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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은당실기-제1장 유소시대

화은당실기-제1장 유소시대

경전 및 도서  화송 화송님의 글모음 쪽지 2015-06-11 00:16 7,376
제1장 유소시대

1.선사는 강증산천사의 유일한 혈식으로서 단기 4237년(서기 1904년) 갑진 정월 십오일 자시에 현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서 탄생하셨으니, 이름은 순임이요 화은당은 그의 호이니라.

2.어머니 되시는 하동정씨께서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소리를 타고 많은 선관들이 내려오는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여오더니, 그 소리를 타고 많은 선관들이 내려오는 중에 한 사람의 선녀가 품에 안기어 춤을 추었다. 그 뒤로 임신한 정씨 성모는 산월이 되어 밤 열두시 자정에 해산을 하였으니 출생한 갓난이는 여식이라. 그의 할머니는 산모의 첫 국밥을 지으려 밖에 나가셨는데 많은 신명들이 기치창검을 들고 온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난데없는 지동소리가 울려오는지라. 혼겁을 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몇 시간을 지낸 뒤에야 첫 국밥을 지었다.

3.성부께서 화은당 위로 이남 이녀를 두신 바 있어, 그 용모가 비범하여 조부께서는 무한히 애중한 마음을 두셨으나 성부께서는 웬일인지 집에 들어오시면 아이들을 눈앞에 서지도 못하게 하시고, 그의 부친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들은 일곱 여덟 살이 되면 모두 죽을 것이니 사랑하지 마시옵소서" 하고 간하여 오시다가 사 남매는 정말 일곱 여덟 살이 되어서 모두 죽었다. 그때는 성부께서 전혀 가정을 돌보시지 못하신 채 천지공사를 주재하시고 계시던 때라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으며, 선사의 조부는 실성하여 객지에 유랑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정씨 성모는 또다시 출산을 하게 되셨으며 여식일 뿐 아니라 먼저 아이들도 단명하여 열살 안으로 죽었는데, 이번에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란 걱정과 함께 슬퍼하고 탄식하시며 어린아이를 거둘 생각도 없이 넋을 잃고 않았는데 오후에 성부께서 집에 돌아오시더니 "해산하였지?" 하고 물으시는지라. 그 물음을 받아 조모께서 "여식을 나았으나 산모는 정신을 잃고 누어있노라"고 대답하니, 성부께서 화를 내시며 방에 들어가시어 강보에 묻힌 갓난아이를 끌러 내놓으시니 하룻밤 반나절을 찬 방안에 아무렇게나 내어 던져두었으므로 파랗게 된 모습이 거의 절명할 지경이었다. 성부께서는 크게 슬퍼하시더니 앞집에 사는 안칠용을 불러 "너의 집에서는 기르는 잉태중인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고 태중에 든 새끼와 내장은 버리고 나머지 부분만 가져오라"고 명하신, 안칠용은 평소에 성실하게 순종하던 사람이라 즉시 그대로 잡아 올리니, 성사께서 갓난아이를 그 돼지 속에 싸두었다가 하룻밤이 지낸 뒤에 내놓으시니 갓난아이에게 서리던 푸른 기가 씻은 듯이 가시어졌는지라. 산모를 보시고 크게 책망을 하시면서, "이 아이라야 장차 나의 일을 이어 빛내게 될 것이니 잘 기르라"고 타이르시고 다시 집을 떠나시며, "내가 삼칠일에 집에 돌아와 보게 될 공사가 크니 그 동안 여러 일에 마음먹음과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고 동곡으로 떠나시니라.

4.그 뒤 삼칠일이 되는 하루 전날에 집에 오시어 안칠용을 시켜 “백미 서 말과 백지 세권을 사오라” 하시더니, 그날 밤 마당에 덕석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 놓으시고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내다보지 못하게 하시고 백미 서 말을 사방에 쥐어 던지면서 주송을 하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식구들이 밖에 나가 아무리 찾아보고도 쌀이라고는 한낱도 없었다. 삼칠일인 그날에 칠용으로 하여금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게 하시고 성부께서는 갓난아이를 무당 앞에 뉘여 놓고 백지와 부적과 글 쓴 종이를 갓난아이 사타구니에 붙이시고 담뱃대로 고저장단을 짚드시 하시면서, “자자가 나온다. 자지가 나온다”고 소리를 하신, 무당이 굿을 하다가 성부의 하시는 거동을 보고 미친 광인이 아니고는 여자아이한테서 자지가 나온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욕을 하면서 굿에는 정성을 드리지 않았는데 성부께서는 무당의 속마음을 아시고 “죽일 년이라 어이 가식으로 굿을 하는고”라고 책망하시며 재차 꾸짖어 말씀하시고 “벼락을 맞아 죽어 쌀 년이라”하시니 별안간 뇌성이 대발하고 무당은 그 자리에 자물을 쓰게 됨에 다시 호통하시니, 무당이 정신이 돌아와 일어나서 절하고 “알지 못하여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하겠사오니 사려 주시옵소서” 하고 용서를 빈 다음 성심으로 굿을 계속하여 사흘 만에 마치니 성부께서는 갓난아이 사타구니에 붙었던 것을 떼어 지니시고 “회문산을 거쳐 모악산에 가겠노라” 하시며 집을 떠나시니라.

5.성부께서는 선사 탄생 전부터 시작하신 천지공사를 주재하시느라고 고부 본가에는 한해에 두서너 차례밖엔 내왕이 없으시더니 기유년 오월에 집에 들어오시어 여식을 업기도 하시고 손을 잡고 시루봉에 올라가셔서, 각 선령의 묘소에 성묘도 드리고 고부 서생에 있는 선사의 진외가를 찾으시기도 하시고 또 객망리 수십 호 문중을 찾으신, 문중 노인들은 집안을 망쳐놓은 증산이라 욕하고 안노인들은 잘날 자식은 사 남매나 다 죽이고 저 못난 아이를 데리고 그게 무슨 모양일까하여 비난함이 자자하더라. 이에 성부께서는 “못난 아이라야 나의 일의 일맥이 될 것이라” 하시니, 모두 웃으면서 “집안이 망하려하니 별일이 많다.” 고들 야단이었다. 뒷날 선사께서는 “그 소리가 잊혀지지 않은 채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노라”고 교중 형제들에게 대하여 가끔 말씀하시곤 하였다.
며칠 후 성부께서는 부모님께 이별의 예를 올리시면서 “지금 떠나면 언제올지 모르오니 몸을 안보하시오며, 어린 순임을 잘 길러 장래사를 후계토록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여식을 업으시고 못내못내 하시며 집밖에까지 나오시니 정씨성모께서 따라 나오시는지라. 성모를 항하여 말씀하시되 “그 어떤 고생된 일을 당할지라도 잘 인내하여 이 한줄기 혈맥을 길러내어 후계사를 이루도록 하오 나는 이제 오기가 어려울 것이요” 하시니 정씨 성모는 팔자 한탄을 하시면서 좋은 자식 다 죽이고 못난 여식으로 후계를 삼으라니 또 못 오시느니 하신다고 여러 말씀으로 푸념을 늘어놓으시는 지라. 성부께서 추상같이 꾸짖어 고함치시면서 노기가 등등 하사 돌을 주어 성모의 머리를 때려 유혈이 낭자하니 어린 여식은 어머니를 붙들고 울며 발버둥치고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이끌고 돌아서는데, 성부께서는 높은 소리로 다시 크게 꾸짖으시면서 산모퉁이를 돌아서시는지라. 며칠동안 손을 잡고 못내 못내 애지중지 해주시던 정의도 한바탕의 꿈인 듯 어린 딸은 어머니의 머리를 만져 피를 씻어드리고 모녀가 한자리에 앉아 울고 또 울었다.

6.본가를 떠나신 뒤 수개월 후에 소식을 들으니, 김제등지 외가친척을 일일이 방문하시고 나신 뒤, 동독에 있는 수제자 김형렬 댁에서 기유년 유월 이십사일에 화천 하셨다는 통보를 조부께서 받으셨으나, 그 동안 선사 모녀에게는 정상이 너무 딱하다 하여 알리지 않으셨는데, 뒤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모녀의 깊은 서러움은 실로 형언할 길이 없었더니라.
성부께서는 십사대 종손으로서 집안에는 각종 문물이 많이 전하여 내려왔는데 집을 떠나시기 이전에 하루는 관직에 대한 교지며 족보 기타 문집 등 일체의 서책을 마당에 꺼내어 교지에 찍힌 직인 자리만 오려 띠시고 전부 불사르시니, 수십 호 문중 노소가 모여들어 소동이 일어났으나 만류치 못한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로 집안의 모든 사람과 척이 되어 오면서 이윽고는 문중재산까지 다 없애고 하시는 말씀이 “유도의 구습을 없애고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할지니 유도에서는 범절밖에 취할 것이 없노라”고 하시니라.
성부께서 화천하신 뒤로 가세는 더욱 궁핍하여 생계가 곤궁 막심하니 어디라 의탁할 곳 없는 환경 속에서도 관후하신 정씨성모께서는 모든 난관을 겪으면서 유리걸식하여 따님 기르시기에 온갖 마음을 다 기우리시고, 노쇠하신 조부께서는 짚신을 삼아가며 아드님과 크나큰 이상을 생각하고 그의 재림을 기원하여 사시로 치성을 올리시고 축원하는 그 모습은 실로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무렵에 전라남도 순천에 사는 장기동종반이 찾아 와서 가장집물을 사주어 가난하고 막막한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 주니 그 은혜 실로 골수에 아로새겨서 잊지 못할 바라. 모녀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며 근근이 지내는데, 어느덧 세월은 흘러 선사나이 열세 살이 되어 부모의 소중함이며 제반 인사범절도 대략 깨닫게 되었는데, 조부께서 별세하시니 의지할 곳 없는 정씨 성모 선사를 안고 애통망극하니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정신을 가다듬어 겨우 장사 지내니라.

7.조부가 별세한 후에 악마의 작해가 심하여 모녀간에 생이별이라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으니, 그 원인은 선사모녀는 없앰으로써 자기가 성부의 후계자를 맡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진 고모는 악독하게도 선사모녀를 살해하고자 별별 흉모를 꾀한 나머지 모녀를 모함하여 문중을 선동하고 동리 사람들을 선동하여 여러 가지로 구박을 준 다음, 마침내는 양모라는 자의 어미와 상의하여 어느 날 밤에 성모는 집안에서 축출하고 선사는 정읍에 있는 어느 노파의 집에 끌려가, 정씨성모는 홀로 이 곳 저곳을 유리방황하면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떠돌아다니었으니, 이 사건은 뒷날 선사께서 “생각하면 기막히고 원통스러웁다”고 자주 말씀하시었다.
고모의 모해와 작란이 도에 넘치어 난폭한 소란이 있을 때에 성모께서 “네가 끝내 이러한 흉계를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불에 타서 죽으리라”고 하시더니, 임오년 칠월에 고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중풍이 나서 수년을 고생하다가 방장에 불이 붙어 보는 사람도 없이 불에 타서 사망했다고 한다.

8.정읍 양가의 집에 억류된 채 외로이 앉아 홍대무변한 주친의 후계사를 생각하고, 또 모친과의 상봉을 기도하여 모든 괴로움을 억누르고 주야로 앙천축도하신 선사의 지성이 하늘에 감응 되었음인지 열 네 살 되는 팔월 십오일에 은인의 도움으로 우연히 함정을 벗어나서 김제군 금산면 원평 일우에서 모녀가 서로 만나게 되니, 쌓이고 쌓인 정회 맺히고 맺혔던 서러움 한꺼번에 터져 솟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하시었다.
이와 같이 모녀가 서로 만나게 되었음은 성부를 신앙하는 조철제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는 본시 영남 사람으로서 원평 태인 등지에 적지 않은 교세를 이룩한 분이라 성부의 혈육과 가족을 모심으로서 후학자가 된 본분을 다하며 또한 대내외적인 명분도 세워 교세확장에 기여 코 저 하는 내심으로 성부의 혈육과 가족의 행방을 탐문하여 오던 중 객망리에서 수소문한 결과 성부의 유족인 모녀는 집안 난리를 당하여 집을 쫓겨난 정씨대모는 군산 임피 방면으로 돌아다니시고 따님은 정읍 모처 양가의 집에 억류되어 연금생활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조철제는 그의 삼촌 두 분을 군산과 정읍으로 파송하여 모녀를 찾게 되니 수개월에 걸친 탐문조사로서 비로서 모녀가 일년 만에 상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마의 검은 손은 또다시 모녀를 갈라놓고 말았으니 조철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수개월을 지내는 동안에 양가 모녀가 그 사실을 알고 찾아와서 다시 작해함을 일삼게 되었음으로, 그러다가는 어느 때에 어떤 일을 당하여 생명에까지 해를 입게 될지도 모를 일이어서 정씨성모는 군산방면으로 가계시게 되고, 선사는 조씨 삼촌댁에 가시 계시게 되었느니라. 선사께서는 어머니와 헤어지기 싫었으나 조철제의 말이 “증산선생의 가족 한분이라도 모신다는 것이 선생을 신앙하는 본리라”하여 절대로 놓아주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조씨 삼촌댁에 다시 은거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으로, 서로 갈리는 날 원평 어느 갈림길까지 배웅나간 선사를 대하여 정씨성모 말씀하시기를, “삼년동안만 서로 고생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니 그만 들어가라” 하셨으나, 선사 차마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어서 금구까지 따라가 서로 눈물로서 작별하니 모녀의 기구한 운명 실로 개탄치 않을 수 없었노라.

9.서럽고 외로운 가운데에서도 세월은 흘러 선사의 나이 열여섯이 되시던 해 유월 이십사일 성부 화천기념일에 정씨성모께서 홀연히 찾아오시니, 모녀는 서로 반가이 얼싸 않고, 그동안 그립던 정회를 풀은 다음 성부의 후계사를 상의하여 좋은 방안이 없을까 하고 논의하는데, 조철제가 하는 말이 “앞으로 모녀는 절대로 타 처레 출타하지 마시고 소인이 가옥이며 가장집기를 마련하여 드리겠사오니 저희의 보호를 받으소서” 하고 함께 지내기를 간청함으로 그의 말에 응하여 구태인읍에서 모녀가 더불어 육년 동안을 지내던 중 정씨대모께서 신환을 얻으사 수년간 정황 없이 신고하시다가, 선사께서 스물네살 되시던 무진년 팔월 십오일에 선화하시니 불의에 당한 외로움과 서러움을 구천에 원정하여 말씀하시기를 “오호 서럽고 서럽도다. 우리 엄마 천상으로 가셨으면 우리 아빠 상봉하여 극락향수 누리련만 불과 연세 오십 오세 기구한 생애 생각하니 골절이 아리도다. 이 몸의 중한 임무 어느 누구와 상의하며, 어느 곳에 의지하여 호소하리” 하시니 천지간에 외로이 홀로 남으신 선사의 당시 정경을 생각하면 실로 피맺혀오는 애수를 끊을 수가 없다.

10.정씨대모 별세하신 그때부터 이름 모를 악질이 퍼져 세상이 암암하고 인심이 흉흉한데도 선사께서는 어머님의 영위도 불구하고 조철제의 집을 떠나 기약 없는 나그네 길을 방황하시게 되었으니,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성부의 후계사를 가로 채고 져 하는 양가 모녀의 흉계가 자자했다 함은 위에 기술한 바와 같거니와, 선사께서 그의 흉계에 걸려 양가의 집에서 억류생활을 할 때에 그들은 선사를 키워 맞 며느리로 삼으면 증산선생과 혈연관계를 맺게 됨으로 교중 각파 사이에 기세를 높힐 수 있으며 또한 물질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사를 억류했던 것으로, 조철제가 선사모녀를 뫼시게 되어 선사께서 양가의 집을 벗어나게 되자 조씨는 양가에서 적지 않은 금품을 증여했을 뿐 아니라 장가까지 보내주었던 것인데 양가 어미는 그것을 기화로 가끔 조씨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조씨는 돈을 주고 또 장가를 두 번이나 보내주는 등 손을 끊게 하기에 많은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조철제와 차경석 사이에 소송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성부의 체백을 모시는 자가 장차 재림시에 법통을 이을 수 있다는 그릇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교주들 가운데에는 체백을 서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당시 조철제가 모시고 있던 체백을 차경석에게 빼 앗겼음으로 양교주간에 재판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재산상의 이해관계가 있어서 다투는 것도 아닌 소송사건에 사직당국에서는 체백과의 친소 관계를 따질 수밖에 없어 성부의 유가족의 유무를 거론하게 되자, 흉악한 양가모녀는 조철제에게 적자는 없고 딸이 하나 있으니 사위가 나서면 재판은 문제없이 승소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 의견을 받아들인 조철제는 선사와 양가가 서로 결혼한 것처럼 호적을 위조함에 이르렀다.
사세가 이에 이름에 선사의 가슴이 막히고 초조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이렇게 매여 살다가는 후계사는 고사하고 성부님의 도법을 빙자하여 혹세무민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이용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위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새로운 설계를 꾸미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심하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지는 마음을 가다듬어 죽음을 각오하고 어머님의 영위도 돌보지 못한 채 강산을 집삼아 떠도는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더니라.

11.이렇게 하여 고아의 몸으로 전라도를 떠나신 선사께서는 경상도로 들어 가셔서 안동 봉화를 거쳐 강원도 일대로 오륙년 동안을 방황하게 되시었으니, 이 곳 저곳에 성부를 신앙하는 무리가 많았건만 마음을 털어 놓고 후계사를 의론할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채 거센 바람과 찬 이슬이 몸에 서리고 맺혀도, 그 한몸 편안히 쉴 곳마저 없는 유랑의 길을 더듬을 때 한숨 어리고 눈물 맺혀 미칠 듯 마음은 초조한데 소망은 여의치 않고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는지라. 다시 행방을 돌려 부산 대구 김천 문경 등지를 더듬어 몇 해가 또 지남에 어이없는 마음을 거두어 전주로 돌아와서 태인 공동묘지에 계시는 정씨성모의 산소에 성묘하며 고개를 숙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하소연하니 온 몸은 찢어질 듯하고 사지의 힘은 다시 일어설 기력마저 없었으나 일편단심 가실 줄 모르는 효성은 다시 길을 떠나 후계사를 상의할 사람을 기어코 찾아야지 하는 일심으로 다시 힘을 얻게 되어 김천, 상주, 문경으로 내려가서 수년을 경과하였으나 그 길도 허행이라. 이제는 할 수 없어 전라도로 다시 가서 성묘 묘전에 엎디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하시고, 전주에 돌아오시어 생각하시니 취한 듯 꿈속같이 지나간 세월이 어언 십년이라. 때때로 비몽사몽간에 천상에 계시는 부모의 명령이 혁혁한 장래사를 예시하심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당시 무의무탁한 선사의 처지로서 생각할 때 실로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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