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은당실기 - 제8장 선화(仙化) 1
제8장 선화(仙化)
1. 선사님께서는 무술(戊戌)년 십월부터 득병하여 신음하시더니 그 뒤로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제반공사를 주제하시고 교중사를 일일이 지도하시더니 기해년(己亥年)이 되면서
점차 중태에 빠지시니 정사를 비롯한 교중 형제들의 우울하고 염려스러운 마음 그지
없는지라. 백방으로 치료를 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던 중 하루는 원평병원(院坪病院)에
입원(入院) 하시겠다는 말씀이 내리신지라. 수종을 들고 있던 임원들은 반대하여 말씀드리되
“누님의 병환은 천상에서 아시는 일이라 천상의 의원들이 맡아 치료하실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또 인반(人般)에서는 인반대로 있는 힘을 다하여 치료해야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오나 그러나 다른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르거니와 적어도 증산천사(甑山天師)님의
따님으로서 인간세의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면 일반의 비소를 면치 못할 것이니
정히 필요하시다면 의사를 불러다가 곁에서 시봉(侍奉)하도록 할지언정 친히 내려가시는
것은 도리에 합당(合當)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 말씀하니 선사님(禪師)께서는
평생에 일신사에 대해서는 비록 재하자(在下者)라도 의견이 있을 때에는 즐겨 침착하시고
따르시는지라. 이번에도 그럴 일이라고 더 말씀이 계시지 않더라.
그러자 삼월 초순이 되며 선사님(禪師)께서는 다시 입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이는 아무래도 무슨 공사를 보시기 위하심인가 싶어 말씀을 받들기로 식구들 사이에
상의(相議)가 돌아 삼월 사일 아침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는데 차를 준비하려는 것도
말리시고 친히 걸어 나서는지라. 상택은 마스크를 하시도록 권해드리니 물리치신 뒤에
손수래로 모시고 가니 수인의 내외 식구들이 뒤따르니라.
병원에 입원하신 다음날 선사님께서 입고오신 치마에 혈수(血水)가 묻었는지라.
시봉자는 대경실색하고 내출혈인가 걱정하여 황급히 서둘러 의사로 하여금 지혈제를
놓아드리도록 부탁하여 의사가 주사를 놓으려고 하는데 선사님은 웃으시면서
“이놈의 아들아 내 막내 하나 낳으련다”하시매 깨닫고 보니 그것은 내출혈이 아니라
경도로 인한 혈수(血水)임을 비로소 알게 되니라.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현상에 식구들이 모두 이상해 하며 정사도 또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니라.
선사께서는 십여년 동안 경도를 보신 일이 없었으며 다만 도령 두 형제를 나으실 즈음에
돈짝만큼 비쳤을 뿐으로 더구나 갑오년 이후로는 정사와는 별거하다 싶이 하여
동침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차에 수개월을 신음하여 쇠약하실 대로 쇠약하신
선사님(禪師)의 몸에 그런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었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하룻밤에는 성모님의 명령이 내리시는지라 명령을 받어 봉명(奉命)하시는
선사님께서 노래 부르시듯 풀어내시니 그 음성(音聲)이 어찌나 큰지 병원 의사는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하며 놀래더라.
모든 식구는 병원에 입원하셨으니 이제 완치되어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원 의사는 이미 당시의 그 체력 가지고는 도저히 생명을 유지해 갈 수 가 없노라고 판단하여
방금이라도 주사기운만 떨어진다면 운명하실 것이라고 하는 판에 입원하신지 사흘 만에
퇴원하시겠다는 말씀이 내리시니 식구들은 또 한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선사님께서
자리를 일어 나서 앞장을 서다싶피 하시니 수종하던 자들도 하는 수 없이
본부(本部)로 되짚어 돌아오니라.
2. 본부로 돌아오신 선사님께서는 남별당(南別堂)에는 드시지 않으신 체 바로 천하전에 올라가시더니
갑자기 치성(致誠) 준비를 명령(命令) 하시니라. 식구들은 온갖 정성(精誠)을 드려 시키는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개 두 마리와 술 다섯말 밥 두 가마니를 위시로 대소 제물을 장만하는 동안,
선사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신 후 그대로 천하전에서 머무시더니, 그날 밤에 준비된 제물을 진설하여
천지 부모와 제대신장(天地諸大神將)을 대접하기 위한 대 치성을 올리게 되니라.
그때는 마침 제사회 공부생(第四回工夫生)들이 입공중이었는데, 온 밤을 두고 공사를
주제하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많은 신장들이 내려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빙빙 돌며 빙글빙글 웃기만 하는 것을 보니 천상(天上)에 이미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고
하시니라.
소위 사일구혁명 전야 열두시 삼청전 미륵불상에서 땀이 흘러 내려 좌대가 모두 젓고 수건으로
닦아서 짜낸 물은 서되도 넘더라. 모든 사람들이 무슨 큰일이 있으리라고 하며 신기함에 빠져
있는 중에 날이 세면서 혁명방송이 흘러나왔다.
3. 삼월(三月) 이십칠일(二十七日)이 되면서 선사님의 병세가 그날을 못넘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생들의 공부를 중지시키려고 하니 선사님께서 말리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는 것은 나의 할 일이요, 저희들의 공부는 저희 각자(各者)의 책임(責任)인데
어찌 공부를 그만두도록 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내가 떠날지라도 공부를 정지(停止)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이에 정사는 “사람이 죽는데 무슨 정신으로 공부를 하겠소”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시면서 다시 당부하시는지라. “그럼 이 판국에 무슨 주문을 읽도록
하리까”고 물으니 “읽는 주문이 생각나지 않거든 나를 생각하여 울도록 하시오 그도 역시
공부이외다”고 하시니라.
선사님과 목천포에서 만난 뒤로 이십사년 동안 지내온 정상(情狀)을 생각할 때에 실로
꿈 같은 경로야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평소에 선사께서는 분명코 천상(天上)의 연분이
지중하다고 하시더니 웬일인지 칠팔년 전부터 합방거처도 못하게 하시면서 조석도 따로
가져오라 하시며 심지어는 아침 저녁으로 상면(相面)을 할지라도 안색(顔色)이 변하고
혹 상의할 일이 있어 이런 말 저런 말을 주고 받다가도 불쾌한 어조로 돌변하여 빨리 나가라고
욕을 퍼붓기도 하여 정을 떼는지라. 그런 일을 당하면서 정사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어
그러하리라고 짐작할 때도 혼자 하시는 말씀이 “내가 멀지 않은 앞날에 죽고 보면
저 영감은 혼자서 뛰다가 울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리라 불쌍한 노릇이요 그러나 내가 먼저
떠날지라도 앵무새같이 일러주마”고 하시더니 또 오년전 부터는 나의 대신을 구하라고
조르듯 말씀하시는지라.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왔는데 오늘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되니 지난번 병원에서 돌아오시어 천하전에서 하시던 말씀이
모두 뜻이 있어 하셨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말씀대로 행하여 드리지 못하였음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쓸데 없는 일이라 비감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더라.
4. 그 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온 식구가 침식을 거두다 싶이하여 간호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왔으나 오륙개월을 두고 시병한 사람들은 기원(基元) 춘도(春島) 종호(鍾浩) 명성(明星)
오반택(五班宅) 식모등이었더라. 삼월초에는 대구로부터 입공차로 왔던 김선도(金仙道) 여인이
선사님(禪師)의 병세 위급함을 보고는 공부보다도 시병이 급하다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진심갈력으로 이십일을 봉양하는 가운데 때때로 눈물바람을 하며 또 피를 빼어 수혈을 하여
드리려 했으나 선사님께서 굳이 응하지 않으시니 선사님을 대신하여 목숨을 받치겠아오니
무량도법(無量道法)의 혜택을 입어 선사님께서 소생(蘇生)하실 수 있게 하여 주시라고
수십일을 두고 기원한 바 있었으며, 한편 각 지부(各支部) 신도 남녀일동(男女一同)은
수차 치성(致誠)을 올리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축원하기를 그치지 않을세,
선사님께서도 그들의 간호를 받으시면서 많은 형제자매를 두고 먼저 떠나시게 되니 남는
형제들의 전정을 생각하심인지 깊으신 참뜻은 몰라도 “어쩔거나 어쩔거나”
그 말씀을 되풀이 하시니라.
5. 삼월 삼십일에 입공한 도생들이 공부를 마치어 졸공(卒工)하고 도장(道場)을 떠나게 되어 저녁에
선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일 일찍 떠날 것을 고하고 서른 세 사람이 모은 돈 이천오백환을
드리면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사서 잡수시라고 말씀드리니, 선사님께서는 그 돈을 받아
가슴 안에 넣으시면서 “잘되었다. 내가 이 시간에 멀리 갈려는데 여비가 없더니 참 잘되었다.”하시니,
모두들 웃으며 우리 누님 정신이 좋으시다고 하면서 저만하면 회복하실 날도 멀지 않았다고
희색(喜色)이 만면하더라. 그러나 선사님께서는 곧 요에다 나를 뉘인 채 떠밀라 하심에
그대로 행하니 손으로 요를 쳐들어 높이 올리고 밀라고 하시어 수종드는 사람들이
높이 떠메고 나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시기에 그대로 행하니, 선사님께서 “높기도 높구나
나는 태전(太田)으로 간다”고 하시더니 다시 “멀기도 멀다”고 하시며 정사를 대하여
“여비가 부족하니 여비를 더 내라” 하심에 몸에 지닌 돈은 없고 선사님 몸에
이천오백환이나 있음을 아는지라 더 들이지 않은 채 예사로 생각하고 근 한시간이나
메고 돌다가 다시 방으로 모시니 말이 어둔하신지라.
성태(成泰)가 천하전으로부터 내려와서 하는 말이 “하늘에 저구름을 보시오”라고 함으로
나가보니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지붕위로 오색(五色) 구름이 무지개처럼 뻗치었더라.
정사(整師)를 비롯한 성도(聖度)등 간부들은 어쩔줄을 몰라 이저리 서성거리는데
환우(烜雨) 상택(相澤) 등 몇 사람이 하는 말이 삼월 말만 넘어가면 무사하리라는
동기가 있었다고 하면서 열두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지내면 삼월 말이
다 간다고들 고대하는 마음으로 주고 받는지라.
그러나 정사의 생각에는 누류인간삼월우(淚流人間三月雨)라 하시었는데 오늘을 지낸다
하여도 내일은 곧 사월이라, 그 사월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 현무경(玄武經)에
불의사월래(不意四月來)라 하시었으니, 아무래도 사월 그믐이 다가고 오월달이 와야
안심이 될 것만 같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전주 노송동(全州 老松洞) 에서 지낼때에도
중병에 빠져 운명(運命)할 지경이 되어 치상준비(治喪準備) 까지 하여 놓고 절명(絶命)
하기만 기다라고 있었는데 불시에 도령형제가 들어와서 약(藥)을 먹이니 약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면서 곧 쾌유하여 기동(起動)하게 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워낙 중환(重患)이라
인세(人世)의 약으로는 도저히 안될 줄을 생각하면서도 온갖 수단을 다하여
치료와 간호에 전력을 다하기는 하면서도 극도(極度)에 이르르면 또한 무슨 신기한
동기가 있으리라고 바라고 왔었는데 두해 동안을 두고 신음에 신음을 거듭하셔도
성부 성모님과 도령형제며 모든 신명(神明)께서도 한마디 걱정도 없으시니
무슨 연고인지 알 도리가 없는 채 이상한 생각만드니라.
전번에 금성산(金城山)에 있을적에는 몸살만 나도 천상의 약을 주시고 애지중지하셨으며,
처음에는 “나의 복동(福童)아”라고 부르시다가 다음에는 “나의 혈식(血息)아” 하시고
또 그다음으로는 “내 꽃(花)아”라고 부르시고, 천지 신명도 선사님의 말씀이면 여율령(如律令)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이처럼 아무런 소식이 없음은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라 성부(聖父)님의 말씀에 “비록 나무나 돌이라도 기운만 부치면 쓰는바 되리라”하시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또 죽음을 바라면서까지 받들기 어려운 명령(命令)을 받들어 수십년 동안을
쉴 사이 없이 일하여 겨우 기초(基礎)를 마치고는 그 동안의 무리로 육탈이 되고
기진맥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더욱 신고하게 되었어도 영영 불고하시니,
공사(公事)에 사정을 두지 않아야 성공(成功)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탓인가 사람의
좁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성부님의 도덕이 속속히 판단(判斷)을 내리소서.
비통한 마음과 불효스러운 심정금할 길 없나이다 하고 심고하니라. 갑을(甲乙)이 기두(起頭)하여
무기(戊己)로 구비친다 하셨으니, 아무래도 올해 기해(己亥)년이 그대로 넘어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도(聖度) 환우(烜雨) 상택(相澤) 등도
모두 우리가 생각해도 안심할 수 없노라고 통탄해 마지 않니라.
6. 이튿날 기해(己亥)년 사월 초하룻날 아침에 성도와 환우가 들어와서 보더니
오늘은 영 가망(可望)이 없을 듯 싶으다고 탄식(嘆息)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곁에 앉는데
천하전에서 수공하던 공부꾼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간밤에 천상에 올라가 보니 선사(禪師)님께서
천상 대법관(大法官)으로 임명을 받아 우리 인간의 선악과 천지공사(天地公事)에 대한
공로의 유무를 심판 결재(決裁)하시는 책임을 맡으셨으니 법석을 마련하여
모든 법관들이 시위하고 기다리고 계시더이다.”라고 하니 모든 식구는 운명하실
시간이 가까워지는가 싶어 더욱 서러워하니라.
오후 두시경에 정사(整師)는 선사(禪師)님을 안고 약물을 두 번 떠 넣으니 잘 받아
드시고 나서 손을 들어 정사의 얼굴을 이리 저리 쓰다듬어 어루만지시더니 눈을 바로 뜨신 채
숨소리가 점점 줄어드시므로 성도(聖度)가 식구들을 불러들여 앉히니 모여든 식구들을
두루 살피시고 하시는 말씀이 “본부 식구들은 물론 일반형제들도 꼼짝 말고 수도(修道)나
잘하면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나는 태전(太田)으로 간다. 하시고
곧 눈을 바로 뜨시더니 전광(電光)을 돌린 듯 빛나고 눈동자를 그대로 눈감지 않으신 채
선화(仙化) 하시니라.
7. 지금까지 오직 대신(代身)하는 존재로 성부님을 대하듯 의지하고 지내온 선사님께서
선화(仙化)하시니, 온 식구의 곡성(哭聲)은 천지에 진동하는지라. 애통스러운 정
금할 길이 없으나 근근이 정신을 수습하여 각 지부에 전보를 치고 부근의 신도와
지방유지에 부고(訃告)를 보내는 등 장례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니라.
그러나 묘지(墓地)도 막연하고 당시의 경제상태 또한 곤란한 때라 어이 일을 치루어야
할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우선 세상 사람들의 욕이나 면하기로 외봉(外封)이나
하였다가 정식 장례식은 후일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부고에도 임시장사라고
통지(通知) 하였는데, 그날 석양에 뜻밖에 지사(地師) 한 사람이 찾아오는지라.
무슨 뜻이 있는 일인가 생각되어서 답산을 부탁한 결과 현 남별당(南別堂) 뒤 산록에 묘지를
정하기에 정사도 자세히 살펴보니 그럴듯한 생각이 들어 그 장소에다 시멘트로 방과 같은
모양의 강중을 만들어 그 속에 관을 모시도록 하니 이는 선화(仙化)하시기 수년전부터
“내가 죽거던 묘안을 방안같이 하고 몸을 결속하지 않은채 자는 듯 뉘여달라”고
당부하시던 선사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니라.
8. 기해 사월 팔일(己亥 四月 八日)에 장례식을 거행함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교중형제는
물론이요 증산교 각파의 원로를 비롯한 많은 신도가 문상(問喪)하게 되니 보는 사람마다
묘지가 썩 좋다고들 말하니 혹은 금부포란(金鳧抱卵)이라고도 하고 혹은 유지앵소(柳枝鶯巢)
혈이라고도 하면서 복인이 봉길지(福人逢吉地)라 하더니 정말 대명당(大明堂)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니, 그런 땅에 모시게 되었음으로 다시 이장(移葬)할 필요가 없게 되어
영영 안장지(安葬地)로 결정하고, 장례위원회가 결성되어 부회장인 환우를 위원장으로
각 지부장이 위원으로 장례식을 구일장으로 정하고, 초 종례식은 교례에 의해 결정하고
준비가 완료되어 선사님의 채백이 본교를 떠나는 영결식에는 내외신도와 많은 사람들의
통곡소리는 수양산도 참담하고 일난풍화한 사월에 햇볕도 슬픔을 더해주고 바람마저
잔잔하여 온 수양산록이 문상객의 흰옷으로 백화를 이루었고 염불소리는 그치지 않고,
수백의 만장과 조기는 일산을 이루어, 장지에 당도하여 하관하고 평토제사를 지내고
반혼하여 초위제례를 행할재, 이제 화은당선사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수월전에도 경춘대를 들어서면 선사님의 음성은 온집안이 훈훈하였는데 자애하신 그 음성은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으리요. 내외도생들의 통곡소리는 본부가 떠나갈 듯 슬피울었다.
재우삼우를 모두 마치고 장례위원회를 해체하는 동시에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선사님 당부하심을 명심하여 슬픔을 참고 천하전 수련은 계속되었다.
일부 교단이며 외부측에서는 말하기를 증산선불교는 끝났다고 비판이 자자했으며,
허령에 빠진 도생 몇사람이 이탈했으나 별일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교인이 화은당선사님을 더욱 사모함은 형제. 숙질. 자매지 의로 모인 정이 깊었고
상제님의 따님과 맺어진 인연에 감회가 더욱 깊었더라.
그뒤 수공생(修工生)이나 가족에게 자주 현몽(現夢)하사되
“내 누운 자리가 매우 편안하다”고 하시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더라.
하루는 한 내수교인이 공부중에 천상에 올라가보니 선사님께서 수다한 사무원을 두시고
문서(文書)를 기재하시기에 다망하시어 인사를 받으실 여가도 없으신데
간신히 인사를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지상에 오르내리실 때에 나의 법신(法神)을
보내노라”하시며, 또 “천상에서 나를 보았다고 지방 형제들에게 안부나 전하라”고 하시더라
말하니라.
9. 이십사년을 두고 주야로 서로 마주앉아 천지사(天地事)를 상론(相論)하면서 신약한
선사님을 마치 유아 기르듯 일신양력(一身兩力) 으로 전심하여 받들어 오다가 사사
사람도 처상(妻喪)을 당하면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 하는데 지중한 천연가약으로
성부님의 인도하심을 입어 서로 만난 뒤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천지공사를 받들어
오던 일을 생각하니, 마디마디 회상되는 옛일들은 모두 피눈물로 얽힌 발자국들이라.
선사님 선화하신 이 세상에 더 머물면 무엇하랴 싶은 생각 참을길 없어 치상이나 마치고
뒤따라 죽을 것을 결정하였으나, 교중 형제자매들을 남겨 놓은채 정사마저 세상을 떠나면
그들은 정말 길 잃은 양떼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한즉 그럴수도 없다싶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시키기에 힘을 들이던 중 하루는 경춘대(景春臺) 이층에 올라가
금평호수를 내다보니 과거 수리공사가 완성이 되면 호수에 배도 띄울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좋아하시던 생각이랄지 또 보뚝자리를 정하시기 위하여 이마를 깨어 피를
흘리셨던 생각들이 떠올라 가뜩이나 수심스러운 심정에 더욱 애잔한 생각이 드는지라.
저수지에 물이 채워지는 것도 보시지 못하고 선사님이 먼저 가시니, 홀로 경춘대에 앉아
호수를 바라다보아야 하는 처지가 꿈인 듯 가여운지라.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솟아나고
정신이 아찔하여 의자에서 거꾸러지고 마니라 한참 만에 정신을 수습하여 눈물을 씻고 보니
마루바닥이 온통 눈물에 젖은지라 마루를 닦고 다시 걸상에 앉아 있자니 성부님의 재세시
말씀에 갑을(甲乙)이 기두(起頭)하여 무기(戊己)로 구비친다 하는 구절이 떠오르는지라.
금년이 기해(己亥)년이요 또한 득병하시기를 무진년(戊辰年)에 하였으니 이는 무기가 분명한
즉 갑진 을사(甲辰 乙巳)생이 서로 만나 성부의 후계사를 기두하여 무기로서 그 절을 바꾸게
되니 재세시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저윽히 안심이 되더라.
그 자리에서 입에 떠오르는 대로 시조 한수를 지어서 읊으니 그 뒤로도 늘 경춘대에 올라가
그것을 읊조리며 내내 마음을 부뜰어 오니 그 시조는 다음과 같으니라.
갑을(甲乙)이 기두(起頭)하여 무기(戊己)로 구비쳤네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라 나의 한(恨)이 아닐까
아무리 폭풍우 불어온들 사불범정
10. 치상(治喪)을 마치고 나서 정사는 짝 잃은 기러기처럼 외로이 앉아 생사를 아직 경절하지
못한채 연일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선사님과 화답하게 되었는데 선사님께서 “영감아 이십사년 동안 천지사를 받들기 위하여
그대 나와 더불어 죽을 고초를 감내하였음을 세상사람 그 누가 알리요. 나한테도 많은
고초를 당하고 별관 난관에 부딪쳤던 그 사정을 오직 천지신명이나 알수 있기에 천상에
치부되고 법문에 기재되었으니, 그 품값이사 나올 때가 있지 않겠소.
우리 양인이 이십여년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하시는 아버지의 명령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지금껏 받들어 나왔기에 이 기초가 다 완성된 것이니 나로서는
지상의 책임을 다한 셈이요, 따라서 아버님의 체백을 찾아 모시자던 일편단심으로
살아온 나의 소망도 이루어진 셈이 아니겠소, 지금 아버님을 믿기 위하여 벌려놓은
각파의 일은 모두 부분적인 책임을 맡아서 하는 것인데, 우리가 할 책임을 천상에 와서 보니
강령(綱領)은 되었으나 앞으로 남은 책임이 더욱 큰지라 모든 것을 정리하여 새 문명을
세상에 들어낼 의무와 책임이 아직 남았으니 그 일이 어찌 크지 않다 하겠소,
나는 천상 일광의 기운으로 일을 보게 되었으며 정사는 지상 월광의 일을 보게 되었으니
정사께서는 모든 근심걱정과 수심한숨을 거두시도록 하시고 정사께서 한숨을 쉬시며는
천상의 아버님께서도 마음이 불안하다 하시고, 또 제몸이 곧 내 몸이요 내 마음이
곧 제 마음인데 어찌 저리 한탄할까 하시며 걱정이 여간 아닐실 뿐더러 이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오니 제발 수심일랑 거두시도록 하시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떠나옴으로
혹 마음이 흔들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놓아두고 보시기만 하시오. 앞으로 뽑는
데는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아니 듣게 될 것인즉 제 마음에 붙이어 가는 자는
저절로 그들의 선영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암암리에 속마음으로만 좌우를 결정하면
신계에 치부(置簿)되어 불언지교(不言之敎)로 화민(化民)하게 될 것이매
은연중 무성 무취한 가운데 정리가 될 것이니, 이 점을 깊이 양찰하신다면
이제부터는 퍽 재미가 있을 것이요. 모든 것을 천지에서 은밀히 일러주고
뒤에서 훈수하는데 우주간에 겁날 것이 무엇이오, 현실문명과 현실인심에
역합하지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로되 우리가 그동안 공사해 나온 것은 인세로 보아서야
모두가 가소롭고 허망하기만 한 노릇인데도 물샐틈 없이 짜여진 그 도수(度數)대로
진행이 되어 나온 것이 아니겠소 미구에 판밖에서 일어 터져 나올 것이니
그 동안 도체와 공사가 어긋나지 않도록 하소서. 일반이 혹 부당한 논설을 할지라도
들은척 만척하고 내가 할 책임만 힘써 다하실 수 있도록 하시오.
우리도 과거에는 일을 위하여 서로 욕도 하고 싸움도 하였으나 그것은 공사를 위해
그리했던 것이니 이제부터는 나도 주인이라 부를 것이며 서로 극존하게 되었사오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 모두 더불어서 개명장(開明場) 나는 그날에는
나를 서로 만날 수도 있고 성부님 성모님을 모신 한자리에서 풍류를 잡히면서 전전사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공부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시오”라고
하시니라.
11. 우리 사업(事業)은 마치 탕자의 노름같고 광인과 무당의 집과 같으니 알 수 없도다.
우리 교는 깨달은 자 알것이오, 깨닫지 못하는 자 모를 것이니, 호호 탕탕한 이 가운데
진법이 나오건만 어찌 그리 쉽게 깨달을 자 많으리요
이상으로 소개된 선사님의 약력은 선사님 선화 후 그의 재세시의 피눈물 발자취를 더듬으므로서,
우리 다시 옷깃을 여미고, 성부님의 홍대무변(弘大無邊)한 대 진리를 세상에 밝혀내기 위하여,
가일층 굳은 결의를 촉구하는 정사의 충정으로, 우선 대강의 강령만을 줄음 잡은 것이니,
상세한 것은 과거에 나날이 기록해 나온 일지와 기타 문물로서 후일에 다시 밝혀내고져 하니,
모든 형제자매는 그점 깊이 양해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2. 경자(庚子)년 삼월 스무 아흐렛날 화은당선사(華恩堂禪師) 일주기(一週 朞)를 맞이하여
전국 이십여 지부에서, 수천명의 신도들이 지부별로 전수를 마련하여 기정(忌情)을
드린 후에 지부마다 제문(祭文)을 일일이 고유하니, 구구(句句)히 슬픈 정곡 구천(九天)에
사무치고 도량안의 통곡소리 만리창공(萬里蒼空)에 비전터라 오호(嗚呼) 슬프도다.
영당에 모여서서 기정을 드리는데 그 시간에 밤은 깊어가고 등촉만 밝혔는데,
대령전 마루에서 과방을 차려놓고 대흠 화섭등 신도 오륙명이 과방을 보고 있는데,
수양산 호랑이 한 마리가 대령전 축대에 내려와서 제향(祭享)에 동참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요. 성도가 그 호랑이를 알아보고 가만히 과방(果房)에 들어가서,
우골 한 벌과 저골 한벌 두벌의 뼈를 내어주며 고이 가지고 가랐더니,
한참 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도 흔적이 없고 우골과 저골 두벌의 뼈도
간 곳이 없이 사라져 호랑이가 그날밤에 우골 저골 한벌씩을 남김없이 모두 가지고
사라졌더라. 일점진성(一點眞性)이 불명불멸(不冥不滅)이나 산령의 보우함이
더더욱 뚜렷하니 모든 신도들이 놀라워 하더라.
13. 세월이 여류하여 신축(辛丑)년 삼월 이십구일 화은당 선사 대상(大祥)일을 맞이하여
전국 신도 수백명이 지부별로 운집(雲集)하여 제례 준비중인데,
새벽에 오일육(五∙一六)이 일어날 순간에 삼청전 불상에 땀이 흘러내려 불상좌대가
모두 젖었는데 물로 계산하면 서되 정도나 되었다. 신기하고 기이한 점은 인간으로서는
해석하기가 어렵도다. 차임이 되자 방송에서 뜻밖의 소식을 보도하니,
오늘 새벽에 오일육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선사님의 대상일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영이(靈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사에 모인 신도들이 선사의 영험을 신통에
감명할 뿐이더라.
대표회의에서 사대오상(四大五常)을 의론하였는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기운이
화합하여 인간의 육신이 이루어졌다가 별세(別世)하게 되면 다시 지수화풍 사개체(四個體)로
분류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인륜의 대강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神) 오상(五常)의 본바탕을 거울삼아 후계사에 도덕이
기본되는 도통(道統)을 계승할 수 있는 맥을 이어줌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14. 임인(壬寅)년 삼월 이십구일날 화은당 선사 사대상(四大祥)일을 맞이하여
전국 신도 수백명이 한결같이 참예하여 전수를 마련하고 지부별(支部別)로 문상하고
기정을 드리니 세세한 과거사가 상(祥)이 거듭할수록 명명백백 떠오르고
지난 날의 시은시덕(施恩施德) 일월같이 밝아오인 지부대표 수십 명이 영위(靈位)전에
맹서하기로 심견석천(心堅石穿) 의지로써, 대도창명(大道彰明)을 기약하고
어려운 이 시기를 감내하는 바탕으로 진도역행(眞道逆行)의 고난의 길 거울을 삼아
즉 수도하는 길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공은 더욱 더 큰 것이니 우리는 잠시도
도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게 다지면서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결속할 것을 재삼
다짐하였더라.
15. 계묘(癸卯)년 삼월 이십구일날 화은당 선사 오상(五常)인 종상(終祥)을 맞이하여 전국에
산재한 이십여 지부에서 성심성의 장만하여 각각으로 표징(標徵)하며 내일이면
떠나가는 영위를 생각하여 그간에 맺힌 통한(痛恨)함을 토해내니 영전앞에 동석한
수많은 신도들의 애끊는 호곡(號哭)소리 구소(九宵)에 전하더라. 광음(光陰)이
여류하여 사대오상(四大五常)으로 종상(終喪)을 당하니 그 의의는 인간의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품을 길러 치천하지 대경대법(治天下之 大經大法)과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가르침을 세우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기를 밝혀서
창생(蒼生)을 광제(廣濟)하는 도장을 이룩하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화은당선사님의
출천대효를 이어받아 도덕이 땅에 떨어진 오늘에 우리 형제자매는 선사의 명명지교를
지키고 닦아 인류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며, 본 실기(本實記)에 선후가 도착된 곳도
있으며 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으나, 한마디의 줄이거나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였으니, 신기에 관한 일이라 이해가 잘 안된 점은 생각을
깊이 하여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화은당실기를 대략 마무리하니
독자 재위는 유의경독(有意敬讀) 하시기 바라노라.
1. 선사님께서는 무술(戊戌)년 십월부터 득병하여 신음하시더니 그 뒤로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제반공사를 주제하시고 교중사를 일일이 지도하시더니 기해년(己亥年)이 되면서
점차 중태에 빠지시니 정사를 비롯한 교중 형제들의 우울하고 염려스러운 마음 그지
없는지라. 백방으로 치료를 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던 중 하루는 원평병원(院坪病院)에
입원(入院) 하시겠다는 말씀이 내리신지라. 수종을 들고 있던 임원들은 반대하여 말씀드리되
“누님의 병환은 천상에서 아시는 일이라 천상의 의원들이 맡아 치료하실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또 인반(人般)에서는 인반대로 있는 힘을 다하여 치료해야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오나 그러나 다른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르거니와 적어도 증산천사(甑山天師)님의
따님으로서 인간세의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면 일반의 비소를 면치 못할 것이니
정히 필요하시다면 의사를 불러다가 곁에서 시봉(侍奉)하도록 할지언정 친히 내려가시는
것은 도리에 합당(合當)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 말씀하니 선사님(禪師)께서는
평생에 일신사에 대해서는 비록 재하자(在下者)라도 의견이 있을 때에는 즐겨 침착하시고
따르시는지라. 이번에도 그럴 일이라고 더 말씀이 계시지 않더라.
그러자 삼월 초순이 되며 선사님(禪師)께서는 다시 입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이는 아무래도 무슨 공사를 보시기 위하심인가 싶어 말씀을 받들기로 식구들 사이에
상의(相議)가 돌아 삼월 사일 아침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는데 차를 준비하려는 것도
말리시고 친히 걸어 나서는지라. 상택은 마스크를 하시도록 권해드리니 물리치신 뒤에
손수래로 모시고 가니 수인의 내외 식구들이 뒤따르니라.
병원에 입원하신 다음날 선사님께서 입고오신 치마에 혈수(血水)가 묻었는지라.
시봉자는 대경실색하고 내출혈인가 걱정하여 황급히 서둘러 의사로 하여금 지혈제를
놓아드리도록 부탁하여 의사가 주사를 놓으려고 하는데 선사님은 웃으시면서
“이놈의 아들아 내 막내 하나 낳으련다”하시매 깨닫고 보니 그것은 내출혈이 아니라
경도로 인한 혈수(血水)임을 비로소 알게 되니라.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현상에 식구들이 모두 이상해 하며 정사도 또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니라.
선사께서는 십여년 동안 경도를 보신 일이 없었으며 다만 도령 두 형제를 나으실 즈음에
돈짝만큼 비쳤을 뿐으로 더구나 갑오년 이후로는 정사와는 별거하다 싶이 하여
동침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차에 수개월을 신음하여 쇠약하실 대로 쇠약하신
선사님(禪師)의 몸에 그런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었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하룻밤에는 성모님의 명령이 내리시는지라 명령을 받어 봉명(奉命)하시는
선사님께서 노래 부르시듯 풀어내시니 그 음성(音聲)이 어찌나 큰지 병원 의사는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하며 놀래더라.
모든 식구는 병원에 입원하셨으니 이제 완치되어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원 의사는 이미 당시의 그 체력 가지고는 도저히 생명을 유지해 갈 수 가 없노라고 판단하여
방금이라도 주사기운만 떨어진다면 운명하실 것이라고 하는 판에 입원하신지 사흘 만에
퇴원하시겠다는 말씀이 내리시니 식구들은 또 한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선사님께서
자리를 일어 나서 앞장을 서다싶피 하시니 수종하던 자들도 하는 수 없이
본부(本部)로 되짚어 돌아오니라.
2. 본부로 돌아오신 선사님께서는 남별당(南別堂)에는 드시지 않으신 체 바로 천하전에 올라가시더니
갑자기 치성(致誠) 준비를 명령(命令) 하시니라. 식구들은 온갖 정성(精誠)을 드려 시키는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개 두 마리와 술 다섯말 밥 두 가마니를 위시로 대소 제물을 장만하는 동안,
선사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신 후 그대로 천하전에서 머무시더니, 그날 밤에 준비된 제물을 진설하여
천지 부모와 제대신장(天地諸大神將)을 대접하기 위한 대 치성을 올리게 되니라.
그때는 마침 제사회 공부생(第四回工夫生)들이 입공중이었는데, 온 밤을 두고 공사를
주제하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많은 신장들이 내려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빙빙 돌며 빙글빙글 웃기만 하는 것을 보니 천상(天上)에 이미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고
하시니라.
소위 사일구혁명 전야 열두시 삼청전 미륵불상에서 땀이 흘러 내려 좌대가 모두 젓고 수건으로
닦아서 짜낸 물은 서되도 넘더라. 모든 사람들이 무슨 큰일이 있으리라고 하며 신기함에 빠져
있는 중에 날이 세면서 혁명방송이 흘러나왔다.
3. 삼월(三月) 이십칠일(二十七日)이 되면서 선사님의 병세가 그날을 못넘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생들의 공부를 중지시키려고 하니 선사님께서 말리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는 것은 나의 할 일이요, 저희들의 공부는 저희 각자(各者)의 책임(責任)인데
어찌 공부를 그만두도록 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내가 떠날지라도 공부를 정지(停止)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이에 정사는 “사람이 죽는데 무슨 정신으로 공부를 하겠소”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시면서 다시 당부하시는지라. “그럼 이 판국에 무슨 주문을 읽도록
하리까”고 물으니 “읽는 주문이 생각나지 않거든 나를 생각하여 울도록 하시오 그도 역시
공부이외다”고 하시니라.
선사님과 목천포에서 만난 뒤로 이십사년 동안 지내온 정상(情狀)을 생각할 때에 실로
꿈 같은 경로야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평소에 선사께서는 분명코 천상(天上)의 연분이
지중하다고 하시더니 웬일인지 칠팔년 전부터 합방거처도 못하게 하시면서 조석도 따로
가져오라 하시며 심지어는 아침 저녁으로 상면(相面)을 할지라도 안색(顔色)이 변하고
혹 상의할 일이 있어 이런 말 저런 말을 주고 받다가도 불쾌한 어조로 돌변하여 빨리 나가라고
욕을 퍼붓기도 하여 정을 떼는지라. 그런 일을 당하면서 정사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어
그러하리라고 짐작할 때도 혼자 하시는 말씀이 “내가 멀지 않은 앞날에 죽고 보면
저 영감은 혼자서 뛰다가 울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리라 불쌍한 노릇이요 그러나 내가 먼저
떠날지라도 앵무새같이 일러주마”고 하시더니 또 오년전 부터는 나의 대신을 구하라고
조르듯 말씀하시는지라.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왔는데 오늘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되니 지난번 병원에서 돌아오시어 천하전에서 하시던 말씀이
모두 뜻이 있어 하셨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말씀대로 행하여 드리지 못하였음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쓸데 없는 일이라 비감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더라.
4. 그 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온 식구가 침식을 거두다 싶이하여 간호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왔으나 오륙개월을 두고 시병한 사람들은 기원(基元) 춘도(春島) 종호(鍾浩) 명성(明星)
오반택(五班宅) 식모등이었더라. 삼월초에는 대구로부터 입공차로 왔던 김선도(金仙道) 여인이
선사님(禪師)의 병세 위급함을 보고는 공부보다도 시병이 급하다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진심갈력으로 이십일을 봉양하는 가운데 때때로 눈물바람을 하며 또 피를 빼어 수혈을 하여
드리려 했으나 선사님께서 굳이 응하지 않으시니 선사님을 대신하여 목숨을 받치겠아오니
무량도법(無量道法)의 혜택을 입어 선사님께서 소생(蘇生)하실 수 있게 하여 주시라고
수십일을 두고 기원한 바 있었으며, 한편 각 지부(各支部) 신도 남녀일동(男女一同)은
수차 치성(致誠)을 올리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축원하기를 그치지 않을세,
선사님께서도 그들의 간호를 받으시면서 많은 형제자매를 두고 먼저 떠나시게 되니 남는
형제들의 전정을 생각하심인지 깊으신 참뜻은 몰라도 “어쩔거나 어쩔거나”
그 말씀을 되풀이 하시니라.
5. 삼월 삼십일에 입공한 도생들이 공부를 마치어 졸공(卒工)하고 도장(道場)을 떠나게 되어 저녁에
선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일 일찍 떠날 것을 고하고 서른 세 사람이 모은 돈 이천오백환을
드리면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사서 잡수시라고 말씀드리니, 선사님께서는 그 돈을 받아
가슴 안에 넣으시면서 “잘되었다. 내가 이 시간에 멀리 갈려는데 여비가 없더니 참 잘되었다.”하시니,
모두들 웃으며 우리 누님 정신이 좋으시다고 하면서 저만하면 회복하실 날도 멀지 않았다고
희색(喜色)이 만면하더라. 그러나 선사님께서는 곧 요에다 나를 뉘인 채 떠밀라 하심에
그대로 행하니 손으로 요를 쳐들어 높이 올리고 밀라고 하시어 수종드는 사람들이
높이 떠메고 나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시기에 그대로 행하니, 선사님께서 “높기도 높구나
나는 태전(太田)으로 간다”고 하시더니 다시 “멀기도 멀다”고 하시며 정사를 대하여
“여비가 부족하니 여비를 더 내라” 하심에 몸에 지닌 돈은 없고 선사님 몸에
이천오백환이나 있음을 아는지라 더 들이지 않은 채 예사로 생각하고 근 한시간이나
메고 돌다가 다시 방으로 모시니 말이 어둔하신지라.
성태(成泰)가 천하전으로부터 내려와서 하는 말이 “하늘에 저구름을 보시오”라고 함으로
나가보니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지붕위로 오색(五色) 구름이 무지개처럼 뻗치었더라.
정사(整師)를 비롯한 성도(聖度)등 간부들은 어쩔줄을 몰라 이저리 서성거리는데
환우(烜雨) 상택(相澤) 등 몇 사람이 하는 말이 삼월 말만 넘어가면 무사하리라는
동기가 있었다고 하면서 열두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지내면 삼월 말이
다 간다고들 고대하는 마음으로 주고 받는지라.
그러나 정사의 생각에는 누류인간삼월우(淚流人間三月雨)라 하시었는데 오늘을 지낸다
하여도 내일은 곧 사월이라, 그 사월 역시 의심스러운 것이 현무경(玄武經)에
불의사월래(不意四月來)라 하시었으니, 아무래도 사월 그믐이 다가고 오월달이 와야
안심이 될 것만 같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전주 노송동(全州 老松洞) 에서 지낼때에도
중병에 빠져 운명(運命)할 지경이 되어 치상준비(治喪準備) 까지 하여 놓고 절명(絶命)
하기만 기다라고 있었는데 불시에 도령형제가 들어와서 약(藥)을 먹이니 약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면서 곧 쾌유하여 기동(起動)하게 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워낙 중환(重患)이라
인세(人世)의 약으로는 도저히 안될 줄을 생각하면서도 온갖 수단을 다하여
치료와 간호에 전력을 다하기는 하면서도 극도(極度)에 이르르면 또한 무슨 신기한
동기가 있으리라고 바라고 왔었는데 두해 동안을 두고 신음에 신음을 거듭하셔도
성부 성모님과 도령형제며 모든 신명(神明)께서도 한마디 걱정도 없으시니
무슨 연고인지 알 도리가 없는 채 이상한 생각만드니라.
전번에 금성산(金城山)에 있을적에는 몸살만 나도 천상의 약을 주시고 애지중지하셨으며,
처음에는 “나의 복동(福童)아”라고 부르시다가 다음에는 “나의 혈식(血息)아” 하시고
또 그다음으로는 “내 꽃(花)아”라고 부르시고, 천지 신명도 선사님의 말씀이면 여율령(如律令)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이처럼 아무런 소식이 없음은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라 성부(聖父)님의 말씀에 “비록 나무나 돌이라도 기운만 부치면 쓰는바 되리라”하시었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또 죽음을 바라면서까지 받들기 어려운 명령(命令)을 받들어 수십년 동안을
쉴 사이 없이 일하여 겨우 기초(基礎)를 마치고는 그 동안의 무리로 육탈이 되고
기진맥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더욱 신고하게 되었어도 영영 불고하시니,
공사(公事)에 사정을 두지 않아야 성공(成功)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탓인가 사람의
좁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성부님의 도덕이 속속히 판단(判斷)을 내리소서.
비통한 마음과 불효스러운 심정금할 길 없나이다 하고 심고하니라. 갑을(甲乙)이 기두(起頭)하여
무기(戊己)로 구비친다 하셨으니, 아무래도 올해 기해(己亥)년이 그대로 넘어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도(聖度) 환우(烜雨) 상택(相澤) 등도
모두 우리가 생각해도 안심할 수 없노라고 통탄해 마지 않니라.
6. 이튿날 기해(己亥)년 사월 초하룻날 아침에 성도와 환우가 들어와서 보더니
오늘은 영 가망(可望)이 없을 듯 싶으다고 탄식(嘆息)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곁에 앉는데
천하전에서 수공하던 공부꾼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간밤에 천상에 올라가 보니 선사(禪師)님께서
천상 대법관(大法官)으로 임명을 받아 우리 인간의 선악과 천지공사(天地公事)에 대한
공로의 유무를 심판 결재(決裁)하시는 책임을 맡으셨으니 법석을 마련하여
모든 법관들이 시위하고 기다리고 계시더이다.”라고 하니 모든 식구는 운명하실
시간이 가까워지는가 싶어 더욱 서러워하니라.
오후 두시경에 정사(整師)는 선사(禪師)님을 안고 약물을 두 번 떠 넣으니 잘 받아
드시고 나서 손을 들어 정사의 얼굴을 이리 저리 쓰다듬어 어루만지시더니 눈을 바로 뜨신 채
숨소리가 점점 줄어드시므로 성도(聖度)가 식구들을 불러들여 앉히니 모여든 식구들을
두루 살피시고 하시는 말씀이 “본부 식구들은 물론 일반형제들도 꼼짝 말고 수도(修道)나
잘하면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나는 태전(太田)으로 간다. 하시고
곧 눈을 바로 뜨시더니 전광(電光)을 돌린 듯 빛나고 눈동자를 그대로 눈감지 않으신 채
선화(仙化) 하시니라.
7. 지금까지 오직 대신(代身)하는 존재로 성부님을 대하듯 의지하고 지내온 선사님께서
선화(仙化)하시니, 온 식구의 곡성(哭聲)은 천지에 진동하는지라. 애통스러운 정
금할 길이 없으나 근근이 정신을 수습하여 각 지부에 전보를 치고 부근의 신도와
지방유지에 부고(訃告)를 보내는 등 장례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니라.
그러나 묘지(墓地)도 막연하고 당시의 경제상태 또한 곤란한 때라 어이 일을 치루어야
할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우선 세상 사람들의 욕이나 면하기로 외봉(外封)이나
하였다가 정식 장례식은 후일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부고에도 임시장사라고
통지(通知) 하였는데, 그날 석양에 뜻밖에 지사(地師) 한 사람이 찾아오는지라.
무슨 뜻이 있는 일인가 생각되어서 답산을 부탁한 결과 현 남별당(南別堂) 뒤 산록에 묘지를
정하기에 정사도 자세히 살펴보니 그럴듯한 생각이 들어 그 장소에다 시멘트로 방과 같은
모양의 강중을 만들어 그 속에 관을 모시도록 하니 이는 선화(仙化)하시기 수년전부터
“내가 죽거던 묘안을 방안같이 하고 몸을 결속하지 않은채 자는 듯 뉘여달라”고
당부하시던 선사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니라.
8. 기해 사월 팔일(己亥 四月 八日)에 장례식을 거행함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교중형제는
물론이요 증산교 각파의 원로를 비롯한 많은 신도가 문상(問喪)하게 되니 보는 사람마다
묘지가 썩 좋다고들 말하니 혹은 금부포란(金鳧抱卵)이라고도 하고 혹은 유지앵소(柳枝鶯巢)
혈이라고도 하면서 복인이 봉길지(福人逢吉地)라 하더니 정말 대명당(大明堂)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니, 그런 땅에 모시게 되었음으로 다시 이장(移葬)할 필요가 없게 되어
영영 안장지(安葬地)로 결정하고, 장례위원회가 결성되어 부회장인 환우를 위원장으로
각 지부장이 위원으로 장례식을 구일장으로 정하고, 초 종례식은 교례에 의해 결정하고
준비가 완료되어 선사님의 채백이 본교를 떠나는 영결식에는 내외신도와 많은 사람들의
통곡소리는 수양산도 참담하고 일난풍화한 사월에 햇볕도 슬픔을 더해주고 바람마저
잔잔하여 온 수양산록이 문상객의 흰옷으로 백화를 이루었고 염불소리는 그치지 않고,
수백의 만장과 조기는 일산을 이루어, 장지에 당도하여 하관하고 평토제사를 지내고
반혼하여 초위제례를 행할재, 이제 화은당선사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수월전에도 경춘대를 들어서면 선사님의 음성은 온집안이 훈훈하였는데 자애하신 그 음성은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으리요. 내외도생들의 통곡소리는 본부가 떠나갈 듯 슬피울었다.
재우삼우를 모두 마치고 장례위원회를 해체하는 동시에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선사님 당부하심을 명심하여 슬픔을 참고 천하전 수련은 계속되었다.
일부 교단이며 외부측에서는 말하기를 증산선불교는 끝났다고 비판이 자자했으며,
허령에 빠진 도생 몇사람이 이탈했으나 별일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교인이 화은당선사님을 더욱 사모함은 형제. 숙질. 자매지 의로 모인 정이 깊었고
상제님의 따님과 맺어진 인연에 감회가 더욱 깊었더라.
그뒤 수공생(修工生)이나 가족에게 자주 현몽(現夢)하사되
“내 누운 자리가 매우 편안하다”고 하시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더라.
하루는 한 내수교인이 공부중에 천상에 올라가보니 선사님께서 수다한 사무원을 두시고
문서(文書)를 기재하시기에 다망하시어 인사를 받으실 여가도 없으신데
간신히 인사를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지상에 오르내리실 때에 나의 법신(法神)을
보내노라”하시며, 또 “천상에서 나를 보았다고 지방 형제들에게 안부나 전하라”고 하시더라
말하니라.
9. 이십사년을 두고 주야로 서로 마주앉아 천지사(天地事)를 상론(相論)하면서 신약한
선사님을 마치 유아 기르듯 일신양력(一身兩力) 으로 전심하여 받들어 오다가 사사
사람도 처상(妻喪)을 당하면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 하는데 지중한 천연가약으로
성부님의 인도하심을 입어 서로 만난 뒤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천지공사를 받들어
오던 일을 생각하니, 마디마디 회상되는 옛일들은 모두 피눈물로 얽힌 발자국들이라.
선사님 선화하신 이 세상에 더 머물면 무엇하랴 싶은 생각 참을길 없어 치상이나 마치고
뒤따라 죽을 것을 결정하였으나, 교중 형제자매들을 남겨 놓은채 정사마저 세상을 떠나면
그들은 정말 길 잃은 양떼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한즉 그럴수도 없다싶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시키기에 힘을 들이던 중 하루는 경춘대(景春臺) 이층에 올라가
금평호수를 내다보니 과거 수리공사가 완성이 되면 호수에 배도 띄울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좋아하시던 생각이랄지 또 보뚝자리를 정하시기 위하여 이마를 깨어 피를
흘리셨던 생각들이 떠올라 가뜩이나 수심스러운 심정에 더욱 애잔한 생각이 드는지라.
저수지에 물이 채워지는 것도 보시지 못하고 선사님이 먼저 가시니, 홀로 경춘대에 앉아
호수를 바라다보아야 하는 처지가 꿈인 듯 가여운지라.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솟아나고
정신이 아찔하여 의자에서 거꾸러지고 마니라 한참 만에 정신을 수습하여 눈물을 씻고 보니
마루바닥이 온통 눈물에 젖은지라 마루를 닦고 다시 걸상에 앉아 있자니 성부님의 재세시
말씀에 갑을(甲乙)이 기두(起頭)하여 무기(戊己)로 구비친다 하는 구절이 떠오르는지라.
금년이 기해(己亥)년이요 또한 득병하시기를 무진년(戊辰年)에 하였으니 이는 무기가 분명한
즉 갑진 을사(甲辰 乙巳)생이 서로 만나 성부의 후계사를 기두하여 무기로서 그 절을 바꾸게
되니 재세시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저윽히 안심이 되더라.
그 자리에서 입에 떠오르는 대로 시조 한수를 지어서 읊으니 그 뒤로도 늘 경춘대에 올라가
그것을 읊조리며 내내 마음을 부뜰어 오니 그 시조는 다음과 같으니라.
갑을(甲乙)이 기두(起頭)하여 무기(戊己)로 구비쳤네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라 나의 한(恨)이 아닐까
아무리 폭풍우 불어온들 사불범정
10. 치상(治喪)을 마치고 나서 정사는 짝 잃은 기러기처럼 외로이 앉아 생사를 아직 경절하지
못한채 연일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선사님과 화답하게 되었는데 선사님께서 “영감아 이십사년 동안 천지사를 받들기 위하여
그대 나와 더불어 죽을 고초를 감내하였음을 세상사람 그 누가 알리요. 나한테도 많은
고초를 당하고 별관 난관에 부딪쳤던 그 사정을 오직 천지신명이나 알수 있기에 천상에
치부되고 법문에 기재되었으니, 그 품값이사 나올 때가 있지 않겠소.
우리 양인이 이십여년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하시는 아버지의 명령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지금껏 받들어 나왔기에 이 기초가 다 완성된 것이니 나로서는
지상의 책임을 다한 셈이요, 따라서 아버님의 체백을 찾아 모시자던 일편단심으로
살아온 나의 소망도 이루어진 셈이 아니겠소, 지금 아버님을 믿기 위하여 벌려놓은
각파의 일은 모두 부분적인 책임을 맡아서 하는 것인데, 우리가 할 책임을 천상에 와서 보니
강령(綱領)은 되었으나 앞으로 남은 책임이 더욱 큰지라 모든 것을 정리하여 새 문명을
세상에 들어낼 의무와 책임이 아직 남았으니 그 일이 어찌 크지 않다 하겠소,
나는 천상 일광의 기운으로 일을 보게 되었으며 정사는 지상 월광의 일을 보게 되었으니
정사께서는 모든 근심걱정과 수심한숨을 거두시도록 하시고 정사께서 한숨을 쉬시며는
천상의 아버님께서도 마음이 불안하다 하시고, 또 제몸이 곧 내 몸이요 내 마음이
곧 제 마음인데 어찌 저리 한탄할까 하시며 걱정이 여간 아닐실 뿐더러 이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오니 제발 수심일랑 거두시도록 하시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떠나옴으로
혹 마음이 흔들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놓아두고 보시기만 하시오. 앞으로 뽑는
데는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아니 듣게 될 것인즉 제 마음에 붙이어 가는 자는
저절로 그들의 선영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암암리에 속마음으로만 좌우를 결정하면
신계에 치부(置簿)되어 불언지교(不言之敎)로 화민(化民)하게 될 것이매
은연중 무성 무취한 가운데 정리가 될 것이니, 이 점을 깊이 양찰하신다면
이제부터는 퍽 재미가 있을 것이요. 모든 것을 천지에서 은밀히 일러주고
뒤에서 훈수하는데 우주간에 겁날 것이 무엇이오, 현실문명과 현실인심에
역합하지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로되 우리가 그동안 공사해 나온 것은 인세로 보아서야
모두가 가소롭고 허망하기만 한 노릇인데도 물샐틈 없이 짜여진 그 도수(度數)대로
진행이 되어 나온 것이 아니겠소 미구에 판밖에서 일어 터져 나올 것이니
그 동안 도체와 공사가 어긋나지 않도록 하소서. 일반이 혹 부당한 논설을 할지라도
들은척 만척하고 내가 할 책임만 힘써 다하실 수 있도록 하시오.
우리도 과거에는 일을 위하여 서로 욕도 하고 싸움도 하였으나 그것은 공사를 위해
그리했던 것이니 이제부터는 나도 주인이라 부를 것이며 서로 극존하게 되었사오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 모두 더불어서 개명장(開明場) 나는 그날에는
나를 서로 만날 수도 있고 성부님 성모님을 모신 한자리에서 풍류를 잡히면서 전전사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공부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시오”라고
하시니라.
11. 우리 사업(事業)은 마치 탕자의 노름같고 광인과 무당의 집과 같으니 알 수 없도다.
우리 교는 깨달은 자 알것이오, 깨닫지 못하는 자 모를 것이니, 호호 탕탕한 이 가운데
진법이 나오건만 어찌 그리 쉽게 깨달을 자 많으리요
이상으로 소개된 선사님의 약력은 선사님 선화 후 그의 재세시의 피눈물 발자취를 더듬으므로서,
우리 다시 옷깃을 여미고, 성부님의 홍대무변(弘大無邊)한 대 진리를 세상에 밝혀내기 위하여,
가일층 굳은 결의를 촉구하는 정사의 충정으로, 우선 대강의 강령만을 줄음 잡은 것이니,
상세한 것은 과거에 나날이 기록해 나온 일지와 기타 문물로서 후일에 다시 밝혀내고져 하니,
모든 형제자매는 그점 깊이 양해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2. 경자(庚子)년 삼월 스무 아흐렛날 화은당선사(華恩堂禪師) 일주기(一週 朞)를 맞이하여
전국 이십여 지부에서, 수천명의 신도들이 지부별로 전수를 마련하여 기정(忌情)을
드린 후에 지부마다 제문(祭文)을 일일이 고유하니, 구구(句句)히 슬픈 정곡 구천(九天)에
사무치고 도량안의 통곡소리 만리창공(萬里蒼空)에 비전터라 오호(嗚呼) 슬프도다.
영당에 모여서서 기정을 드리는데 그 시간에 밤은 깊어가고 등촉만 밝혔는데,
대령전 마루에서 과방을 차려놓고 대흠 화섭등 신도 오륙명이 과방을 보고 있는데,
수양산 호랑이 한 마리가 대령전 축대에 내려와서 제향(祭享)에 동참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요. 성도가 그 호랑이를 알아보고 가만히 과방(果房)에 들어가서,
우골 한 벌과 저골 한벌 두벌의 뼈를 내어주며 고이 가지고 가랐더니,
한참 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도 흔적이 없고 우골과 저골 두벌의 뼈도
간 곳이 없이 사라져 호랑이가 그날밤에 우골 저골 한벌씩을 남김없이 모두 가지고
사라졌더라. 일점진성(一點眞性)이 불명불멸(不冥不滅)이나 산령의 보우함이
더더욱 뚜렷하니 모든 신도들이 놀라워 하더라.
13. 세월이 여류하여 신축(辛丑)년 삼월 이십구일 화은당 선사 대상(大祥)일을 맞이하여
전국 신도 수백명이 지부별로 운집(雲集)하여 제례 준비중인데,
새벽에 오일육(五∙一六)이 일어날 순간에 삼청전 불상에 땀이 흘러내려 불상좌대가
모두 젖었는데 물로 계산하면 서되 정도나 되었다. 신기하고 기이한 점은 인간으로서는
해석하기가 어렵도다. 차임이 되자 방송에서 뜻밖의 소식을 보도하니,
오늘 새벽에 오일육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선사님의 대상일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영이(靈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사에 모인 신도들이 선사의 영험을 신통에
감명할 뿐이더라.
대표회의에서 사대오상(四大五常)을 의론하였는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기운이
화합하여 인간의 육신이 이루어졌다가 별세(別世)하게 되면 다시 지수화풍 사개체(四個體)로
분류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인륜의 대강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神) 오상(五常)의 본바탕을 거울삼아 후계사에 도덕이
기본되는 도통(道統)을 계승할 수 있는 맥을 이어줌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14. 임인(壬寅)년 삼월 이십구일날 화은당 선사 사대상(四大祥)일을 맞이하여
전국 신도 수백명이 한결같이 참예하여 전수를 마련하고 지부별(支部別)로 문상하고
기정을 드리니 세세한 과거사가 상(祥)이 거듭할수록 명명백백 떠오르고
지난 날의 시은시덕(施恩施德) 일월같이 밝아오인 지부대표 수십 명이 영위(靈位)전에
맹서하기로 심견석천(心堅石穿) 의지로써, 대도창명(大道彰明)을 기약하고
어려운 이 시기를 감내하는 바탕으로 진도역행(眞道逆行)의 고난의 길 거울을 삼아
즉 수도하는 길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공은 더욱 더 큰 것이니 우리는 잠시도
도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게 다지면서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결속할 것을 재삼
다짐하였더라.
15. 계묘(癸卯)년 삼월 이십구일날 화은당 선사 오상(五常)인 종상(終祥)을 맞이하여 전국에
산재한 이십여 지부에서 성심성의 장만하여 각각으로 표징(標徵)하며 내일이면
떠나가는 영위를 생각하여 그간에 맺힌 통한(痛恨)함을 토해내니 영전앞에 동석한
수많은 신도들의 애끊는 호곡(號哭)소리 구소(九宵)에 전하더라. 광음(光陰)이
여류하여 사대오상(四大五常)으로 종상(終喪)을 당하니 그 의의는 인간의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품을 길러 치천하지 대경대법(治天下之 大經大法)과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가르침을 세우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기를 밝혀서
창생(蒼生)을 광제(廣濟)하는 도장을 이룩하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화은당선사님의
출천대효를 이어받아 도덕이 땅에 떨어진 오늘에 우리 형제자매는 선사의 명명지교를
지키고 닦아 인류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며, 본 실기(本實記)에 선후가 도착된 곳도
있으며 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으나, 한마디의 줄이거나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였으니, 신기에 관한 일이라 이해가 잘 안된 점은 생각을
깊이 하여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화은당실기를 대략 마무리하니
독자 재위는 유의경독(有意敬讀) 하시기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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