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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은당실기 - 제7장 육기초공사(六基礎公事) 오리알터(鳧卵基) 2부

화은당실기 - 제7장 육기초공사(六基礎公事) 오리알터(鳧卵基) 2부

경전 및 도서  백제의꿈 백제의꿈님의 글모음 쪽지 2015-08-14 15:58 9,537
19. 이해 팔월에 수리조합 연합회에서 직원들이 출장나와서 금평수리조합 공사 예정지를 일일히
측량하게 되니 그때에 실시된 측량에 의한 제일차 설계는 현재의 땜(보뚝) 자리보다 일미터
정도 윗 지경에 정하고 금산사까지 이르는 도로의 설계는 본부 경춘대(景春臺) 자리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들은 여기저기 푯말을 밖았더니라. 오래(吾來)터로 성전을 옮기도록
명령하실 때 냇물에 섬다리를 놓게 하시면서 장차 이곳은 발로 걸어서는 다닐 수가 없게되니라
하셨으며 또 동곡에서 오래터로 이사하지 않으면 곧 패운이 들어온다 하시더니 우리가 기지를
옮긴 뒤에 그 자리가 수몰지구로 편입되고 말았던 사실을 생각하더래도 필경 설계가 변경될 수
있도록 정리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러나 막상 기지내에 푯말이 박히고 보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는 없더라.

그날 저녁에 성전 불전에 예를 올리고 이러한 사정을 심고하니 성부께서 하교하시되
“염려말라 연전에 공사시에 너희가 원평을 다녀온 일이 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화은당(華恩堂)의 이마를 깨어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제방 자리를 미리 표시한 바 있고
그날 밤에 천불을 내려 전반적인 표시를 한바 있으니 천지에서는 벌써 정해져 있노라
동곡의 냇물에 섬다리 열두개 씩을 해마다 정월 십사일 밤에 놓게 한 것 역시 이 저수지
관계라.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앞거리를 바라보고 남조선 뱃길이라 하며 냇가 변두리
느티나무에 배를 매게 될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동곡마을이 없어지게 되어 거기에서는
장차 고기를 낚게 될 것이며, 또 뒷날에 도사들의 별장이나 짓고 살 터가 되리라고 했을때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인(狂人)으로 여겼지만 그 당시에 벌써 천지도수에 정하여
 놓은 것이니라. 그러나 천지사는 정성을 드리지 않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이니 무사히 풀리게 해
주시기를 불전에 충심으로 발원하도록 하다. 그렇다면 신명들이 너희 몸에 힘을 주어 무사히
되리라” 하시니라.

그뒤 정성껏 기도를 올렸더니 설계가 변경되어 제방자리가 오십여미터나 물러나게 되니
도로도 역시 물러나게 되어 현위치에 푯말을 다시 박게 되니 기지에는 아무런 침해가 없게
되었다. 수년전에 동곡으로부터 집을 뜯어 옮길 때 보는 사람마다 집은 왜 지었다가 뜯었다가
하며, 또 널찍한 평지를 버리고 산비탈에 그처럼 힘을 들여 할것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경상도 사람은 멍청하다더니 거대한 집을 지었다가 이삼년만에 이축한다는 것은
정말 멍청한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소하면서 순전히 돈 지랄을 하는 것들이라고
욕을 하며 별별 모략이 많았더라. 그러나 그뒤 수몰공사가 착수되고 동곡이 수몰지대가 되어
물속에 들어가게 되자 모두들 놀라면서 이상한 일이다. 지금에 와서 보니 만일 오래터에
개기하지 않고 그대로 동곡에 머물렀더라면 그런 낭패가 없을 터인데 미리 알고 터를
옮긴 것을 보면 아마도 오래터에는 큰 지혜자가 있는 모양이고 도통한 교인도 많은 것
같다고 말들을 하면서 옛날의 그처럼 심하던 비소는 간곳 없고 인사차로 찾아와서
찬양하는 소리가 자자하더라. 당시의 정황을 아는 자는 교중 형제는 물론이요 밖의
사람들도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감탄하더라.

그리고 또 한가지 기이한 것은 우리 교중의 경제관계가 핍박하여져서 건축공사를 중지하면
저수지 공사도 역시 중지하게 되고, 교중 경제가 풀려 건축공사가 잘 진척되면 저수지 공사도
또한 활발하게 진행되어 칠팔년 동안을 두고 한결같이 그 모양으로 진행되었으니
이것은 우리의 영대(靈臺)와 음양대대로 진행되는 영소(靈沼) 공사가 천지의 도수 소관으로
진행 되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니라.


20. 계사(癸巳) 오월 칠일 아침 불전에 예식을 드리니 성부님께서 강림하시와
“오늘 저녁 안으로 세월가(歲月歌)를 지어 진지상을 올릴 때 부르고 불사르도록 하라.
운장(雲將)이 와서 천상에 접수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지체하지 말고 곧 짓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정사는 마침 전주에 볼 일이 있었던고로 우형과 조진명(趙鎭明) 두 사람에게 정성을
들여 작사하도록 지시하고 전주에 나갔다가 석양에 돌아와서 상을 올리는데 두 사람이
세월가를 읽으니 성부님과 운장께서 웃으시고 웃으시면서 “가사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로다 가사라 하면 곡조를 부쳐서 누구나 노래 부르도록 해야 될 것인즉
다시 지어올리도록” 하라 하시며 “저녁 열시에는 천상에 돌아갈 것이니
그안에 짓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정사는 저녁밥을 먹지 않은채 정성드려 작사하니
그때부터 수년을 세월가(歲月歌)로 부르다가 단기 사천이백구십삼년 경자
(檀紀 四二九三年 庚子)로부터 시대가(時代歌)로 수정하여 영가(詠歌)함이
다음과 같으니라.

 
         (歲月) 時 代 歌

一   時代야 歲月이야 開明하온 時乎로다
      東靑龍 三八木에 北玄武一六水라
      水生木 東南風에 陰陽和合되는구나
二   時代야 歲月이야 風雨霜雪너머간다
      一樹花發 萬樹春에 春和氣和 절로절로
      無窮花 이江山에 三淸日月 밝아온다
三   時代야 물결이야 술렁술렁 드러온다
      母岳山下 金生水에 萬化歸一 되는구나
      靑龍黃道 大開年에 旺氣浮來 太乙船을
四   時代야 歲月이야 修養山陰 절로절로
      天절로 地절로하니 山河大運이 절로절로
      心靈神臺 바로가면 先靈蔭德 鳥乙矢口
五   時代야 歲月이야 時乎時乎 祥瑞로다
      童子의 비를드러 掃除濁氣 절로절로
      時乎時乎 좋은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밤 열시에 성전에서 다시 지은 세월가를 세번 부르고 나니 운장께서
“소축하라 천상 옥경으로 떠난다”하시며 승천 하시더라.
십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니 운장상제 천존신장 선관선녀가 모두 하강하여
“육기초 공사는 천상만 못하더니 세월가는 천상보다 잘 지었다”고 하시며
서로 천거하시더니 “너희들은 모두 세월가를 경문과 같이 불러야 하리라”고 하시더라

21. 계사(癸巳) 구월 십구일 탄강 기념치성에는 큰 소를 쓰라고 명령이 내려 어려운
처지에서도 월전에 준비하여 두었더니 선사께서 치성에는 산소를 올리라시며
잡지 말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하더니 구월 십구일 탄강기념치성에
다른 치성물은 모두 준비 되었으나, 우육만이 없었는데 선사(禪師)님께서는
진설이 다 되자 “소를 몰아 성전 앞뜰에 세우라”하시고 잔을 올릴때마다
이 소가 심헌까지 울어야지 만일에 소가 울지 않으면 너희들이 하는 일은 허사가
되리라고 하여 모든 사람이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행사는 진행되어
초헌을 올리니 그때까지 조용히 섰던 소가 큰 소리로 울음을 우는 것이 아닌가.

수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감격하여 숨을 죽이고 다음 행동을 주시하는데 종헌에
맞추워 소가 세번씩이나 울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비결에 이르기를
인지명은 양명지종야(人之明洋明之終也) 신지명 우명지종야(神之明牛鳴之終也)라
하며 이러한 일은 참으로 현묘지의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더라.

계사(癸巳)년 십월 이십육일 교명을 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
증산천사법문연구회(甑山天師法文硏究會)로 공보처에 등록번호(登錄番號)
제 백칠십구호(第 百七十九號)로 등록하고 교명을 정식(正式)으로 세상에
선포(宣布)하였다. 해원 보은 상생(解寃 報恩 相生)을 교리로 하여
신상(信像)은 증산미륵불(甑山彌勒佛)을 신앙대상으로 숭앙하고 이십일개의 지방조직을
완성하고 결성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로부터 합법적인 포교로 교세가 발전되었다.

22. 계사(癸巳)년에는 태평전(太平殿)과 구룡사(龜龍祠) 수운전(水雲殿)을 건립하여
 갑오(甲午) 삼월 삼일에 도내 관민 유지 수백명이 모인 가운데 단군 성조의 체상과
순국 충의 열사와 수운선생의 체상 봉안식을 거행하니라. 그 동안 수년에 걸쳐 여러채의
건물에 단청을 완료하게 되니, 각 당우의 칭호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그리하여 그 이름은 천추 만대를 두고 불리울 것이니 신중을 기하기로 하였던 바
단군성상을 모신 전각은 국내에서는 대게 단군전(檀君殿)이니 또는
대덕대진전(大德大眞殿)이라 하였으나, 다른 곳에서 쓰지 않는 이름으로 할것을
마음먹고 생각한 결과 단군께서 탄생하신 태백산(太白山)의 윗자를 따고
 또 단군 한배께서 도읍터로 정하신 평양(平壤)의 윗자를 따사 합하여 태평전(太平殿)이라
명명(命名)하니, 그것에 봉안한 단군 성상은 금성골 지하 중궁에 모셧떤 성상이요
또한 성상의 좌우에는 단군 이후 창업주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어 삼천년에 걸친
우리민족의 역사 노정과 거기에 얼룩진 겨레의 얼과 넋을 찾아서 모을 수 있도록 하니라.

묘각은 성부님의 성령이 내왕하시는 총묘 천지신이라 하시니 영대(靈臺)라 하고
미륵불을 모신 성전은 천상 삼계를 본따서 삼청전(三淸殿)이라 칭하고
수운전은 수운선사께서 경주(慶州) 구미용담(龜尾龍潭)에서 탄생하였음으로
그 윗자를 따서 구룡사(龜龍祠)라 칭하고 순국 충의열사를 모신 곳은
호국사(護國祠)라 칭하여 그 결과를 글로 써서 상고하니, 성부님께옵서
“잘 되었다 너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니라”고 하시니라

23. 갑오(甲午) 오월 단오절에 현재의 남별당 자리에 그네를 메고 선사님께서 원삼에 족두리를
쓰시고 그네를 타며 치성을 올리고 공사를 보는데 성부성모님께서 하강하시와 명령하시되
“동곡별당을 뜯어온 재목으로 이 자리에 남별당(南別堂)을 지어라” 하시며
“오늘 개기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명을 받을어 봉행하고 나서 뒤이어 터를
닦고 보니 종종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났으며 구성산을 안으로 삼는 대지가 되었더라.
별당 건축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밤이면 큰 호랑이가 내려와서 별당터에서 놀다가
각 성전을 돌아서 가는 적이 수차 있었더니라.

그해 가을에 대구에 사는 박귀동(朴貴東)이 납명(納名)하고 본교를 신앙하게 되었는데
본부에는 미쳐 와보지도 않은채 거액의 성금(誠金)을 헌납하였음으로 그것으로
경춘대(景春臺) 재목을 구하여 이층 건물을 시작하여 갑오(甲午) 을미(乙未) 양년에 걸쳐
준공하게 되니 안으로 영대와 삼청전을 대하고 밖으로 금평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그 건물은 우리 본부의 정문으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니, 모든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경치를 볼 수 있는 높은 자리가 되었다고 칭송이 자자하니라.

수운선생의 유전 가사중에 사십구년 설법가(四十九年 說法歌)라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르기를 “삼십육궁 도시춘(三十六宮 都是春)이 만방안락 태평(萬邦安樂 太平)일세
춘(春)아 춘(春)아 태평춘(太平春)아 사시동락(四時同樂)하여 보세”라는 구절이 있으니
장래 있을 용화 극락세계의 사시장춘 좋은 경치 구경하며 태평춘가(太平春歌)를 노래할
      날도 머지 않으리라.

24. 을미(乙未) 구월 십구일 성부님의 화천기념일에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옵서 하명하시되
“각 문중 도선영이 천상공정(天上公庭)에 모여 천지공사에 수종해 왔으나,
지금은 지상에 한 자리를 정해야 할 것이라. 각성 각가의 도선영 사당을 짓고 봉사자(奉祠者)의
명부를 작성하여 각 성별로 위패를 봉안하되 금성중궁(金城中宮)에 있던 내 영상(靈像)을
 갈라서 선영(先靈) 위패를 조각하다가 부족하거든 모악산에 가면 한 율목이 있으니
그것을 쓰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먼저 앉아야 선영(先靈)들이 좌정된다.

모든 선영이 자리를 정하면 나는 나가게 되느니라.
위패에는 본관성씨 직선조 하감지위(本貫姓氏 直先祖 下鑑之位)라 써서 봉안토록 하라.
그러므로서 각가의 선영신들이 지상의 후손들에게 응기하여 성자(聖子) 성손(聖孫)으로
교양하여 다음에 올 용화회상에 참석 할 수 있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 뒤로 다시 명령하시기를 “당우를 짓되 그 자금을 각가 각성의 자손들에게 성의를 표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교중의 여러 형제는 명령을 받들어 성심으로 기금을 모아서
 그것을 자금으로 사당을 건립하여 병신(丙申) 십이월 이십육일에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게
된 바 봉안된 위패는 이백사십여위에 달하니라.
정유 정월 십오일 기념일에 사당의 첫 제사를 올리게 되었는데 각위마다 술 한잔 건포
한마리 떡국 한 그릇 과일 한 접시씩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는 도중 운장상제와 오악산왕
사해용왕이 강림하시와 제사 지내는 광경을 보시고 춤을 추며 풍유를 하시면서 잘 되었다고
하시니라.

25. 정유(丁酉) 정월 십칠일 아침에 성부님께옵서 명령하여 말씀하시되 “천상의 대신장들도
지상에 앉을 자리가 있어야 하나니 신명사(神明舍)를 올해안으로 짓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이튿날 각 지방의 지부감(支部監)과 회의를 가진 결과 건축에 대한 모든 합의가 원만히
진행되어 제반 절차를 결의하게 되었던 바 대구(大邱)에 사는 이구락(李龜洛)이 자기는
도문에 납명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용화도장 건설에 아무런 공적이 없음으로
이번 신명사 대령전(大靈殿)은 자기가 단독으로 부담하여 건축하겠다고 간청하므로
놀라운 정성이라 하여 허락하니 그의 단독 희사로서 대령전은 준공을 하게 되니
그의 공적을 표창하고 지부감 회의 결과에 의하여 거출된 성금은 각 전각의 수리 및 공사비용에
충당하니라.

구락은 동년 시월에 입공(入工)하여 십일이 경과되었으나 어무런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없었다
하여 딴 곳으로 신앙처를 바꾸게 되었으며 자기가 성금한 대령전 건축 비용 일체를 반환해
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오니라. 구락의 이와 같은 처사는 삼척동자의 수작도 아니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 세상에 부처님 존전에 시주해 놓고 수공 십일만에 영험이 없으니
시주한 모든 것을 돌려달라고 하는 그런 일이 어디 또 있을까보냐고 모두들 어이없어 했으니
장차 올 용화선경 세계의 기초를 열어 나가는 공사 절차에 있어 한 사람이라도 척을 지으면
아니될 일이라 그의 척원을 풀기 위하여 반환해 주기로 결의하여 교중 전답을 팔아 거액을
반환하면서 이는 오로지 도의적인 면에서 돌려주는 것이지 현행법에 비추어 반환해야할
하등의 책임이 없음을 밝혀 말해주니라.

26. 무술(戊戌) 정월 일일 신년을 맞아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또 집을 짓도록 하라. 이번에는 높은 자리에 터를 잡아야 되겠은즉 처음 기초시에
산중턱에 터를 본 자리가 있느냐”고 하문하시므로 “있습니다” 상고하니
“술상을 차려서 가자” 하심으로 술상을 차려 그 자리에 올라 갔더니 성부님께서 보시고
“터가 썩 좋구나” 하시면서 “이 자리는 대학공부하는 자리라 너희들이 겁기를 벗을 집이
될 것이니 성의껏 지어 공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계속하여 “금성골로부터 전라도까지
집은 열세채를 지으면 될것이라고 한 일이 있나니, 이 집으로 집 짓는 일은 끝이 나니라.
그러한 즉 더욱 정성을 드리도록 하라. 집 모양은 구궁(九宮)으로 하여 우물정(井)자
형으로 하되 통로를 두도록 하라. 그 집에서 한 차례에 남녀 삼십삼명씩 공부하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뒤 혈심 전력을 다하여 집 짓기를 마치고 내부 단청도 십월 초순에는 완료하게 되었음으로
무술 십월 십일에 입공(入工)하게 되니라. 입공식을 행하는데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이번 공부에 읽을 주문(呪文)은 태을주(太乙呪)로 위주하야 지극히 많이 읽도록 하라”고
하시니라.

성부님의 명령대로 무술(戊戌) 시월 십일부터 기해(己亥) 오월까지 수십회에 걸쳐 본부의
식구들과 각 지방 형제들이 수공하게 되었으니 이 집이 곧 천하전(天厦殿)으로
수련도장(修鍊道場)이다. 또 이 천하전을 지은 것은 금성산 지하에서 모셨던 형을
그대로 지상(地上)에 옮겨지은 것을 천하전(天厦殿)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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