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체격이 가분수입니다.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습니다. 이건 동양인이라서 그렇다 치고 겨우 턱걸이 해서 키가 170cm인데 손이 큰편이고 발도 커서 신발 275cm 신습니다. 근데 이젠 270cm으로 줄었습니다.
그동안 손가락의 수난이 많았습니다. 칼로 무우껍질 벗기다 손가락을 쳐서 흉터가 있고 로프공장 하루 일하다가 손가락이 물려 들어가 살이 터진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자전거 타고 가면서 친구 따라 오는거 뒤돌아보다가 트럭과 받아서 새파랗게 부어 엄지손톱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조상님 덕분으로 100% 다 회복되었습니다. 뼈도 상하지 않고 살도 회복되고요.
그런 후 70년초(제가 초등 3년쯤) 서울 용산의 삼각지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세워진(원장:대만인)쿵후 도장에서 사범으로 있던 큰형이 기타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에는 배고픈 시절이라 밥만 먹여주면 급여 없이 식모살이(가정부)로 가던 때인데 제 누님도 청소 및 애기보고 빨래하고 밥해주는 식모로 갔던 때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선 집안의 장남이 운동이나 하고 세월을 까먹고 있으니 당시 대한민국 아버지 문화로서는 한심 한거죠. 아버지는 계속 공장 같은데 가서 기술배우라고 닥달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 말씀도 맞습니다.
운동으로 밥 먹고 사는 시대가 아녔거든요.
저의 큰형도 불쌍합니다. 키는 저보다 작은데 근육이 멋있었습니다.
당시 마장동 도살장에 가서 손가락으로 돼지 배를 쑤셔서 내장을 꺼낼 정도로 자질이 있었는데 괜히 특기를 못 살리고 한 평생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며 세월이 흘렀습니다.
또한 많은 세월 속에서 저희 동생들 챙기느라 장가도 못가고 늙어 가는 한(恨)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3살 되던 때부터 집안에 우환이 생기기 시작하여 고창군 윤씨 집안이 전부 다 풍지박살 났습니다. 한 때 떵떵거리던 집안이었는데 제가 태어나자 마자 가세가 기울었답니다.
갑자기 멀쩡한 사람이 미쳐버린가 하면 갑자기 사고로 숨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병이 생겨 죽는 사람 등등..지금도 끔찍합니다.
그건 그렇고 암튼 제 손가락이 길고 예뻐서 손과 연관된 예술을 하면 좋겠다란 표현이 있어서 용기를 갖고 처음으로 기타를 만진거지요 .
이때까지만 해도 하모니카가 대중을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뒤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방학때 서울로 도망 나왔다가 하루 굶고는 배고파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부터 기타를 독학했습니다. 서울에 와서는 학원에 놀러 다니며 학원장 대신 실습생들 가르쳐 주기도 하고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연탄보일러실에 들어가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5인조 그룹사운드(보컬그룹)를 결성했지요.
저는 훠스트(1st)기타를 맡고 다른 분은 보컬(2nd기타)을 맡고 서울 고등학교 선생은 음악에 미쳐 직장 팽개치고 베이스를 맡고 같은 동네(금호동)선배는 드럼을 맡고 다른 분은 키보드(올갠)를 맡고..
그리고 미리 이름(브랜드)을 띄우려고 쇼쇼쇼(허참진행)에 물었더니 약 300만원 달랍니다. 이 때 300만원이면 금호동에서 허름한 집 한 채 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맨 나중에 자막 올라 갈 때 나오는 시간대로 한답니다.
돈도 없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이때는 종로 낙원상가 4층(기억으론)에 악기상가가 있었습니다. 여기는 당시 오후 4시부터 아마츄어 연주자들이 모이는 일명 연주자 인간시장이었습니다. 윤수일, 건아들, 조용필 밴드 중의 맴버가 아프거나 미처 합류를 못하는 사정이 생기면 여기서 일당으로 선출해갑니다.
우리는 지하실을 얻어서 연습(합주)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드럼치는 선배가 긴머리(남자임)에 노랑염색을 하고 알록달록 한 옷을 입고 다녀서 같이 다니기 정말 창피했습니다. 82년에는 이런 유행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 유행 감각은 15년을 앞섰다고 봐야지요.
그리곤 저는 큰형에게 부탁해서 전자기타를 샀습니다. 그때 형편에는 월세 10만원주고 한평반 방에서 큰어머니랑 4식구가 살던 때라 기타(guitar)살 형편이 아니었지만 큰형은 동생들의 부탁에 간 쓸개까지 빼줄 정도로 인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이트클럽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이트클럽은 올나이트라 해서 꼬박 밤새워 영업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화재사건이 크게 났습니다. 그러자 언론에서 문제를 삼아 새벽 2시로 영업시간을 제한해버려 많은 연주자들 일자리가 엄청나게 축소되어 버린거지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오디션을 보면 악기(5인조 총 악기값)값이 얼마냐에 따라 패이(일당)가 다릅니다. 가령 5인조 악기 총액이 2천만원이면 일당 10만원, 악기 총액이 1천만원이면 일당 5만원입니다.
그래서 악기를 고급으로 구매할수록 유리합니다.
또 음악 곡 선정을 해야하는데 대부분 훠스트 기타맨이 악보를 그립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악보들은 모두 편곡되어 있기에 오리지널 악보는 녹음된 테프를 되돌려 가며 먼저 기타음을 잡아내서 악보를 그리고 베이스 것만을 잡아내서 악보에 그리고 드럼 것을 잡아내서 악보를 그려내야 합니다.
보통 고역인 작업이 아니지요. 어쩔 때는 숨어있는 음을 못 잡으면 100%음이 나오질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앙꼬 빠진 찐빵식입니다. 물론 비전문가는 눈치채지 못하지만 전문가는 바로 알아차립니다. 절대음감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당시 연주했던 곡중의 한 곡입니다. 추억을 되새기며 띄워봅니다.)
그 후 기타를 도둑맞고 초상화에 관심을 갖고 윤호씨 연필초상화 제1기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남산에 갔더니 길바닥에 초상화 그리는 사람이 무더기로 있는걸 보고 밥 먹고 살기 힘들겠다 싶어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현재 윤호씨 연필초상화 회원이 250만명이라는군요.
-중략-
1990년 잠실역에서 퇴근시 어떤 여성이 다가와 얘기를 하잡니다. 당시 저는 단전호흡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방이 좁아 부엌에 가서 수련을 하면 어릴때 죽은 벅구(犬)가 자꾸 수행을 방해하더군요. 예를 들면 깊은 호흡에 들어갈나 하면 찬장위에서 냄비가 꽝 떨어지고 깊은 호흡에 들어갈만 하면 그릇이 쨍그렁 떨어져서 무조건 빌었습니다.
이 벅구는 진도개와 새파트를 접종해서 생긴 개(犬)인데 무척 영리했습니다. 마당에 곡식을 널어놓으면 우리 닭은 안 쫒아도 다른 집 닭은 쫒아버립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람도 배고프지만 개들도 배고픈 시절이라 어디가서 뭘 먹었는지 눈에 불켜고는 집을 몇 바퀴 돌다가 방에 들어와 이불 속에 머리 쳐박고 숨졌습니다.
근데 워낙 가난한 때라 동네분들이 묻어 주지 말고 고기로 팔으라고 하자 아버지가 우리들 생각해서 고기로 팔았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 때 묻어줬어야는데..
아무튼 그 여자가 조상을 얘기하고 철학을 얘기하는데 관심이 있던터라 따라갔습니다. 중곡동 안동방면 연락소이더군요.
가자마자 돈 3천원인가 내고서 제를 지냈습니다. 그 후 2~3번 가서 보고 중곡동 본부에서 1박 2일로 수행해보고 여주에 가서 박한경씨도 옆에서 구경하고 그러다가 서점에 가서 이것이 개벽이다를 보고 증o도에 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여기서 인생을 마감하리라. 그리고 초발심에 열심히 하던차 큰어머니께서 태을주 소리를 들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얘야~ 그것 하지마라~ 옛날 그것 하는 집안 다 망했단다~ 시어머니는 가족이 굶어죽어도 식량을 갖다 바칠 정도로 그 놈의 것이 사람 다 버려놨단다~ 하십니다.
저는 그랬지요, 시대가 달라요.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예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날 여동생이 문제가 생겼다고 급한 전하가 왔습니다. 병원을 아무리 다녀도 병이 안 낫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그랬지요. 별일 없겠지..한데 어느날 여동생이 무속인이 되어야 한다고 굿을 한다네요. 헐~ 제가 말릴 분위기도 아니더군요. 그래서 너의 팔자인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무속인도 약간 융통성이 있어야 돈이 되는데 그냥 평범하니까 돈이 안 되나 봅니다.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데 한 번 만나보면 월세 걱정하더만요, 무속인이라 월세도 얻기 힘들답니다.
아무튼 그래도 어찌 어찌 해서 계를 타가지고 그 돈으로 화곡동에 쬐그만 생맥주 집을 하는모양인데.. 치킨은 맛있다고 소문난 모양이지만 상권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기에 하루 매상 3만원, 잘 되면 30만원, 매상이 불규칙해서 먹고살기 힘들다고 합니다~ㅋ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큰형이 직장을 다니면서 하던지 아니면 증o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뭐 결국 세월이 흘러 증o도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 때는 약간 미친놈 상태라 신경 쓰지 말라고 말다툼 하다가 제가 제 손가락을 찍게 되어서 왼손 약지가 끝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바보 된거지요.
또, 한번은 저번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목감IC 알바 갔다가 나무 뽑는 포크레인 줄에 걸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망가져 바보 된거지요.
최근에 큰형이 힘든 경비하지 말고 “쎄시봉”이 인기인데 기타를 가르쳐 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인연이 아닌 것 같고 손가락도 바보 되었기에 오로지 도 닦는 것만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너희는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을 도모하라. 묵은 습성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그 몸이 따라서 망하느니라. [道典2:47]
긴 글을 읽어주심에 큰 복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손가락의 수난이 많았습니다. 칼로 무우껍질 벗기다 손가락을 쳐서 흉터가 있고 로프공장 하루 일하다가 손가락이 물려 들어가 살이 터진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자전거 타고 가면서 친구 따라 오는거 뒤돌아보다가 트럭과 받아서 새파랗게 부어 엄지손톱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조상님 덕분으로 100% 다 회복되었습니다. 뼈도 상하지 않고 살도 회복되고요.
그런 후 70년초(제가 초등 3년쯤) 서울 용산의 삼각지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세워진(원장:대만인)쿵후 도장에서 사범으로 있던 큰형이 기타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에는 배고픈 시절이라 밥만 먹여주면 급여 없이 식모살이(가정부)로 가던 때인데 제 누님도 청소 및 애기보고 빨래하고 밥해주는 식모로 갔던 때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선 집안의 장남이 운동이나 하고 세월을 까먹고 있으니 당시 대한민국 아버지 문화로서는 한심 한거죠. 아버지는 계속 공장 같은데 가서 기술배우라고 닥달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 말씀도 맞습니다.
운동으로 밥 먹고 사는 시대가 아녔거든요.
저의 큰형도 불쌍합니다. 키는 저보다 작은데 근육이 멋있었습니다.
당시 마장동 도살장에 가서 손가락으로 돼지 배를 쑤셔서 내장을 꺼낼 정도로 자질이 있었는데 괜히 특기를 못 살리고 한 평생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며 세월이 흘렀습니다.
또한 많은 세월 속에서 저희 동생들 챙기느라 장가도 못가고 늙어 가는 한(恨)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3살 되던 때부터 집안에 우환이 생기기 시작하여 고창군 윤씨 집안이 전부 다 풍지박살 났습니다. 한 때 떵떵거리던 집안이었는데 제가 태어나자 마자 가세가 기울었답니다.
갑자기 멀쩡한 사람이 미쳐버린가 하면 갑자기 사고로 숨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병이 생겨 죽는 사람 등등..지금도 끔찍합니다.
그건 그렇고 암튼 제 손가락이 길고 예뻐서 손과 연관된 예술을 하면 좋겠다란 표현이 있어서 용기를 갖고 처음으로 기타를 만진거지요 .
이때까지만 해도 하모니카가 대중을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뒤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방학때 서울로 도망 나왔다가 하루 굶고는 배고파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부터 기타를 독학했습니다. 서울에 와서는 학원에 놀러 다니며 학원장 대신 실습생들 가르쳐 주기도 하고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연탄보일러실에 들어가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5인조 그룹사운드(보컬그룹)를 결성했지요.
저는 훠스트(1st)기타를 맡고 다른 분은 보컬(2nd기타)을 맡고 서울 고등학교 선생은 음악에 미쳐 직장 팽개치고 베이스를 맡고 같은 동네(금호동)선배는 드럼을 맡고 다른 분은 키보드(올갠)를 맡고..
그리고 미리 이름(브랜드)을 띄우려고 쇼쇼쇼(허참진행)에 물었더니 약 300만원 달랍니다. 이 때 300만원이면 금호동에서 허름한 집 한 채 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맨 나중에 자막 올라 갈 때 나오는 시간대로 한답니다.
돈도 없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이때는 종로 낙원상가 4층(기억으론)에 악기상가가 있었습니다. 여기는 당시 오후 4시부터 아마츄어 연주자들이 모이는 일명 연주자 인간시장이었습니다. 윤수일, 건아들, 조용필 밴드 중의 맴버가 아프거나 미처 합류를 못하는 사정이 생기면 여기서 일당으로 선출해갑니다.
우리는 지하실을 얻어서 연습(합주)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드럼치는 선배가 긴머리(남자임)에 노랑염색을 하고 알록달록 한 옷을 입고 다녀서 같이 다니기 정말 창피했습니다. 82년에는 이런 유행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 유행 감각은 15년을 앞섰다고 봐야지요.
그리곤 저는 큰형에게 부탁해서 전자기타를 샀습니다. 그때 형편에는 월세 10만원주고 한평반 방에서 큰어머니랑 4식구가 살던 때라 기타(guitar)살 형편이 아니었지만 큰형은 동생들의 부탁에 간 쓸개까지 빼줄 정도로 인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이트클럽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이트클럽은 올나이트라 해서 꼬박 밤새워 영업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화재사건이 크게 났습니다. 그러자 언론에서 문제를 삼아 새벽 2시로 영업시간을 제한해버려 많은 연주자들 일자리가 엄청나게 축소되어 버린거지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오디션을 보면 악기(5인조 총 악기값)값이 얼마냐에 따라 패이(일당)가 다릅니다. 가령 5인조 악기 총액이 2천만원이면 일당 10만원, 악기 총액이 1천만원이면 일당 5만원입니다.
그래서 악기를 고급으로 구매할수록 유리합니다.
또 음악 곡 선정을 해야하는데 대부분 훠스트 기타맨이 악보를 그립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악보들은 모두 편곡되어 있기에 오리지널 악보는 녹음된 테프를 되돌려 가며 먼저 기타음을 잡아내서 악보를 그리고 베이스 것만을 잡아내서 악보에 그리고 드럼 것을 잡아내서 악보를 그려내야 합니다.
보통 고역인 작업이 아니지요. 어쩔 때는 숨어있는 음을 못 잡으면 100%음이 나오질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앙꼬 빠진 찐빵식입니다. 물론 비전문가는 눈치채지 못하지만 전문가는 바로 알아차립니다. 절대음감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당시 연주했던 곡중의 한 곡입니다. 추억을 되새기며 띄워봅니다.)
그 후 기타를 도둑맞고 초상화에 관심을 갖고 윤호씨 연필초상화 제1기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남산에 갔더니 길바닥에 초상화 그리는 사람이 무더기로 있는걸 보고 밥 먹고 살기 힘들겠다 싶어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현재 윤호씨 연필초상화 회원이 250만명이라는군요.
-중략-
1990년 잠실역에서 퇴근시 어떤 여성이 다가와 얘기를 하잡니다. 당시 저는 단전호흡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방이 좁아 부엌에 가서 수련을 하면 어릴때 죽은 벅구(犬)가 자꾸 수행을 방해하더군요. 예를 들면 깊은 호흡에 들어갈나 하면 찬장위에서 냄비가 꽝 떨어지고 깊은 호흡에 들어갈만 하면 그릇이 쨍그렁 떨어져서 무조건 빌었습니다.
이 벅구는 진도개와 새파트를 접종해서 생긴 개(犬)인데 무척 영리했습니다. 마당에 곡식을 널어놓으면 우리 닭은 안 쫒아도 다른 집 닭은 쫒아버립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람도 배고프지만 개들도 배고픈 시절이라 어디가서 뭘 먹었는지 눈에 불켜고는 집을 몇 바퀴 돌다가 방에 들어와 이불 속에 머리 쳐박고 숨졌습니다.
근데 워낙 가난한 때라 동네분들이 묻어 주지 말고 고기로 팔으라고 하자 아버지가 우리들 생각해서 고기로 팔았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 때 묻어줬어야는데..
아무튼 그 여자가 조상을 얘기하고 철학을 얘기하는데 관심이 있던터라 따라갔습니다. 중곡동 안동방면 연락소이더군요.
가자마자 돈 3천원인가 내고서 제를 지냈습니다. 그 후 2~3번 가서 보고 중곡동 본부에서 1박 2일로 수행해보고 여주에 가서 박한경씨도 옆에서 구경하고 그러다가 서점에 가서 이것이 개벽이다를 보고 증o도에 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여기서 인생을 마감하리라. 그리고 초발심에 열심히 하던차 큰어머니께서 태을주 소리를 들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얘야~ 그것 하지마라~ 옛날 그것 하는 집안 다 망했단다~ 시어머니는 가족이 굶어죽어도 식량을 갖다 바칠 정도로 그 놈의 것이 사람 다 버려놨단다~ 하십니다.
저는 그랬지요, 시대가 달라요.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예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날 여동생이 문제가 생겼다고 급한 전하가 왔습니다. 병원을 아무리 다녀도 병이 안 낫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그랬지요. 별일 없겠지..한데 어느날 여동생이 무속인이 되어야 한다고 굿을 한다네요. 헐~ 제가 말릴 분위기도 아니더군요. 그래서 너의 팔자인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무속인도 약간 융통성이 있어야 돈이 되는데 그냥 평범하니까 돈이 안 되나 봅니다.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데 한 번 만나보면 월세 걱정하더만요, 무속인이라 월세도 얻기 힘들답니다.
아무튼 그래도 어찌 어찌 해서 계를 타가지고 그 돈으로 화곡동에 쬐그만 생맥주 집을 하는모양인데.. 치킨은 맛있다고 소문난 모양이지만 상권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기에 하루 매상 3만원, 잘 되면 30만원, 매상이 불규칙해서 먹고살기 힘들다고 합니다~ㅋ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큰형이 직장을 다니면서 하던지 아니면 증o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뭐 결국 세월이 흘러 증o도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 때는 약간 미친놈 상태라 신경 쓰지 말라고 말다툼 하다가 제가 제 손가락을 찍게 되어서 왼손 약지가 끝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바보 된거지요.
또, 한번은 저번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목감IC 알바 갔다가 나무 뽑는 포크레인 줄에 걸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망가져 바보 된거지요.
최근에 큰형이 힘든 경비하지 말고 “쎄시봉”이 인기인데 기타를 가르쳐 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인연이 아닌 것 같고 손가락도 바보 되었기에 오로지 도 닦는 것만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너희는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을 도모하라. 묵은 습성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그 몸이 따라서 망하느니라. [道典2:47]
긴 글을 읽어주심에 큰 복 받으시길 바랍니다.
글 빠진 부분과 사진 추가 했습니다. 집에서는 마누라 눈치보며 직장에서는 윗사람 눈치보며 글 쓰다보니 맘대로 안 되네요. 하지만 쓰려는 맘을 먹으면 그런데로 잘 됩니다. 연도는 워낙 오래되어서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ㅎㅎ 좋은 주말 되세요~^^
원래가 없는집 맏이가 힘들고 동생챙기는 마음도 따뜻하죠....
나이들어 갈수록 그 형님을 보는 마음은, 마치 노부모 보는듯 하죠~~ ^^
나이들어 갈수록 그 형님을 보는 마음은, 마치 노부모 보는듯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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