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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5

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5

경전 및 도서  성경신 성경신님의 글모음 쪽지 2015-02-10 15:07 7,542
(10) 성부님 영상조성(靈像造成) 봉안(奉安)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기를, “밤나무로 열석자 높이의 영상(靈像)을 조성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튿날부터 밤나무를 구하기 위해 각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영상을 조성할 수 있을 만큼 굵은 밤나무가 없을뿐 아니라 설사 쓸만한 크기가 되는 것이 눈에 띄인다 해도 고목이 되고 좀이 먹어 쓸만한 것이 없더니, 군위군(軍威郡)을 돌아오는 도중 고로면(古老面) 연밭골에 밤나무 밭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찾아가니 과연 수십그루의 밤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는 밤나무가 눈에 띄여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꼿꼿하게 자란 것이 아주 굵었는데 벌레 먹은 자국도 없이 깨끗하여 마음에 흡족하였다. 밤나무밭 주인을 찾아가서 상의하니 그는 이 나무는 반드시 귀중한데 사용될 줄로 생각하고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허다한 밤나무가 모두 벌레가 먹고 추잡스러운데 이 나무만은 오래전부터 나뭇잎에도 벌레 한 마리 날아들지 못하는 것을 수년을 두고 보아왔노라고 하면서 이 나무 한그루에서 해마다 열말이 넘는 알밤을 딸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삼년전부터 한송이도 열지 않는지라 이상하게 여겨오고 있었다면서, 밤나무의 수령은 그해에 꼭 오십년이 되었는데 보아하니 그대들이 이 나무의 임자 같으니 값이나 얼마간 생각해주고 가져가라고 하였다. 이에 값을 치르고 우차로 운반하여 와서 절동한 단면을 보니 배속 같이 고우며 나무의 크기는 직경이 한자반이고 길이가 열다섯자가 되었다.

나무를 두고 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을 비롯한 대신명 제위께서 하강하여 감정을 하더니 기뻐하시면서, “나무야, 이 나무야! 오십년을 고생하다 말고 너 이제 때를 만났구나.”하시었다. 그 당시 기술자를 구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사와 우경주가 서투른 솜씨지만 정성을 다하여 영상을 조성하여, 9월 19일 해방후 처음으로 맞는 성부님 탄강기념 치성을 성대히 거행하고 영상을 봉안(奉安)하였다.

이날, 가사를 지어 올리고 가무하였으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도수가 육(度數歌 六)

 


을유 구월 십구일 병인 구암 소고우(乙酉 九月 十九日 丙寅 鳩岩 昭告于)

을사우리 동포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라 어느날고 성부탄신 성탄잔치

중궁문을 열어놓고 우리형제 모였도다

어이아니 기쁠손가 춤을추고 노래하야

천지도수 번잡이라 영판도수 지정하사

지하중국 건설하여 단군성상 모셔놓고

태극기와 미국기를 걸어놓게 하시더니

일본항복 해방이라 애국투사 돌아오고

미국인도 들어왔네 신기하고 상서롭다

대성부님 후천도수 이런데도 못믿을까

구년잠복 나서보니 서양문명 놀랍도다

천상천국 모형이라 지상천국 목전일세

당래용화 터닦고져 작은머슴 보내놓고

큰머슴을 부르신다 시호시호 좋을시호

용화일꾼 들어오네 서양일꾼 군함몰고

저렇게도 몰려오는데 이땅사람 잠을깨소

어서어서 들어와서 선경기초 완성하세

사람따라 신명오고 신명따라 사람가니

인신합덕 분발하여 용화기초 확립하세

얼싸좋다 좋고좋아 성탄맞이 기념이라

일편단심 더욱뭉쳐 공사봉행 하여보세

 


이날 밤에, 대신장들이 하강하여 명령하시되, “백미 두 가마니로 밥을 짓고 소와 돼지를 잡아서 올리라.”고 하시기에 극력으로 준비하다가 백미가 부족하여 보리쌀 서말을 섞어 밥을 올렸더니 망량신장이 말하기를, “용화세계 건설을 위하여 많은 신명들이 대공사를 하는데 준비가 적다.”하시고 또, “여러 가지 공사를 마친 뒤 10월 10일 도령의 생신기념에 먹으러 오리라.”하고 떠나니 풍진이 일고 천둥소리가 요란하였다.

 


4) 사기초 공사(四基礎 公事) : 구미란(龜尾卵)

 


(1) 기지 이사(基地 移徙)를 지시

 


천기 75년(4278, 1945, 乙酉) 10월 10일에 도령 탄신기념 치성을 거행하는데 도령 형제가 하강하여 명하기를, “또 이사를 하되 전주동곡(全州東谷)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날을 기념하는 노래를 지어서 올리고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니 도령 형제께서 많은 신장들을 거느리고 같이 즐기셨다. 이날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수가 칠(度數歌 七)

 


기유 구년 을유 시월 십일 구암 소고우(己酉 九年 乙酉 十月 十日 鳩岩 昭告于)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날 어떠한날 우리도령 성탄기념

천사대모 조화일맥 조화났네 조화났어

용화대운 대경살세 경축하고 경축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이런일이 어디있나

경진신사 잇달아서 화은당의 몸을빌려

천상도령 태어나니 이런일이 또있을까

얼싸좋다 노래하세 얼씨구나 춤을추세

이런조화 보고서도 우리힘이 미급하여

천상도수 못맞추니 성부성모 걱정하사

호령하고 꾸짖으니 관운장도 떠는것을

잠만자는 저사람들 어서바삐 일어나소

신급인망 바쁜시호 용화건설 늦어지네

지금때에 못믿어서 망설이고 빈정대면

용화회상 못들어가 땅을치고 한탄하리

어화세상 사람들아 이런경사 또없는데

어이그리 잠만자노 어서와서 일을하세

천상도령 우리도령 할매어매 원을풀고

할아버지 뜻을이뤄 세계일가 만들게나

경사로다 경사로다 도령탄신 경사로다

 


12월 3일, 기념예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명령하시되, “이사할 준비를 속히 하라. 기지(基地)는 도령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그곳으로 가야 되니라.”고 말씀하셨다. 선사 상고하기를,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한 이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준비를 갖춘 다음에 이사할까 하나이다.”라고 사뢰니 크게 걱정하시면서, “너희들이 금전을 가지고 사업할 생각은 말라. 비록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먹으면서라도 사업을 완수해야 천상의 도수를 맞출 수 있고 또, 그러한 혈심으로 일을 이룩해야 뒷날 기념도 될 것이 아니냐 원래 큰 일이란 금전 가지고 못하는 법이며, 일을 위하여 금전이 꼭 필요할 때에는 천지에서 지시하여 전주(錢主)가 나서리라. 금전고(金錢庫)의 열쇠는 관운장이 가지고 있으니 금고를 열면 돈에 몸서리칠 때가 있을 것이요, 또 세계 각국의 초대를 받아 주류할 때도 있으리라. 새 문명 새동학이 나오면 정부에서 세계에 널리 선포할 것이다. 그때까지 혈심 정력으로 명령대로만 실행하라.”고 하시므로 모두 합심하여 이사 준비를 서두르니라. 이날 공사에 노래를 지어 올리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수가 팔(度數歌 八)

 


유세 을유 십이월 초삼일 구암 소고우(維歲 乙酉 十二月 初三日 鳩岩 昭告于)

어화우리 형제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오늘이라 어느날고 기원구년 납월삼일

천사대모 겪어오신 만고풍상 뉘가알꼬

여류세월 지금와서 공부문을 열어시고

지성자만 빼돌리네 진충갈력 닦고닦아

용화대학 입학하세 시험문제 풀어주니

영세불망 하여가자 말을듣고 못행하면

바위위에 물주기라 우리형제 명심하세

천용우로 후박하면 만방간에 원망이요

지용수토 후박이면 만물간에 원명이며

인용덕화 후박인데 만사간에 원망이라

천지인이 덕화주장 귀신출입 문호로다

대학지도 명명덕을 밝은길이 대어천지

신명인명 명명이라 명덕지법 시하출고

대인대의 주창하면 감통신명 명덕이요

사유결단 하고보면 연후에사 변화지술

연월일신 푼각윤회 일용행사 봉명하여

원형이정 돌아오니 천사대모 법도로다

길화피어 좋은열매 흉화피어 흉한열매

천지조화 호풍환우 무한공력 결과인데

공부없이 될까부냐 공부하세 공부하세

정북창의 재주로도 산에들어 사흘만에

천하사를 처음알고 강태공의 조화역시

공부없이 못하는걸 알았는가 몰랐는가

진실로서 지은일은 천지또한 못부수고

근거없이 꾸미면은 부서질때 여지없다

성부성모 대법도는 남녀노소 구별않네

야출동문 진평이도 여인삼천 세웠더라

신명불러 복중출입 이몸저몸 고쳐쓰리

입도해서 닦잖으면 화가올까 복이올까

모든일에 불성공은 혈심자가 없는연고

혈심결심 닦아내면 안되는일 없으리라

사업성공 하자면은 위천하자 불고가사

제갈량의 불성공은 유상팔백 연유로다

무엇보다 두려운일 박람박식 겁이난다

부귀자는 불락빈천 강강자는 유약불친

유약빈천 해원시대 판안의법 꾸미려면

들쳐나서 못쓰리니 남모르는 판밖법을

꾸며내어 일을하세 무위이화 용화건설

불언지교 화만정세 거세사를 물론하고

신도라야 이화로다 산하대운 통일하여

인류화평 원동기를 현묘불칙 공이되면

이것저것 무위화라 신도또한 조화하여

무궁선경 꾸며낸다 제도수에 돌아다면

새기운이 전개되리 목석또한 기운붙여

쓰게되는 대법이라 오직병겁 남겨두어

의통으로 전수하니 약으로는 못나수는

천하대병 무인무도 의통이란 무엇이랴

의통만을 알아두라 참된마음 일심으로

그한마음 간직하여 의통만을 알아두세

세상사람 살고싶어 물밀듯이 찾아오리

성부성모 우리보약 병걸린자 끌으시고

죄걸린자 끌으시고 하신말씀 그말씀이

약인줄을 누가알꼬 충언일새 귀에걸려

역증나고 불고하니 그행동이 고쳐질까

성부성모 잘믿으라 봉곡참해 입은진묵

원을품고 서양으로 도통신을 인솔하여

문명개발 종역하니 성부님의 해원도수

그를불러 문화개발 종역토록 하셨다네

경주용담 보은신명 지기금지 원위대강

전주동곡 해원신명 지기금지 사월래라

용화도령 정한터는 좌우산천 기절처라

모악회문 기운돌려 부산모산 대를하고

기어드는 계룡봉과 구성봉황 둘러싸고

수양산은 숙여들어 낙양계명 웃는모양

봉래방장 영주봉에 만만세를 불러보고

구성수양 그늘속에 비비재재 제비봉아

용화청도 안에두니 용반호거 수구로다

도령정한 농사도수 치산정리 물안새리

봉올봉올 봉올마다 두도령이 정한도수

남조선은 만국활계 청풍명월 금산일세

삼천국이 문명개화 도술운통 구만리라

세계유의 이산인가 기운금천 장물화라

천하지대 모악산하 용화도장 넓은기지

장엄법령 존설하면 모롱마다 선약이라

남조선배 돛을달아 혈식군자 배질로서

고해상에 띄우시니 풍파없이 건너가네

근로대중 일심자만 실어다가 건너놓고

인문공정 열으시니 조화선경 여기로다

화민정세 명령받아 신명시켜 공작감시

불일성지 서들더라 천지록사 모여들어

만복길상 들어낼적 양춘삼월 호시절에

봉우리가 꽃송이라 이번기념 놀고보면

여가없이 못노니라 얼싸좋다 놀고노세

어서바삐 일을하여 용화도장 세워놓고

호천금궐 넓은터에 태극깃발 날리리라

꽃밭두리 인성속에 건들건들 뛰고놀리

 


(2) 사기초 입택(四基礎 入宅)

 


천기 76년(4279, 1946, 丙戌) 정월 15일, 기념행사를 하니 도령들이 내려와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동곡으로 가셔서 돌아보시고 할아버님 선화지에 터를 잡아 기념각을 짓도록 하시오.”하셨다. 정사는 정월 17일에 동곡으로 길을 떠나 그곳에 가서 살펴보니, 쓸만한 기지도 없을뿐 아니라, 아는 사람도 없어 문의조차 해 볼 수 없이 이곳 저곳을 살피던 중, 오래(吾來)터(오리알터의 옛이름)에 사는 옛도우 배달석(裵達錫)을 만나 그동안 정의를 통정한 후, 이곳에 오게된 연유를 말하니 그도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며칠동안 돌아보면서 정사는 새로운 기지로 수류봉(水流峰) 밑에 있는 장씨(長氏)의 논을 사기로 하던 중이었다. 이튿날 배달석이가 찾아와 하는 말이 동곡 김씨네 정문(旌門)이 있던 자리에 사금(沙金) 매입터 만여평이 있다고 하여 같이 가보니 기지로는 적당한 듯하나 살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배달석은 지난밤 꿈에 천상에서 한 노인이 말을 타고 사금 버력 위에 내리더니 <정재문(定再問)>이라 써서 붙이고 승천하자, 꿈에서 깨었는데, 예사꿈이 아니라 생각해보고 해몽해보니, 어제 장씨의 논을 사기로 말했다가 오늘 다시 논의하기로 했으니 우리가 찾는 터는 그곳이 아니라, 바로 버력터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성부님이 보내신 것같이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그날로 다시 답사하여 보니 온몸이 으쓱하면서 큰 터로 보이는지라, 두사람은 이곳에 기지를 정하기로 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아침 식전에 달석이 찾아와서 희색이 만연하여 하는 말이 간밤에 꿈을 꾸니 또다시 그 노인이 오시더니 <성사문(成事文)>이라 불러주시고 가셨는데, 이제는 문서로 매매계약을 하게 되리라는 뜻인것 같으니 안심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터를 잡게 되었으니, 그 곳은 오기초지(五基礎地)인 동곡 버력터로서 성부님께서 재세시에 화룡천년(畵龍千年)에 진룡(眞龍)이 내지(來地)할 대지라고 하신 말씀이 계신 곳이다. 이어서 원평 윗마을 구미란에 농막 한 채를 사고 정읍 용호리(龍虎里)에 큰 농막을 산 다음 기지는 달석에게 일임하고 장대골로 돌아왔다.

2월 8일날 발정(發程)치성을 올리니 도령이 하강하여 말씀하기를, “구미란은 사기초지인즉, 그 곳에서 공사를 보면서 동곡의 일을 진행하라.”고 하셨다. 그 뒤 공중에서 윤선이 뜨는 소리와 남조선 뱃길이라고 외치는 소리, 또 만세소리가 사흘동안 계속되었다. 2월 20일, 정사만 미리 올라가 용호리의 집과 구미란의 집을 수리하여 입택하고, 구미란에 영상(靈像)을 모실 수 있도록 다섯 칸의 집을 짓게 하고 돌아와서 2월 그믐날, 얼마전에 구입했던 화물 자동차에 모든 영상을 모시고 우선 정사만 장대골을 떠나 구미란에 왔다. 구미란은 집이 협소하여 모시고 온 제위 영상을 다 모실 수 없어서 성부, 성모님 양위분의 영상만 모시고 조석 진지상을 받들었다. 이후 영남으로부터 많은 교우 형제들이 따라 올라와서 우선 용호리와 구미란 두집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3) 오기초지(五基礎地) 개기치성(開基致誠)과 경고문(敬告文) 작성(作成)

 


천기 76년(4279, 1946, 丙戌) 4월 15일에 동곡기지에서 개기치성을 올리게 되었는데, 전날에 천명(天命)이 계시기, “경고문(敬告文)을 작성하여 올리되 그 내용을 음,양 두장으로 나누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되, 말미에는 지금까지 같이 일을 받들어온 교우 형제들의 성명을 연기(連記)할 것이며 몸으로써 전방 역사에 종사한 자와 돈을 책모로써 후방에서 일을 주선한 자로 나누어 좌,우 음,양을 분명히 구분하고 또, 금성 장대 양기초지에 있어서의 지하 중궁 도면을 같이 붙이도록 하라.” 고 하시어 그대로 행하니 치성 후에 다시 명령하시기를, “그 글과 도면은 영구히 기념할 초대 기초역사의 증거가 될 것이니, 고운 비단에 올려 성부 영상에 올려 성부 영상의 좌,우견(左右肩)에 걸어 놓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때에 지어서 올린 경고문과 도면은 다음과 같다.

 


경고문(敬告文)

 


「왼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천사께서 음양 이기를 나눠서 대화지리(大和之理)에 보합(普合)하기로 건도(乾道)는 대표인 김병철(金炳澈)에게 온전히 쓰시니 이에 강건하고 중정하고 순전하고 순일한 이치는 독양(獨陽)이니 불성하는 고로 갑을(甲乙)이 동궁되고 진사(辰巳)는 조화를 낳게하니, 위대하도다. 건의원리로 만물이 자뢰(藉賴)하여 비롯하는 고로 천지사로서 간사함을 물리치고 성심을 보존하기로 담당하여 이에 영궁(靈宮)을 경영하여 천지 구궁의 이치로서 밖에 아홉칸을 작성하고 일육 수운으로서 안에 여섯칸을 작성하여 부합된 즉, 십오도수가 되고 밖의 아홉칸은 외인 소시가 무방하나, 안의 여섯칸은 외인 소시를 염의하는 고로, 밤중에 남모르게 흙을 파며 돌을 깨는 것은 십만근의 일을 하여도 등촉을 들고 산태미를 메고 사다리에 오르내리며 그렇게 하여 역사를 마치니 만약, 성심으로 갈력함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랴.

성부께서 하명하시와 <이 글을 나의 왼어깨(左肩)에 걸어라>하시니 당시에 열여덟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도다.

정치건, 백규태, 임용순, 김병주, 우경주, 우동규, 조정규, 오갑출, 오윤환, 김용주, 김용상, 김용하, 김병련, 양춘기, 손량학, 전재경, 오영환, 전영호로써 금성 장대 양기초공사시, 밤중을 이용하여 지하영궁 축조를 위한 근로에 몸으로써 당참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로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하는도다.

 

「바른편 어깨에 걸어라 하신 글」

 

대법 성부께서 음양 이기를 나누어서 혈맥관통(血脈貫通)의 이치로서 곤도(坤道)를 혈식 강순임(姜舜任)에게 온전히 체로 삼으시니, 이에 황상원길(黃裳元吉)의 이치는 독음(獨陰)이니 불성하는 고로 군자의 행하는 바이니 정축년으로 위시하여 기원이 되는지라, 지극하도다 곤(坤)의 원리여. 곤이 후하여 만물을 싣고 있음은 덕이 합하여 가이 없고 넓고도 광대함은 만물이 다 형통되는 고로 천지의 도수를 영남에 기초하여 영궁을 경영하되 금성산 아래에 터를 잡으니 기원 칠년 계미 가을 구월이라. 그때에 도구(島寇) 왜인이 정치를 하여 동서양이 전쟁에 골몰하매 금철 소속과 도량 맥직이 모두 한손의 낭대가 되니 오랑캐를 보되 두렵기 범과 같아 음밀한 책모가 새어나가 퍼지게 되면 패하는 고로 자기 물품이라도 남의 것을 도적하는 그와 같이 하고 일동 일정을 밤을 낮삼아 행하여 모자람을 채워 운용하였은즉, 가히 한쪽 어깨에 해당할지라.

성부께서 하명하시와 <이 글을 나의 바른 어깨(右肩)에 걸어라>하시니 당시에 열여섯 사람이 당참한 바, 당참자의 성명은 다음과 같도다.

김춘식, 이준봉, 이준민, 조성관, 김성도, 이환우, 신현철, 김종한, 신대안, 임무순, 서종태, 김만호, 정성호, 김양호, 김선진, 신현구로서 금성 장대 양기초 공사시 제반 치성비와 기초공사 비용을 추심주선 헌납케 되었으므로 여기에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명하는도다.

 


(4) 동곡 기지건설의 고난과 성모님 체백 이안

 


제목을 구하여 동곡에 성전을 짓는 동안 세상은 호열자로 교통이 두절되고 영남으로부터 이주해 와서 날마다 종역하는 식구는 오,육십명이 되었는데 양식은 떨어져 모두들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며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 당시 금산(金山)일대는 해방으로 인하여 그동안 지하에 숨어 있던 군,소 교단이 할거하여 서로 다른 교판을 꾸미니, 해원과 상생, 보은을 위주로 하는 성부님의 대이념은 간곳이 없고, 난립한 교단끼리 서로 찢고 부수는 모략과 중상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각 교중의 비밀을 내탐하여 모략하고 중상함으로써 금품을 탈취하는 등 모랙배도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모략배들의 무고로 인하여 선사는 좌익 사상가로 지목되어 경찰서에 투옥되어 닷새동안 모진 고문으로 절명 직전까지 이르기도 하였으며, 정사는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간난신고를 무릎쓰고 영남을 두차례나 다녀왔으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선사와 정사는 고생하는 식구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사이 수개월을 먹을 것에 주린 식구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척수까지 맞추어서 다듬어 놓은 성전에 쓸 재목을 울면서 토막토막 끊어서 밥그릇, 세수통, 복기접시 등을 만들어 호밀과 바꾸어다 죽을 쑤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이에 선사와 정사는 비통한 마음으로 영상을 한데 모아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고 같이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천지와 도중 형제들 앞에 사심으로 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식구들을 전부 구미란에 가게하고 천기 76년(4279, 1946, 丙戌) 8월 26일 아침 마지막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모님께서 하강하시와 꾸짖어 명령하시되, “이 몹쓸 것들아 너희들이 또 죽을 생각으로 휘발유를 준비하였으니 그래가지고 어찌 끝까지 천지사를 받들 수 있으랴! 너희들은 이 길로 경주로 내려가거라. 그 곳에 있는 팔,구인이 모두 일을 맡아 처리할 것이니 죽더라도 그 사람들한테 가서 통정하고 죽도록 하라.”고 호령하시며, 또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경주로 갈때에 성모님의 체백을 다시 모시고 떠나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또 잃어버릴 염려가 있느니라.”고 추상같이 호령하시었다. 장대골에서 이사올 때 성모님의 체백을 모시고 동곡으로 가라는 명령이 있어 단석산으로부터 용호리 범어골에 체백을 이안하였다가 경주로 내려갈 때 지시대로 성모님 체백을 모시고 가서 신현철의 집에 모셔놓고 조석예식과 제반치성을 받들었다.

정사는 경주 도생 형제들을 모아놓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모두 눈물을 머금고 걱정하였다. 이듬해인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2월, 경주 교인들이 모아준 성금 삼만오천원을 가지고 와서 다시 성전 축조공사를 진행하였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식구들은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면서 역사를 수행해 나갔다. 안노인들은 이고을 저고을 동냥 길을 드나드는데 동냥 나간 경주의 아내가 십여일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지라, 모든 식구가 염려하던 중 하루는 마차에 보리, 호밀, 감자 등 다서가마니를 싣고 돌아와서 김제, 만경 등지를 돌며 동냥으로 모은 것이라하니, 이 말을 들은 온 식구들은 비장한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난날 금성골에 있을 때 성부님의 옥체를 찾겠다는 정성으로 추운 겨울날에 홋옷을 걸친 채 집을 나섰던 일을 비롯하여 언제나 변할 줄 모르는 경주 아내의 일편단심에 감탄하면서 가마니를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그날 저녁, 경주 아내가 돌아오면서 준비한 주과포와 백미 한되를 진지를 지어 올렸는데, 도령형제와 신장들이 하강하시더니 한 신장이 말하기를, “내일 밤에 경주 아내가 구걸해 온 보리, 호밀, 감자 등 한알도 남기지 말고 밥을 짓고 감자를 삶아서 올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여 이튿날 밤에 지시대로 혀여 올리니 어제 하강했던 신명들이 내려와서, “요즈음 배가 고프더니 오늘은 배가 부르도다. 성전 짓는데 부역이나 하자.”하시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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