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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인 신정기-4

고부인 신정기-4

경전 및 도서  화송 화송님의 글모음 쪽지 2015-06-03 22:07 8,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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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第四章)

제삼교단시대(第三敎團時代)

1. 천후(天后) 조종(祖宗)골 본소(本所) 건물(建物)을 강응칠(姜應七)에게 넘겨 주시고, 모든 일을 정리(整理)하신뒤에 신미년(辛未年) 동짓(冬至)달 열나흗날 고찬홍(高贊弘), 이근목(李根睦), 강재숙(姜在淑), 전준엽(田畯燁), 박종오(朴鍾五) 등 십여인(十餘人)을 데리고, 천사(天師)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용화동(龍華洞)으로 이사(移徙)하사 보름날 새벽에 동화교(東華敎) 개교(改敎) 삼주년(三周年) 기념치성(記念致誠)에 참배(參拜)하시고, 참배(參拜) 끝에 종도(從徒)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법(法)은 천사(天師)께서 내셨으되, 용사(用事)는 내가 하노라' 하시고, '평천하(平天下) 운수(運數)요, 평천하(平天下) 도수(度數)로다. 전국말세(戰國末世) 진시황(秦始皇)은 평천하(平天下) 한 연후(然後)에, 만리장성(萬里長城) 쌓노라고 인석(人石)을 구사(驅使)하여 학정(虐政)이 자심(滋甚)함에, 상극사배(相剋司配) 선천운수(先天運數) 갈수록 극렬(極烈)했네. 천사(天師)님의 신성법력(神聖法力) 제생의세(濟生醫世) 하신 후(後)는, 후천해원(後天解寃) 순천도(順天度)로 상생도술(相生道術) 무궁(無窮)하리라'고 놀하신 뒤에, 따라온 종도(從徒)들과 동화교(東華敎) 간부(幹部)들에게 명(命)하여 서로 악수(握手)하고 즐기게 하시니라.

2. 치성(致誠) 끝에 조종(祖宗)골 교단(敎團)과 동화교(東華敎)를 합(合)하여 통합교단(統合敎團)을 조직(組織)하실 때에, 천후(天后) 주재하(主宰下)에 대교령(大敎領) 한 사람과 부교령(副敎領) 두 사람을 두어 교단(敎團)을 운영(運營)케 하고, 대보(大保) 한 사람과 아보(亞保)와 찬보(贊保) 각(各) 두 사람씩으로 구성(構成)된 보화원(保華院)을 두어 교무(敎務)를 협찬(協贊)케 하니, 대교령(大敎領)은 홍원표(洪元杓), 부교령(副敎領)은 이성영(李成英) 전준엽(田畯燁), 대보(大保)는 이상호(李祥昊), 아보(亞保)는 임경호(林敬鎬) 고찬홍(高贊弘), 찬보(贊保)는 김환(金丸) 이근목(李根睦)이 각기 선임(選任) 되니라. 이렇게 두 교파(敎派)의 통합교단(統合敎團)인 동화교(東華敎)가 천후(天后) 주재하(主宰下)에 새로 발족(發足)하게 되니,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께 부탁(付託)하신 셋째 살림이 이로써 열리게 되니라. 천후(天后) 모든 일을 정돈(整頓)하신 뒤에 '대흥리(大興里)에 가서 두어달 동안 일을 보고 돌아오리라' 하시고, 대흥리(大興里)로 가시어 미리 사두었던 집에서 두류(逗留) 하시니라.

3. 무진(戊辰) 기사년(己巳年) 간(間)에 각 지방(地方)으로부터 대흥리(大興里)와 그 근방(近方) 각 마을로 이사(移徙)하여 온 보천교도(普天敎徒) 수천(數千) 호(戶)가 모두 직업(職業)이 없어서 생계(生計)가 곤란(困難)하여 짐에, 차경석(車京石)이 벽곡약방문(抗穀藥方文)을 공포(公布)하여 벽곡(抗穀)을 장려(奬勵)하다가, 약독(藥毒)과 기아(飢餓)로 인(因)하여 죽은 자가 많고 남은 자들도 모두 굶주림에 헤메더니, 천후(天后) 대흥리(大興里)에 우거(寓居) 하심에 굶주린 교도(敎徒)들이 매일(每日) 수십인(數十人)씩 와 뵈옵고 호소(呼訴)하거늘, 천후(天后) 낱낱이 후(厚)하게 대접(待接)하여 그들을 구제(救濟)하시니라.

4. 섣달 그믐날 보천교도(普天敎徒) 사오인(四五人)이 객실(客室)에 와서 놀다가 서로 한탄(恨歎)하되 '해마다 이날 저녁에 천사(天師)의 묘각(墓閣)에 촛(燭)불을 켰었는데, 오늘은 촛불을 켜지 못하리라' 하거늘 이용기(李用己)가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묘직원(墓直員)이 파면(罷免)되고 아직 새 직원(直員)이 임명(任命)되지 아니하여 책임자(責任者)가 없다 하는지라. 이날 밤에 용기(用己)가 김수열(金壽烈)을 데리고 큰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묘각(墓閣)에 가서 촛불을 켜놓고 돌아오니, 천후(天后) 가라사대 '누구의 해골(骸骨)인지도 모르거늘 헛되이 수고(受苦)하였도다' 하시니, 대개(大槪) 차경석(車京石)이 조철제(趙哲濟)와의 소송관계(訴訟關係)로 극비밀리(極秘密裡)에 천사(天師)의 천골(天骨)을 숨겨놓고, 다른 해골(骸骨)을 관속에 바꾸어 넣었음을 알으심이더라.

5. 임신년(壬申年) 정월(正月) 보름께 보천교도(普天敎徒) 십여인(十餘人)이 와 뵈옵고 굶주림을 호소(呼訴)하거늘, 천후(天后) 이용기(李用己)와 박종오(朴鍾五)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천교도(普天敎徒)가 저렇듯 굶주리니,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여 보라' 하시거늘, 용기(用己)가 익산군(益山郡) 왕궁면(王宮面) 오룡동(五龍洞) 김도봉(金道奉)과 완주군(完州郡) 삼례면(參禮面) 해전리(海田里) 정덕근(鄭德根)에게 가서 의논(議論)하여, 두 사람의 자금(資金)을 합(合)하여 대흥리(大興里)에 싸전을 벌려서 굶주린 교도(敎徒)들을 접제(接濟)하는 양도(糧道)를 잇게 하더니, 삼월(三月)까지 두 사람의 싸전 자금(資金)이 전부(全部) 소비(消費)되니라.

6. 스무여드렛날 익산군(益山郡) 팔봉면(八峯面) 남산리(南山里) 이보일(李寶日)의 모친(母親)이 와 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소녀(小女)의 자부(子婦)가 우연(偶然)히 병(病)들어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고, 사경(死境)에 이르렀나이다.' 천후(天后) 가라사대 '네가 급(急)히 돌아가 치성(致誠)을 올리면서, [소녀(小女)가 청춘과부(靑春寡婦)로 독자(獨子) 내외(內外)만 두었사오니 이를 불쌍히 여기사 자부(子婦)의 병(病)을 낫게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일심(一心)으로 심고(心告)한 뒤에, 시천주(侍天呪) 일곱 번과 진액주(津液呪) 일곱 번을 읽으라 하시거늘, 보일(寶日)의 모친(母親)이 돌아가서 그대로 행(行)함에 자부(子婦)의 병(病)이 곧 나으니라.

7. 익산군(益山郡) 춘포면(春浦面) 장연리(長淵里) 김형대(金亨大)는 수십년(數十年) 동안 벌어오던 전답(田畓) 이십여(二十餘) 두락(斗落)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십년(十年) 동안을 곤궁(困窮)하게 지내더니, 이월(二月) 열여드렛날 천후(天后)께 와서 뵈오니 천후(天后) 가라사대 '고생(苦生)이 다 갔으니 지난 고생(苦生)을 큰 복(福)으로 알라' 하시며 급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催促) 하시거늘, 형대(亨大)가 집에오니 뜻밖에 군청(郡廳)에서 가마니 수천 개(個) 값을 선금(先金)으로 주면서 가마니를 사 달라고 부탁(付託) 하는지라. 이로부터 득리(得利)하여 생계(生計)가 열리게 되고, 또 뜻밖에 십여 두락의 소작답(小作沓)을 얻어 농사짓게 되니 점차(漸次) 생활(生活)이 요족(饒足)하여 지니라.

8. 대교령(大敎領) 홍원표(洪元杓)는 사재(私財)를 내어 정월(正月) 스무날께부터 용화동(龍華洞)에 천후(天后) 거주(居住)하실 집을 짓기 시작(始作)하여, 삼월(三月) 보름께 낙성(落成)하게 되니라.

9. 삼월(三月) 보름께 천후(天后) 채유중(蔡有中)을 용화동(龍華洞)에 보내어 '정읍(井邑) 일을 다보았으니 스무날 돌아오겠노라'고 기별(寄別) 하시거늘, 열아흐렛날 이성영(李成英)이 천후(天后)를 모시러 대흥리(大興里)에 가니, 이날 저녁에 천후(天后) 이성영(李成英)으로 하여금 차경석(車京石)의 집을 향(向)하여 신정(神政)을 행(行)하실새, 성영(成英)에게 물어 가라사대 '경석(京石)이 이제 천사(天師)를 배반(背叛)하고 수백만(數百萬) 교도(敎徒)의 전정(前程)을 그르치니, 어떻게 조처(措處)함이 옳겠느냐?' 성영(成英)이 대(對)하야 가로대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身)이라 하였사오니, 죽어야 마땅할까 하나이다.' 또 가라사대 '수백만(數百萬) 교도(敎徒)의 피를 거두어 지어놓은 것이 마침내 허사(虛事)로 돌아가니, 어떻게 조처(措處)함이 가(可)하겠느냐?' 하시니, 성영(成英)이 대(對)하여 가로대 '허사(虛事)로 돌아갈진대 뜯어버림이 마땅하오리다.' 천후(天后) 세 번씩 물어서 다짐을 받으신 뒤에 가라사대 '선(善)도 오세(五歲)요, 악(惡)도 오세(五歲)니라' 하시며 발로서 성영(成英)의 다리를 차시니 성영(成英)이 엎드러지니라. 이 뒤 오년(五年)만인 병자년(丙子年)에 차경석(車京石)이 죽고, 대건물(大建物)도 모두 뜯겨 버리니라.

10. 스무날 천후(天后) 종도(從徒)들을 데리고 이성영(李成英)을 따라 대흥리(大興里)로부터 용화동(龍華洞)으로 오사, 신축(新築)한 집에 거주(居住) 하시면서 동화교(東華敎)의 교무(敎務)를 주재(主宰) 하시니라.

11. 스무하룻날 이성영(李成英)을 불러들이사 수일(數日)동안 신정(神政)을 행(行)하시니, 성영(成英)이 심(甚)히 피곤(疲困)하여 신정(神政)을 마치시기 전(前) 스무나흗날 새벽에 천후(天后) 잠간(暫間) 주무시는 틈을 타, 고(告)하지 아니하고 전주(全州)로 가버린지라. 천후(天后) 잠을 깨사 성영(成英)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물으시거늘, 이에 대답하여 가로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더니 크게걱정하시며 가라사대 '이미 올개미에 올켰으니 제아무리 달아나려 하여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성영(成英)은 물오리라. 사면팔방(四面八方)으로 날아다녀도 앉는 곳마다 저의 물(水)이니라' 하시니라.

12. 이해 사월(四月)부터 심(甚)히 가물어서 이종(移種)을 못하여 인심(人心)이 소란(騷亂)하더니, 오월(五月) 스무날에 이상호(李祥昊)의 딸 정남(井南)이 나이 열두살이라. 부모(父母)의 심부름으로 와 뵈옵거늘 천후(天后) 불러들여 무릎 위에 붙들어 앉히시고 '어미없이 자라나니 불쌍하다' 하시고 크게 울으시며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지라. 종도(從徒)들이 진정(鎭定) 하시기를 애걸(哀乞)하되 듣지 아니하시고 계속(繼續)하여 두어 시간(時間)을 물둁시다가, 문득 종도(從徒)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이만하면 넉넉하겠느냐?' 하시니, 종도(從徒)들은 심(甚)히 민망(憫?)하다가 물으신 말씀의 뜻도 알지못하고 다만 천후(天后)의 울음을 그치시게 하기 위하여 '넉넉합니다' 라고 대답(對答)하고, 또 '풍족(豊足)하냐?'고 물으심에 '풍족(豊足)합니다'라고 대답(對答)할 뿐이거늘 이에 울음을 그치시더니, 반(半) 시간(時間)쯤 지남에 문득 검은 구름이 일어나서 삽시간(散時間)에 하늘을 덮고 소낙비가 시작하여 두어 시간만에 그치니, 사방(四方)에서 이 비로 인(因)하여 이종(移種)을 하였으나 우량(雨量)이 좀 부족(不足)하여 천수답(天水沓)은 심지 못한 곳이 많으니라.

13. 유월(六月)에 대교령(大敎領) 홍원표(洪元杓)가 사임(辭任)하거늘, 부교령(副敎領) 이성영(李成英)으로 하여금 대교령(大敎領)의 직권(職權)을 대행(代行)케 하시니라.

14. 칠월(七月) 초닷새날 저녁에 천후(天后) 박종오(朴鍾五)를 부르사 집을 잘 보라고 부탁(付託)하시고, 이용기(李用己)를 데리시고 계룡봉(鷄龍峯) 밑에 이르사 가라사대 '계룡산(鷄龍山)은 여기려니와 용소(龍沼)가 없도다' 하시거늘, 용기(用己)가 대(對)하여 가로대 '용소(龍沼)는 남(南)쪽 모퉁이에 있나이다' 하니, 천후(天后) 담배를 피워 물으시고 사방(四方)을 살펴보시며 산(山) 이름을 물으시거늘, 용기(用己)가 대금산(大金山), 소금산(小金山), 용안대(龍眼台), 자천대(紫天台),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台), 수양산(修養山), 제비산(帝妃山), 구성산(丘聖山)을 낱낱이 아뢰니, 천후(天后) 수양산(修養山)을 바라보시며 가라사대 '구성(丘聖) 속에 수양산(修養山)이 결실(結實) 하였도다. 후천(後天) 오만년(五萬年) 운수(運數)의 본원지(本源地)가 이곳이라. 속설(俗說)에 수양산(修養山) 그늘이 강동(江東) 팔십리(八十里)라는 말이 이곳을 두고 나온 말이니, 잘 기억(記憶)하여 두라' 하시니라.

15. 이성영(李成英)이 사월(四月)부터 조학구(趙鶴九), 박붕식(朴鵬植), 정태환(鄭台煥)과 여교인(女敎人) 김정렬(金貞烈)을 데리고, 전주(全州) 완산동(完山洞) 전(前) 보천교당(普天敎堂)에 머무르며 포교운동(布敎運動)을 일으키다가, 팔월(八月) 초열흘게 조병관(趙秉觀)의 급사(急死)로 인(因)하여 모든 경영(經營)이 실패(失敗)됨에 운동(運動)을 중지(中止)하고 김정렬(金貞烈)을 데리고 돌아오니, 천후(天后) 담뱃대로 정렬(貞烈)을 때리시며 '어린 것을 데리고 가서 그런 흉(凶)한 일을 당(當)하고 오니 무슨 꼴이냐?' 하시며 크게 꾸짖으시면서, 성영(成英)에게 지난 삼월(三月)에 신정(神政)을 끝내지 않고 달아났음을 꾸짖어 가라사대 '큰 재앙(災殃)이 네 몸에 미치지 않니하였음이 다행(多幸)이니라' 하시고, 인(因)하여 성영(成英)을 대(對)하사 사흘동안 신정(神政)을 행(行)하신 뒤에 물어 가라사대 '이제는 진심(眞心)으로 받겠느냐?' 성영(成英)이 대(對)하여 가로대 '일심(一心)으로 받들겠나이다' 하니라.

16. 스무날 정태환(鄭台煥)이 성영(成英)의 안내(案內)로 와서 뵈오니, 천후(天后) 태환(台煥)에게 일러 가라사대 '거짓말을 잘하는도다.' 태환(台煥)이 가로대 '소자(小子)는 출생(出生) 이후(以後) 아직까지는 거짓말을 하여본 일이 없나이다.' 천후(天后) 가라사대 '네가 군산(群山)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여관(旅館)에서 밥값도 갚지 아니하고, 보따리를 들고 밤중에 도망(逃亡)한 일이 있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대개(大蓋) 태환(台煥)은 수년전(數年前)에 군산(群山) 기미취인장(期米取引場)에서 옥관(玉關) 노릇을 하다가 실패(失敗)하고, 밤중에 도망(逃亡)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말씀하심이라. 태환(台煥)이 크게 울며 사죄(謝罪)하고,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맹서(盟誓)하고 나가니라.

17. 이날 오후(午後)에 천후(天后)께서 이성영(李成英), 박종우(朴鍾雨), 김재윤(金在允)을 데리고 용화동(龍華洞) 뒤 정자(亭子)나무 북편(北便) 동산(洞山) 밑 소로(小路) 가에 가시어, 성영(成英)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곳에 집을 짓고 살라. 이는 물을 먼저 쓰려 하노니' 하시니라.

18. 시월(十月) 보름날 김제군(金堤郡) 백구면(白鷗面) 가전리(佳田里) 오수엽(吳守燁)의 세 살된 어린 딸이 급경풍(急驚風)으로 죽게 되었거늘, 수엽(守燁)이 와서 뵈옵고 사실(事實)을 아뢴대 천후(天后) 가라사대 '이길로 곧 돌아가다가 길에서 이상(異常)한 일을 보거든 명심(銘心)하라.' 수엽(守燁)이 바삐 돌아오더니 문득 공중(空中)으로부터 무엇이 모자(帽子) 위에 떨어지거늘, 자세(仔細)히 보니 노루 쓸개라. 가지고 돌아와서 갈어 먹이니, 어린 아해(兒孩)가 곧 나으니라.

19. 계유년(癸酉年) 삼월(三月) 스무여드렛날 천후(天后) 이상호(李祥昊) 내외(內外)와 이용기(李用己) 내외(內外)를 부르사 영정(影幀) 앞에 청수(淸水)를 올리고, 또 교적(敎籍)을 올리고 시천주(侍天呪)를 읽히신 뒤에 성영(成英)이 있는 곳을 물으시니 상호(祥昊)가 전주(全州)에 있다고 대답(對答)하거늘, 가라사대 '성영(成英)을 곧 데려오겠느냐?' 상호(祥昊)가 미처 대답(對答)하기 전에 이용기(李用己)가 대(對)하여 가로대 '곧 데려 오겠나이다' 라고 아뢰었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물으시거늘 용기(用己)가 대(對)하여 가로대 '이미 데려왔나이다' 하니, 천후(天后) 교적(敎籍)을 가져오라 하사 용기(用己)를 주시며 받아서 상호(祥昊)에게 주고, 상호(祥昊)는 다시 용기(用己)에게 주어 서너번 돌리라 하신 뒤에, 술상(床)을 가져오라 하사 술 석 잔(盞)을 부어 상호(祥昊)와 용기(用己)에게 각기 한 잔(盞)씩 주시고, 한 잔(盞)은 성영(成英)에게 준다 하시며 무명지(無名指)를 넣어 두르시면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이라 하시니라.

20. 스무아흐렛날 박종오(朴鍾五), 이용기(李用己), 김성환(金成煥) 세 사람을 천후(天后)께서 보시더니 문득 길 치워라 하시거늘, 모두 살펴보니 별복(鼈腹)으로 고통(苦痛)하는 용기(用己)의 셋째 딸이 창(窓)밖에 서 있거늘, 창(窓)을 열어주니 용기(用己)의 딸이 들어와 방을 닦는지라. 천후(天后) 보시고 가라사대 '이 아해(兒孩)의 뱃속에 아해(兒孩)가 들었도다' 하시며, 손으로 배를 만져 주시니 이 뒤로 별복(鼈腹)이 나으니라.

21. 오월(五月) 보름날 주원일(朱元一)의 처(妻)가 신입(新入) 여교인(女敎人)을 데리고 와서 뵈오니, 천후(天后) 신입교인(新入敎人)을 보시고 크게 놀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며 '지랄말고 돌아가라' 하시니, 그 사람은 간질(癎疾) 환자(患者)로서 크게 원한(怨恨)을 품고 돌아갔더니, 이 뒤에 간질(癎疾)이 나아버림에 비로소 깨닫고 폐백(幣帛)을 가지고 와 뵈이거늘, 천후(天后) 사랑하시며 '이제는 건강(健康)하냐?' 하시니라.

22. 화천절(化天節) 치성(致誠) 끝에 교도(敎徒) 수십인(數十人)을 벌려 앉히시고, 진액주(津液呪)를 한 시간 동안 읽히신 뒤에 종오(鍾五)로 하여금 '구천지상극(舊天地相剋) 대원대한(大寃大恨), 신천지상생(新天地相生) 대자대비(大慈大悲)'라 쓰이시고 교도(敎徒)들로 하여금 뒤를 따르게 하시고, 왼 편(便)으로 열다섯 번을 돌으시며 '구천지상극(舊天地相剋) 대원대한(大寃大恨)'이라 읽히시고, 오른 편(便)으로 열다섯 번을 돌으시며 '신천지상생(新天地相生) 대자대비(大慈大悲)'라 읽히신 뒤에, '서신사명(西神司命) 수부사명(首婦司命)' 이라고 열다섯 번을 읽히시니라.

23. 이날 석양(夕陽)에 천후(天后) 영정(影幀) 앞에 배례(拜禮)하시고 앉으사, 목침(木枕)으로 마룻장을 치시며 가라사대 '모든 일을 둘둘 뭉쳐서 저 어린 것에게 짐지워 내세우시면서, 풀어주지 아니하시면 장차(將次)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집이 있나이까, 처자(妻子)가 있나이까?'라 하시니라.

24. 칠월(七月)에 고영(高英)이 옥구군(沃溝郡) 교도(敎徒)들과 협의(協議)하여 오성산(五聖山)에 수양소(修養所)를 지으려 할 새, 문명수(文明洙)가 그 가부(可否)를 여쭈어보기 위(爲)하여 와서 뵈오니, 천후(天后) 건축(建築)을 재촉(催促)하시며 동지(冬至) 후(後)에 이사(移徙)할 뜻을 표시(表示) 하시거늘, 명수(明洙)가 돌아가서 교도(敎徒)들에게 천후(天后)의 뜻을 전(傳)하여 공사(工事)를 급속(急速)히 진행(進行)케 하니라.

25. 칠석(七夕)날 윗 방(房)에 외국신명(外國神明)이라는 위패(位牌)를 써 붙이시고, 큰 너러기에 밥을 많이 담아 그 앞에 놓고 수저를 많이 꽂게 하시며 찬수(饌需)를 많이 진설(陣設)하신 뒤에, 종도(從徒)들로 하여금 개벽주(開闢呪)를 읽히시며, 위패(位牌)를 향(向)하여 가라사대 '배불리 먹고 돌아가라' 하시니라.

26. 동지지성(冬至至誠) 후(後)에 천후(天后) 오성산(五聖山)으로 이사(移徙)하실 때, 부교령(副敎領) 이성영(李成英)을 불러 들이사 영정(影幀)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시고, 영정개사(影幀改寫)와 저술(著述)과 도장건축(道場建築) 등 뒷일에 대(對)하여 낱낱이 세 번씩 다짐을 받으신 뒤에, 영정(影幀)을 잘 받들라고 부탁(付託)하시며 용화동(龍華洞)을 떠나 오성산(五聖山) 동화교(東華敎) 수양소(修養所)로 이사(移徙) 하시니, 먼저 오성산(五聖山)에 가실 때에 거미 비유(譬喩)를 말씀하신 일이 이에 응험(應驗)되니라. 이로부터 성영(成英)이 영정(影幀)을 받들게 되니라.
 



제오장(第五章)

은거(隱居)와 선화(仙化)

1. 계유년(癸酉年) 동짓(冬至)달 초엿새날 천후(天后) 용화동(龍華洞)으로부터 오성산(五聖山) 수양소(修養所)로 옮기어 오사 은거(隱居) 휴양(休養) 하시니, 파란곡절(波瀾曲折)이 많았던 세 살림의 경로(經路)가 추억(追憶)에 남을 뿐이요, 담박(淡泊)한 생애(生涯)는 고요한 세월(歲月)에 따라 잔생(殘生)을 영위(營爲)하실 뿐이니, 이로부터 고영(高英)과 박종오(朴鍾五)가 시봉(侍奉)하여 안팎 일을 보살피고, 익산(益山), 완주(完州), 임피(臨陂), 옥구(沃溝) 등지(等地) 교도(敎徒)들이 종종 와서 문후(問候)할 뿐이더라.

2. 갑술년(甲戌年) 정월(正月) 초사흗날, 완주군(完州郡) 조촌면(助村面) 화전리(花田里) 김석배(金石培)의 모친(母親)과, 익산군(益山郡) 북일면(北一面) 영등리(永登里) 김성녀(金姓女) 두 사람이 와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익산군(益山郡) 왕궁면(王宮面) 광암리(光岩里) 송병우(宋炳雨)의 처(妻)가 혈적병(血積病)으로 수십년(數十年) 동안 고통(苦痛)하여 사경(死境)에 이르렀사오니 고쳐 주시옵소서' 하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너희 두 사람이 가서 치료하여 보라. 너희들의 성심(誠心)을 이번에 시험(試驗) 하리라' 하시거늘, 두 사람이 환자(患者)의 집에 가서 치성(致誠)을 올리게 하고 일심(一心)으로 기도(祈禱)하니, 사흘만에 그 병(病)이 완치(完治)되니라.

3. 열사흗날 박종오(朴鍾五), 김수열(金壽烈), 채유중(蔡有中)을 용화동(龍華洞)에 보내어 이성영(李成英)에게 전달하여 가라사대 '내가 오성산(五聖山)에 온 뒤로 몸이 편(便)치 못한지라. 생각하여 보니 영정(影幀)을 모셔오지 아니한 까닭이라. 어희들은 반드시 영정(影幀)을 개사(改寫)하여 받들지니, 이 영정(影幀)은 내가 다시 받들겠노라' 하시고, 영정(影幀)을 모셔가시니라.

4. 보름날 익산군(益山郡) 북일면(北一面) 영등리(永登里) 김성녀(金姓女)가 와 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삼례(參禮) 이삼봉(李三奉)의 처(妻)가 중풍(中風)과 주마담(走馬痰)으로 수년(數年)동안 고통(苦痛)하오니 고쳐주시옵소서' 하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가장 중병(重病)이로다. 네가 가서 성심(誠心)으로 치료(治療)하라' 하시니, 김성녀(金姓女)가 환자(患者)의 집에가서 치성(致誠)을 올리고 일심(一心)으로 기도(祈禱)하니, 그 병(病)이 곧 나으니라.

5. 삼월(三月) 초이튿날 완주군(完州郡) 조촌면(助村面) 화전리(花田里) 여교도(女敎徒) 박경신(朴敬信)과 김석배(金石培)의 모친(母親) 두 사람이 와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소녀(小女)들의 마을에 최금석(崔金石)이란 자(者)가 우연(偶然)히 이름모르는 급병(急病)에 걸려서 사경(死境)에 이르렀사오니 고쳐 주시옵소서' 하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그 사람의 가족(家族)에게 포교(布敎)하라' 하시거늘, 두 사람이 돌아가서 환자(患者)의 처(妻)에게 포교(布敎)를 하며 일심(一心)으로 시천주(侍天呪)를 읽으면서 기도(祈禱)하니, 그 병(病)이 곧 나으니라.

6. 보름께 아산리(阿山里) 여교도(女敎徒) 김기화(金基華)가 와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소녀(小女)의 마을에 김기녀(金奇女)라는 여자(女子)가 광사병(狂邪病)으로 폐인(廢人)이 되었사오니 고쳐 주시옵소서.' 천후(天后) 청수기(淸水器) 뚜껑을 쳐서 울리시며 가라사대 '이제 나았으니 돌아가 보라' 하시거늘, 기화(基華)가 돌아오니 과연(果然) 그 병(病)이 완치(完治)되니라.

7. 사월(四月) 초닷새날 이상호(李祥昊)가 조학구(趙鶴九)를 보내서 오성산(五聖山)에 가 천후(天后)를 뵈옵고 영정개사(影幀改寫)할 일을 아뢰인대, 천후(天后) 영정(影幀) 초본(抄本)을 주시며 잘 그리라고 부탁(付託) 하시니라.

8. 열아흐렛날 익산군(益山郡) 춘포면(春浦面) 장연리(長淵里) 김형대(金亨大) 내외와 김봉우(金奉佑) 등 세 사람이 와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저의 마을 양상규(梁常奎)의 둘째 아들 석봉(石奉)이 우연(偶然)히 급병(急病)에 걸려서 사경(死境)에 이르렀사오니 고쳐 주시옵소서' 하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너희들 세 사람이 독 돌아가서 마음을 합(合)하여 연수법(延壽法)을 사용하라.' 세 사람이 돌아와서 환자(患者)의 집에 가니 상규(常奎)의 처(妻)가 아해를 안고 울거늘, 이에 청수(淸水) 한 동이를 방(房) 한가운데 올리고 시천주(侍天呪)와 칠성경(七星經)을 일곱 번씩 읽은 위에, 세 사람이 각기(各己) 청수(淸水) 한 숫갈씩 더서 환자(患者)에게 먹이면서 칠성경(七星經)을 세 시간(時間) 동안 읽었더니, 그 병(病)이 완치(完治)되니라.

9. 거년(去年) 가을에 수양소(修養所)를 건축(建築)할 때에 경비(經費)가 부족(不足)하므로 이진묵(李眞默)이 자기 집을 팔아서 그 돈으로 준공(竣工)한 뒤에, 진묵(眞默)이 거처(居處)할 곳이 없어 수양소(修養所) 협실(夾室)에 살더니, 천후(天后) 여러 번 핍박(逼迫)하여 붸아내실 새 진묵(眞默)이 할 일없어 옥구(沃溝) 서면(西面) 지방(地方)으로 유리(遊離)하다가, 두어 달이 못되어 뜻밖에 돈벌이가 생겨 기왕(旣往)보다 풍족(豊足)히 지내게 되거늘, 천후(天后) 들으시고 가라사대 '박절(迫切)하다고 그대로 두었으면 진묵(眞默)은 평생(平生) 곤궁(困窮)을 면(免)하지 못하겠으므로 내가 녹(祿)줄을 붙여서 내어보냈노라' 하시니라.

10. 구월(九月) 초이렛날 친자종도(親炙從徒) 김경학(金京學)과 김영학(金永學)이 와 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저희들이 모악산(母岳山) 물왕암(水王庵)에서 수련(修鍊)을 행(行)하던 중(中)에, 천사(天師)의 성령(聖靈)이 나타나사 수십년(數十年) 동안 천후(天后)님과 막혀지낸 것을 꾸짖으시고, [이길로 가서 너의 천후(天后)를 모셔다가 모든 지난 일을 터파(攄破)하고, 이전(以前) 정의(情誼)를 다시 계속(繼續)하지 아니하면 화(禍)가 있으리라]고 정녕(??)히 계시(啓示)하시므로 저의 두 사람이 일동(一同)을 대표(代表)하여 왔사오니, 천후(天后)께서는 저희들의 이전(以前) 과실(過失)을 깊이 용서(容恕)하시고, 함께 가사 앞으로 사흘동안 수련법석(修鍊法席)을 주재(主宰)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추회(追悔)의 눈물이 비오듯 하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지난 일은 한갖 꿈과같을 뿐이요, 칠십노인(七十老人)이 멀리 와서 이렇듯 간곡(懇曲)히 말하니, 내가 비록 건강(健康)이 허락(許諾)치 못할지라도 멀리할 수 없노라' 하시고 두 사람을 따라 물왕암(水王庵)에 가시니, 곧 박공우(朴公又)의 주창(主唱)에 따라서 김경학(金京學), 김영학(金永學), 이중성(李重盛) 내외(內外), 이성영(李成英), 김수응(金壽應) 등이 모여서 진법(眞法)을 수련(修鍊)하는 법석(法席)이라. 천후(天后)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흘동안 머무르시다가, 법석(法席)이 파(罷)함에 열하룻날 금산사(金山寺)를 들러서 용화동(龍華洞)에 이르사 이틀동안 머무르시면서, 개사(改寫)한 영정(影幀)이 많이 틀렸음을 지적(指摘)하사 다시 개사(改寫)하라고 명(命)하시고, 열사흗날 용화동(龍華洞)을 떠나 돌아가시니라.

11. 을해년(乙亥年) 이월(二月) 초사흗날 김제군(金堤郡) 용지면(龍池面) 예림리(禮林里) 황경수(黃京洙)가 천연두(天然痘)를 앓아서 위독(危篤)하더니, 백구면(白鷗面) 가전리(佳田里) 김도성(金道成)과 조승기(趙承基)의 모친(母親)이 가보고, 곧 천후(天后)께 심고(心告)한 뒤에 시천주(侍天呪)를 한 시간(時間) 쯤 읽으니 그 병(病)이 곧 나으니라.

12. 칠월(七月) 보름날 완주군(完州郡) 삼례(參禮) 김성녀(金姓女)가 와뵈옵고 여쭈어 가로대 '옥구군(沃溝郡) 대야면(大野面) 고청리(高靑里) 김완산(金完山)이 뇌접병(病)으로 십여년(十餘年)을 고통(苦痛)하다가, 이제 사경(死境)에 이르렀사오니 고쳐주시옵소서.' 하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네가 돌아가서 환자(患者)의 가족들로 하여금 치성(致誠)을 올리고 시천주를 읽게 하라.' 김성녀(金姓女)가 환자(患者)의 집에 가서 명(命)하신 대로 하니 그 병(病)이 곧 나으니라.

13. 구월(九月) 초사흗날 김제군(金堤郡) 백구면(白鷗面) 가전리(佳田里) 오수엽(吳守燁)의 처(妻)가 와서 여쭈어 가로대 '저의 마을에 사는 서해식(徐海植)이라는 사람이 이름 모르는 급병(急病)에 걸려서 사경(死境)에 있사오니 고쳐주시옵소서.' 천후(天后) 가라사대 '네가 빨리 가서 치료(治療)하여주라.' 하시는지라. 수엽(守燁)의 처(妻)가 환자(患者)에게 가서 치성(致誠)을 올리고 기도(祈禱)하니 곧 나으니라.

14. 열여드렛날 오수엽(吳守燁)이 군산(群山)가는 길에 와서 뵈옵거늘 천후(天后) 가라사대 '너는 어디를 가려 하느냐?' 대(對)하여 가로대 '군산(群山)에 가려하나이다.' 천후(天后) 수엽(守燁)의 등을 두드리시며 가라사대 '옥(玉)돌이 진토(塵土)에 묻혔음을 세상(世上)에서 누가 알리오,어서 다녀오라.' 하시더니 수엽(守燁)이 군산(群山)을 다녀서 집에 돌아온 뒤로 문득 산상가(山相家)로(지사) 천명하게 되니라.

15. 하루 밭에는 참세 한 마리가 밤을타 방에 들어와서 천후(天后)의 치마 밑에서 자고 나가니라.

16. 하루는 퉁벌이 침실(寢室) 정문(正門) 위에 집을 지었다가 마침 큰 바람에 떨어졌거늘 천후(天后) 그 벌집을 주워서 본처(本處)에 매어 두셨더니, 이 뒤로부터 벌이 크게 번식(繁殖)하여 벌집이 큰 박과 같이되어 천후(天后) 선화(仙化)하실 때까지 달려 있었느니라.

17. 천후(天后) 여행(旅行)하실 때에 어느 집에서든지 지어 올리는 음식(飮食)을 잘 잡수시면 그 뒤부터 그집 살림이 점점(漸漸) 흥왕(興旺)하여지고, 잡숫지 아니하시면 그 뒤로부터 그집 살림둁니 점점(漸漸) 쇠(衰)하여 지더라.

18. 종도(從徒)들이 처음으로 와서 뵈오면, 천후(天后)께서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몸에 붙어있는 척신(戚神)을 물리치시며, 혹(或) 몸에 병(病)이 있으면 그 병(病)을 낫게 하시며, 또 그 사람의 전정(前程)에 모든 장애(障碍)를 제(除)하여 주신 뒤에 비로소 따름을 허락(許諾) 하시니라.

19. 시월(十月) 초닷새날 저녁에 천후(天后) 목욕(沐浴)하시고 새 옷을 갈아입으신 뒤에 요(褥) 위에 누우사, 고영(高英)을 불러들여 머리맡에 앉히시고, 두어 시간(時間) 후(後)에 문득 가라사대 '잘 꾸리고 있으라' 하시거늘, 고영(高英)이 무슨 뜻임을 물으니 대답(對答)치 아니하시고 또 가라사대 '증산(甑山)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증산(甑山)도 오시리라' 하시더니, 조금 있다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 라고 세 번 거듭 말씀하신 뒤에 눈을 감으시고 선화(仙化)하시니 새벽 두시(時)라. 이때에 모시고 있던 자(者)는 고영(高英)과 박종오(朴鍾五)와 식모(食母) 이길수(李吉守)더라. 날이 밝음에 수의(壽衣)를 수습(收拾)하니, 이미 꺼내어 횃대에 걸어 놓으셨더라.

20. 각처(各處) 종도(從徒)들에게 부고(訃告)를 보내니, 고찬홍(高贊弘), 이진묵(李眞默), 전선필(田先必), 문명수(文明洙), 문기수(文基洙), 이중진(李重鎭), 김내언(金乃彦), 유일태(劉一太), 오수엽(吳守燁), 이재균(李在均), 조학구(趙鶴九) 등이 달려와서 치상(治喪)하여, 스무여드렛날 오성산(五聖山) 봉우재에 장사(葬事)하니라.
 
 









재판(再版) 편집후기(編輯後記)

본서(本書)를 천후신정기(天后神政記)라 명명(命名)하니라.

종사(宗師)께서 초유(初有)에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라 서명(書名)을 정(定)하고 송문섭(宋文燮)이 필경(筆耕)하니, 이 책은 오장(五章) 분류(分類)에 총(總) 백삼십이면(百三十二面)으로서 등사(騰寫) 출판(出版)했던 바이다.

이제 재판(再版)을 내면서 고구(考究)하건대, 두 가지를 보완(補完)해야 되겠음을 절감(切感)하게 되니, 첫째는 서명(書名)에 있어서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를 천후신정기(天后神政記)로 하고, 둘째는 유장무절(有章無節)로 인하여 독자(讀者)로 하여금 기억(記憶)한 대목(大目)을 분간(分揀)하여 찾아보기가 어려우므로 쉽게 하고자 절(節)을 붙이니, 이후(以後) 학인(學人)은 근송축독(謹頌祝讀) 하여 영세불망(永世不忘) 할지니라.

大巡 百十五年 二月 十八日

회상(回祥) 정영규(丁永奎)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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