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천사(天師)의 탄강과 유소시대
1-1 천사(天師)의 성(姓)은 강(姜)이요 이름은 일순(一淳)이요 자(字)는 사옥(士玉)이요 호(號)는 증산(甑山)이시니 단군기원(檀君紀元) 4204년 이조(李朝)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 9월 9일(서력 1871년 11월 1일)에 조선(朝鮮) 전라도(全羅道)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지금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신기新基))에서 탄생(誕生)하시니라.
1-2 부친(父親)의 이름은 흥주(興周)요 모친(母親)은 권씨(權氏)요 집은 고부군 우덕면 손바래기라 권씨가 그 부근(附近) 답래면(畓來面) 서산리(西山里) 그의 친정(親庭)에 근친(覲親)하려고 가 있을 때에 하루는 하늘이 남북(南北)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음에 천하(天下)가 광명(光明)하여지는 꿈을 꾸고 이로부터 잉태(孕胎)하여 열 석 달 만에 천사를 낳으시니라 .
1-3 낳으실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두 선녀(仙女)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산모(産母)를 간호(看護)하더니 이로부터 이상(異常)한 향기(香氣)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에 뻗쳐서 이레동안 계속(繼續)하니라.
1-4 점차(漸次) 자라심에 얼굴이 원만(圓滿)하시고 솔성(率性)이 관후(寬厚)하시며 총명(聰明)과 혜식(慧識)이 출중(出衆)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경애(敬愛)를 받으시니라.
1-5 어려서부터 호생(好生)의 덕(德)이 많으 사 나무 심으시기를 즐기시며 자라나는 초목(草木)을 꺾지 아니하시고 미세(微細)한 곤충(昆蟲)이라도 해(害)하지 아니하시며 혹 위기(危機)에 빠진 생물(生物)을 보시면 힘써 구하시니라.
1-6 일곱 살 되시던 정축년(丁丑年)에 농악(農樂)을 보시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리셨으므로 장성(長成)하신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시되 농악은 흔히 구경하시니라.
1-7 이 해에 부친이 훈장(訓長)을 구하여 천사께 천자문(千字文)으로 글을 가르칠 새 하늘천자(天字)와 따지자(地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으시나 검을현자(玄字)와 누루황자(黃字)를 가르칠 때에는 따라 읽지 아니하시거늘 훈장이 만단개유(萬端開諭)하되 종시(終是) 읽지 아니하심으로 할 일 없이 그친지라 부친이 천사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연고(緣故)를 물으니 가라사대 하늘천자에 하늘 이치(理致)를 알았고 따지자에 땅 이치를 알았사오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사오리까 남의 심리(心理)를 알지 못한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責任)을 감당(堪當)치 못하리니 돌려보내사이다 하시거늘 부득이하여 그 훈장을 보내니라.
1-8 아홉 살 되시던 기묘년(己卯年)에 부친께 청(請)하여 후원(後園)에 별당(別堂)을 짓고 홀로 거처(居處)하사 외인(外人)의 출입(出入)을 금하시고 간일(間日)하여 암꿩 한 마리와 비단 두자 다섯치씩 구하여 들이시더니 두 달 후에 문득 어디로 나가셨는데 방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더라 그 뒤에 집으로 돌아오사 자의(自意)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시니라.
1-9 서당(書堂)에서 한문(漢文)을 배우실 때 한 번 들은 것은 곧 깨달으시고 동무들과 더불어 글을 배우심에 항상 장원(壯元)을 하시니라 하루는 훈장이 여러 학부형(學父兄)에게 미움을 받을까하여 문장(文章)이 다음 되는 다른 아이에게 장원을 주려고 뜻을 정하고 글을 꼲었더니 또 천사께로 장원이 돌아가니 이는 훈장의 뜻을 미리 알으시고 문체와 글씨를 변하여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 모든 일에 이렇게 혜명(慧明)하시므로 보는 자가 다 이상히 여기니라.
1-10 부친이 정읍읍내 박부호(朴富豪)에게 수 백 냥 빚이 있어서 독촉(督促)이 심하므로 걱정으로 지내거늘 천사 부친께 청하여 돈 오십 냥을 준비하여 가지고 박부호에게 가사 돈을 주시고 그 집 사숙(私塾)에 가서 학동들과 싸여서 노실 새 훈장이 운자(韻字)를 불러 학동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니 천사 함께 글짓기를 청하사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심에 시격(詩格)이 절묘(絶妙)하거늘 훈장과 학동들이 크게 이상히 알며 박부호도 심히 기이(奇異)히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子侄)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천사 부득이(不得已)하여 며칠 동안 머무르시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박부호가 모든 일에 크게 기특(奇特)히 보고 심히 사랑하여 드디어 채권(債權)을 포기(抛棄)하고 증서(證書)를 불사르니라.
1-11 하루는 부친이 벼를 말리는데 새와 닭의 무리를 심히 쫓으시니 천사 만류(挽留)하여 가라사대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사람을 먹일 수 있나이까 하시되 부친이 듣지 않고 굳이 쫓더니 뜻밖에 백일(白日)에 뇌우(雷雨)가 대작(大作)하여 말리던 벼가 다 표류(漂流)하여 한 알도 건지지 못하였더라.
1-12 열세 살 되시던 계미년(癸未年)에 모친이 친히 짠 모시베 예순 자를 마을사람 유덕안 (柳德安)에게 들리사 정읍장에 팔러 가셨는데 덕안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가고 천사께서는 모시베를 포목전(布木廛)에 놓고 앉으셨더니 문득 헛눈을 파는 사이에 모시베를 잃어버렸더라 덕안이 이 말을 듣고 빨리 돌아와서 찾으려하나 날은 저물고 많은 사람중에 찾을 길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시기를 청하니 천사 듣지 아니하시고 즉시 고창으로 가시며 가라사대 내일 들어가리라 하시거늘 덕안은 어찌하는 수 없이 혼자 돌아가니라 이튿날 천사께서 모시베 값을 가지고 돌아와서 모친께 올리시니 온 집안이 이상히 여겨 사실을 물으매 가라사대 모친이 무한(無限)한 근고(勤苦)를 들여서 짜신 물건(物件)을 잃었음에 얼마나 애석(愛惜)히 생각하실까 하여 오늘이 고창장(高敞場)이므로 반드시 장에 나올 듯 싶어서 바로 고창으로 갔더니 다행히 찾아서 팔아왔나이다 하시니라.
1-13 열일곱 살 되시던 정해년(丁亥年) 어느 날 외가에 가시더니 어떤 술주정꾼이 무고(無辜)히 패욕(悖辱)을 가(加)하거늘 천사 아무 대항(對抗)도 하지 아니하시더니 문득 어디서 큰 돌절구통이 떠내려 와서 주정꾼의 머리 위로 덮어씌우니 주정꾼이 절구통 속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라 천사 몸을 빼쳐 다른 곳으로 가시니라.
1-14 스물 네 살 되시던 갑오년(甲午年)에 태인(太仁) 동골 사람 전봉준(全琫準)이 당시의 악정(惡政)에 분개(憤慨)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표호(標號)로 동학신도(東學信徒)를 모아 고부에서 혁명(革命)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는지라 천사 그 전도(前途)가 이롭지 못 할 줄을 알으시고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선우야둔도(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慾將輕騎逐) 대설만궁도(大雪滿弓刀)」란 옛글을 여러사람에게 외워주사 겨울에 이르러 패멸(敗滅)될 것을 예언(豫言)하시며 망동(妄動)치 말라고 개유(曉諭)하시니라.
1-15 이해 시월에 동골에 가사 동학접주(東學接主) 안윤거(安允擧)를 방문(訪問)하시니 마침 태인 닥뱀이 안필성(安弼成)이 한 마을에 사는 동학신도 최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에게 도담(道談)을 듣고 있더라 천사 마루에 걸터 앉으사 윤거와 더불어 성명(姓名)을 통(通)하신 뒤에 일러 가라사대 고부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동학군(東學軍)이 황토마루(黃土峴)에서 승리(勝利)를 얻었으나 필경(畢竟) 패망(敗亡)을 면치 못하겠으므로 동학군의 발원지(發源地)인 이곳에 효유하러 왔노라 그대가 접주(接主)라하니 삼가 전란(戰亂)에 참가(參加)하기를 회피(回避)하여 무고(無辜)한 생민(生民)을 전화(戰禍)에 몰아 들이지 말라 섣달이 되면 그들이 전패(全敗)하리라 하시고 돌아가시는지라 윤거 이 말씀을 듣고 드디어 접주를 사면(辭免)하고 전란에 참가치 아니하니 최두연은 믿지 않고 윤거의 대(代)로 접주겸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윤거의 부하(部下)를 인솔(引率)하고 출전(出戰)하더라.
1-16 필성은 두연에게서 도(道)를 받은 뒤에 남원(南原)으로 와서 종군(從軍)하라는 군령(軍令)을 받고 스무날 닥뱀이를 떠나 남원으로 향할 때 전주(全州) 구이면(九耳面) 정자리(亭子里)에 이르니 천사 길가에서 계시다가 필성이 이르름을 보시고 일러 가라사대 그대 올 줄을 알고 이곳에서 기다렸노니 함께 가자 하시고 필성으로 더불어 두어마장을 행(行)하여 임실(任實) 마군단 주막(酒幕)에 이르러 가라사대 날이 차니 이곳에서 쉬어 기다리라 남원에 가서 만날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리라 필성이 가로대 여비(旅費)가 없으니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곤란(困難)하겠나이다 가라사대 밥 굶을 걱정은 하지 말라 하시더니 두어시간이 지난 뒤에 문득 방포성(放砲聲)이 나며 과연 두연이 수천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지나가며 필성에게 남원으로 가지말고 전주로 따라오라 하는지라 천사 필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군마의 뒤를 가까이 따라감이 불가(不可)하니 천천히 가자 하시고 전주 수통목에 이르러 가라사대 오늘은 전주에서 소란(騷亂)하여 살상(殺傷)이 있으리니 이 곳에서 자고 내일 가자하시고 필성으로 더불어 수통목에서 쉬시니라.
1-17 이튿날 필성을 데리시고 전주에 이르사 조용한 곳에 주인(主人)을 정(定)하시고 저녁에 필성에게 일러 가라사대 거리에 나가면 볼 것이 있으리라 하시며 함께 나가사 한 곳에 이르르니 세 사람의 머리가 길 바닥에 구르는지라 가라사대 저것을 보라 이렇게 위험한 때에 어찌 경솔(輕率)하게 몸을 움직이리오 하시더라 필성은 이곳에서 천사와 작별(作別)하니라.
1-18 그믐께 동학대군(東學大軍)이 전주를 떠나서 경성(京城)으로 향할 때 필성이 종군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니 천사 길 가에 서 계시다가 필성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이제 종군하느냐 대(對)하여 가로대 그러하나이다 가라사대 이 길이 크게 불리(不利)하리니 조심(操心)하라 하시더라 필성은 천사를 작별(作別)하고 종군하여 진잡읍(鎭岑邑)을 지나서 유성(儒城) 장터에서 쉬고 다시 하루를 행군하여 다음날 새벽에 청주(淸州) 병영(兵營)을 진공(進攻)할 새 삼십리 가량(假量) 미치지 못하였는데 천사 또 길가에 서 계시다가 필성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너의 군중(軍中)에 한 중이 있더냐 대하여 가로대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는 이길을 따르지 말라 저희들이 요승(妖僧)의 말을 듣고 멸망(滅亡)을 당(當)하리라 필성이 가로대 이런 중대(重大)한 일에 어찌 불길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가라사대 나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어찌 저희들을 미워함이리오 저희들의 불리한 장래(將來)를 알므로 한 사람이라도 화를 면케하려 함이로다 가로대 그러면 선생은 어찌 이곳까지 오셨나이까 가라사대 나는 동학에 종군하여 온 것이 아니요 구경하러 왔노라 하시니라.
1-19 이때에 김형렬(金亨烈)이 필성의 곁에 있다가 천사 필성과 수작(酬酌)하시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청하거늘 형렬에게도 종군하지 말라고 권하시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천사의 말씀을 믿지 않고 종군하여 가다가 청주 병영 앞 산골에 이르니 좌우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서 포화(砲火)를 퍼부음에 동학군에 죽는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황겁(慌怯)하여 몸을 빼어 송림(松林)속으로 들어가니 천사 이곳에 계시다가 불러 가라사대 너희들은 잘 도망(逃亡)하여 왔도다 이곳은 안전(安全)하니 안심(安心)하라 하시니 형렬은 비로소 천사의 지감(知鑑)이 비상(非常)하심을 감복(感服)하니라 두 사람은 종일(終日) 먹지 못하여 주림을 이기지 못하거늘 천사 돈을 내어주시며 가라사대 저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수효(數爻)대로 떡그릇 안에 두고 떡을 가져오라 필성이 명하신대로 하여 떡을 가져오니 천사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
1-20 천사 두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동학군이 미구(未久)에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진잠에 이르러 문득 가라사대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히 생각하거늘 가라사대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事態)의 진전(進展)될 기미(機微)를 말함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 지라도 불쾌(不快)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산중유벽(山中幽僻)한 곳에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총소리가 어지러히 일어나며 그 곳에서 격전(激戰) 끝에 동학군이 많이 사상(死傷)하니라 .
1-21 이곳을 떠나 산길을 행하시더니 문득 목탁(木鐸)소리가 들리거늘 찾아가니 곧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더라 가라사대 해는 아직 이르나 더 가다가는 해(害)를 입으리니 이곳에서 자고 가자 하시고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한 중이 이르러 말하되 동학군이 노성(魯城)에 유진(留陣)하여 도망하는 군사(軍士)를 붙든다 하거늘 필성과 형렬이 크게 근심하니 가라사대 이곳에서 쉬자는 것은 정(正)히 이러한 화(禍)를 피(避)하려 함이라 내일 아침에 떠나가면 아무 사고(事故)가 없으리니 염려(念慮)하지 말라 하시더라.
1-22 이튿날 아침에 갑사를 떠나시면서 가라사대 그대들은 이로부터 큰 화가 없으리니 각기 갈려 가라 하시니 두 사람은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놓지 못하여 천사와 동행(同行)하기를 청(請)하거늘 허락(許諾)하시고 함께 여산에 이르사 가라사대 만일 읍내를 지나면 옷을 빼앗기리라 하시고 샛길로 들어 고산(高山) 인내 장터로 향(向)하시니라 이때에 여산읍으로 지나는 동학군은 모두 읍사람에게 옷을 빼앗기고 벗은 몸으로 흩어져 가니 대개(大槪) 전번(前番)에 동학군들이 북상(北上)할 때에 읍사람들의 옷을 빼앗아 갔음을 보복(報服)함이러라.
1-23 이 길로 전주에 이르 사 두 사람을 각기 돌려보내실 때 필성과 형렬이 숙박비(宿泊費)가 없음을 걱정하거늘 가라사대 내가 이곳에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 하기거늘 이에 천사께 작별하고 형렬은 구릿골로 필성은 닥뱀이로 각기 돌아갔더니 이 뒤에 동학 전군(全軍)이 도망해 와서 섣달 열 사흗날 원평(院坪) 접전(接戰)과 보름달 태인 접전으로 연전연패(連戰連敗)하여 산망(散亡)하여 버리니라.
1-24 스물다섯 살 되시던 을미년(乙未年) 봄에 고부 지방(地方) 유생(儒生)들이 평란(平亂)되었음을 축하(祝賀)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 때 천사께서도 참여(參與)하였더니 한 노인이 천사를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천사 그 책을 통독(通讀)하시니라.
1-25 하루는 송광사 (松廣寺)에 가서 여러 날 동안 지내시더니 어떤 중이 무례(無禮)하게 대접(待接)하는지라 천사 노(怒)하사 꾸짖어 가라사대 요망(妖妄)한 무리들이 산속에 모여 불법(佛法)을 빙자(憑藉)하고 백악(百惡)을 감행(敢行)하여 세간(世間)에 해독(害毒)을 끼치니 이 소굴(巢窟)을 뜯어버리리라 하시고 법당(法堂)기둥을 손으로 잡아당기심에 기둥이 한 자나 물러나는지라 온 절이 크게 놀래어 여러 중들이 몰려와서 절하며 사죄(謝罪)하거늘 이에 노를 그치시고 그대로 두셨더니 그 뒤에 그 법당을 여러 번 수리(修理)하여도 물러난 기둥이 원상(原狀)대로 회복(回復)되지 아니하더라.
1-26 이 뒤에 전주에 가사 백남신(白南信)의 아우 소실(少室) 기생(妓生)의 친가(親家)에 사관(舍?)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머무르시더니 그 기생이 천사의 우아(優雅)하신 의표(儀表)를 탐(貪)내어 하루는 밤을 타서 천사의 거처(居處)하신 방으로 들어오거늘 천사 꾸짖어 보내셨더니 그 뒤에 다시 수차(數次) 들어오거늘 여전(如前)히 개유(開諭)하사 돌려 보내시니라.
1-27 혁명난 후로 국정(國政)은 더욱 부패(腐敗)하여 세속(世俗)은 날로 악화(惡化)하고 관헌(官憲)은 오직 포악(暴惡)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례(虛禮)만 숭상(崇尙)하며 불교는 무민혹세(誣民惑世)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실패 후에 기세(氣勢)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거두게 되고 서교(西敎(예수 신.구교))는 세력(勢力)을 신장(伸長)하기에 진력(盡力)하니 민중은 고궁(苦窮)에 빠져서 안도(安堵)할 길을 얻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싸여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위구(危懼)와 불안(不安)이 온 사회(社會)를 엄습하거늘 천사 개연(慨然)히 광구(匡救)할 뜻을 품으 사 유불선(儒佛仙) 음양참위(陰陽讖緯)의 모든 글을 읽으시고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기 위하여 정유(丁酉)로부터 유력(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
1-28 충청도(忠淸道) 연산(連山)에 이르 사 역학자(易學者) 김재일(金在一)에게 들리시니 이때 재일의 꿈에 하늘로부터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강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올라오라는 상제(上帝)의 명(命)을 전하거늘 재일이 천사와 함께 천사를 따라서 옥경에 올라가 요운전(曜雲殿)이라고 액자(額字)가 써 붙여진 장려(壯麗)한 금궐(金闕)에 들어가서 상제께 뵈이니 상제가 천사께 대하여 광구천하(匡救天下)하려는 뜻을 칭찬(稱讚)하며 극(極)히 우대(優待)하는지라 재일이 크게 이상(異常)히 여겨 이 일을 말한 뒤에 요운(曜雲)이란 도호(道號)를 천사께 드리고 심(甚)히 경대(敬待)하니라.
1-29 이 길로 경기(京畿) 황해(黃海) 강원(江原) 평안(平安) 함경(咸鏡) 경상(慶尙) 각지를 차례로 유력(遊歷)하시니 천사의 혜식(慧識)은 박학(博學)과 광람(廣覽)을 따라 명철(明徹)하여 지시므로 이르는 곳마다 신인(神人)이라는 칭송(稱訟)이 높더라
1-30 이렇게 수 년 동안 유력하시다가 경자년(更子年)에 고향(故鄕)으로 돌아오시더니 이때에 전주 이동면(伊東面) 전용리(田龍里) 이치안(李治安)이 구혼차(求婚次)로 충청도로 향하다가 주막에서 천사를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고 그 이튿날 떠나려 할 때 천사 치안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대가 이제 구혼차로 길을 떠났으나 반드시 헛걸음이 될 것이니 이 길을 가지 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전일부터 의혼(議婚)하여 오던 곳에서 매파(媒婆)를 보내 정혼(定婚)하기를 구하리라 만일 이 기회를 놓치면 혼로(婚路)가 열리기 어려우니 빨리 돌아가라 치안은 천사께서 자기(自己)의 사정(事情)을 밝히 알고 말씀하심을 신기(神奇)히 여겨 비로소 성명(姓名)을 통(通)하고 천사의 주소(住所)를 자세(仔細)히 물은 뒤에 곧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라.
1-31 이 뒤로 치안이 천사의 신기하심을 흠모(欽慕)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 오니라 치안의 아들 직부(直夫)는 그 마을 이장(里長)이라 마침 그 마을 인구(人口)를 긴급히 조사(調査)할 일이 있다 하거늘 천사 수(數)를 놓으신 뒤에 호수(戶數)와 남녀 인구를 자세히 일러 주시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적어질 것을 말씀하시거늘 직부는 믿지 아니하고 온 마을을 돌아 낱낱히 조사한 즉 과연 한 집 한 사람도 틀림이 없고 또 사흘 만에 한 사람이 죽는지라 직부가 비로소 놀라 천사의 신기하심을 감복(感服)하니라.
1-32 설흔 한 살 되시던 신축년(辛丑年) 가을에 집에 들어오자 선영(先靈)의 공명첩(功名帖)을 불살으시니라.
1-33 정씨부인(鄭氏婦人)이 간곡(懇曲)히 말씀하여 가로대 이제는 그만 돌아다니시고 집에서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사이다 하니 천사 가라사대 그렇게 적은 말이 어디있느뇨 하시고 이로부터는 집에 가까이 아니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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