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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7

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7

경전 및 도서  성경신 성경신님의 글모음 쪽지 2015-02-10 15:10 7,300
(7) 오리알터(鳧卵基)기지 구입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8월 15일, 성모님 화천기념식을 거행하니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도장의 터가 좁으니 터를 넓히도록 하라.”고 하시어, 10월 10일부터 터를 고르기 시작하는데 그날밤에 또 하명하시되, “비록 터를 넓히는 역사라 할지라도 개기제(開基祭)를 지내야 하니 내일은 개기치성을 하라.”고 하셨다. 다음날 개기치성을 올리고 나니,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이 자리는 머지않아 패운이 들어오게 될 것이니, 오리알터 밤나무를 사서 새기지를 닦도록 하고, 이곳에 있는 기왕의 건물도 뒤이어 이축토록 하라.”고 명령하시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명령을 받들기 위해 그 터를 두고 수소문해보니 수백그루의 밤나무가 서있는 그 자리는 정읍에 사는 이판옥(李判玉)의 소유 임야로써 예로부터 그 곳에 가활백만지지(可活百萬之地)가 있다하여 수 많은 지사(地師)들이 답산하여 그 좌,우에는 명당을 찾아 쓴 분묘들이 많았고, 다른 사업상으로도 쓰기 위해 원매자가 적지 않았으나, 산주의 형편이 넉넉하여 도무지 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허행만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사는 이와 같은 형편에 당장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고심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산주가 방문한지라, 반갑게 서로 인사하고 점심을 같이 마친 뒤, 그는 앞문을 열고 건너편에 내다보이는 율목림(栗木林)을 가르키면서, “저것이 나의 소유 임야로써 평수는 약 칠정보나 되는데 수년전부터 몇 사람이 드나들며 매도하라고 조르는 것을 팔 마음이 없어 거절해 나오던 중인데, 이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성화를 대는지라 번잡하기 짝이 없어 팔아버릴 마음을 정하고 있으니 치성때에 실과도 필요할 것이며 또한 관리하기에도 용의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 다른 곳에 팔기 전에 찾아 뵙고 말씀이라도 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성부님게서 친히 인도하시고 운영하시는 일이 이처럼 척척 사우(四遇)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 이미 상식화된 사실이거니와, 음식까지 전폐하고 염려하던 중, 반갑고 신기한 마음 한이 없어 산주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사기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종역하는 도중 식구들은 죽과 나무뿌리를 면치 못하고 있는 처지라, 새기지를 매입할 자금을 만들려고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였으나, 천의에 따라 봉명하면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풀려나감을 생가하며 백방으로 주선한 끝에 겨우 친분이 있는 농우 한 마리를 빌려 원평 장날에 파니 꼭 육만환이었다. 정사는 그 길로 정읍으로 가서 산주를 찾으니 그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지체할 것 없이 매매에 대한 계약서를 들고 대금을 물으니, 다른 원매자들이 팔,구만환을 이야기하니 알아서 달라고 하기에 가진 돈이 육만환이라고 하자, 그는 계약서에 오만오천환이라고 기입하였다. 뜻밖의 일이나 남은 오천환은 마침 나와 인사하는 그집 아들 오형제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성부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미리 깨달을 수 없는 것임을 또 한번 명심하면서 오리알터를 도득할 수 있게 되니 마음이 나를 듯 가벼워지고 언제나 앞길을 열어주시는 하늘에 감사해 마지 않았다.

 

 


6) 육기초 공사(六基礎公事) : 오리알터(鳧卵基)

 


(1) 육기초공사 착공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정월, 새해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정월 20일에 오리알터에 개기(開基)토록 하라.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삼,사월에는 큰일이 있을 터이니, 너희들은 속히 일을 착수하도록 하라.”하시고 다시, “너희들은 정월 14일 저녁나절에 이곳으로부터 오리알터로 건너가는 냇물에 섬다리 열두개를 놓되, 그 속에 엽전 한,두푼씩 넣을 것이며 내(川) 양편에 오색등 하나씩을 달도록 하라. 너희들은 머지않아 이곳에 발로는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니라.”고 하시었다. 14일 저녁무렵에 하명하신대로 실행하고 2월 20일, 오리알터에서 개기제(開基祭)를 올린 다음, 정사는 성도와 경주를 데리고 밤나무 숲 곳곳에 측량 푯말을 세우고 이튿날부터 터를 닦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2) 성부님 유품(遺品) 및 중화경(中和經) 입수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3월 3일, 각 기관장들을 초청하여 기념치성을 올린 다음 주연을 베풀고 있었는데, 밖에 사람이 찾아 왔다고 하여 나가 보니 곽봉훈(郭鳳勳) 노장스님이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불교 학승으로서 80이 넘는 노구로 수년전 금산사 강원에서 불자들을 기른 일이 있는 사람이라 약간의 지면이 있었는데, 책보에 싼 것을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금산사에서 강(講)을 할때에, 김응종(金應鐘)이라는 사람이 증산선생의 유적(遺蹟)이라고 하면서 맡기고 간 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지금까지 두루 찾아보아도 만날 수 없었고 오늘 전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있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사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곽봉훈 스님의 말을 공개하고 여러 사람의 입회하에 보자기를 열어보니 두 권의 책과 한 개의 인장갑이 들어 있었는데, 책은 중화집(中和集)이라 쓰여진 것과 또 전자체(篆字體)로 된 친필집(親筆集) 한 권이었으며, 인장갑 안에는 성부님 제세시 사용하시던 친인(親印)과 함께, <陰年土 陽月土 干支看 三吉日 重陽金日 舜任 信傳 東谷>이라 쓰인 글이 들어 있었다. (이 날은 己丑年 戊辰月 庚申日 陰三月三日 이었다.)

너무나도 신기하게 간지와 일진이 부합되어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봉훈장은 그 자리에서 증언하기를, “팔년 전에 김응종이라는 노인이 유저(遺著)와 인장(印章)을 가지고 와서 잘 읽어 새겨보라 하고 간 뒤 다시 찾아오지 않으므로 인장갑 속의 글을 보니 기축 삼월 삼일에는 어디에고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다만 구암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찾아왔는데, 의외에도 증산선생의 따님이 계시고 그의 이름이 <순임(舜任)>이라 하니 정법(正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으리라.”고 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증산법종교 간행서 「중화경」참고 - 상제님 친인, 중화집, 전자체 수록

 


(3) 성부님과 성모님의 장례식(葬禮式) 봉행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2월 15일, 성부님께서 하강하시어 명령하시되, “오는 3월 15일에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오리알터는 나와 너의 어머니의 영원한 안장지니라. 이 날에는 장례(葬禮)라고 하지말고 장사(葬事)라 하여라. 이날 장사는 천하장사(天下葬事), 지하장사(地下葬事), 인간장사(人間葬事), 천지대장사(天地大葬事)니라.”고 하시었다.

화은당 선사께서 명령을 받고 보니, 성인의 피를 홀로 받아 넓고 넓은 대해 중에 외로운 일엽편주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애통한 가슴을 부여안고 숨어서 지성으로 기도에 이은 기도의 생활과 잇달아 내리는 명령의 봉행에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길을 생사를 걸고 지나온 피맺히는 과거의 역정을 생갈할 때, 오늘 이 한 명령을 얻어 모시기 위하여 바쳐나온 반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하여 한편 기쁘고 한편 서러워 목놓아 통곡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두고 생각하면 넉넉지 못한 경제도 걱정이려니와 그동안의 준비가 여간 바쁘지 않겠으므로 눈물을 거두고 성전을 물러나와 형제들로 하여금 업무를 분담하여 건축을 서두르고 성묘 기지를 닦으며 꽃상여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 뒤 당일 행사 절차에 관한 성부님의 지시가 계시니 그것은 유공한 도생들로 하여금 운상하되, 그들에게는 모두 삼베 양복을 만들어 입히고, 상여마다 좌,우 삼십명씩 모두 백이십명으로써 운상토록 하라는 명령이셨다.

명령대로 다시 준비를 보충하여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3월 15일 장사식을 거행하였다. 삼베 양복을 입은 운상꾼 육십명이 앞에서 흰상여로 성부님의 옥체를 모시고 또, 그 뒤에 삼베 양복을 입은 육십명이 오색 꽃상여로 성모님의 옥체를 모시고 뒤따르고, 그 뒤에 상주(喪主)와 수백명의 복입은 신도가 줄을 지어 따르는데, 앞에 가는 백상여 운상채 위에 올라선 인보자가 태극기를 좌,우로 흔들며 천천히 메기는 우주영가(宇宙詠歌)의 구절을 운상꾼들은 구슬프게 받으면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그 뒤에는 수백명의 복인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정연하게 열지어 뒤따르니, 수백장의 만기(輓旗)들이 봄바람에 너울거리는 가운데 하얗고 울긋불긋한 두채의 상여는 봉황인듯 공작인듯 아름답고 숭고한데 장사행렬은 실로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주영가(宇宙詠歌)

 


가소로다 가소로다 세상사가 가소로다

이내몸이 생겨나서 사십구년 낭도타가

초당에 깊이든잡 일몽으로 화하여서

한곳으로 돌아드니 십주연화 분명하다

무기궁에 깊이앉아 사면을 바라보니

철통같이 굳은속에 일로를 난통이라

태화기운 부여잡고 영심만을 굳게지켜

오는때를 기다리니 홀연뇌풍 상박소리

건곤이 진동하고 무기궁이 요란터니

홀연일로 통개하야 음양이기 내닫거늘

나도따라 나서보니 삼리화 벌려있고

삼청일월 밝았는데 벽목삼궁 여기로다

음양을 따라나서 청림새 좁은길로

차츰차츰 내려가니 상중하 섰는청림

정이삼월 경이로다 이수를 요량하니

한달에 삼천육백리 씩이로다

삼월이수 마련하니 만팔백리 뿐이로다

천황씨 목덕운은 만팔천세 하였는데

이내운로 어이하여 만팔백리 뿐일런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러하고 그러하다

칠천이백 연기빼여 칠십이둔 며련하던

강태공위 조화수단 이금에 안재재요

삼천법계 넓은도장 팔백연화 나열하고

석가여래 무궁도술 자고로 유명하다

미륵전 높은대에 뚜렷이선 저금불은

나를보고 반기는듯 감중련한 이이치에

이허중이 따라났다 구성산 높은봉에

울고가는 저봉황은 성인이 나계시니

황화수 일천년에 다시한번 맑았도다

동구에 배례하니 적송자 나왔구나

장자방은 어디가고 요지연만 진동한가

서왕모의 상존이라 안기생을 보았는가

청춘작반 호환향은 두자미의 지은글귀

나늘두고 일렀던가 양안도화 협거진은

어주자가 지시하니 무릉원이 여기로다

해상에 삼신산은 구름밖에 둘려있고

눈앞에 모악산은 반공에 솟았는데

딸고따른 제생들은 나의부탁 아니잊고

일일상면 가애로다 백발이 소소하야

선풍에 흩날리고 금풍에 저저귀로

옥경대에 올랐구나 책자에 치부법문

그다지도 못깨닫고 지동지서 혼침한가

개명장 나는날에 일체개심 하였어라

동자야 비를들어 만정락화 쓸어내라

동방일월 대명시에 만세동락 하여보세

 


장사행렬은 구릿골로부터 출발하여 구로(舊路)로 나서 수양산(首陽山) 서편 마루밑을 돌아 신작로로 올라서서 오리알터 장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두 도령과 천지신명들이 둘러싸고 옹위하며 따르고 앞뒤로 메기고 받는 운상소리와 염불소리는 좌,우 산천에 메아리 치니, 고애로운 화은당 선사님의 그 생애는 출천지대효로서, 오늘이 있음으로서 빛나게 된 것이었으니, 미어질 듯 벅차오르는 가슴은 가눌 길이 없었다.

우리의 장사행렬을 구경하려고 원근으로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산과 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장지인 수양산 일대는 종일토록 사람들로 마치 눈에 덮인 듯 하얗게 되었다.

이튿날에 풍진이 일고 일기가 몹시 요란하더니 구성산(九城山)으로부터 봉황 한쌍이 날아와서 성부, 성모님의 묘소가 있는 수양산 영봉둘레를 빙빙 돌며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구성산으로 날아가더라. 그날 교인들은 풍악을 울리고 구릿골을 다녀서 오기초지인 지금의 금평호수 자리에서 노래와 춤으로 즐겨 놀았다.

그 날,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장지에 습기가 많으니 내 체백을 식당 윗방으로 옮겼다가 4월 9일 묘소에 봉안하라.”고 하심으로 그대로 봉안하였다. 4월 8일 기념식에 서울에서 류동열(柳東說)장군 일행이 내려오고 그 이튿날인 4월 9일에는 전북 도청과 부근의 각 기관으로부터 내림한 귀빈들의 참석하에 전일과 같이 상여를 운반하여 예식을 거행할 때에, 과거 십여성상을 두고 성부님의 옥체를 찾아 모시고자 하던 일편단심으로 많은 고생과 파란곡절을 겪어 온 것을 생각하고 오늘날 귀빈의 참석하에 성부님의 옥체를 영영 안장하게 되니,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와 하늘을 부르고 통곡하는 선사님의 모습을 대하는 사람마다 눈물을 머금고 당신의 출천지 대효에 감격하였다.

 


(4) 삼청전(三淸殿)을 준공하고 미륵불상(彌勒佛像)을 봉안

 


천기 79년(4282, 1949, 己丑) 5월 단오절(端午節)치성을 올리는데 운장상제와 천존신장(天尊神將)이 하강하시어, “성전을 짓고 열석자 금불상을 조상하여 모시되, 6월 24일 화천기념일에 착수토록하라.”고 하시었다.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천지신장이 강림하여 말하기를, “성부님께서 미륵불상으로 지상에 현현하시게 되니, 천상에서도 대회를 열었노라.”고 하시면서, “성부님께서 천상 마리지일월삼용(嗎哩池日月三龍)에 누워 계시다가 역석자의 금불로 화현하시게 되면, 그 삼용도 서게 되느니라. 12월 26일에 불상 조성을 마치고 예불을 올리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또 말씀하시길, “기념치성이 끝나면 바로 불상조성을 시작하되 조상자 마음대로 하지 못할지니, 선사님께서 천상에 오르내리시면서 제반 지시를 받도록 도수를 두었는고로, 조각자는 일일이 선사님의 지도를 받아 조각을 하게 될 것인즉, 그리알고 전상에 대하여 치성을 자주 올리기 바라노라.”고 하시었다. 그 뒤 조상자(造像者) 김일섭(金日燮)은 선사님의 교시하심에 따라 미륵금불상을 조성하였다. 10월 27일 개안식(開眼式)을 올리고 나니 천지가 모두 황금색으로 변하여 사물을 보나 산천을 보나 눈에 보이는 만상이 모두 금빛으로 화하더니 삼일 후에야 다시 원색으로 보이게 되었다.

공사는 계속되어 삼청전(三淸殿)을 12월 23일에 준공하고, 12월 26일을 재생신기념일(再生身記念日)로 정하고 열석자 증산미륵불상 봉안식(甑山彌勒佛傷 奉安式)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이 삼청성전(三淸聖殿)을 짓고 열석자의 미륵금불을 모시게 됨은 성부님의 명령계시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니 그것은 재세시에 ‘나는 미륵불이노라’하신 말씀과 ‘내가 장차 열석자로 오리라’ 또, 남겨놓으신 문장 가운데에 ‘십이월 이십육일 재생신(十二月二十六日再生身)이라 하신 말씀들을 모두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 불상 봉안후, 지금까지 네차례의 발한(發汗)이 있었기로 이를 약술한다.

1) 1차 : 천기 90년(4293, 1960, 庚子) 3월 11일

2) 2차 : 천기 91년(4294, 1961, 辛丑) 4월 1일

3) 3차 : 천기 92년(4295, 1962, 壬寅) 9월 16일

4) 4차 : 천기 116년(4319, 1986, 丙寅) 12월 26일

 


(5) 성부님 체백의 수난

 

성부님의 체백은 재세시의 종도들에 의하여 동곡 장탯날 기슭에 장사하여 모셔졌는데, 그 후 무극도 교주였던 조철제에 의하여 야밤에 성부님의 옥체가 도굴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일부 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 의하여 성부님 옥체는 수난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성골을 서로 차지하려는 각 교파간의 싸움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성골을 탈취해가는 실력행사와 법정소송이 제기되는 등 큰 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보천교의 교도 수십명이 무극도를 습격하여 성부님의 체백을 다시 탈취하는 과정에서 왼손 성골이 분실되고 말았다.

천기 79년(4282, 1949, 己丑)에 태극도 신도로 있다가 본교에 납명한 엄병윤, 신도균, 정기택이 분실된 성부님의 왼손 성골은 그 당시에 조철제가 수습하여 보관해 오고 있다고 제보하므로, 이에 선사님께서는 성부님의 분실된 성골을 찾아 모시고자 법적인 절차를 밟으니, 이듬해 정초 태극도 임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분실된 성골의 소재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무지몽매한 자들에 의하여 성골의 한 부분이 영원히 분실되고 말았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 서별당(西別堂) 건립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정월에 동곡에 있는 옛 성전을 뜯어다가 서별당(西別堂)을 짓고, 응접실 및 삼문(三門)을 4월에 완공하였다.

 


(7) 6.25 동난으로 인한 선사님의 남하(南下)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5월 4일 삼청전에 예불을 드리니 미륵불께서 하명하시되, “성전 정문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못을 치고 시각을 지체말고 대구(大邱)로 향하여 떠나도록 하라.”는 추상같은 호령을 하셨다.

이에 선사님은 교중 식구들을 성전 마당에 모이도록 한 다음 목수들을 시켜 통나무로 성전 정문에 못을 박도록 하고 - 부모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경제상 애로가 있어 경상도 방면으로 구걸차 내려가면서 부득이 철봉하고 떠나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용서하시옵소서 - 라는 글을 써 붙이고, 성부님의 추상같은 명령으로 내일은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다녀올 동안 어떠한 세상변동이 있을지라도 진심을 지키어 잘 믿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시하고, 다음날 아침 선사는 정사와 이환우, 이우형, 배달석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셨다. 김제를 거쳐 하룻밤을 세우고 이튿날 대전에 도착하니,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하여 벌써 서울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부님께서 불시에 명령을 내리신 뜻을 비로소 깨닫고 물밀듯 내려오는 피난민들 틈에 끼어 겨우 기차를 얻어타고 대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구에 도착한 일행은 교중 형제인 이교태(李敎台)의 장자 종회(鍾會)의 집에 여장을 풀고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8) 인민군 남하(人民軍 南下) 저지를 위한 수운치성(水雲致誠)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5월 6일, 종회의 집에서 저녁 진지상을 올리고 예를 드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큰일이로다. 대구는 최수운(崔水雲)이 참사를 당한 자리라. 수운은 나라를 개명시키고자 한 혁명 사상가로서 이번 일도 그가 하는 일이라. 내일은 수운을 위하여 치성준비를 갖추어 달성공원(達城公園)에 가서 치성을 드리되, 창호지에다 - 이 난리가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범치 못하리라.- 고 써서 설상 앞에 펴놓고 치성을 올린 다음, 글은 소화하라.”고 하시었다.

다음날 달성공원에 가서 명령대로 치성을 봉행하고 축문과 지도를 불사르니 수운선사께서 하강하시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 발을 굴리시면서 명하시기를, “이놈들아 물러가라. 대구로부터 부산까지는 못들어온다. 너희놈들이 대구 이남을 침범하여 끝까지 난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라가 없어진다.”고 호통을 하시었다.

 


(9) 밀양 종남산(終南山) 치성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5월 8일, 저녁 예를 올리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되, “큰일났도다. 그러나, 너희들은 염려를 말고 날이 새면 밀양으로 내려가도록 하되, 우형을 먼저 보내어 거처를 정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에 우형은 미리 발정하여 밀양 종남산 구배리(九拜里)에 있는 이화학(李和學)의 집에 자리를 정하니, 이에 일행은 구배리로 내려가게 되었다. 밀양에 있는 교인들과 더불어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날마다 치성을 올리고 북을 치고 춤을 추는 등, 풍악을 울리며 수십명의 인원이 회집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자 일체 행사를 보게 되었다.

 


(10) 부산(釜山)으로 내려가 치성 올리다.

 

어느날 성부님께서, 밀양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이 내리시므로, 선사님과 일행은 부산으로 내려가 해변이며 섬중에서 명령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치성을 올렸으니, 그것은 국토회복을 위한 치성이었다.

 


(11) 선사님 오리알터로 복귀하다.

 


천기 80년(4283, 1950, 庚寅) 9월 그믐에, 평리(平里)에 사는 박성근(朴成根)의 집에서 치성을 올리니 성부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이제 인민군도 물러가고 차차 평온해가니 곧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지시하시었다. 수개월간에 걸친 남하생활에서도 선사님은 본부를 부르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기를 매일 두,세차례씩이나 하시었는데, 이렇게 명령를 받고 보니 본부는 혈심으로 지은 성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도 없어졌을 것이며, 삼사십명의 교중형제들도 모두 죽었으리라고 생각이 미쳤을때는 염려되는 심정 금할 길이 없었다.

전쟁통이라 교통이 여의치 못하므로 가까스로 본부에 도착하여 보니, 본부의 각 전각이며 남아있던 식구들도 모두 무사히 있는지라. 실로 성부님의 덕화와 힘이 지중함을 새삼 느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사님은 성전에 들어가 불상앞에 엎드려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저녁에 교중 형제 자매들을 회집하여 동란중에 얼마나 고생을했는가 위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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