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버스에서, 전철에서, 길거리에서 어른들을 뵙게 되면 저절로 숙연해집니다.
*갑오년 오월 어느 날 밤 상제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중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고 아뢰는도다. (대순 행록(行錄) 1:22)
*을미(乙未 : 道紀 25, 1895)년 봄에 고부 유생들이 난이 평정되었음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 때 증산께서도 참여하시니 한 노인이 증산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증산께서 그 책을 통독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63)
요즘 같이 험악한 환경에서 감옥을 멀리하고, 숨쉬며, 마시며, 먹으면서도 병들지 않고 몸을 잘 다스려 이 순간까지 오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결과인가요.
*태인 화호리(禾湖里) 숙구지(宿狗地)에 사는 전태일(全泰一)이 공우에게 와서 말하기를 “시천주(侍天主) 주문을 읽었더니 하루는 한 노인이 와서 ‘살고 잘될 곳을 가려면 남쪽으로 20리를 가라.’ 하므로 찾아왔노라.” 하니라. 공우 태일을 데리고 와서 아뢰니 상제님께서 글 한 장을 써서 태일에게 주시므로 태일이 집에 돌아와서 펴 보니 곧 태을주(太乙呪)라. 이에 하룻저녁을 읽으니 온 마을 남녀노소가 다 따라 읽는지라. 이튿날 태일이 와서 상제님께 그 사실을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이는 문공신(文公信)의 소위라. 숙구지는 곧 수(數) 꾸지라. 장래 일을 수 놓아 보았노라. 아직 시기가 이르니 그 기운을 거두리라.” 하시고 약방 벽에 기동북이고수氣(東北而固守)하고 이서남이교통(理西南而交通)이라 쓰시고 문밖 반석(盤石) 위에 물형(物形)을 그려 점을 치신 뒤에 종이에 태을주(太乙呪)와 김경수라 써 붙이시고 일어나서 절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김경수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도전 6:111)
문득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훗날 저 모습처럼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늙은 모습을 당당히 보여줄 수 가 있으련지...
*하루는 근동에 사는 지사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어떤 비결에 오리알터에 가활백만지지가 있노라고 하였기에 이곳에 많은 지사들이 들어와서 답산이 빈번하여 묘는 많이 섰으나 이 줄기만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이라고 하며 나도 당지를 찾으려고 이곳에 이사까지 와서 있지만 여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터가 될만한 혈이 없노라고 평하는지라 우리는 객지사람으로서 바쁜 일에 좋고 궂은 것을 가릴 처지가 못 되니 아무데나 우선 마음에 내키는 대로 터를 닦을 수밖에 없노라고 대답하니 대사를 경영하려거든 신중을 기해야 되니라고 만류하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은 즉 생각하고 권하는 말도 듣지 않으니 한심할 노릇이라고 하며 하릴없이 돌아가 버리니라.
이와 같이 헐뜯고 비소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일을 착수하여 아는 이가 있나보다고 저희끼리 수군거리고도 하더라. 그러하던 어느 날 다시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나침반을 놓고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전날에는 형편이 없는 진펄이더니 이제 와서는 그 질퍽거리던 물로 간 곳 없고 전장지비한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더라. 서노인은 그 뒤 그 일로 말미암아 노심하던 끝에 패철을 내어 던지고 말았으니 한번은 와서 평생에 그럴듯한 터 하나를 잡아 보지도 못하고 한탄하더니 그 뒤로 득병하여 신음하다가 사망하니라.
이월 십오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니 성모께옵서 하명하시되 “너의 아버지 묘각이 그래 가지고는 장구하게 계실 수 없으니 오리알터에 영영 안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니라
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미리 당부하신 바 있어 각 기관장을 청하여 대접하고 있자니 밖에서 웬 백발노인이 찾는다고 하여 나가보니 곽봉훈 노장이라. 그는 불교학자로서 수년 전에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팔십 노구로서 전부터 지면이 약간 있었는데 무엇인지 책보에 싼 것을 내 놓으며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을 할 때에 어느 날 김응종이란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가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가 없는데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것을 받아서 들고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내력을 말하고 하도 모략이 많은 세상이라 혹 무슨 계략이나 있지 않나 염려되기도 하여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열어서 보기로 결정하고 성전에 들어가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인장이 들어 있어, 한권에는 중화집이라 한자로 쓰여있었고 또 한 권은 전자체로 된 친필집이였으며 인장갑 안에 쓰여 있는 글은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銅谷”이었다.
이날이 기축 삼월 초삼일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너무나도 신기한 일에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일은 교중 형제들만이 알 일이 아니라하여 대접 중이던 손님들과 봉훈장을 성전으로 창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니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봉운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십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와 인장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 속의 글을 보니 기축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이곳에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이라 하니 정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하더라. 봉운장은 유소시로부터 불경을 읽은 유명한 학승으로 그때 나이 이미 팔십사세였으나 어느 절에고 찾아 들면 우대를 받든 터인데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 본교에 계시게 되니라. (화은당실기-제7장 육기초공사 2~7)
위의 노인들은 상제님과의 인연들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중요한 부분에 노인들이 의미를 갖고 등장하는 곳이 더러 있더군요.
이 글에서는 일부만을 발췌했으나 더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3월 3일 중궁에 조반 진지상을 올려 예를 드리던 중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뒤로는 쇠솥에 지은 밥은 내가 먹지 않을 것임에 옥석정을 구하여 오라.”하시고 또, “현무경을 구하여 오라.”고 명하시었다. 명을 받고 정사는 경주 건천(慶州乾川)에 사는 이준의(李準儀) 노인과 이환우(李桓雨)의 부친 종허(鍾許) 노인 두 분을 찾아가 상의하였는데, 이 두분은 나이로는 정사와 노소의 처지이나 신앙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마음을 주고 받던 동지였었다. 종허 노인으로부터는 정사의 나이 젊었을 때 등서해 놓았던 현무경을 전해 받고, 이준의 노인으로부터는 마침 8년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서 보관해 두었던 돌솥을 구할 수 있었는데, 명령만 순종하여 행하면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는 성부님의 홍은에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성골에 돌아와서, 현무경(玄武經)과 돌솥을 영상 앞에 올리니 성부님께서, “현무경은 보관하고 솥은 곧 진지를 지어 올리라.”고 말씀하시어 그대로 봉행하였다.
정사가 현무경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정사의 나이 이십사세 때, 청도 풍각(淸道豊角)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곳을 지나자니 갑자기 뇌성이 대발하고 폭우가 쏟아지는지라, 비를 피하여 어느 집으로 찾아드니 주인은 풍병환자요, 부인은 맹인이더라. 잠시 피우를 하려던 것이 좀처럼 비가 개이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되었다. 정사는 적적하던 차에 혹 읽을 책이라도 없나하여 사면을 살피던 중 한 책이 있어 뒤적여 보니 한자로 된 글귀와 많은 부적이 그려져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져 주인에게 책의 내력을 물으니,
주인은 이년 전에 한 과객이 들렀다가 자기병을 보고 그 책에 있는 부적을 그려서 먹고 기도를 지성껏 올린다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맡겨놓고 간 뒤, 곧 돌아온다는 사람이 이년이 다 되었는데도 종무소식이라고 내력을 설명하면서, 그러나 자기가 무식한 사람이라 그가 시키는데로 한 번도 해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다. 이에 정사는 주인에게 청하여 그 책을 자기에게 빌려준다면 경주에 사는 유명한 학자에게 보여 감정을 받은 뒤에 되돌려 주겠다고 하여 그 책을 가지고 가서 경주에 사는 종허 노인에게 보이니 깜짝 놀라면서, “이 책은 현무경(玄武經)이라. 평소에 한번 구하여 보고자 하던 차”라고 기뻐하면서, 등서를 하여 두고 원본을 환본하였다. 그 후로 16년간을 간신히 보관해 오던 차였다. (제2장 교단의 창업기-3)
*갑오년 오월 어느 날 밤 상제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중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고 아뢰는도다. (대순 행록(行錄) 1:22)
*을미(乙未 : 道紀 25, 1895)년 봄에 고부 유생들이 난이 평정되었음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 때 증산께서도 참여하시니 한 노인이 증산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증산께서 그 책을 통독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63)
요즘 같이 험악한 환경에서 감옥을 멀리하고, 숨쉬며, 마시며, 먹으면서도 병들지 않고 몸을 잘 다스려 이 순간까지 오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결과인가요.
*태인 화호리(禾湖里) 숙구지(宿狗地)에 사는 전태일(全泰一)이 공우에게 와서 말하기를 “시천주(侍天主) 주문을 읽었더니 하루는 한 노인이 와서 ‘살고 잘될 곳을 가려면 남쪽으로 20리를 가라.’ 하므로 찾아왔노라.” 하니라. 공우 태일을 데리고 와서 아뢰니 상제님께서 글 한 장을 써서 태일에게 주시므로 태일이 집에 돌아와서 펴 보니 곧 태을주(太乙呪)라. 이에 하룻저녁을 읽으니 온 마을 남녀노소가 다 따라 읽는지라. 이튿날 태일이 와서 상제님께 그 사실을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이는 문공신(文公信)의 소위라. 숙구지는 곧 수(數) 꾸지라. 장래 일을 수 놓아 보았노라. 아직 시기가 이르니 그 기운을 거두리라.” 하시고 약방 벽에 기동북이고수氣(東北而固守)하고 이서남이교통(理西南而交通)이라 쓰시고 문밖 반석(盤石) 위에 물형(物形)을 그려 점을 치신 뒤에 종이에 태을주(太乙呪)와 김경수라 써 붙이시고 일어나서 절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김경수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도전 6:111)
문득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훗날 저 모습처럼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늙은 모습을 당당히 보여줄 수 가 있으련지...
*하루는 근동에 사는 지사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어떤 비결에 오리알터에 가활백만지지가 있노라고 하였기에 이곳에 많은 지사들이 들어와서 답산이 빈번하여 묘는 많이 섰으나 이 줄기만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이라고 하며 나도 당지를 찾으려고 이곳에 이사까지 와서 있지만 여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터가 될만한 혈이 없노라고 평하는지라 우리는 객지사람으로서 바쁜 일에 좋고 궂은 것을 가릴 처지가 못 되니 아무데나 우선 마음에 내키는 대로 터를 닦을 수밖에 없노라고 대답하니 대사를 경영하려거든 신중을 기해야 되니라고 만류하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은 즉 생각하고 권하는 말도 듣지 않으니 한심할 노릇이라고 하며 하릴없이 돌아가 버리니라.
이와 같이 헐뜯고 비소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일을 착수하여 아는 이가 있나보다고 저희끼리 수군거리고도 하더라. 그러하던 어느 날 다시 서씨 노인이 찾아와서 나침반을 놓고 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전날에는 형편이 없는 진펄이더니 이제 와서는 그 질퍽거리던 물로 간 곳 없고 전장지비한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더라. 서노인은 그 뒤 그 일로 말미암아 노심하던 끝에 패철을 내어 던지고 말았으니 한번은 와서 평생에 그럴듯한 터 하나를 잡아 보지도 못하고 한탄하더니 그 뒤로 득병하여 신음하다가 사망하니라.
이월 십오일 아침에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행하니 성모께옵서 하명하시되 “너의 아버지 묘각이 그래 가지고는 장구하게 계실 수 없으니 오리알터에 영영 안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니라
삼월 삼일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미리 당부하신 바 있어 각 기관장을 청하여 대접하고 있자니 밖에서 웬 백발노인이 찾는다고 하여 나가보니 곽봉훈 노장이라. 그는 불교학자로서 수년 전에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팔십 노구로서 전부터 지면이 약간 있었는데 무엇인지 책보에 싼 것을 내 놓으며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을 할 때에 어느 날 김응종이란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가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가 없는데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는 그것을 받아서 들고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내력을 말하고 하도 모략이 많은 세상이라 혹 무슨 계략이나 있지 않나 염려되기도 하여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열어서 보기로 결정하고 성전에 들어가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인장이 들어 있어, 한권에는 중화집이라 한자로 쓰여있었고 또 한 권은 전자체로 된 친필집이였으며 인장갑 안에 쓰여 있는 글은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銅谷”이었다.
이날이 기축 삼월 초삼일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너무나도 신기한 일에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일은 교중 형제들만이 알 일이 아니라하여 대접 중이던 손님들과 봉훈장을 성전으로 창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니 모두 감탄하여 마지않더라. 봉운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십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와 인장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 속의 글을 보니 기축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이곳에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이라 하니 정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하더라. 봉운장은 유소시로부터 불경을 읽은 유명한 학승으로 그때 나이 이미 팔십사세였으나 어느 절에고 찾아 들면 우대를 받든 터인데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 본교에 계시게 되니라. (화은당실기-제7장 육기초공사 2~7)
위의 노인들은 상제님과의 인연들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중요한 부분에 노인들이 의미를 갖고 등장하는 곳이 더러 있더군요.
이 글에서는 일부만을 발췌했으나 더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천기 74년(4277, 1944, 甲申) 3월 3일 중궁에 조반 진지상을 올려 예를 드리던 중 성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뒤로는 쇠솥에 지은 밥은 내가 먹지 않을 것임에 옥석정을 구하여 오라.”하시고 또, “현무경을 구하여 오라.”고 명하시었다. 명을 받고 정사는 경주 건천(慶州乾川)에 사는 이준의(李準儀) 노인과 이환우(李桓雨)의 부친 종허(鍾許) 노인 두 분을 찾아가 상의하였는데, 이 두분은 나이로는 정사와 노소의 처지이나 신앙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마음을 주고 받던 동지였었다. 종허 노인으로부터는 정사의 나이 젊었을 때 등서해 놓았던 현무경을 전해 받고, 이준의 노인으로부터는 마침 8년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서 보관해 두었던 돌솥을 구할 수 있었는데, 명령만 순종하여 행하면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는 성부님의 홍은에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성골에 돌아와서, 현무경(玄武經)과 돌솥을 영상 앞에 올리니 성부님께서, “현무경은 보관하고 솥은 곧 진지를 지어 올리라.”고 말씀하시어 그대로 봉행하였다.
정사가 현무경을 입수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정사의 나이 이십사세 때, 청도 풍각(淸道豊角)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곳을 지나자니 갑자기 뇌성이 대발하고 폭우가 쏟아지는지라, 비를 피하여 어느 집으로 찾아드니 주인은 풍병환자요, 부인은 맹인이더라. 잠시 피우를 하려던 것이 좀처럼 비가 개이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며칠을 묵게 되었다. 정사는 적적하던 차에 혹 읽을 책이라도 없나하여 사면을 살피던 중 한 책이 있어 뒤적여 보니 한자로 된 글귀와 많은 부적이 그려져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져 주인에게 책의 내력을 물으니,
주인은 이년 전에 한 과객이 들렀다가 자기병을 보고 그 책에 있는 부적을 그려서 먹고 기도를 지성껏 올린다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맡겨놓고 간 뒤, 곧 돌아온다는 사람이 이년이 다 되었는데도 종무소식이라고 내력을 설명하면서, 그러나 자기가 무식한 사람이라 그가 시키는데로 한 번도 해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다. 이에 정사는 주인에게 청하여 그 책을 자기에게 빌려준다면 경주에 사는 유명한 학자에게 보여 감정을 받은 뒤에 되돌려 주겠다고 하여 그 책을 가지고 가서 경주에 사는 종허 노인에게 보이니 깜짝 놀라면서, “이 책은 현무경(玄武經)이라. 평소에 한번 구하여 보고자 하던 차”라고 기뻐하면서, 등서를 하여 두고 원본을 환본하였다. 그 후로 16년간을 간신히 보관해 오던 차였다. (제2장 교단의 창업기-3)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