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증산도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자 의미인데 오히려 그 진의가 여러모로 가려져 왔고 왜곡되어 온 점이 없지 않다고 본다. 부족하기 그지 없는 식견으로나마 이번 글을 쓰는 목적이다.
동학이 이렇듯 그 진의가 가려지고 왜곡되어 온 원인은 도판내적으로는 기존 과도기 교단들의 종통집착적 교리에 의해서일 테고 도판외적으로는 기존 민중사학계의 혁명지향적 사관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유신사관, 후자는 무신사관을 바탕으로 한 왜곡이라 하겠다.
동학에 대한 또 하나의 관성적 편견이 동학과 동학란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동학은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사상이자 교단이고 동학란은 그 교단 조직을 주축으로 한 민란이었다. 증산께서는 동학부터가 현실역사에서 그 본연의 목적과 기능을 완수할 수 없었다고 진단하셨고 동학란에 대해서는 더더욱 냉엄한 평가를 내리셨다.
애초 동학란의 시초는 1864년 최제우 선생의 순교 이후 1890년 초반부터 전개되었던 '교조신원운동' 즉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여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목적의 시위에서 비롯한다. 이를 통해 동학의 합법성을 인정받아 교세를 확장하고 교도들의 피해를 없애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작으나마 진척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이 시위의 성격이 변화되는 계기가 생기는데 1893년 2월 손병희 등 40여 명의 동학간부가 광화문 앞에서 국왕에게 교조신원을 상소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한 뒤 '왜놈과 서양오랑캐는 물러가라[척왜양斥倭洋]'는 벽보가 나붙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벽보를 붙인 세력은 동학 상층부의 교조신원운동과는 성격이나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이를 기점으로 동학 내부에는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순수한 종교운동에 머물려는 세력과 반봉건 반침략 등의 정치적 목적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동학 교단은 크게 북접, 남접으로 나뉘는데 북접은 최제우 선생의 도통을 계승한 교권파를 뜻하며 북접 지도층은 최시형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등으로 이들은 교주와 교단 상층간부였다. 반면 남접은 1894년 동학란이 본격화되는 시점을 전후하여 교권파로부터 독자적으로 분파하여 동학란을 초기부터 주도했던 세력으로 서장옥,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이 남접 지도층이었다.
1893년 3월 보은 집회는 동학란의 주요 전기점이 되는데 이때부터 동학은 교조신원운동 외에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정치적 지향성을 띠게 되며 동시에 남접이 북접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자노선을 표방하는 계기도 된다. 수만명이 집결한 집회였지만 조정에서 급파한 호조참판 어윤중의 중재로 결국 동학 지도부는 20여일만에 해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장옥, 손화중,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 따로 집회를 이어갔고 이들이 이듬해 1894년 1월 1차 동학란 봉기의 주도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생으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평이란 지역이 동학란이 시작한 곳이자 끝을 맺은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보은 집회를 기점하여 북접(교권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세력화한 남접이 본격적인 봉기를 도모하기 시작한 곳도 원평 집회(1893년 3월)부터였고 전봉준 장군이 이끈 동학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원평 구미란이었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자료가 있어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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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gumiran/8899634
아직도 미완인 1894년 원평의 구미란 전투
본문 중)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전해주는 기본 사료를 보면 원평과 관련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김제 원평이 갖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1893년의 전사(前史)에 포함되는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원평집회가 수행한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지만, 1894년의 전개과정 서술에서 원평은 옆으로 비겨져 있는 실정이다.
(중략)
전봉준 장군은 논산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주로 들어갔으나 이미 대읍 전주는 오래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시 산을 넘어 남으로 후퇴하였다. 도착지는 원평 구미란, 잠시 쉬어 숨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로 기습해왔다. 그 전투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전해졌다.
(하략)
http://blog.daum.net/donghak120/122
김제] '전봉준 최후 항전지' 구미란엔 이름없는 무덤들만…
(본문 중) 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거의 원평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평은 동학농민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교통의 요지기도 했고, 조선 말기 상설시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화가였다.
지리적 여건도 당시 지도부들이 모여 거사를 도모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원평 김덕명 장군 생가 동남쪽 상두산 자락을 넘으면 김개남 장군의 생가가 있는 정읍 지금실이다. 두 지역의 거리는 불과 20리가 안된다. 동학농민혁명의 거두인 이들이 혁명 이전부터 교류를 가지며 미래를 꿈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중략)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명의 농민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농민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농민군은 더욱 결사 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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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동학란은 완전히 대세가 기울었고 이틀 후인 11월 27일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전봉준 장군은 동학군을 해산하게 된다.
원평 구미란은 증산께서 중요공사를 보신 곳이기도 하다. 도전에 나와 있는 관련자료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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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원평 김명보(金明甫)의 주점에 이르러 미리 준비된 황구(黃狗) 한 마리로 개장국을 끓여 술과 함께 잡수시고 성도들에게 “구미산(龜尾山)에 오르라.” 하신 후에 상제님께서는 유문거리를 돌아서 구미산에 올라 물으시기를 “지금 어느 때나 되었느냐?” 하시니 한 성도가 “정오시쯤 되었을 듯합니다.” 하고 아뢰니라. 이 때 김자현(金自賢)이 문득 시장 쪽을 바라보며 아뢰기를 “장꾼들이 대가리놀음을 합니다.” 하거늘 성도들이 모두 장터를 바라보니 장꾼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서로 멱살을 잡고 머리를 부딪치고 상대가 없으면 아무 기둥이나 벽에다 자기 머리를 들이받기도 하니라. 이를 본 성도 하나가 상제님께 여쭈기를 “이것은 무슨 도수입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전쟁 도수니라. 내가 한날 한시에 전 세계 사람들을 저와 같이 싸움을 붙일 수 있노라. 부디 조심하라. 나의 도수는 밖에서 안으로 욱여드는 도수이니 천하대세를 잘 살피도록 하라.” 하시니라. 이 때 한 성도가 여쭈기를 “오시(午時)에 공사를 보셨으니 오시에 전쟁이 나겠습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그것은 너희들이 잘 생각해 보아라.” 하시니라. 공사를 마치신 뒤에 원평장의 아낙들이 밥을 하려고 보니 솥뚜껑이 모두 솥 안으로 들어가 있거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르기를 “신의 조화로다.” 하니라. (道典 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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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원평 구미란은 '전쟁 도수'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원평은 일찌기 원평장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만큼 조선 후기 상거래와 교통의 요지였다. 이 공사에 등장하는 주요 시점이 또한 정오正午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일중위시교역퇴日中爲市交易退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해가 중천에 뜨면(日中:午時) 장이 서고(爲市) 교역을 하고 물러난다(交易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 담긴 키워드는 원평 구미란에서 보신 공사와 거의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앞으로도 더 깊은 탐구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 3부에서 계속
동학이 이렇듯 그 진의가 가려지고 왜곡되어 온 원인은 도판내적으로는 기존 과도기 교단들의 종통집착적 교리에 의해서일 테고 도판외적으로는 기존 민중사학계의 혁명지향적 사관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유신사관, 후자는 무신사관을 바탕으로 한 왜곡이라 하겠다.
동학에 대한 또 하나의 관성적 편견이 동학과 동학란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동학은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사상이자 교단이고 동학란은 그 교단 조직을 주축으로 한 민란이었다. 증산께서는 동학부터가 현실역사에서 그 본연의 목적과 기능을 완수할 수 없었다고 진단하셨고 동학란에 대해서는 더더욱 냉엄한 평가를 내리셨다.
애초 동학란의 시초는 1864년 최제우 선생의 순교 이후 1890년 초반부터 전개되었던 '교조신원운동' 즉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여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목적의 시위에서 비롯한다. 이를 통해 동학의 합법성을 인정받아 교세를 확장하고 교도들의 피해를 없애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작으나마 진척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이 시위의 성격이 변화되는 계기가 생기는데 1893년 2월 손병희 등 40여 명의 동학간부가 광화문 앞에서 국왕에게 교조신원을 상소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한 뒤 '왜놈과 서양오랑캐는 물러가라[척왜양斥倭洋]'는 벽보가 나붙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벽보를 붙인 세력은 동학 상층부의 교조신원운동과는 성격이나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이를 기점으로 동학 내부에는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순수한 종교운동에 머물려는 세력과 반봉건 반침략 등의 정치적 목적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동학 교단은 크게 북접, 남접으로 나뉘는데 북접은 최제우 선생의 도통을 계승한 교권파를 뜻하며 북접 지도층은 최시형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등으로 이들은 교주와 교단 상층간부였다. 반면 남접은 1894년 동학란이 본격화되는 시점을 전후하여 교권파로부터 독자적으로 분파하여 동학란을 초기부터 주도했던 세력으로 서장옥,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이 남접 지도층이었다.
1893년 3월 보은 집회는 동학란의 주요 전기점이 되는데 이때부터 동학은 교조신원운동 외에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정치적 지향성을 띠게 되며 동시에 남접이 북접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자노선을 표방하는 계기도 된다. 수만명이 집결한 집회였지만 조정에서 급파한 호조참판 어윤중의 중재로 결국 동학 지도부는 20여일만에 해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장옥, 손화중,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 따로 집회를 이어갔고 이들이 이듬해 1894년 1월 1차 동학란 봉기의 주도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생으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평이란 지역이 동학란이 시작한 곳이자 끝을 맺은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보은 집회를 기점하여 북접(교권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세력화한 남접이 본격적인 봉기를 도모하기 시작한 곳도 원평 집회(1893년 3월)부터였고 전봉준 장군이 이끈 동학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원평 구미란이었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자료가 있어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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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gumiran/8899634
아직도 미완인 1894년 원평의 구미란 전투
본문 중)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전해주는 기본 사료를 보면 원평과 관련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김제 원평이 갖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1893년의 전사(前史)에 포함되는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원평집회가 수행한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지만, 1894년의 전개과정 서술에서 원평은 옆으로 비겨져 있는 실정이다.
(중략)
전봉준 장군은 논산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주로 들어갔으나 이미 대읍 전주는 오래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시 산을 넘어 남으로 후퇴하였다. 도착지는 원평 구미란, 잠시 쉬어 숨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로 기습해왔다. 그 전투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전해졌다.
(하략)
http://blog.daum.net/donghak120/122
김제] '전봉준 최후 항전지' 구미란엔 이름없는 무덤들만…
(본문 중) 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거의 원평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평은 동학농민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교통의 요지기도 했고, 조선 말기 상설시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화가였다.
지리적 여건도 당시 지도부들이 모여 거사를 도모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원평 김덕명 장군 생가 동남쪽 상두산 자락을 넘으면 김개남 장군의 생가가 있는 정읍 지금실이다. 두 지역의 거리는 불과 20리가 안된다. 동학농민혁명의 거두인 이들이 혁명 이전부터 교류를 가지며 미래를 꿈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중략)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명의 농민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농민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농민군은 더욱 결사 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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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동학란은 완전히 대세가 기울었고 이틀 후인 11월 27일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전봉준 장군은 동학군을 해산하게 된다.
원평 구미란은 증산께서 중요공사를 보신 곳이기도 하다. 도전에 나와 있는 관련자료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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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원평 김명보(金明甫)의 주점에 이르러 미리 준비된 황구(黃狗) 한 마리로 개장국을 끓여 술과 함께 잡수시고 성도들에게 “구미산(龜尾山)에 오르라.” 하신 후에 상제님께서는 유문거리를 돌아서 구미산에 올라 물으시기를 “지금 어느 때나 되었느냐?” 하시니 한 성도가 “정오시쯤 되었을 듯합니다.” 하고 아뢰니라. 이 때 김자현(金自賢)이 문득 시장 쪽을 바라보며 아뢰기를 “장꾼들이 대가리놀음을 합니다.” 하거늘 성도들이 모두 장터를 바라보니 장꾼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서로 멱살을 잡고 머리를 부딪치고 상대가 없으면 아무 기둥이나 벽에다 자기 머리를 들이받기도 하니라. 이를 본 성도 하나가 상제님께 여쭈기를 “이것은 무슨 도수입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전쟁 도수니라. 내가 한날 한시에 전 세계 사람들을 저와 같이 싸움을 붙일 수 있노라. 부디 조심하라. 나의 도수는 밖에서 안으로 욱여드는 도수이니 천하대세를 잘 살피도록 하라.” 하시니라. 이 때 한 성도가 여쭈기를 “오시(午時)에 공사를 보셨으니 오시에 전쟁이 나겠습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그것은 너희들이 잘 생각해 보아라.” 하시니라. 공사를 마치신 뒤에 원평장의 아낙들이 밥을 하려고 보니 솥뚜껑이 모두 솥 안으로 들어가 있거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르기를 “신의 조화로다.” 하니라. (道典 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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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원평 구미란은 '전쟁 도수'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원평은 일찌기 원평장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만큼 조선 후기 상거래와 교통의 요지였다. 이 공사에 등장하는 주요 시점이 또한 정오正午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일중위시교역퇴日中爲市交易退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해가 중천에 뜨면(日中:午時) 장이 서고(爲市) 교역을 하고 물러난다(交易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 담긴 키워드는 원평 구미란에서 보신 공사와 거의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앞으로도 더 깊은 탐구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