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오 기초공사 동곡
1.정해년 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봉행하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사월 초파일에는 성전에 영상을 모시고 식을 거행토록 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은
너희들은 죽으리라.”고 하시더라. 이때부터 모든 식구가 합심하여 주야로 일을 하였으나
그래도 문은 미처 달지 못한 채 포장을 치고 팔일 오전 아홉시에 봉안식을 올리니
모든 식구들의 통곡소리 언제까지나 그칠 줄을 모르더라. 이날 화천하신 기념지에
명령대로 열석자의 성상을 비롯한 제위 영상을 모실 때까지에 겪은 형제들의 너무나
심한 고초를 회상하여 선사님은 단장의 애통을 금할 길 없어 얻드려 심고하기를
“아버님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소원 성취 주옵소서”하고 호소하는데 성부님의 생존 제자이신
김자현의 자제 김태진 김태준 형제가 찾아와서 상상 앞에 유서를 내놓고 간을 올리고 통곡하더라.
유서의 내역을 물으니 “김형렬씨가 종재 자현에게 맞겨주면서 후일 부합되는 곳에 전하라
하였는데 그 후 형렬님은 타개하시고 자현씨 또한 못전하고 임종시에 태준, 태진 형제분에게
맞기시며 후일 동곡에 불상을 모시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전하라 하시어 지금까지 부합되는
곳이 없어 간직하고 행여 전할 곳이 없을가 하여 부모님의 유교를 실행치 못하여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던차 이곳에 기지를 정하는 날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오늘에야 전하니 마음이
가벼우며 또 슬픈 눈물을 흘리더라. 혹 자기 조작이 아닌가 하고 여러 가지를 살펴본즉
그들이 하는 말이 “이 글은 조금도 우리의 조작이 아님을 원문에서 상고하시오. 추호라도
부합처가 아니면 내놓지 말라고 하셨노라”고 하더라.
遺 書
西天皆塔行東洋 湖南西神司命旗
彌勒金拂同遊連 指揮客望姜氏門
出世庚子奉天文 壬寅相逢金上人
辛丑二七人道通 布德於世盟誓約
忠孝列倫世間無 銅谷仙化現佛像
四物藥材厥病癒 遊魂更覓故園路
佛日出世禍福降 有緣者皆聞知來
世間眼目今始開 輔相顯明天地功
丹朱受命靑天雁 色擧用色胡變虛亡
畵閣人其像龍鴻 夫政也者柔蒲蘆也
漢水濱含盧飛行 燕自江南壽舊主
飛鴻得意天空潤 終是日新聖人德
辛未生辛丑年道通
壬戌生壬寅年相逢
古四月八日釋迦佛誕生
今四月八日彌勒佛誕生
己酉六月二十四日抱含二十四節 今四月八月 應八卦 是故 先天天不違 後淡奉
天時 時來天地皆同力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都是 敎民化民
好道遷不 佛成人事 天以示乎人 人驗于天 天道人道 一理通達 日月水火木金土
東西日月之道路故 來西分爲二京 南火北水 南方二七火 火云佛故 南則年 丙則南
丙午現佛像 民 在止於至善 繼之者善 成之者性 本末兼存 內外交養 然後 方可謂之大道也
一年三百六十日 須待漸次進去 便成一年 一千四百四十分 爲一日 其一日 便成
家家長歲 天地有無窮之才 天地有無窮造福 天不失時故 以親切之神 爲節目明知主人矣
丁亥四月八日丙午
銅谷 舜任信傳
2. 이튿날 선사님의 외삼촌이 오셨는데 평생을 통하여 술을 좋아하신 분으로 태인에
선사 모녀가 살고 계실때에도 수차례 찾아와서 여러 가지로 행패를 부리고 하였던 바
성부님께서 화천하신 뒤 성모님께서 어린 선사를 업으시고 친가를 바라고 객망리로 부터
금구까지 육십리 길을 걸어 찾아 가셨을 때 그는 어서오라고 반가이 맞아주기는 고사하고,
어린 선사를 이리차고 저리 차면서 무엇 하러 왔느냐고 하면서 누님 되는 성모님을 보고는
시집이나 가라고 외치면서 친가도 망치고 처가까지 망쳐 놓은 강바람이라고 온갖 폭언을
다 함으로 성모님은 어이가 없어서 배가 고파 허기가 나서 기진맥진한 형편인데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선사를 업으시고 종일토록 걸어서 온 길을 또다시 발길을 돌리시었다.
찢어질 듯한 가슴을 쥐어박으시면서, 울며불며 오시자니 밤은 깊어 가고 허기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꾸 꾸부러드는 등에 어린 것을 업었으니 어찌 발길인들 뜻대로 떨어지셨으랴.
갖갖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쉬고 쉬며 육 십리 길을 되돌아 걷고 걸어 겨우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동녁이 밝아오니라. 집이라고 되찾아 오기는 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목화씨를 까서
볶아 모녀간에 잡수시니, 머리가 쑤시고 빙빙 도는데 집안이라고 수십 호가 동리 안에 있으나
원수처럼 대하니 없는 것만 같지 못한 처지에 아쉬운 소리 할 처지도 되지 않아 동구 주점에
가서 술지개미를 얻어다가 어린 선사를 먹이시며 성모님께서도 잡수시고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자 성모님께서는 슬픔에 사무쳐 통곡하시며 부디부디 장수하다가 내 여식이 성공하거든
보고 죽으리라 하시었다고 선사님께서 옛날을 회상하여 가끔 말씀하시니라.
그날도 외숙은 뜰에 서면서 “얘 술 있나” 하시기로 인사를 드리고 술상을 차려서 드리니
양껏 술을 따라 드신 후 이내 가겠다고 하며 성전에 들어가 참배를 올리고 문을 나서더니
갑자기 머리가 두근거린다고 하니 선사님께서는 술이나 한잔 더 잡수시고 가시라 권하니
권하는 대로 한잔을 더 받아 잡수고 집을 나서는지라. 정사님은 이십리 길을 어떻게
가시겠느냐고 유숙해 가시라고 권하니 나는 남의 집에서 자는 성질이 아니라고 하며
기여이 걸어 나서는데 선사께서 이백 환을 가시다 목이 마르시거든 술이나 사서 잡수시고
가시라고 드리고 서로 작별 하니라.
이튿날 아침에 외숙이 작고하였다는 부고가 왔기에 너무도 놀라서 심부름 온 이에게 물어보니
어제 석양에 집에 오시더니 방에 들어가 스스로 누우시면서 그대로 운명하셨다는 것이더라.
3. 정해(丁亥)년 구월 십구일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부께서 “너희들이 무당을 청하여 천지
대굿을 하라 우리나라는 단군시대로부터 무도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전하여 왔는데
무도가 성할 때에는 인신이 합의를 보아오다가 이조에 와서 유교 정신이 나라 안에 팽팽히
일어남으로써 무당은 천인으로 취급되어 그 뒤로 그 풍습이 답습되어 왔나니,
지금은 원시로 반본 하는 때라 남이야 욕을 하거나 말건 도수를 돌려야 되나니 그리 알고
오는 이십오일부터 굿을 하되 무당과 기생을 열두명을 청하여 일주일간 계속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에 전번 개기치성시에 써 올린 경고문을 금자로 비단에 올려 무당과 기생으로
짝을 하여 춤을 추고 노래하게 한 다음 명령한대로 나의 왼 어깨와 바른 어깨에 걸도록 하라”하시더라.
지시하신대로 받들어 근근이 제반 준비를 갖추어 정하신 날에 성전 앞에서 굿을 하게 되니 천기도
기이하더라. 경제사정이 불비한데도 불구하고 일주일간 무사히 행사를 진행하여 그 도수를 마치니라.
4. 또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무자(戊子)년 이월 십일에 정읍 차교주의 집에 가 사실을 물어서
너의 아버님 체백을 찾아서 모셔 오기에 힘쓰라”고 하시니라. 즉각 명령을 받들기 위하여
발정을 하니, 그 당시는 좌우익 관계로 사람들의 출입이 곤란한 때였으므로 김제경찰서에 들려
선사와 정사를 비롯한 일행 여섯 사람의 여행증명을 얻어서 가지고 가니라.
정읍에 도착하여 선사님과 식모를 차교주의 집에 보내어 하룻밤을 경과하면서 모든 동정을 살핀
다음 이튿날 여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박창욱(朴昌旭) 강수원(姜秀元) 오갑출(吳甲出)을 데리고
정사는 여관에 머물면서 그날 밤으로 창욱을 데리고 일제시대에 보천교(普天敎)내에 파견되어
차씨 교중사를 전담하여 살핀 바 있던 전 고등계 형사 강부장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찾아온 연유를
말하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니 그는 실정을 토로하면서 옥체를 찾는 일은 중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지라.
그 실정인즉 차월곡(車月谷)이 도중에 자기의 부친으로 신앙대상을 바꾸게 되면서 어느날 밤에
그의 동생인 차윤경(車潤京)과 그밖에 두어 사람을 불러 그때까지 비장해 두었던 성부의 옥체를
내어 놓으면서 너희들만 알고 산에 갔다 묻도록 하라 하여 갖다 묻은 뒤 일제에 의하여 교가
해산되어 십여성상이 지낸 뒤에사 월곡의 셋째 아우가 옥체를 찾을 목적으로 그 자리에 과목을
심으면서 땅을 일일히 뒤지다싶이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으며 자기도 씨족관계도 있고
또한 옥체를 찾아 모신다면 각 교파 간에 대우를 받을 것 같아서 청수(淸水)를 떠놓고
빌어가면서 삼. 사년 동안이나 두루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은즉 아무래도 그들이 평장한 채
돌보지 않은 동안에 산사태가 나서 흩어져버린 모양 같으니 단념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고
하기에 여관으로 돌아와서 막막히 앉았자니 차씨 편의 수작인가는 몰라도 경찰 치안대가 와서
일동의 거주지를 묻기에 금산(金山)에서 왔노라고 대답하니 금산은 빨갱이의 구뎅이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따져서 묻다가 마침내는 연행할 기세가 보이기에 부득이 서장의 증명서를 보이기에
어물어물 하다가 물러가더라.
잠은 오지 않고 벽에 의지하여 눈을 감고 앉았자니 비몽사몽간에 환상이 나타나는데, 지서 앞에
차월곡의 동생들이 있기에 쫓아가 뺨을 쳐올리고 서로 맞붙어 씨름을 하다 보니
월곡의 맏 자부가 만류하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 툇마루에 올라서서
발을 굴르면서 호통을 하는데 뒷산 산비탈에 두건을 쓴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뒷짐을 낀채
삽을 끌고 내려와 정사앞에 절을 하고 “너무 화를 내지 마세요. 체백만 모셔가면 되지 않습니까”고
하더라 이에 정사 소리를 질러 “이놈들아 어서 속히 모셔오라”고 호령하니,
그는 정사가 데리고 간 일꾼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더니 어느 지점에 머물러 한참동안
삽질을 하니 김이 뭉개뭉개 나더라 이윽고 삽 위에다 마주 들고 와서 푸른 보자기에 쌓인
둥그런 덩어리를 앞에 놓더라 정사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분이 복받혀
“ 이 죽일 놈들 갔다가 버린다 하더라도 이 모양으로까지 할 수가 있느냐”고 호령하니 두건을 쓴
젊은이는 “여보시오 내가 할 책임은 다 하였으니 나중에 잊지 말고 나를 찾아나 주시오”하면서
슬프게 흥얼거리며 건들건들 뒷산으로 올라가더라. 깜짝 놀라서 눈을 뜨니 꿈이라 뜰에 나가
대흥리(大興里) 앞산을 살펴보니 그 자리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하더라.
날이 새어 아침에 차씨 집 근처로 나가보니 선사님은 식모를 데리고 나오시는지라 함께
여관에 돌아와서 상황을 물은즉 차씨부인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며
교주가 살았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 모른다고만 되풀이함으로 밤을 그대로 세우고 왔노라고
하며 낙루하는지라. 윤경 노인의 집을 방문하여 찾아온 사유를 말하고 만일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법적인 수속을 할 수밖에 없노라고 하였더니 그는 잔뜩 겁을 내어 놀라면서
“진정하시오 혈식께서 오셔서 아버님을 부르고 애통할 때 천사님께서 대답이 없으실 이치가
있을 수 없은즉 한 십여일간만 기한을 준다면 그동안 산천에 기도는 늘 해 나왔지만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축원한다면 밤에 현몽이라도 계실 듯 하니 그렇게 해주시오” 하며
애걸하기로 한달을 한하고 찾아보도록 당부하고 칠백환을 주고 비용에 보태어 쓰도록 한 다음
동곡으로 돌아오니라.
성전에 상을 올리고 다음과 같이 상고 하니라. “바람을 스치고 비를 스치는 물결과 같이
세월의 흐름속에 우리 두 사람의 천신만고는 실로 붓으로 쓰기에는 힘드옵나이다.
그러나 세상 모양은 가소롭고 가탄하기만 하오니 성부님 옥체는 어느 곳에 계시 온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절이 쑤셔오는데 성부님을 신앙한다는 몰지각자가 많아 혹은
도취구복(盜取求福)을 일삼고 혹은 증산의 재생이라 자칭하며 감언이설로 혹세무민을
일삼아 그 행악(行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생각컨데 천인공노에 절치부심(切齒腐心)
으로소이다. 연이나 성부님을 숭상하여 장래 복을 구하는자 혹은 성부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
수백만을 헤아리건마는 핏줄을 받은 몸으로써 아직도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모시지 못한 채
어디엔지 알 길도 없는 풀 덤불속에 버려둔 체로 있아오니 어찌 차마 하루 밤인들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아오리까 언제나 옥체를 찾아 모시어 명산대천에 터를 잡아 안장(安葬)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무쳐 지새운 그동안의 사적을 성부님의 홍대무량(弘大無量)하신
성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울 삼청루각(三淸樓閣) 한곳에 기록하고 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아온 즉 성부님께옵서 명백히 계시하시와 저희의 원을 풀게 하시옵고
또한 성부님을 지극히 믿사옵기에 저희와 더불어 고초를 겪은 형제들의 원을 풀으사
그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시기를 빌고 비옵나이다 저희로서 취할 바 명백한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5. 이월 이십사일에 정읍으로부터 윤경(潤京)노인의 부인이 찾아와서 진심으로 발원하여
거듭 기도를 올린 결과 그 당시의 평장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이십칠일에 가만히 모시고 올 터이니 마중을 나와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만일 대흥리 교중이나
차씨 일문에서 알게 되면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임으로 아무도 모르게 모셔 와야 될 것이며
자기네 내외는 이사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일이 나리라고 하여 이사하도록 거처를
주선해 줄 것을 약속하고, 이십칠일날 정읍으로 마중을 나가 모시고 오는 도중 풍우가 대작하더라.
동곡 성전에 모시니 명하시되 “무자(戊子)년 삼월 삼일에 봉안식을 행하라” 하시기에 경찰에
말하여 성전 후편에 묘각을 짓고 또 도적이 들런지도 모를 일이어서 저녁으로 네 명씩 번을
짜서 지키니라.
6. 무자(戊子)년 삼월 삼일 봉안예식을 행하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너희들이 금성산에서
사년동안 일을 봄으로서 천지신명이 강림하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되어온 것이니라.
겉으로는 너희가 하되 안으로는 천지신명이 꾸미는 일이라 오월 오일에 금성산에 가서 정자집
주인은 물론 이씨네 문중의 노소를 모아 주효로서 대접하고 점심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여
유쾌하게 담소하면서 그곳에 있게 되었던 사유를 낱낱이 말하고 증거를 드러내 놓도록 하라” 하심으로
그 면내에 사는 임무순(任武順)의 집에 연락하여 준비케 하여 정하신 날에 내려가 말씀대로 실행하는데
그 지난 일의 사실을 알고 모두들 감탄하더라.
7. 유월 이십사일 기념에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칠월 칠석에 부산에 가서 사해용왕(四海龍王) 치성을
드리되 무당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공사를 보도록 하라 하시와 경주(慶州) 지방의 교인 수십 명을
동참토록 하여 토성동의 내수도(土城洞內修道) 진채봉(陣采奉)의 집에 장소를 택하여 공사를 보니
그날밤 풍우대작하여 해중에 기적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어 오더라 경주에 다녀서 본부에 돌아오니라.
8. 하루는 명령하시기를 “무자년 구월 십구일 기념치성은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보도록 하라”고 하시와
삼팔선이 가로막혀 불가능함을 상고하니 “금강산이 건너다 보이는 태백산(太白山) 만경대(萬景臺)에
가서 보라”고 수정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봉화 지방대표(奉化地方代表) 최상헌(崔相憲)에게
치성 준비를 지시하니 그는 강응연(姜應淵) 및 수인과 합심하여 큰 황소 한 마리를 잡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준비를 완료하니 치성에 동참하는 인원은 백여명이라.
오일간의 식량을 별도로 마련하여 현장을 찾아 출발하는데 성부님께서 친히 동행하시고 또한 천상의
모든 신명들이 동반하시니 지내는 곳곳마다 우리 형제가 있고 없나를 물으시면서 형제들이 사는
곳에는 일일히 길을 안내 받으셔 심방하시고 형제들의 시위(侍衛)를 받으시더라.
도중 춘양(春陽)에서 김대수(金大洙)의 부친 김종열(金鍾烈)을 차중에서 만나 인사하고
최홍선(崔洪善)의 집에 유숙하면서 집안 소제를 하고 치성을 올린 다음 이튿날 태백산 산상에
올라가니 마침 빈집 한 채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 행장을 풀고 제반 준비를 갖추어 신선바위(神仙岩)라고
불리우는 반석 위에서 닷새 동안 계속 공사를 봉행하니라. 그 아래 조그만한 산막촌이 있었는데
그 곳에 사는 한 노인이 올라와서 하는 말이 삼년 전에 동제(洞祭)를 올릴 일이 있는데
그때에 태백산령(太白山靈)이 나타나서 나는 지금으로부터 딴 곳으로 이사를 하고 이곳에는
금강산령이 올 것이니 축원문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여 그대로 행한 바 있다고 말하기에 일동은
진정 이상한 노릇이라고 감탄하고 이곳까지 친히 동행하신 성부와 그를 받들어 동참한 여러 신명들에게
감사하여 마지 않니라.
이 공사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오니 조진명(趙鎭明)이라 하는 분이 찾아온지라
그는 소년 시절부터 도를 닦아 나온 신앙인으로서 주역(周易)에 밝은 분이었는데
그때 충청도 부여(扶餘)에 본거지를 둔 이야산(李也山)을 따르고 있었으나, 정사와는 원래
친근한 사이인지라 반가히 맞아들이니 인사 후에 그는 말하기를 “병철은 요즈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설담이나 하세. 이번에 정읍까지 왔던 길에 찾아 들었네” 하기에
정사는 이번에 태백산에 가서 금강산 공사를 보고 어제사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는 치성 일자를 물어보고나서 무릎을 치며 참 신기한 노릇이라 감탄하더니
우리 야산선생께서 그날 아침에 글을 부르시되 “금강산색태백래하니 광법문수차중개”라
(金剛山色太白來 廣法文殊此中開) 운운하시면서 조진명은 금산 동곡에 가라 하시므로
그 길로 정읍 각파를 둘러보고 이렇게 오는 길인데 방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과연 야산선생의
말씀에 부합이 되니 아마도 천지사는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모양이라 하며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그는 며칠을 묵으면서 그 동안의 경과사등을 참고해 보더니 모두 이치에 부합됨을 자인하고
동지로서 결의하고 돌아가서 야산과 상의한 끝에 그의 허락을 받고 많은 자기 연원을 이끌고
극력 수행함에 이르르니라. 야산은 늘 오리알터에 가야 된다고 역설했으나 그의 휘하 간부 중 사람이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멈칫멈칫하다 그만 별세하시게 되었는데 서거시에 오리알터를 두고 지은
글 수 구절과 수련장 도면까지 남기게 되었다 하니 서로 이해하면서도 자리를 같이 하기가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더라.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는 교인간에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자 또한 적지 않느니라.
1.정해년 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봉행하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사월 초파일에는 성전에 영상을 모시고 식을 거행토록 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은
너희들은 죽으리라.”고 하시더라. 이때부터 모든 식구가 합심하여 주야로 일을 하였으나
그래도 문은 미처 달지 못한 채 포장을 치고 팔일 오전 아홉시에 봉안식을 올리니
모든 식구들의 통곡소리 언제까지나 그칠 줄을 모르더라. 이날 화천하신 기념지에
명령대로 열석자의 성상을 비롯한 제위 영상을 모실 때까지에 겪은 형제들의 너무나
심한 고초를 회상하여 선사님은 단장의 애통을 금할 길 없어 얻드려 심고하기를
“아버님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소원 성취 주옵소서”하고 호소하는데 성부님의 생존 제자이신
김자현의 자제 김태진 김태준 형제가 찾아와서 상상 앞에 유서를 내놓고 간을 올리고 통곡하더라.
유서의 내역을 물으니 “김형렬씨가 종재 자현에게 맞겨주면서 후일 부합되는 곳에 전하라
하였는데 그 후 형렬님은 타개하시고 자현씨 또한 못전하고 임종시에 태준, 태진 형제분에게
맞기시며 후일 동곡에 불상을 모시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전하라 하시어 지금까지 부합되는
곳이 없어 간직하고 행여 전할 곳이 없을가 하여 부모님의 유교를 실행치 못하여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던차 이곳에 기지를 정하는 날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오늘에야 전하니 마음이
가벼우며 또 슬픈 눈물을 흘리더라. 혹 자기 조작이 아닌가 하고 여러 가지를 살펴본즉
그들이 하는 말이 “이 글은 조금도 우리의 조작이 아님을 원문에서 상고하시오. 추호라도
부합처가 아니면 내놓지 말라고 하셨노라”고 하더라.
遺 書
西天皆塔行東洋 湖南西神司命旗
彌勒金拂同遊連 指揮客望姜氏門
出世庚子奉天文 壬寅相逢金上人
辛丑二七人道通 布德於世盟誓約
忠孝列倫世間無 銅谷仙化現佛像
四物藥材厥病癒 遊魂更覓故園路
佛日出世禍福降 有緣者皆聞知來
世間眼目今始開 輔相顯明天地功
丹朱受命靑天雁 色擧用色胡變虛亡
畵閣人其像龍鴻 夫政也者柔蒲蘆也
漢水濱含盧飛行 燕自江南壽舊主
飛鴻得意天空潤 終是日新聖人德
辛未生辛丑年道通
壬戌生壬寅年相逢
古四月八日釋迦佛誕生
今四月八日彌勒佛誕生
己酉六月二十四日抱含二十四節 今四月八月 應八卦 是故 先天天不違 後淡奉
天時 時來天地皆同力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都是 敎民化民
好道遷不 佛成人事 天以示乎人 人驗于天 天道人道 一理通達 日月水火木金土
東西日月之道路故 來西分爲二京 南火北水 南方二七火 火云佛故 南則年 丙則南
丙午現佛像 民 在止於至善 繼之者善 成之者性 本末兼存 內外交養 然後 方可謂之大道也
一年三百六十日 須待漸次進去 便成一年 一千四百四十分 爲一日 其一日 便成
家家長歲 天地有無窮之才 天地有無窮造福 天不失時故 以親切之神 爲節目明知主人矣
丁亥四月八日丙午
銅谷 舜任信傳
2. 이튿날 선사님의 외삼촌이 오셨는데 평생을 통하여 술을 좋아하신 분으로 태인에
선사 모녀가 살고 계실때에도 수차례 찾아와서 여러 가지로 행패를 부리고 하였던 바
성부님께서 화천하신 뒤 성모님께서 어린 선사를 업으시고 친가를 바라고 객망리로 부터
금구까지 육십리 길을 걸어 찾아 가셨을 때 그는 어서오라고 반가이 맞아주기는 고사하고,
어린 선사를 이리차고 저리 차면서 무엇 하러 왔느냐고 하면서 누님 되는 성모님을 보고는
시집이나 가라고 외치면서 친가도 망치고 처가까지 망쳐 놓은 강바람이라고 온갖 폭언을
다 함으로 성모님은 어이가 없어서 배가 고파 허기가 나서 기진맥진한 형편인데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선사를 업으시고 종일토록 걸어서 온 길을 또다시 발길을 돌리시었다.
찢어질 듯한 가슴을 쥐어박으시면서, 울며불며 오시자니 밤은 깊어 가고 허기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꾸 꾸부러드는 등에 어린 것을 업었으니 어찌 발길인들 뜻대로 떨어지셨으랴.
갖갖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쉬고 쉬며 육 십리 길을 되돌아 걷고 걸어 겨우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동녁이 밝아오니라. 집이라고 되찾아 오기는 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목화씨를 까서
볶아 모녀간에 잡수시니, 머리가 쑤시고 빙빙 도는데 집안이라고 수십 호가 동리 안에 있으나
원수처럼 대하니 없는 것만 같지 못한 처지에 아쉬운 소리 할 처지도 되지 않아 동구 주점에
가서 술지개미를 얻어다가 어린 선사를 먹이시며 성모님께서도 잡수시고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자 성모님께서는 슬픔에 사무쳐 통곡하시며 부디부디 장수하다가 내 여식이 성공하거든
보고 죽으리라 하시었다고 선사님께서 옛날을 회상하여 가끔 말씀하시니라.
그날도 외숙은 뜰에 서면서 “얘 술 있나” 하시기로 인사를 드리고 술상을 차려서 드리니
양껏 술을 따라 드신 후 이내 가겠다고 하며 성전에 들어가 참배를 올리고 문을 나서더니
갑자기 머리가 두근거린다고 하니 선사님께서는 술이나 한잔 더 잡수시고 가시라 권하니
권하는 대로 한잔을 더 받아 잡수고 집을 나서는지라. 정사님은 이십리 길을 어떻게
가시겠느냐고 유숙해 가시라고 권하니 나는 남의 집에서 자는 성질이 아니라고 하며
기여이 걸어 나서는데 선사께서 이백 환을 가시다 목이 마르시거든 술이나 사서 잡수시고
가시라고 드리고 서로 작별 하니라.
이튿날 아침에 외숙이 작고하였다는 부고가 왔기에 너무도 놀라서 심부름 온 이에게 물어보니
어제 석양에 집에 오시더니 방에 들어가 스스로 누우시면서 그대로 운명하셨다는 것이더라.
3. 정해(丁亥)년 구월 십구일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부께서 “너희들이 무당을 청하여 천지
대굿을 하라 우리나라는 단군시대로부터 무도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전하여 왔는데
무도가 성할 때에는 인신이 합의를 보아오다가 이조에 와서 유교 정신이 나라 안에 팽팽히
일어남으로써 무당은 천인으로 취급되어 그 뒤로 그 풍습이 답습되어 왔나니,
지금은 원시로 반본 하는 때라 남이야 욕을 하거나 말건 도수를 돌려야 되나니 그리 알고
오는 이십오일부터 굿을 하되 무당과 기생을 열두명을 청하여 일주일간 계속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에 전번 개기치성시에 써 올린 경고문을 금자로 비단에 올려 무당과 기생으로
짝을 하여 춤을 추고 노래하게 한 다음 명령한대로 나의 왼 어깨와 바른 어깨에 걸도록 하라”하시더라.
지시하신대로 받들어 근근이 제반 준비를 갖추어 정하신 날에 성전 앞에서 굿을 하게 되니 천기도
기이하더라. 경제사정이 불비한데도 불구하고 일주일간 무사히 행사를 진행하여 그 도수를 마치니라.
4. 또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무자(戊子)년 이월 십일에 정읍 차교주의 집에 가 사실을 물어서
너의 아버님 체백을 찾아서 모셔 오기에 힘쓰라”고 하시니라. 즉각 명령을 받들기 위하여
발정을 하니, 그 당시는 좌우익 관계로 사람들의 출입이 곤란한 때였으므로 김제경찰서에 들려
선사와 정사를 비롯한 일행 여섯 사람의 여행증명을 얻어서 가지고 가니라.
정읍에 도착하여 선사님과 식모를 차교주의 집에 보내어 하룻밤을 경과하면서 모든 동정을 살핀
다음 이튿날 여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박창욱(朴昌旭) 강수원(姜秀元) 오갑출(吳甲出)을 데리고
정사는 여관에 머물면서 그날 밤으로 창욱을 데리고 일제시대에 보천교(普天敎)내에 파견되어
차씨 교중사를 전담하여 살핀 바 있던 전 고등계 형사 강부장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찾아온 연유를
말하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니 그는 실정을 토로하면서 옥체를 찾는 일은 중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지라.
그 실정인즉 차월곡(車月谷)이 도중에 자기의 부친으로 신앙대상을 바꾸게 되면서 어느날 밤에
그의 동생인 차윤경(車潤京)과 그밖에 두어 사람을 불러 그때까지 비장해 두었던 성부의 옥체를
내어 놓으면서 너희들만 알고 산에 갔다 묻도록 하라 하여 갖다 묻은 뒤 일제에 의하여 교가
해산되어 십여성상이 지낸 뒤에사 월곡의 셋째 아우가 옥체를 찾을 목적으로 그 자리에 과목을
심으면서 땅을 일일히 뒤지다싶이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으며 자기도 씨족관계도 있고
또한 옥체를 찾아 모신다면 각 교파 간에 대우를 받을 것 같아서 청수(淸水)를 떠놓고
빌어가면서 삼. 사년 동안이나 두루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은즉 아무래도 그들이 평장한 채
돌보지 않은 동안에 산사태가 나서 흩어져버린 모양 같으니 단념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고
하기에 여관으로 돌아와서 막막히 앉았자니 차씨 편의 수작인가는 몰라도 경찰 치안대가 와서
일동의 거주지를 묻기에 금산(金山)에서 왔노라고 대답하니 금산은 빨갱이의 구뎅이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따져서 묻다가 마침내는 연행할 기세가 보이기에 부득이 서장의 증명서를 보이기에
어물어물 하다가 물러가더라.
잠은 오지 않고 벽에 의지하여 눈을 감고 앉았자니 비몽사몽간에 환상이 나타나는데, 지서 앞에
차월곡의 동생들이 있기에 쫓아가 뺨을 쳐올리고 서로 맞붙어 씨름을 하다 보니
월곡의 맏 자부가 만류하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 툇마루에 올라서서
발을 굴르면서 호통을 하는데 뒷산 산비탈에 두건을 쓴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뒷짐을 낀채
삽을 끌고 내려와 정사앞에 절을 하고 “너무 화를 내지 마세요. 체백만 모셔가면 되지 않습니까”고
하더라 이에 정사 소리를 질러 “이놈들아 어서 속히 모셔오라”고 호령하니,
그는 정사가 데리고 간 일꾼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더니 어느 지점에 머물러 한참동안
삽질을 하니 김이 뭉개뭉개 나더라 이윽고 삽 위에다 마주 들고 와서 푸른 보자기에 쌓인
둥그런 덩어리를 앞에 놓더라 정사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분이 복받혀
“ 이 죽일 놈들 갔다가 버린다 하더라도 이 모양으로까지 할 수가 있느냐”고 호령하니 두건을 쓴
젊은이는 “여보시오 내가 할 책임은 다 하였으니 나중에 잊지 말고 나를 찾아나 주시오”하면서
슬프게 흥얼거리며 건들건들 뒷산으로 올라가더라. 깜짝 놀라서 눈을 뜨니 꿈이라 뜰에 나가
대흥리(大興里) 앞산을 살펴보니 그 자리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하더라.
날이 새어 아침에 차씨 집 근처로 나가보니 선사님은 식모를 데리고 나오시는지라 함께
여관에 돌아와서 상황을 물은즉 차씨부인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며
교주가 살았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 모른다고만 되풀이함으로 밤을 그대로 세우고 왔노라고
하며 낙루하는지라. 윤경 노인의 집을 방문하여 찾아온 사유를 말하고 만일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법적인 수속을 할 수밖에 없노라고 하였더니 그는 잔뜩 겁을 내어 놀라면서
“진정하시오 혈식께서 오셔서 아버님을 부르고 애통할 때 천사님께서 대답이 없으실 이치가
있을 수 없은즉 한 십여일간만 기한을 준다면 그동안 산천에 기도는 늘 해 나왔지만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축원한다면 밤에 현몽이라도 계실 듯 하니 그렇게 해주시오” 하며
애걸하기로 한달을 한하고 찾아보도록 당부하고 칠백환을 주고 비용에 보태어 쓰도록 한 다음
동곡으로 돌아오니라.
성전에 상을 올리고 다음과 같이 상고 하니라. “바람을 스치고 비를 스치는 물결과 같이
세월의 흐름속에 우리 두 사람의 천신만고는 실로 붓으로 쓰기에는 힘드옵나이다.
그러나 세상 모양은 가소롭고 가탄하기만 하오니 성부님 옥체는 어느 곳에 계시 온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절이 쑤셔오는데 성부님을 신앙한다는 몰지각자가 많아 혹은
도취구복(盜取求福)을 일삼고 혹은 증산의 재생이라 자칭하며 감언이설로 혹세무민을
일삼아 그 행악(行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생각컨데 천인공노에 절치부심(切齒腐心)
으로소이다. 연이나 성부님을 숭상하여 장래 복을 구하는자 혹은 성부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
수백만을 헤아리건마는 핏줄을 받은 몸으로써 아직도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모시지 못한 채
어디엔지 알 길도 없는 풀 덤불속에 버려둔 체로 있아오니 어찌 차마 하루 밤인들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아오리까 언제나 옥체를 찾아 모시어 명산대천에 터를 잡아 안장(安葬)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무쳐 지새운 그동안의 사적을 성부님의 홍대무량(弘大無量)하신
성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울 삼청루각(三淸樓閣) 한곳에 기록하고 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아온 즉 성부님께옵서 명백히 계시하시와 저희의 원을 풀게 하시옵고
또한 성부님을 지극히 믿사옵기에 저희와 더불어 고초를 겪은 형제들의 원을 풀으사
그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시기를 빌고 비옵나이다 저희로서 취할 바 명백한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5. 이월 이십사일에 정읍으로부터 윤경(潤京)노인의 부인이 찾아와서 진심으로 발원하여
거듭 기도를 올린 결과 그 당시의 평장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이십칠일에 가만히 모시고 올 터이니 마중을 나와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만일 대흥리 교중이나
차씨 일문에서 알게 되면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임으로 아무도 모르게 모셔 와야 될 것이며
자기네 내외는 이사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일이 나리라고 하여 이사하도록 거처를
주선해 줄 것을 약속하고, 이십칠일날 정읍으로 마중을 나가 모시고 오는 도중 풍우가 대작하더라.
동곡 성전에 모시니 명하시되 “무자(戊子)년 삼월 삼일에 봉안식을 행하라” 하시기에 경찰에
말하여 성전 후편에 묘각을 짓고 또 도적이 들런지도 모를 일이어서 저녁으로 네 명씩 번을
짜서 지키니라.
6. 무자(戊子)년 삼월 삼일 봉안예식을 행하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너희들이 금성산에서
사년동안 일을 봄으로서 천지신명이 강림하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되어온 것이니라.
겉으로는 너희가 하되 안으로는 천지신명이 꾸미는 일이라 오월 오일에 금성산에 가서 정자집
주인은 물론 이씨네 문중의 노소를 모아 주효로서 대접하고 점심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여
유쾌하게 담소하면서 그곳에 있게 되었던 사유를 낱낱이 말하고 증거를 드러내 놓도록 하라” 하심으로
그 면내에 사는 임무순(任武順)의 집에 연락하여 준비케 하여 정하신 날에 내려가 말씀대로 실행하는데
그 지난 일의 사실을 알고 모두들 감탄하더라.
7. 유월 이십사일 기념에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칠월 칠석에 부산에 가서 사해용왕(四海龍王) 치성을
드리되 무당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공사를 보도록 하라 하시와 경주(慶州) 지방의 교인 수십 명을
동참토록 하여 토성동의 내수도(土城洞內修道) 진채봉(陣采奉)의 집에 장소를 택하여 공사를 보니
그날밤 풍우대작하여 해중에 기적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어 오더라 경주에 다녀서 본부에 돌아오니라.
8. 하루는 명령하시기를 “무자년 구월 십구일 기념치성은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보도록 하라”고 하시와
삼팔선이 가로막혀 불가능함을 상고하니 “금강산이 건너다 보이는 태백산(太白山) 만경대(萬景臺)에
가서 보라”고 수정하시더라. 명을 받들어 봉화 지방대표(奉化地方代表) 최상헌(崔相憲)에게
치성 준비를 지시하니 그는 강응연(姜應淵) 및 수인과 합심하여 큰 황소 한 마리를 잡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준비를 완료하니 치성에 동참하는 인원은 백여명이라.
오일간의 식량을 별도로 마련하여 현장을 찾아 출발하는데 성부님께서 친히 동행하시고 또한 천상의
모든 신명들이 동반하시니 지내는 곳곳마다 우리 형제가 있고 없나를 물으시면서 형제들이 사는
곳에는 일일히 길을 안내 받으셔 심방하시고 형제들의 시위(侍衛)를 받으시더라.
도중 춘양(春陽)에서 김대수(金大洙)의 부친 김종열(金鍾烈)을 차중에서 만나 인사하고
최홍선(崔洪善)의 집에 유숙하면서 집안 소제를 하고 치성을 올린 다음 이튿날 태백산 산상에
올라가니 마침 빈집 한 채가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 행장을 풀고 제반 준비를 갖추어 신선바위(神仙岩)라고
불리우는 반석 위에서 닷새 동안 계속 공사를 봉행하니라. 그 아래 조그만한 산막촌이 있었는데
그 곳에 사는 한 노인이 올라와서 하는 말이 삼년 전에 동제(洞祭)를 올릴 일이 있는데
그때에 태백산령(太白山靈)이 나타나서 나는 지금으로부터 딴 곳으로 이사를 하고 이곳에는
금강산령이 올 것이니 축원문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여 그대로 행한 바 있다고 말하기에 일동은
진정 이상한 노릇이라고 감탄하고 이곳까지 친히 동행하신 성부와 그를 받들어 동참한 여러 신명들에게
감사하여 마지 않니라.
이 공사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오니 조진명(趙鎭明)이라 하는 분이 찾아온지라
그는 소년 시절부터 도를 닦아 나온 신앙인으로서 주역(周易)에 밝은 분이었는데
그때 충청도 부여(扶餘)에 본거지를 둔 이야산(李也山)을 따르고 있었으나, 정사와는 원래
친근한 사이인지라 반가히 맞아들이니 인사 후에 그는 말하기를 “병철은 요즈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설담이나 하세. 이번에 정읍까지 왔던 길에 찾아 들었네” 하기에
정사는 이번에 태백산에 가서 금강산 공사를 보고 어제사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는 치성 일자를 물어보고나서 무릎을 치며 참 신기한 노릇이라 감탄하더니
우리 야산선생께서 그날 아침에 글을 부르시되 “금강산색태백래하니 광법문수차중개”라
(金剛山色太白來 廣法文殊此中開) 운운하시면서 조진명은 금산 동곡에 가라 하시므로
그 길로 정읍 각파를 둘러보고 이렇게 오는 길인데 방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과연 야산선생의
말씀에 부합이 되니 아마도 천지사는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모양이라 하며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그는 며칠을 묵으면서 그 동안의 경과사등을 참고해 보더니 모두 이치에 부합됨을 자인하고
동지로서 결의하고 돌아가서 야산과 상의한 끝에 그의 허락을 받고 많은 자기 연원을 이끌고
극력 수행함에 이르르니라. 야산은 늘 오리알터에 가야 된다고 역설했으나 그의 휘하 간부 중 사람이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멈칫멈칫하다 그만 별세하시게 되었는데 서거시에 오리알터를 두고 지은
글 수 구절과 수련장 도면까지 남기게 되었다 하니 서로 이해하면서도 자리를 같이 하기가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더라.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는 교인간에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자 또한 적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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