 새해를 맞이하고 계미 정월 이십사일에 입택토록 하라”고 하시더라.
몇 칠이 지난 뒤 금성골에 가보니 농막에 사는 사람이 나가지 않고 살고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농지를 반씩 나누어 소작하기로 계약을 하게 되니, 그들과 이웃해 산다면 공사 진행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들에 대하여 의심을 풀어 소문을 퍼트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화은당을 청송 본가에 모시고 그 길로 전라도로 넘어와서 경주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임오년 십이월 이십사오 양일간 비여 있던 집을 말끔히 청소하고 이십육일에 가마니를 둘러치고 입택을 하였다.
때마침 식량 사정이 곤란했던 일제 말기 배급시대라 생계가 어려워 걱정하던 중에, 우연히 동리 주인의 주선으로 공출할 가마니를 만들게 되어 약간의 특별 배급으로 생활하였다.
계미년 정월 이십사일 청송 본가로부터 금성산을 찾아 화은당께서 입택 하시게 되었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금성비봉의 산천이 진동하고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오니 온 동리 사람들은 물론 근동이 모두 놀래지 않을 수 없더라.
그 뒤 수개월간을 두고 하루도 빠짐이 없이 소리가 요란하여 동리 사람들 놀라게 하니 급기야는 금성산에 객호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부근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금성산을 포위하고 일대 수색을 전개하였으나 객호는커녕 노루 한 마리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배급 쌀 네 말을 준비해온 그들의 점심을 우리 집에서 지어 주었는데 그날 밤에도 역시 소리는 여전히 울려오고 마을 사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길 뿐 어찌된 일인지를 몰라 궁금해 하였다.
선사(화은당)께서 입택 하시도록까지 이웃 농막에 사는 산직이가 이사하지 않고 있었음에 선사께서는 놀래면서 천장지비의 신비한 공사를 진행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문전에 살게 되면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을 것이라고 걱정하시어,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입택 고유를 하니 성모께서 하강 하시와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큰일 났구나, 동리에서 일마장이 훨씬 더 떨어진 은벽한 곳이라야 공사를 받들 수 있을 것인데 보아하니 너의 집 앞에 옛날부터 살아 나온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사를 하지 않았은 즉 공사에 지장이 많을 것이니 그들을 딴 곳으로 이사를 보내도록 해야 되리라.그러나 너희는 누구를 대할지라도 덕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앞으로 그들을 대할지라도 혼연하게 하라. 모든 것을 내가 알아 처리할 것이니 오는 이월 이십일까지만 기다려보라” 하시니라.
그 뒤 명령대로 혼연하게 대하는데 과연 이월 이십일 식전에 동리 사람 십수명이 와서 이사짐을 저 나르는지라 “뜻밖에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삿짐을 모두 지어 보낸 다음 서서히 말씀드리고 떠나겠습니다.” 하기에 경주 형제로 하여금 이사짐 나르는데 조력토록 하니라. 이윽고 산지기 내외가 하는 말이 “당신들이 온 후로는 웬일인지 밤으로 무서워서 지낼 수가 없었나이다 그전에는 십년을 살아도 무서운 일이 없었는데 금성 비봉에서 새벽마다 천둥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밤이 되면 큰 호랑이가 문전에 와서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바윗돌이 들석들석 하도록 지동소리가 요란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어젯밤에는 그만 대소변도 나오지 못한 채 방안에서 치루고 나니 하루가 여삼추라 배를 짜다 말고 오늘 새벽에는 동리에 내려가서 우선 방 한 칸을 얻어 택일할 것도 없이 도망치듯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그리 아시오” 농사와 농우까지 다 버리고 가니 모든 일이 이와 같이 경험이 있는지라, 우리는 속으로 놀래며 즐거운 마음 그지없었다.
8.그 해 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일 치성을 마치고 나니 집을 지으라는 명령이 내리시더라. 집 모양을 우물정자 형으로 지으라시는데 정자형 집을 어떻게 지어야 될지 언뜻 설계가 서지 않더라. 그러나 좌우간 제목이나 구하여 놓고, 목재를 구한 다음에 성주 할 날짜는 임박해 오는데 도무지 설계가 서지 않아 골몰하던 중 하룻밤은 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더니, 정자를 두고 그 둘레 사방을 막으면 삼삼은 구로 아홉궁이 되는지라, 아홉 궁은 곧 아홉 칸을 뜻하는 것인즉 아홉 칸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는데, 가운데 칸과 뒷 칸을 두고 또 샘을 파게 될른지도 모르니 비어 두기로 하고 연구해 볼 때 이는 아홉 칸 집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계를 확정하고 공사를 진행시켜 연자까지 걸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한 노인이 내려와서 건축한 집터를 살펴보고 백기를 세워 폐철을 놓아보더니, 그 동안 천상일이 바빠서 미쳐 내려와 일러주지 못했는데 이곳은 집터가 못되니 정자 밑으로 정하라 하면서 그곳에서 홍기를 세우면서 이 자리로 하라 하시고, 발을 세 번 굴리더니 천상으로 올라가시더라.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가운데에서 진심갈력하여 근근이 집을 다 얽었는데 이제와서 집터가 부당하니 그 자리를 옮기라는 지시가 내리니 어이없는 마음 울고만 싶었다.
그때는 태평양전쟁도 종전을 앞둔 마지막 고비에 접어든 때라 곳곳마다 선재의 공출이 심하여 재목 구하기가 몹시 어렵게도 되어서 도시에서도 건축을 중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주인영감의 주선으로 어렵게 금성산에서 재목을 구하여 조립하였는데 이제는 다시 사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집을 짓다 중단하고 터를 다시 잡아서 옮긴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어서 어이 할 바를 모르는 채 아침에 목수들의 작업을 중지시키고 홀로 정자에 올라 아득한 정신을 수습하고 앉아 있는데 오전 열시쯤 되어서 주인댁의 하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사랑 영감님께서 오늘부터 집 짖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라 하시면서 정오에 이곳에 나오시겠다고 그 뜻을 속히 전하라 하심으로 왔나이다”고 하더라. 정사 하인을 대하여 “오늘은 목수들이 쉬는 날이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전언하라”고 일러서 보냈다.
9.하인을 돌려보내고 생각하니 어젯밤 천상 노인의 하신 말씀과 오늘 주인영감의 작업중지 통고에는 기필코 무슨 이치가 내재하는 듯 오료를 준비시키고 기다리는데 과연 정오가 되어 주인 영감이 찾아오므로 응접을 하고 이어 오료를 차려 대접하였다. 주인 영감은 곧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차마 어려워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나 망서리고 나더니 겨우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내가 구암에게 간절히 할말이 있으나 말하기가 난처하다”고 하기에 “그러실 것이 없노라”고 하니 사실인즉 이 터는 벌써 오래 전부터 종중의 경영 예정지로 되어 있는 곳이며, 원래는 타인에게 허락할 수 없는 기지였으나 세월도 분분한 이때에 마침 구암의 청이 있어 예정지를 타처로 정하고 승낙을 했던 것인데, 어제 밤에 이상한 동기가 있어 나로서는 도저히 이 터를 내어줄 수 없게 되었네 그러한즉 딴 곳에 터를 잡도록 하고 이축 비용은 내가 담당할 것이니 미안하지만 이 터를 물려주어야 되겠다는 걸세, 미안하기 그지없어 말하기가 퍽 난처했던 것이네” 하는 주인의 말을 듣고 정사는 “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입택을 하였다 할지라도 옮겨야 될 일이라면 옮겨야 되지 않겠습니까”고 부드럽게 응락하니라.
이에 주인영감의 심정도 명쾌해진지라 직석에서 정사를 이끌고 새로운 기지를 찾아보자고 하여 수개 처를 돌아보고 난 뒤에, 전날 밤에 천상의 노인이 홍기를 세워보인더 곳에 가서 폐철을 놓더니, “이 자리는 옛날에 진주 강씨 한 분이 명풍을 데리고 와서 자기 선영의 묘지로 하겠다고 거액을 주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류하던 터인데, 과연 터는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집 세울 터와 날까지 잡아 주고 가니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할 때 신기하고 영험스러웁기 그지없더라.
수운선생 말씀에 “운자하방오부지(運自何方吾不知)라 하셨는데 실로 운이란 어느 방위를 좇아오는 것인지 오기 전에는 나도 또한 이를 깨달을 수 없다 하신 그 말씀의 뜻을 실지 경험을 통하여 실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으며, 이 현현묘묘한 섭리적 행사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채 다만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에 자부하고 새김 하였을 뿐이었다.
10.그 뒤 새로이 잡은 기지를 밤낮으로 닦아 계미년 시월 십오일에 상량을 하고, 십이월 이십육일까지 완축하여 입택을 하고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옵서 강림하시와 돌아보시고, “내가 앉을 정도로 지하에 비밀실을 파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밤을 이용하여 굴을 다 파고 나서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다시 하강하시와 말씀하시기를 “귀틀을 튼튼히 짜고 마루를 잘 놓도록 하라. 그리고 한편 벽 밑으로 문호를 내어 왕래하되 외인이 보아도 표가 없게 하고 후원 산밑으로 연속하여 한 칸을 더 파도록 하라” 하시니라.
하명하신대로 공사를 끝마치고 갑신년을 맞으니 성부님께옵서 또 하강하시와 “잘 되었다.”고 칭찬하시고 나서 이미 파고 나오는 김에 한 칸만 더 파라”고 하시니라.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한 칸씩 파라고 명령하시매 우리는 그 명령대로 행하여 지하실은 어느덧 길이 육간에다 중간 좌우로 한 칸씩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질은 단단하고 철분이 섞여있어 무너질 염려도 없었으며 습기도 없는데다 드나들어도 의복에 흙도 묻지 않는 깨끗한 방이다.
그 안에 칸칸이 나무기둥을 세우고 마지막 칸은 길이와 넓이를 아홉 자로 하여 옥경대라 칭하고 사방에 미닫이를 달며 바닥에는 마루를 놓아 오색으로 단청을 한 다음, 성부 성모님의 영상과 국조 단군의 영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부께옵서는 크게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날이 가고 밤이 잦으면 알게 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에게 한꺼번에 이러한 지하실을 파도록 명령하면 정신이 아득해서 겁을 집어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인즉 한 칸 한 칸 또 한 칸씩 파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파고파고 또 파다가 보니까, 이러한 거창한 지하실이 되지 않았느냐”고 위로의 말씀을 내리시더라. 성부 재세시에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이 파면 모두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남기셨던 일을 회상함에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11.그 뒤 수개월동안 여러 가지로 명령이 계시어 그대로 봉행하던 중 하루는 “태극기와 미국기를 그려 높이 걸고 소를 잡아 마당 가운데 진설하고 치성을 올린 다음 지하중궁의 영상후면에 걸어 두라”는 명령이 내리더라. 일제 말기에 있어서 이와 같은 명령의 수행은 실로 어려운 일이였으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공사는 그 하나라도 발각이 되는 날이면 일제의 소의 치안유지법에 저촉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일제의 칼날의 위해를 의식하는 행사라 할지라도 봉행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하명대로 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이 진행되자 아랫 동리에서는 경찰관과 경방단원이 파견되어 불을 끄라고 외치면서 곧 적기가 내습해 온다고 하면서 방공연습에 한창이더라. 그 뒤 시국은 더욱 악화되어 집집마다 방공굴을 파느라고 분주하였다.
그날 밤을 경과하고 중궁에 조반 진지상을 올려 예를 드리자니 성부님께옵서 말씀 하시기를 “이 뒤로는 쇠솥에 지은 밥은 내가 먹지 않을 것임에 옥석정을 구하여 오라” 하시더라.
명을 받고 이것도 역시 힘드는 일이라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경주 건천에 사는 이준의노인과 이환우 의 부친 종허노인 두 분을 찾아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떠났다.
이 두 분은 노소의 처지이나 신앙을 중심하여 비롯된 진진하게 마음을 주고받던 동지라, 십여 년을 통하여 서로 통정하는 처지일 뿐 아니라 종허 노인에게는 정사의 나이 젊었을 때 현무경을 맡겨 둔 일이 있었던지라 그곳에 가면 무슨 묘책이 생기리라고 생각하였다.
종허 노인에게 현무경을 맡기게 되고 또 그것을 구해오게 된 경로는 다음과 같으니라. 즉 정사의 나이 이십사세 때에 청도 풍각의 어느 곳을 지내다가 졸지에 뇌성이 대발하고 폭우가 내리는지라 비를 피하여 어느 집에 찾아드니 주인은 풍병 환자요 부인은 맹인이라, 잠시 피우를 하려든 것이 좀처럼 비가 개이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저녁밥을 먹고 그날 밤을 세웠으나 비는 이튿날에도 개이지 않은 채 시냇물은 넘쳐 흘러서 건널 수가 없으므로 또 한 밤을 더 쉬게 되었다.
내외가 모두 병신이라 딴 사람들의 출입이 희소함으로 그들은 정사를 매우 후대하면서 피차 위로함이 지극한지라 마음에 미안함을 금할 길 없어 적적하고 또한 궁금한 판에, 혹 읽을 책이라도 없나 하여 사면을 두루 살펴보니, 한자로 된 글귀와 많은 부적이 그려져 있었음으로 이상하게 느끼어 주인에게 책의 내력을 물은즉, 주인은 이년 전에 한 과객이 들렸다가 자기병을 보고 그 책에 있는 부적을 그려서 먹고 기도를 지성껏 올린다며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맡겨놓고 간뒤 곧 돌아온다는 사람이 이년이 다 되었어도 종무소식이라고 내력을 설명 하고나서, 그러나 자기는 무식한 사람이라 그가 시키는 대로 한번도 해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 책을 자기에게 빌려 준다면 경주에 사는 유명한 학자에게 보여 감정을 받은 뒤에 돌려주겠다고 청하여 그 책을 얻어 가지고 경주에 가서 종허 노인에게 보이니 깜짝 놀라면서 이 책은 현무경이라 평소에 한번 구해 보고자 하던 차라고 기뻐하면서 자기는 등서를 할 것이요 원본은 언제까지라도 용처가 있을 때까지 보관하겠다고 한일이 있었었다.
이상과 같은 일이 추억이 되어서 종허 노인을 찾아 환우의 집에 들리니 마침 작은 아들의 집에 출타중이라 곧 기별하여 뵈옵게 되었으며 현무경을 구하려 왔노라고 말하니, 그는 그동안 누차의 수색과 압수에도 불구하고 현무경만은 땅속에 보관해 두었노라고 하면서, 제반 명령의 내용과 공사의 진행관계를 듣고 나더니 몹시 기뻐하더라.
14.현무경은 구할 수 있었으나 옥성정은 구할 방법이 막연하여 종허 노인에게 명령 내용을 말씀드리고 조력하기를 청하였더니 둘이서 건천에 사는 준의라는 노인을 찾아가 서로 상의하자고 하여 다음날에 건천을 향하여 환우의 집을 떠나니라.
당시는 경주 남산은 일본 사람들이 일반인의 통행을 통제하여 고적 보존지로 결정한 바 있어 그 안에서 돌 안경 하나 구해오기 어려운 때라 저윽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더라.
그러나 세 사람이 앉아 야심토록 생각에 잠겨 있는데 준의 노인은 무릎을 치면서 “허 참 내가 내 집에 놓아두고 딴 궁리만 하였네”하면서, 여덟 해 전에 어떤 사람이 돌솥 하나를 가지고 와서 약을 다려먹으면 좋다고 하기에 사서 철사로 얽어 후원 연자끝에 달아 메어둔 것이 이제 생각이 난다고 하므로, 세 사람은 촛불을 밝혀 후원에 나가 살펴보니 과연 거기 돌솥 하나가 매달려 있더라.
그러나 끄시럼과 얽히어 있는지라 씻고 닦고 하여 가지고 오기로 하였다. 그 돌솥은 밥 네 그릇 정도 들만한 것이었는데 세 사람은 모두 기뻐하여 마지않았으며, 술상을 차려 주고받으며 하루 저녁을 지낼 적에 명령만 순종하여 행하면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는 성부님의 홍은에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이튿날 준의 노인과 동반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현무경과 돌솥을 영상앞에 올리니, “현무경은 보관하고 솥은 곧 진지를 지어 올리라”고 하심으로, 그대로 봉행하였던 바,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다시 할 일이 있으니 시키는대로 하라. 이제는 나의 체골을 찾아 와야 할 것이니라”고 하시더라
성부님의 체백을 모시고자 함은 우리의 평생 소원으로써 이제 와서 비로소 이와 같은 명령이 내리시니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명령대로 봉행하여 이루지 못한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평생소원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열리어 오나보다고 선사는 하늘에 사무치는 망극하기 짝이 없던 그 심정을 통곡으로 풀으시고, 우리 또한 비상한 각오로써 그 명령을 준행키로 결심하고 상의한 끝에, 경주로 하여금 정읍 차교주의 집에 가서 몇 달을 한정하고 일꾼 노릇을 하며 제반 동정을 살피도록 일러 파송하였더니, 경주는 대흥리에 가서 그 집 일꾼으로 들어가 수개월을 두고 이 곳 저곳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리 하여도 이렇다 할 증거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한곳에 의심나는 곳이 있었으니 그는 곧 차씨의 사당이라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서 김성도와 오갑출을 증파하여 더욱 확실하게 찾아보았더니 세 사람은 어느 날 깊은 밤을 틈타서 사당안에 들어가 두루 수색하여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니라.
집에서는 틀림없이 체백을 모시고 오리라는 생각으로 의관문물이며 신발 재터리 세수대야등 일체를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이 허행하고 되돌아오니 모두 정신이 암암하고 맥이 빠져 넋을 잃은 체 중궁에 들어가 엎드리니, 성부님께옵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아비 뼈골을 찾지 못하였으니 중궁 동편에 빈소를 차리되 옷 나무 칠성판에 글을 쓰고 의복 일습을 올려 모셔 놓고 너희들은 복을 입어 상주 노릇을 하되 빠짐없이 진지상을 올리고 애곡하라”하시더라. 이에 우리들 일동은 하명하신 바를 준행하는데 성부님께옵서는 종종 천지신명과 더불어 현현한 공사를 행하시더니라.
16.갑신년 윤사월을 당하여 하명하시되 “금성산에 묘소를 정하라” 하시매 종허노인과 답산을 하여 용가마골 절벽암상 뒤에 묘지를 정하게 되자 “지상여를 만들어 이틀 동안 중궁에서 애곡하며 상여놀음을 하고 십오일 밤에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니라.
우리는 중궁내에서 아름다운 꽃상여를 만들어 열사흘 날부터 주야로 상여놀음을 하게 되었는데 밖으로 탄로될까 두려워 지하실 밖에는 보초를 세워 이 예식을 거행할 때 외인들이 마당까지 드나들고 관청사람들로 내왕하였으나 다행히 밖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사히 마칠 수 있더니라.”
보름날 밤이 되어 상여를 메고 산상에 올라가게 되는데, 상여 전후에는 도령 영상을 세우고 운상 소리를 하라는 호령이 나리어, 종허 노인이 앞소리를 메기고 일동이 받으면서 용가마 밑에 도착하였는데, 그 앞으로는 절벽이라 도저히 운상을 할 수 없게 되었더라. 이에 짐을 부리고 상여를 내려놓은 채 등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계속해서 운상하라고 하시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계속하였는데, 혼자서도 올라가기가 힘든 지형임에도 평지와 다름없이 운상 할 수 있었으니 실로 기이하고도 놀랍지 않을 수 없더라. 이와 같이 하여 산에 다 달아 장지에 평장으로 장례하고 모두 무사히 집에 돌아오니라.
17.이튿날 치성을 올리니 또 하명하시기를 “너희들이 그만큼 울었으니 이제부터 세상 울음이 터져 나오리라” 하시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우리의 행할 바를 지시하시더니 “너희들은 이제부터 치성을 올릴 때에 잔만 올리고 가사를 지어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된다”고 하시니, 가족 전원이 모여 수일동안 치성을 올리고 춤을 추니라.
우리가 지하실안의 공사에서 울음을 마치고 나니 동리마다 귀중한 장정들을 전쟁에 보내게 되어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거리와 정거장마다 곡성이 진동하니라.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가사를 지어 앞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를 받으면서 춤을 추는데 성부님께옵서 명령하사되 “기운이 적다 힘차게 노래하고 힘차게 춤을 추라”고 하시어 번을 짜서 교대하면서 노래와 춤추기를 쉬지 않았으니 이러기를 한달에도 몇 번씩이나 하였다.
18.유월 그믐날에는 중공에 난데없이 생수가 터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만큼 솟아오르더라. 평소에는 장마철에도, 간단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은 잠시 동안만 멈추어도 옥경대에 물이 올라갈 정도이어서 주야로 쉴 사이 없이 퍼내다가, 샘구멍을 조사하니 석벽사이로 엄지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 하더라.
쉴새없이 나오는 물을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어이된 일이오니까” 하고 심고하니, 성부님께옵서 말씀하시기를 “그 물줄기에 정성을 다 하여라. 앞으로 운수가 닥쳐올 때에는 이 생수 나오듯 하리라”고 하시는지라.
그 뒤로 이틀 동안을 푸고 나니 약간 덜 나오는데 천상으로부터 다시 하명이 계시어 “영상 앞에 우물을 파되 넉자 깊이로 하고 그 위에 뚜껑을 만들어 덮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말씀대로 우물을 파니 그렇게 쉴새 없이 솟아오르던 물은 우물안에 가득이 만수가 되더니 넘치지도 줄지도 않더라. 그물로 청수도 모시고 식수로도 사용하라는 말씀이 계시자, 처음 우물정자 집을 지을 때에 나중에 우물을 파게 될련지도 모르니 가운데의 한 칸을 비워두자고 했던 지난 일이 회상되어 신명공사의 현묘한 이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19.하루는 홀연히 생각하니 성부의 수족골 일부를 조절체가 회문산에 모셨다고 하는 풍문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서 답사함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되어, 정사는 갑출을 동반하고 회문산을 찾아 금성골을 떠났더라.
회문산에 당도하여 산직이를 찾아서 물으니 아무개의 산소인데 묘도 이미 파버리고 위토도 팔아갔노라고 한다. 그러나 그 묘자리나 일러달라고 하여 동리 맞은편에 있음을 알아내어 두 사람은 무슨 채약이나 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괭이를 둘러메고 가보았더니 삼사년 동안이나 발초한 흔적도 없는지라. 묘를 파기 시작했으나 동리가 바로 보이기 때문에 얼마 파지 못하고 망서리고 있자니까 난데없는 안개가 서리더니 동리앞을 가리웠다.
이에 두 사람은 천기로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모양이라고 용기를 얻어 단숨에 묘를 파는 갑출이 무엇인지 여문 것이 마치는 것을 보니 틀림없다고 좋아하더라. 그러나 다 파고 보니 나무둥치가 나올 뿐이다. 속히 되묻고 나니 안개가 거치며 다시 청명한 날씨가 되었다.
산직이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하룻밤을 경과하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눈치를 살피니까 조철제도 관가의 수배를 받는 몸이 되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성부의 수족골은 어느 다른 교파에 의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진 증거가 완연하여 절통하기 짝이 없었으나 하는 수 없이 돌아오니라.
20.수일 후 집에 돌아와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는데 큰 금부처가 들어오시더니 “나는 미륵불이라 앞으로 내가 출세하야 중생으로 하여금 해원 상생 보은의 법도를 마련하여 제도함과 아울러 조화정부를 세워 선경세계를 건설하리라”하시면서, 금성산에 천신과 지신을 위하여 큰 치성을 올리도록 하라고 명령하시기에 이튿날 치성 준비를 하여 예를 올리니 천기도 이상하고 기적적인 일도 많았더라.
그 뒤로 치성을 올리면 천신이 한 분씩 꼭 하강하여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시곤 하였는데, 한번은 관운장의 영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중국사람이나 이 나라(한국)을 세번 도와줄 운장인데 강부인은 나를 이기려고 하지를 마오”하는지라 선사 대하여 말씀하시되 “이 자식아 낮짝은 대추빛 같은 자식이 무슨 잔소리야! 일본 사람들이 네 나라를 쳐들어가니 너의 집이나 가서 돌보아라” 하시니, 운장은 허허 웃으면서 “작은 체구로도 천사님의 딸이라 다르다”하며 농담을 하기도 하더니라. 이밖에도 금성 비봉산령이 수시로 발동하여 우리 일을 크게 돕고 보호하였다.
21.갑신년 구월 십구일 기념행사를 거행하니 운장께서 하강하시어 “성모님의 산소가 공동묘지에 있지요 그런데 방금 도적놈들이 들석들석하니 곧 가서 모셔다가 금성산 대관령에 모시게 하시오”하기에, 정사는 성도와 동규 양인을 동반하고 태인 공동묘지에 가서 체골을 모시고 와서 구월 이십구일에 대관령에 터를 잡아서 천광을 하니 터가 좋은지라. 묘를 쓰고 봉분을 크게 지어 벌안도 널찍하게 잡으니 영영 안장지라 화려하게 장사지낸 후 돌아와서 뒷날 알아보니, 그 자리는 곧 영천 이씨네 산으로 그들 문중의 정자의 원룡이더라.
시끄러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의구지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 와서 어찌하는 방책이 없어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지내는 중 하루는 묘소에 가서 공사를 보게 하시더니 정사로 하여금 이튿날로부터 백일을 기약하고 매일 정오에 산소에 가서 사방배로 기도를 하라고 명명 하시더라.
산은 높고 수목이 울밀한 고로 대난에도 적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으나, 명령대로 날마다 내왕하면서 사방배를 올리고 기도를 하면서도, 혹 산주나 그 동리 사람의 눈에 띄일세라 마음이 여간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경과하기를 겨우 일년 반이 되는 날에 금성산 산령이 와서 전하기를 “천사님께서 경주 단석산에 계시면서 내일은 속히 단석산에 와서 기지를 정하고 성모님의 묘소를 옮기도록 하라 하시더라”고 전하더라.
우리는 지체함이 없이 이튿날 단석산에 가서 터를 정하고 을유년 이월 이십구일에 파묘하여 옥체를 일단 장대골 궁중에 모셨다가 삼월 하순에 이안 장례식을 거행 했던 바, 그 뒤 열흘이 못되어서 대관령에 누구인가가 묘를 썼다고 하면서 영천 이씨들은 문회를 열고 다음날에는 문중이 총동원하여 묘를 파보았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음으로 모두들 소골된 모양이라고 하면서 뿔뿔이 헤어져 돌아오니, 우리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성모님 옥체를 단석산에 이장하게 될 때 이 경우 집에서 제물 일체를 준비하게 하였는데, 마침 근방에서 황소를 밀도살하게 되어 그 고기 일부를 얻어오고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제수를 장만하려다가, 경찰에 정보가 들어가 순사들이 출장나와 수색을 당하게 됨에, 명전이나 축문 납패등은 다행이 발각하지 못하였으나 고기가 문제되어 답변에 궁한 나머지 경우는 부득이 자기처의 이장을 위하여 약간의 제수를 장만하게 되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였더니, 경찰관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선 이장을 마치고 다음날 주재소로 출두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성모님의 이장을 끝낸 뒤로 주재소의 심문에 대비하여 자기의 처의 이장을 한다 하였으니 그 증거를 준비하여야 하는 딱한 처지었다. 경우부자는 상의한 끝에 부득이 처의 묘를 파서 아무곳에나 묻은 다음 주재소에 나가 적지않은 물품을 선사하였지만는 끝내 용서할 기세를 보이지 않더라.
그때는 해방되기 삼 개월 전이라 일제의 통제가 극도에 달하여 소나 돼지등을 허가가 없이 밀도살하면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여 가지고 욕을 보일 때였으며, 또한 묘지법이 엄하여 가족 묘지나 또는 공동묘지에만 매장하게 되어 있던 당시의 군국치하에서 여러 번의 향응을 베푼 뒤에야 겨우 모면하였다.
이 일은 삼 개월 뒤에 조국광복을 맞기는 하였으나 경우의 처의 묘소는 그들의 형편이 풀리지 못하여 아직도 좋은 자리를 찾아 옮기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으니 일후 형편을 보아 공중에서 자리를 잡아 이장하여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1.신사년 십일월 동지 날 치성을 올리고 나니 천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곳에서 수년 동안을 무사히 지내왔으나 전쟁은 날로 심하여 가고 일제는 날로 포악해져가니 너희들이 이곳에서는 이 이상 더 견디어낼 방책이 없을 것이니 어서 속히 경상도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시더라. 그러나 모아 논 돈 한 푼 없이 부녀를 데리고 고향이라고 찾아든다면 환영은 고사하고 가화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한 일이라.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다섯 달을 그냥 지내고 말았더니 심중의 불안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다, 급기야는 명령계시도 중지되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약속이나 한듯 한결같이 우리를 미워하고 이르는 곳마다 봉변을 당할 뿐이다 그러자니 자연생계 또한 막연하지 않을 수 없더라. 전자에는 아무리 큰 난관에 부딪쳐도 무위이화로 잘 풀리어 수년 동안을 지낼 수 있었던 전주 땅에도 이제는 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성부의 명령을 직각 시행하지 못한 죄과에 대한 응당한 징계현상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초조한 나날을 보내다가 임오년 이월 십일에 선사와 정사는 서로 상의하여 전주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선사는 이리에서 하숙업을 경영하는 친지의 집에 계시게 하고 정사는 전남 장흥에 있는 친구집에 찾아가서 지내면서 차차 영남으로 내려갈 길을 모색하기로 결정하니라.
선사께서 수년 동안 가업삼아 해오시던 양말 꿰매는 보따리를 공장에 갖다 준 다음 선사는 이리를 향하여 떠나시고, 뒤이어 정사 또한 장흥으로 내려가서 친구의 사업을 돕데 되었더라.
정사가 일을 보게 된 집의 주인은 변호사로서 그가 경영하는 기업체에 관한 사무는 일체 총무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그의 처남을 총무로 기용하고 있었는데 총무는 허랑방탕하여 기업체의 사무는 전연 돌보지 않다시피 하던 중이라. 주인은 그러한 처남의 처사에 골치를 앓아 괴롭던 차에 마침 찾아간 정사로 하여금 기업체의 일체 업무감독을 책임 지우게 되었던 것이다.
형편이 이렇게 됨에 열심히 일한다면 성부님의 명령을 다시 봉행할 길도 열리게 되리라 생각하고 성실하게 일을 돌보고 있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주인의 처남이 하루는 많은 무리와 작당하여 장터 소시장으로 정사를 끌고 나가 칠팔 명이 집단으로 사정없이 구타를 하니 중과부적이라 어찌할 수 없이 봉변을 당했는데 한쪽 눈이 빠질 듯 쑤시고 온몸이 저리어 견딜 수 없는 정사를 방천 저쪽으로 던져놓고 저들은 술을 마시면서 하는 말이 “이제 죽게 되었을 것이니 가면서 아주 방천 밑의 냇물에다 던져 놓으리라” 하는지라. 그 자리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근근이 수습하여 눈을 물에 씻고 사오마장을 나아가면 아는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겨우 기다시피 하여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들판을 걸어 나가면서 생각하니 이 역시 천명을 어긴 소치라. 근 육년 간을 통하여 모든 지시를 받들었을 때는 인덕을 입어 무위이화로 지내던 것을 영남으로 가라고 하시는 명령을 어긴 탓이라. 그 모진 구타를 당하면서도 이것이 곧 천벌이라 감수치 않을 수 없으매 구타하는 그들을 원망할 생각은 추후도 없더라.
3.들 가운데를 건너가다가 한 곳에 머물러 동서남북으로 사배를 올리고 천상을 우러러 심고를 올리고 나서 다시 걸어 어떤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약 일개월 동안 조섭하여 약간 치유는 되었으나 가도 오도 못할 형편이라 하는 수 없이 그 집에서 거의 머슴 노릇을 하는 정사는 서글프고 어이없기 그지없더라. 전자에는 상부상조의지로 형제와도 같이 다정하게 지내든 사이었는데 웬일인지 인심이 돌변하여 쌀쌀하기 그지없으니 이는 모두 천명을 받들게 하기 위한 신명들의 역사로서 사람으로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지라.
만사를 체념하고 지내다가 구월에야 근근이 여비를 얻어 짚신에다 동저고리 바람으로 낡은 맥고자를 쓰고 이리를 찾아 도착하여 선사 계시는 하숙집에 당도하니 밤 열두시가 되었더라.
선사께서는 그 동안 이 집에서 친일고무공장에 다니는 직공 수십 명의 식사를 책임지고 계셨음으로 힘에 겨워 몸이 부서질 듯 괴뢰와도 하루를 누워볼 수 없이 지내온지라.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살 도리가 없어 전보나 쳐 달라고 주인한테 애걸하였더니 정사께서 마침 오시기는 하였으나 장차 어찌해야 하오리까” 하고 한탄하시더라. 그렇지 않아도 막막하던 차에 선사의 한탄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혀 이제는 만사가 다 끝났다는 생각 밖에는 딴 생각이 나지 않아 내일로 둘이서 군산 바닷물에 빠져 죽을 도리밖에 없노라 하였더니 선사 또한 동의하심에 그날 밤은 피곤한 몸을 깊이 잠들지 못한 채 하숙집 구석방에서 세우니라.
날이 밝으니 선사는 하숙집 조반을 해주고 나서, 둘이서 잠시 군산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역에 나가 기차표를 사게 되었는데 돈 칠전이 부족한바 어디에서 구할 수도 없어 어쩔 줄을 모르는 채 대합실에 앉아 멍하니 있자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차표를 살 돈이 부족하여 군산에 가지 못하게 되는 것도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소, 생각컨데 우리가 바닷물에 빠져 죽은들 무슨 신통한 일이 있겠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런 죽음을 하게 되면 천지신명도 노하실 것이며 죽어도 좋은 곳에는 가지 못할 것이니, 수중고혼이 되고 보면 원귀가 되어 자손에까지 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며, 또한 고향에서라도 알게 되면 부질없이 중년 남녀가 바닷물에 정사했다 하여 비로소 자자할 것이니, 그런 꼴이 어디 있소, 내가 전주로 들어가서 전당포에 재전당 수속을 하여 약간의 노자와 옷 한 벌을 빼어 올 터이니 무슨 수를 해서라도 경상도로 내려갈 길을 열어봅시다. 만일 매사가 불여의하여 몸을 버리지 않으면 아니 될 경우가 닥쳐오더라도 경상도 땅에 가서 버려야 옳을 것 같소” 하시는지라. 그 말씀에 뜻이 있음으로 선사를 전주에 가시도록 한 뒤 정사는 동이리역에서 막차가 오기까지 대기하기로 하였더라.
해가 이미 저물어 밤이 되어서야 도착된 막차에 타고 온 선사는 마치 거미 같은 모습으로 차에서 내려오시는지라 복장이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한참동안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자니까 선사께서 “계획대로 되었으니 하숙집으로 가자” 하시는지라 알고 보니 일금 이십 원과 옷 한 벌을 얻어 왔더라.
4.하숙집에 가서 이틀 동안을 쉬면서 서로 상의한 결과 갑자기 고향에 내려간들 별 방책이 없을 듯하니 어느 곳이고 적당한 산골짝에 들어가 돼지우리 같은 산막이라도 한 칸 준비해 놓고 오면 둘이서 솔잎이라도 먹으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기필코 무슨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우선 정사 혼자서 먼저 고향에 다녀오기로 하였더라.
정사가 고향에 다녀 올 동안 선사는 하숙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니 어떤 집에 고생을 무릅쓰고 다녀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시는지라 이리저리 생각하여 보니 전자에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에 있는 모 금광에 광주대리로 수년 동안을 일할 때 사귄 우경주가 지금도 그 광업소에 살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정사는 미리 정황을 살피기 위하여 상개리를 향하여 집을 떠나 상개리에 이르러 보니 경주는 그곳에 그때까지 살고 있었으나 지내는 형편이 말이 아니라 경주형제는 돈벌이로 타관에 나가고 가족은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터라 점심을 먹은 뒤 사정을 이야기하고 고향에 다녀올 동안 선사를 부탁한다고 하였더니 경주의 가족은 거처도 불편하고 식사도 험하여 걱정이라고 하기에 그럼 여려는 말고 사람이란 수시 형편에 따라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고 하며 거듭 부탁을 하고 나서 이리로 돌아 오니라.
경주의 집 주소를 적어 선사에게 드리고 혹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옷고름을 타서 매고 다시 한쪽은 손에 쥐고 가시도록 하여 찾아갈 노정을 일러드린 다음 이튿날 서로 작별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뇌성이 대발하는지라 피차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더니라.
5.선사와 헤어진 뒤 고향땅에 들어서니 오륙년 동안 편지 한 장 부치지 않다가 뜻밖에 돌아간 모습이 하도 남루할 뿐 아니라 경진년 유월 육일에 성부의 인도하심을 입어 시루봉에서 몸을 해부하고 재생신이 된 뒤로 어느 때에 대식욕이 나면 무척 많이 먹게 될 것이라 하시더니 월여 전부터 식욕이 발동하였으나 곤고한 환경에서 양을 채울 도리도 없는 터에 염치를 불구하고 들어선 집안사람들에게 내용을 통정할 수도 없어 차려준 밥상에 오른 간장까지를 다 부어 먹고 빈 그릇만 내놓으니 식당의 제수나 누이동생들은 객지에 다니다가 얼마나 못 먹었으면 저러랴 하여 밥을 많이 담아서 주었으나 그런 정도로서 양을 채울 수는 도저히 없는 형편에 솟아오르는 식욕을 억제하고 다섯 달 동안을 지내자니 비위만 상해 견딜 수 없더라.
생각컨대 그때에 나타난 생리적 변화에 순응할 수 있는 식사조건의 문제로 말미암아 성부님께서 말씀하신바 득체의 기회를 일실한 것 같으며 그 뒤 십여년을 두고 설사를 하게 된 것도 그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딱한 정사 밑에서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어 생각하던 끝에 하루는 서로 통정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신앙동지인 김성도를 찾기로 하였다.
성도는 약 백리 밖에 사는 분으로서 평소에 생사를 같이 할 수 있을 만한 신앙동지였던바 오랜만에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동안 그립던 정회 이루 헤어 릴 수 없었던지라.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니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인 그는 감격하여 눈물겨워 하더라.
이에 정사는 증산천사님의 도법을 널리 세상에 들어 내놓기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하자고 간청했더니 성도는 쾌히 응락 하는지라. 하늘이 결코 무심치 않으심을 새삼 깨닫고 경상도로 내려가라고 그렇게 추상같이 명령하시던 성부의 지시를 생각하여 황송하고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더라.
성도와 상의한 끝에 그의 주선으로 백여원의 금액을 준비하여 그와 더불어 완주군 이서면에 선사를 찾으니 선사는 비록 험식 이나마 몸에 그다지 큰 이상이 업이 잘 지내고 계시더라.
이튿날로 선사를 모시고 경상도로 다시 내려가려는데 경주네 가족은 그 동안 정이 들어 우리를 따라오겠다고 청하는 것이었으나, 제반 준비 관계로 아직은 그럴 수 없다 하여 후일을 약속하고 떠났는데, 경상도에 들어서면서 선사의 몸은 점차 새로운 기력을 얻게 되었으며, 기지를 선정할 때까지는 성도의 집에 유숙하시게 되었더라.
김성도는 우리 부부가 성부의 명령지시도 이행하지 못한 채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할 때에 우리를 구해주고 우리의 힘이 되어준 은인이다. 선사와 더불어 남매의 의를 맺게 되니 하늘에 계시는 성부님께서도 우리의 결연을 가상타 칭찬하시는지라. 이후 교중연원이 성부를 중심하여 서로 형제 자매되는 가족적 분위기를 이룩하게 되는 첫 인연이 되었더라.
6.성도의 집에 여장을 풀은 첫날밤에 성부님의 지시가 계셨으니 “너희들이 내가 지시하던 직시로 왔으며 그 고생이 없었을 터인데 명령에 순응하지 않았으므로 일년 동안을 헛고생을 하였노라. 이제부터 새로운 결심을 하여 성도와 상의하여 공사를 진행하되 기지는 금성산에다 정할지어다.” 하시더라.
금성산은 경북 의성군에 소재하고 있어 영천 이씨의 대 문중이 수 백호를 이루어 세도가 당당한 곳이라. 그 안에 들어가 제반 공사를 받들기가 여의치 않을 뿐 아니라 또한 기지를 얻기도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매사에 성부님께서 친히 도우시는 것을 자각하여 마음을 바로잡고 성도와 의논하여 금성산하 동리와 훨씬 떨어진 곳에 정할 것을 결정하고 현지에 나가 두루 답사한 바, 금성골에 이씨 문중에서 세운 용문정이 있는데 그 옆에 농막 한 채가 있어 수년을 비어 두었고 곁에 또 한 채에는 산직이가 근 십년 동안이나 살며 산을 보고 농사를 지으며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정사는 비어 있는 농막을 얻어 쓸 계획으로 같은 고향사람 정치건을 시켜 이씨 종가에 보내서 교섭하였으니 치건은 정사가 시키는 대로 주인 영감이 만나보자고 하기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사정을 말하니, 주인 영감은 그의 문중과 우리와는 세교가 있음으로 거절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나간다는 풍문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으니 우선 비어있는 집을 수리나 하여 들어가 살도록 하라고 승낙 하여 주더라.
7.그날 밤 성도집에 돌아오니 성부께서 또 명령하시기를 “경주네 가족을 데려다가 십이월 이십육일에 입택 하라. 그리고 혈식은 청송 본가에 가서 새해를 맞이하고 계미 정월 이십사일에 입택토록 하라”고 하시더라.
몇 칠이 지난 뒤 금성골에 가보니 농막에 사는 사람이 나가지 않고 살고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농지를 반씩 나누어 소작하기로 계약을 하게 되니, 그들과 이웃해 산다면 공사 진행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들에 대하여 의심을 풀어 소문을 퍼트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화은당을 청송 본가에 모시고 그 길로 전라도로 넘어와서 경주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임오년 십이월 이십사오 양일간 비여 있던 집을 말끔히 청소하고 이십육일에 가마니를 둘러치고 입택을 하였다.
때마침 식량 사정이 곤란했던 일제 말기 배급시대라 생계가 어려워 걱정하던 중에, 우연히 동리 주인의 주선으로 공출할 가마니를 만들게 되어 약간의 특별 배급으로 생활하였다.
계미년 정월 이십사일 청송 본가로부터 금성산을 찾아 화은당께서 입택 하시게 되었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금성비봉의 산천이 진동하고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오니 온 동리 사람들은 물론 근동이 모두 놀래지 않을 수 없더라.
그 뒤 수개월간을 두고 하루도 빠짐이 없이 소리가 요란하여 동리 사람들 놀라게 하니 급기야는 금성산에 객호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부근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금성산을 포위하고 일대 수색을 전개하였으나 객호는커녕 노루 한 마리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배급 쌀 네 말을 준비해온 그들의 점심을 우리 집에서 지어 주었는데 그날 밤에도 역시 소리는 여전히 울려오고 마을 사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길 뿐 어찌된 일인지를 몰라 궁금해 하였다.
선사(화은당)께서 입택 하시도록까지 이웃 농막에 사는 산직이가 이사하지 않고 있었음에 선사께서는 놀래면서 천장지비의 신비한 공사를 진행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문전에 살게 되면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을 것이라고 걱정하시어,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입택 고유를 하니 성모께서 하강 하시와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큰일 났구나, 동리에서 일마장이 훨씬 더 떨어진 은벽한 곳이라야 공사를 받들 수 있을 것인데 보아하니 너의 집 앞에 옛날부터 살아 나온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사를 하지 않았은 즉 공사에 지장이 많을 것이니 그들을 딴 곳으로 이사를 보내도록 해야 되리라.그러나 너희는 누구를 대할지라도 덕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앞으로 그들을 대할지라도 혼연하게 하라. 모든 것을 내가 알아 처리할 것이니 오는 이월 이십일까지만 기다려보라” 하시니라.
그 뒤 명령대로 혼연하게 대하는데 과연 이월 이십일 식전에 동리 사람 십수명이 와서 이사짐을 저 나르는지라 “뜻밖에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삿짐을 모두 지어 보낸 다음 서서히 말씀드리고 떠나겠습니다.” 하기에 경주 형제로 하여금 이사짐 나르는데 조력토록 하니라. 이윽고 산지기 내외가 하는 말이 “당신들이 온 후로는 웬일인지 밤으로 무서워서 지낼 수가 없었나이다 그전에는 십년을 살아도 무서운 일이 없었는데 금성 비봉에서 새벽마다 천둥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밤이 되면 큰 호랑이가 문전에 와서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바윗돌이 들석들석 하도록 지동소리가 요란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어젯밤에는 그만 대소변도 나오지 못한 채 방안에서 치루고 나니 하루가 여삼추라 배를 짜다 말고 오늘 새벽에는 동리에 내려가서 우선 방 한 칸을 얻어 택일할 것도 없이 도망치듯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그리 아시오” 농사와 농우까지 다 버리고 가니 모든 일이 이와 같이 경험이 있는지라, 우리는 속으로 놀래며 즐거운 마음 그지없었다.
8.그 해 유월 이십사일 화천기념일 치성을 마치고 나니 집을 지으라는 명령이 내리시더라. 집 모양을 우물정자 형으로 지으라시는데 정자형 집을 어떻게 지어야 될지 언뜻 설계가 서지 않더라. 그러나 좌우간 제목이나 구하여 놓고, 목재를 구한 다음에 성주 할 날짜는 임박해 오는데 도무지 설계가 서지 않아 골몰하던 중 하룻밤은 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더니, 정자를 두고 그 둘레 사방을 막으면 삼삼은 구로 아홉궁이 되는지라, 아홉 궁은 곧 아홉 칸을 뜻하는 것인즉 아홉 칸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는데, 가운데 칸과 뒷 칸을 두고 또 샘을 파게 될른지도 모르니 비어 두기로 하고 연구해 볼 때 이는 아홉 칸 집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계를 확정하고 공사를 진행시켜 연자까지 걸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한 노인이 내려와서 건축한 집터를 살펴보고 백기를 세워 폐철을 놓아보더니, 그 동안 천상일이 바빠서 미쳐 내려와 일러주지 못했는데 이곳은 집터가 못되니 정자 밑으로 정하라 하면서 그곳에서 홍기를 세우면서 이 자리로 하라 하시고, 발을 세 번 굴리더니 천상으로 올라가시더라.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가운데에서 진심갈력하여 근근이 집을 다 얽었는데 이제와서 집터가 부당하니 그 자리를 옮기라는 지시가 내리니 어이없는 마음 울고만 싶었다.
그때는 태평양전쟁도 종전을 앞둔 마지막 고비에 접어든 때라 곳곳마다 선재의 공출이 심하여 재목 구하기가 몹시 어렵게도 되어서 도시에서도 건축을 중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주인영감의 주선으로 어렵게 금성산에서 재목을 구하여 조립하였는데 이제는 다시 사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집을 짓다 중단하고 터를 다시 잡아서 옮긴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어서 어이 할 바를 모르는 채 아침에 목수들의 작업을 중지시키고 홀로 정자에 올라 아득한 정신을 수습하고 앉아 있는데 오전 열시쯤 되어서 주인댁의 하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사랑 영감님께서 오늘부터 집 짖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라 하시면서 정오에 이곳에 나오시겠다고 그 뜻을 속히 전하라 하심으로 왔나이다”고 하더라. 정사 하인을 대하여 “오늘은 목수들이 쉬는 날이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전언하라”고 일러서 보냈다.
9.하인을 돌려보내고 생각하니 어젯밤 천상 노인의 하신 말씀과 오늘 주인영감의 작업중지 통고에는 기필코 무슨 이치가 내재하는 듯 오료를 준비시키고 기다리는데 과연 정오가 되어 주인 영감이 찾아오므로 응접을 하고 이어 오료를 차려 대접하였다. 주인 영감은 곧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차마 어려워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나 망서리고 나더니 겨우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내가 구암에게 간절히 할말이 있으나 말하기가 난처하다”고 하기에 “그러실 것이 없노라”고 하니 사실인즉 이 터는 벌써 오래 전부터 종중의 경영 예정지로 되어 있는 곳이며, 원래는 타인에게 허락할 수 없는 기지였으나 세월도 분분한 이때에 마침 구암의 청이 있어 예정지를 타처로 정하고 승낙을 했던 것인데, 어제 밤에 이상한 동기가 있어 나로서는 도저히 이 터를 내어줄 수 없게 되었네 그러한즉 딴 곳에 터를 잡도록 하고 이축 비용은 내가 담당할 것이니 미안하지만 이 터를 물려주어야 되겠다는 걸세, 미안하기 그지없어 말하기가 퍽 난처했던 것이네” 하는 주인의 말을 듣고 정사는 “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입택을 하였다 할지라도 옮겨야 될 일이라면 옮겨야 되지 않겠습니까”고 부드럽게 응락하니라.
이에 주인영감의 심정도 명쾌해진지라 직석에서 정사를 이끌고 새로운 기지를 찾아보자고 하여 수개 처를 돌아보고 난 뒤에, 전날 밤에 천상의 노인이 홍기를 세워보인더 곳에 가서 폐철을 놓더니, “이 자리는 옛날에 진주 강씨 한 분이 명풍을 데리고 와서 자기 선영의 묘지로 하겠다고 거액을 주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류하던 터인데, 과연 터는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집 세울 터와 날까지 잡아 주고 가니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할 때 신기하고 영험스러웁기 그지없더라.
수운선생 말씀에 “운자하방오부지(運自何方吾不知)라 하셨는데 실로 운이란 어느 방위를 좇아오는 것인지 오기 전에는 나도 또한 이를 깨달을 수 없다 하신 그 말씀의 뜻을 실지 경험을 통하여 실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으며, 이 현현묘묘한 섭리적 행사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채 다만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에 자부하고 새김 하였을 뿐이었다.
10.그 뒤 새로이 잡은 기지를 밤낮으로 닦아 계미년 시월 십오일에 상량을 하고, 십이월 이십육일까지 완축하여 입택을 하고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옵서 강림하시와 돌아보시고, “내가 앉을 정도로 지하에 비밀실을 파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밤을 이용하여 굴을 다 파고 나서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다시 하강하시와 말씀하시기를 “귀틀을 튼튼히 짜고 마루를 잘 놓도록 하라. 그리고 한편 벽 밑으로 문호를 내어 왕래하되 외인이 보아도 표가 없게 하고 후원 산밑으로 연속하여 한 칸을 더 파도록 하라” 하시니라.
하명하신대로 공사를 끝마치고 갑신년을 맞으니 성부님께옵서 또 하강하시와 “잘 되었다.”고 칭찬하시고 나서 이미 파고 나오는 김에 한 칸만 더 파라”고 하시니라.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한 칸씩 파라고 명령하시매 우리는 그 명령대로 행하여 지하실은 어느덧 길이 육간에다 중간 좌우로 한 칸씩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질은 단단하고 철분이 섞여있어 무너질 염려도 없었으며 습기도 없는데다 드나들어도 의복에 흙도 묻지 않는 깨끗한 방이다.
그 안에 칸칸이 나무기둥을 세우고 마지막 칸은 길이와 넓이를 아홉 자로 하여 옥경대라 칭하고 사방에 미닫이를 달며 바닥에는 마루를 놓아 오색으로 단청을 한 다음, 성부 성모님의 영상과 국조 단군의 영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부께옵서는 크게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날이 가고 밤이 잦으면 알게 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에게 한꺼번에 이러한 지하실을 파도록 명령하면 정신이 아득해서 겁을 집어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인즉 한 칸 한 칸 또 한 칸씩 파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파고파고 또 파다가 보니까, 이러한 거창한 지하실이 되지 않았느냐”고 위로의 말씀을 내리시더라. 성부 재세시에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이 파면 모두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남기셨던 일을 회상함에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11.그 뒤 수개월동안 여러 가지로 명령이 계시어 그대로 봉행하던 중 하루는 “태극기와 미국기를 그려 높이 걸고 소를 잡아 마당 가운데 진설하고 치성을 올린 다음 지하중궁의 영상후면에 걸어 두라”는 명령이 내리더라. 일제 말기에 있어서 이와 같은 명령의 수행은 실로 어려운 일이였으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공사는 그 하나라도 발각이 되는 날이면 일제의 소의 치안유지법에 저촉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일제의 칼날의 위해를 의식하는 행사라 할지라도 봉행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하명대로 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이 진행되자 아랫 동리에서는 경찰관과 경방단원이 파견되어 불을 끄라고 외치면서 곧 적기가 내습해 온다고 하면서 방공연습에 한창이더라. 그 뒤 시국은 더욱 악화되어 집집마다 방공굴을 파느라고 분주하였다.
그날 밤을 경과하고 중궁에 조반 진지상을 올려 예를 드리자니 성부님께옵서 말씀 하시기를 “이 뒤로는 쇠솥에 지은 밥은 내가 먹지 않을 것임에 옥석정을 구하여 오라” 하시더라.
명을 받고 이것도 역시 힘드는 일이라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경주 건천에 사는 이준의노인과 이환우 의 부친 종허노인 두 분을 찾아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떠났다.
이 두 분은 노소의 처지이나 신앙을 중심하여 비롯된 진진하게 마음을 주고받던 동지라, 십여 년을 통하여 서로 통정하는 처지일 뿐 아니라 종허 노인에게는 정사의 나이 젊었을 때 현무경을 맡겨 둔 일이 있었던지라 그곳에 가면 무슨 묘책이 생기리라고 생각하였다.
종허 노인에게 현무경을 맡기게 되고 또 그것을 구해오게 된 경로는 다음과 같으니라. 즉 정사의 나이 이십사세 때에 청도 풍각의 어느 곳을 지내다가 졸지에 뇌성이 대발하고 폭우가 내리는지라 비를 피하여 어느 집에 찾아드니 주인은 풍병 환자요 부인은 맹인이라, 잠시 피우를 하려든 것이 좀처럼 비가 개이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저녁밥을 먹고 그날 밤을 세웠으나 비는 이튿날에도 개이지 않은 채 시냇물은 넘쳐 흘러서 건널 수가 없으므로 또 한 밤을 더 쉬게 되었다.
내외가 모두 병신이라 딴 사람들의 출입이 희소함으로 그들은 정사를 매우 후대하면서 피차 위로함이 지극한지라 마음에 미안함을 금할 길 없어 적적하고 또한 궁금한 판에, 혹 읽을 책이라도 없나 하여 사면을 두루 살펴보니, 한자로 된 글귀와 많은 부적이 그려져 있었음으로 이상하게 느끼어 주인에게 책의 내력을 물은즉, 주인은 이년 전에 한 과객이 들렸다가 자기병을 보고 그 책에 있는 부적을 그려서 먹고 기도를 지성껏 올린다며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맡겨놓고 간뒤 곧 돌아온다는 사람이 이년이 다 되었어도 종무소식이라고 내력을 설명 하고나서, 그러나 자기는 무식한 사람이라 그가 시키는 대로 한번도 해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 책을 자기에게 빌려 준다면 경주에 사는 유명한 학자에게 보여 감정을 받은 뒤에 돌려주겠다고 청하여 그 책을 얻어 가지고 경주에 가서 종허 노인에게 보이니 깜짝 놀라면서 이 책은 현무경이라 평소에 한번 구해 보고자 하던 차라고 기뻐하면서 자기는 등서를 할 것이요 원본은 언제까지라도 용처가 있을 때까지 보관하겠다고 한일이 있었었다.
이상과 같은 일이 추억이 되어서 종허 노인을 찾아 환우의 집에 들리니 마침 작은 아들의 집에 출타중이라 곧 기별하여 뵈옵게 되었으며 현무경을 구하려 왔노라고 말하니, 그는 그동안 누차의 수색과 압수에도 불구하고 현무경만은 땅속에 보관해 두었노라고 하면서, 제반 명령의 내용과 공사의 진행관계를 듣고 나더니 몹시 기뻐하더라.
14.현무경은 구할 수 있었으나 옥성정은 구할 방법이 막연하여 종허 노인에게 명령 내용을 말씀드리고 조력하기를 청하였더니 둘이서 건천에 사는 준의라는 노인을 찾아가 서로 상의하자고 하여 다음날에 건천을 향하여 환우의 집을 떠나니라.
당시는 경주 남산은 일본 사람들이 일반인의 통행을 통제하여 고적 보존지로 결정한 바 있어 그 안에서 돌 안경 하나 구해오기 어려운 때라 저윽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더라.
그러나 세 사람이 앉아 야심토록 생각에 잠겨 있는데 준의 노인은 무릎을 치면서 “허 참 내가 내 집에 놓아두고 딴 궁리만 하였네”하면서, 여덟 해 전에 어떤 사람이 돌솥 하나를 가지고 와서 약을 다려먹으면 좋다고 하기에 사서 철사로 얽어 후원 연자끝에 달아 메어둔 것이 이제 생각이 난다고 하므로, 세 사람은 촛불을 밝혀 후원에 나가 살펴보니 과연 거기 돌솥 하나가 매달려 있더라.
그러나 끄시럼과 얽히어 있는지라 씻고 닦고 하여 가지고 오기로 하였다. 그 돌솥은 밥 네 그릇 정도 들만한 것이었는데 세 사람은 모두 기뻐하여 마지않았으며, 술상을 차려 주고받으며 하루 저녁을 지낼 적에 명령만 순종하여 행하면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는 성부님의 홍은에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이튿날 준의 노인과 동반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현무경과 돌솥을 영상앞에 올리니, “현무경은 보관하고 솥은 곧 진지를 지어 올리라”고 하심으로, 그대로 봉행하였던 바,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다시 할 일이 있으니 시키는대로 하라. 이제는 나의 체골을 찾아 와야 할 것이니라”고 하시더라
성부님의 체백을 모시고자 함은 우리의 평생 소원으로써 이제 와서 비로소 이와 같은 명령이 내리시니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명령대로 봉행하여 이루지 못한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평생소원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열리어 오나보다고 선사는 하늘에 사무치는 망극하기 짝이 없던 그 심정을 통곡으로 풀으시고, 우리 또한 비상한 각오로써 그 명령을 준행키로 결심하고 상의한 끝에, 경주로 하여금 정읍 차교주의 집에 가서 몇 달을 한정하고 일꾼 노릇을 하며 제반 동정을 살피도록 일러 파송하였더니, 경주는 대흥리에 가서 그 집 일꾼으로 들어가 수개월을 두고 이 곳 저곳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리 하여도 이렇다 할 증거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한곳에 의심나는 곳이 있었으니 그는 곧 차씨의 사당이라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서 김성도와 오갑출을 증파하여 더욱 확실하게 찾아보았더니 세 사람은 어느 날 깊은 밤을 틈타서 사당안에 들어가 두루 수색하여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니라.
집에서는 틀림없이 체백을 모시고 오리라는 생각으로 의관문물이며 신발 재터리 세수대야등 일체를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이 허행하고 되돌아오니 모두 정신이 암암하고 맥이 빠져 넋을 잃은 체 중궁에 들어가 엎드리니, 성부님께옵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아비 뼈골을 찾지 못하였으니 중궁 동편에 빈소를 차리되 옷 나무 칠성판에 글을 쓰고 의복 일습을 올려 모셔 놓고 너희들은 복을 입어 상주 노릇을 하되 빠짐없이 진지상을 올리고 애곡하라”하시더라. 이에 우리들 일동은 하명하신 바를 준행하는데 성부님께옵서는 종종 천지신명과 더불어 현현한 공사를 행하시더니라.
16.갑신년 윤사월을 당하여 하명하시되 “금성산에 묘소를 정하라” 하시매 종허노인과 답산을 하여 용가마골 절벽암상 뒤에 묘지를 정하게 되자 “지상여를 만들어 이틀 동안 중궁에서 애곡하며 상여놀음을 하고 십오일 밤에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고 명령하시니라.
우리는 중궁내에서 아름다운 꽃상여를 만들어 열사흘 날부터 주야로 상여놀음을 하게 되었는데 밖으로 탄로될까 두려워 지하실 밖에는 보초를 세워 이 예식을 거행할 때 외인들이 마당까지 드나들고 관청사람들로 내왕하였으나 다행히 밖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사히 마칠 수 있더니라.”
보름날 밤이 되어 상여를 메고 산상에 올라가게 되는데, 상여 전후에는 도령 영상을 세우고 운상 소리를 하라는 호령이 나리어, 종허 노인이 앞소리를 메기고 일동이 받으면서 용가마 밑에 도착하였는데, 그 앞으로는 절벽이라 도저히 운상을 할 수 없게 되었더라. 이에 짐을 부리고 상여를 내려놓은 채 등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계속해서 운상하라고 하시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계속하였는데, 혼자서도 올라가기가 힘든 지형임에도 평지와 다름없이 운상 할 수 있었으니 실로 기이하고도 놀랍지 않을 수 없더라. 이와 같이 하여 산에 다 달아 장지에 평장으로 장례하고 모두 무사히 집에 돌아오니라.
17.이튿날 치성을 올리니 또 하명하시기를 “너희들이 그만큼 울었으니 이제부터 세상 울음이 터져 나오리라” 하시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우리의 행할 바를 지시하시더니 “너희들은 이제부터 치성을 올릴 때에 잔만 올리고 가사를 지어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된다”고 하시니, 가족 전원이 모여 수일동안 치성을 올리고 춤을 추니라.
우리가 지하실안의 공사에서 울음을 마치고 나니 동리마다 귀중한 장정들을 전쟁에 보내게 되어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거리와 정거장마다 곡성이 진동하니라.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가사를 지어 앞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를 받으면서 춤을 추는데 성부님께옵서 명령하사되 “기운이 적다 힘차게 노래하고 힘차게 춤을 추라”고 하시어 번을 짜서 교대하면서 노래와 춤추기를 쉬지 않았으니 이러기를 한달에도 몇 번씩이나 하였다.
18.유월 그믐날에는 중공에 난데없이 생수가 터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만큼 솟아오르더라. 평소에는 장마철에도, 간단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은 잠시 동안만 멈추어도 옥경대에 물이 올라갈 정도이어서 주야로 쉴 사이 없이 퍼내다가, 샘구멍을 조사하니 석벽사이로 엄지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 하더라.
쉴새없이 나오는 물을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어이된 일이오니까” 하고 심고하니, 성부님께옵서 말씀하시기를 “그 물줄기에 정성을 다 하여라. 앞으로 운수가 닥쳐올 때에는 이 생수 나오듯 하리라”고 하시는지라.
그 뒤로 이틀 동안을 푸고 나니 약간 덜 나오는데 천상으로부터 다시 하명이 계시어 “영상 앞에 우물을 파되 넉자 깊이로 하고 그 위에 뚜껑을 만들어 덮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말씀대로 우물을 파니 그렇게 쉴새 없이 솟아오르던 물은 우물안에 가득이 만수가 되더니 넘치지도 줄지도 않더라. 그물로 청수도 모시고 식수로도 사용하라는 말씀이 계시자, 처음 우물정자 집을 지을 때에 나중에 우물을 파게 될련지도 모르니 가운데의 한 칸을 비워두자고 했던 지난 일이 회상되어 신명공사의 현묘한 이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19.하루는 홀연히 생각하니 성부의 수족골 일부를 조절체가 회문산에 모셨다고 하는 풍문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서 답사함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되어, 정사는 갑출을 동반하고 회문산을 찾아 금성골을 떠났더라.
회문산에 당도하여 산직이를 찾아서 물으니 아무개의 산소인데 묘도 이미 파버리고 위토도 팔아갔노라고 한다. 그러나 그 묘자리나 일러달라고 하여 동리 맞은편에 있음을 알아내어 두 사람은 무슨 채약이나 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괭이를 둘러메고 가보았더니 삼사년 동안이나 발초한 흔적도 없는지라. 묘를 파기 시작했으나 동리가 바로 보이기 때문에 얼마 파지 못하고 망서리고 있자니까 난데없는 안개가 서리더니 동리앞을 가리웠다.
이에 두 사람은 천기로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모양이라고 용기를 얻어 단숨에 묘를 파는 갑출이 무엇인지 여문 것이 마치는 것을 보니 틀림없다고 좋아하더라. 그러나 다 파고 보니 나무둥치가 나올 뿐이다. 속히 되묻고 나니 안개가 거치며 다시 청명한 날씨가 되었다.
산직이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하룻밤을 경과하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눈치를 살피니까 조철제도 관가의 수배를 받는 몸이 되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성부의 수족골은 어느 다른 교파에 의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진 증거가 완연하여 절통하기 짝이 없었으나 하는 수 없이 돌아오니라.
20.수일 후 집에 돌아와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는데 큰 금부처가 들어오시더니 “나는 미륵불이라 앞으로 내가 출세하야 중생으로 하여금 해원 상생 보은의 법도를 마련하여 제도함과 아울러 조화정부를 세워 선경세계를 건설하리라”하시면서, 금성산에 천신과 지신을 위하여 큰 치성을 올리도록 하라고 명령하시기에 이튿날 치성 준비를 하여 예를 올리니 천기도 이상하고 기적적인 일도 많았더라.
그 뒤로 치성을 올리면 천신이 한 분씩 꼭 하강하여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시곤 하였는데, 한번은 관운장의 영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중국사람이나 이 나라(한국)을 세번 도와줄 운장인데 강부인은 나를 이기려고 하지를 마오”하는지라 선사 대하여 말씀하시되 “이 자식아 낮짝은 대추빛 같은 자식이 무슨 잔소리야! 일본 사람들이 네 나라를 쳐들어가니 너의 집이나 가서 돌보아라” 하시니, 운장은 허허 웃으면서 “작은 체구로도 천사님의 딸이라 다르다”하며 농담을 하기도 하더니라. 이밖에도 금성 비봉산령이 수시로 발동하여 우리 일을 크게 돕고 보호하였다.
21.갑신년 구월 십구일 기념행사를 거행하니 운장께서 하강하시어 “성모님의 산소가 공동묘지에 있지요 그런데 방금 도적놈들이 들석들석하니 곧 가서 모셔다가 금성산 대관령에 모시게 하시오”하기에, 정사는 성도와 동규 양인을 동반하고 태인 공동묘지에 가서 체골을 모시고 와서 구월 이십구일에 대관령에 터를 잡아서 천광을 하니 터가 좋은지라. 묘를 쓰고 봉분을 크게 지어 벌안도 널찍하게 잡으니 영영 안장지라 화려하게 장사지낸 후 돌아와서 뒷날 알아보니, 그 자리는 곧 영천 이씨네 산으로 그들 문중의 정자의 원룡이더라.
시끄러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의구지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 와서 어찌하는 방책이 없어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지내는 중 하루는 묘소에 가서 공사를 보게 하시더니 정사로 하여금 이튿날로부터 백일을 기약하고 매일 정오에 산소에 가서 사방배로 기도를 하라고 명명 하시더라.
산은 높고 수목이 울밀한 고로 대난에도 적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으나, 명령대로 날마다 내왕하면서 사방배를 올리고 기도를 하면서도, 혹 산주나 그 동리 사람의 눈에 띄일세라 마음이 여간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경과하기를 겨우 일년 반이 되는 날에 금성산 산령이 와서 전하기를 “천사님께서 경주 단석산에 계시면서 내일은 속히 단석산에 와서 기지를 정하고 성모님의 묘소를 옮기도록 하라 하시더라”고 전하더라.
우리는 지체함이 없이 이튿날 단석산에 가서 터를 정하고 을유년 이월 이십구일에 파묘하여 옥체를 일단 장대골 궁중에 모셨다가 삼월 하순에 이안 장례식을 거행 했던 바, 그 뒤 열흘이 못되어서 대관령에 누구인가가 묘를 썼다고 하면서 영천 이씨들은 문회를 열고 다음날에는 문중이 총동원하여 묘를 파보았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음으로 모두들 소골된 모양이라고 하면서 뿔뿔이 헤어져 돌아오니, 우리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성모님 옥체를 단석산에 이장하게 될 때 이 경우 집에서 제물 일체를 준비하게 하였는데, 마침 근방에서 황소를 밀도살하게 되어 그 고기 일부를 얻어오고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제수를 장만하려다가, 경찰에 정보가 들어가 순사들이 출장나와 수색을 당하게 됨에, 명전이나 축문 납패등은 다행이 발각하지 못하였으나 고기가 문제되어 답변에 궁한 나머지 경우는 부득이 자기처의 이장을 위하여 약간의 제수를 장만하게 되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였더니, 경찰관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선 이장을 마치고 다음날 주재소로 출두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성모님의 이장을 끝낸 뒤로 주재소의 심문에 대비하여 자기의 처의 이장을 한다 하였으니 그 증거를 준비하여야 하는 딱한 처지었다. 경우부자는 상의한 끝에 부득이 처의 묘를 파서 아무곳에나 묻은 다음 주재소에 나가 적지않은 물품을 선사하였지만는 끝내 용서할 기세를 보이지 않더라.
그때는 해방되기 삼 개월 전이라 일제의 통제가 극도에 달하여 소나 돼지등을 허가가 없이 밀도살하면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여 가지고 욕을 보일 때였으며, 또한 묘지법이 엄하여 가족 묘지나 또는 공동묘지에만 매장하게 되어 있던 당시의 군국치하에서 여러 번의 향응을 베푼 뒤에야 겨우 모면하였다.
이 일은 삼 개월 뒤에 조국광복을 맞기는 하였으나 경우의 처의 묘소는 그들의 형편이 풀리지 못하여 아직도 좋은 자리를 찾아 옮기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으니 일후 형편을 보아 공중에서 자리를 잡아 이장하여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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