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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 3장 교단의 발전기-1

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 3장 교단의 발전기-1

경전 및 도서  성경신 성경신님의 글모음 쪽지 2015-02-10 15:12 7,546
제 3장 교단의 발전기

 


1. 교단의 변천과 주요일지

 


1) 포항 용왕치성

 


선사님이 선화하시자, 그 뒤를 이어 김병철 정사님이 초대회장에 취임하시어 교단을 통솔하시게 되었다. 천기 89년(4292, 1959, 己亥) 7월 11일 정사님이 포항에서 용왕치성 준비를 지시하시어 포항지부장 김선진과 도생들은 제물일체를 준비하였는데, 정사님이 포항도생 50명과 함께 죽도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그동안 계속되던 장마가 그치고 햇빛이 작열하였다. 치성을 올리기 앞서 정사님은 김선진에게 지시하여 주위에 빈집을 찾아두라고 말씀하시고 용왕치성(龍王致誠)을 거행하였다. 치성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일기가 돌변하여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도생들은 미리 찾아두었던 빈집으로 피우하여 치성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2) 정족치성(鼎足致誠)

 


천기 91년(4294, 1961, 辛丑) 3월에 정사님이 솥을 떠 받치는 다리가 세 개 있으니 곧 강화도, 울릉도, 제주도라 하시고 정족치성을 올리셨으니, 3월 7일 강화도에서 치성을 올리고, 3월 15일에는 울릉도에서 치성을 올렸는데, 이때에 본부 및 지부에서 다수의 도생이 참가하였으나, 치성시에는 정사님, 이환우, 정상탁 3인만으로 행사를 거행하였다. 치성을 마치고나니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벼락이 일어나는 등 천기변화가 있었다.

다음해 천기 92년(4295, 1962, 壬寅) 3월 15일, 제주도에서 전해와 같이 제반 준비를 갖추어 치성을 올렸으니, 정족치성을 완료하게 되었다.

 


3) 약장제작(藥藏制作)

 


천기 91년(4294, 1961, 辛丑) 3월 15일, 울릉도에서 정족치성을 올리고 돌아올 때, 향나무를 사가지고 본부로 돌아왔는데 정사님이 그 나무로 약장을 제작하게 하시니 4월 8일, 약장이 완성되는 날 비가 쏟아졌다.

 


4)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위한 산신치성(山神致誠)

 


천기 92년(4295, 1962, 壬寅)6월 14일, 정사님께서 세계정세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시고 지부장 회의를 소집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산신치성을 올릴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전국 각 지부에서는 지부 주위에 명산을 정하여 각 지부 도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6월 19일 입공식을 올리고 100일 동안 자정에 산신치성(山神致誠)을 봉행하였다.

9월 29일 자정에 졸공식을 하고 산신치성을 모두 마쳤는데 다음날, 전세계를 핵전쟁 일보직전의 상황으로 몰고가던 소위 「쿠바사태」가 해결되어 세계대전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5) 월남(越南) 파병(派兵)을 위한 용왕치성(龍王致誠)

 


천기 95년(4298, 1965, 乙巳), 정사님이 대구 지부장이던 김대수에게 명하여 부산에 가서 이창훈과 협의하여 용왕치성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시므로 봉명하여 제반행사를 준비하였다.

정사님과 각 지부대표 및 부산도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삼동 앞 바다에 자리를 잡고 제물(祭物)을 진설하였는데 제상의 동쪽에는 청룡(靑龍), 서쪽에는 백호(白虎)의 화상을 그려 세우고 중앙에는 현무경(玄武經)을 장대에 매어놓고 치성을 거행하였다.

치성이 끝나자마자 큰 파도가 몰아치니 제상에 세워 놓았던 청룡, 백호의 화상과 현무경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용왕치성이 거행된 후에 맹호, 청룡 부대가 월남에 파병되어 갔다.

 


6) 성답(誠畓)을 마련하다.

 


천기 96년(4299, 1966, 丙午) 정례회의에서 연례치성(年例致誠)의 기금조(基金條)로 논(畓)을 매입하여 매년 경작에서 수확한 벼로써 치성경비도 충당하고 본부 임원들의 식량으로도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이후 3년간에 걸쳐서 도생 매호당 3,000원 기준으로 성금을 모아 천기 98년(4301, 1968, 戊申)에 답 26두락(斗落)을 매입하였다.

 


7) 구암정사(鳩岩整師) 선화(仙化)

 


천기 99년(4302, 1969, 己酉) 10월 7일, 정사님께서 아침 진지를 잡수시고, 각 전마다 참배를 드리고 숙소에 드시어 본부 가족을 보두 불러놓고 뒷일을 당부하시고, 오전 10시에 잠자듯이 조용히 선화(仙化)하시었으니 향년 65세였다.

이환우 부회장을 장례준비위원장으로 각 지부 대표가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장례절차를 준비하여 10월 12일 각 교단 원로와 각 지부에서 많은 도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묘지는 화은당 선사 묘역에 쌍분(雙墳)으로 안장(安葬)하였다. 33세에 선사님을 만난 이후 그를 도와 1기초에서부터 6기초까지 제반공사를 받들어 교단의 초석을 다졌으니, 일심 가진 도덕군자의 표상이라. 이제 정사님마저 선화하시니 도생들의 마음은 슬프기 한량없었다.

 


8) 교단 부동산 소유권의 공유화(共有化)

 


천기 98년(4301, 1968, 戊申), 창교 이후 본교가 취득한 임야(林野), 대지(垈地), 건조물(建造物), 기타 교단자산이 등기상 김병철님 개인소유로 되어있었는데, 제 2대 회장으로 이환우님이 취임하시고, 천기 99년(4302, 1969, 己酉) 12월 25일, 각 지부 대표회의에서 논의한 바, 교단의 자산은 전신도의 혈성으로 이룩된 만큼 사유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동안의 여건상 어쩔 수 없어 정사님 명의로 등록하여 왔으나, 교단의 장래를 생각할 때 굥유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모으고 교단 자산을 교단명의(敎團名義)로 이전조치하였다.

 


9) 사선조해원치성(四先祖 解寃致誠)

 


천기 101년 (4304, 1971, 辛亥) 6월 24일, 화천기념치성을 봉행하고나서 이환우 회장님이 지시하시기를 각 신도 가정마다 100일동안 기도를 봉행하라고 하시므로, 모든 도생들이 100일 기도를 봉행하였다. 이어 본부에 각 지방대표들을 소집하여 사선조해원치성을 올려야 한다는 회장님의 제의를 참석한 지방대표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사선조해원의 길을 열어놓았다.

 


10) 본부에 전기가설

 


천기 102년 (4305, 1972, 壬子) 4월, 각 지부도생들이 본부의 전기가설비로 25만원의 성금을 모아주니, 이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본부경내 및 각 전각에 전기시설을 갖추고 6월 10일에 최초로 점화하였다.

 


11) 성신사 설치(誠信祠 設置)

 


교단 설립이래 수종헌성(隨從獻誠)하던 도생들의 별세가 늘어나게 되자, 도생 사후의 영혼문제를 논의한 결과 사후의 계속적 수도와 신행을 위하여 성신사(誠信祠)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공사를 진행하여 천기 104년(4307, 1974, 甲寅) 9월 19일, 성신사를 완공하여 당시까지 본교를 신행하다가 별세한 160여위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이후로 매년 9월 19일 상제님 탄강기념일에 당해연도에 사망한 도생의 위패를 일괄 봉안하여 향사를 거행하여 오고 있으며, 천기 127년(4330, 1997, 丁丑) 현재까지도 위패는 700여위에 이르고 있다.

 


12) 성답(誠畓)의 공유화(共有化)

 


교단의 연례치성의 기금조로 천기 98년(4301, 1968, 戊申)부터 각 신도의 성금을 모아 현재까지 성답 34두락을 마련하였는데, 성답의 소유권이 종교단체의 명의로 등록할 수 없어 교단 대표자인 이환우 회장님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회장님이 선화하시고 천기 108년 (4311, 1978, 戊午) 10월, 김대수 회장님이 새로 취임하자, 이것을 중부지부 도생 김춘도, 박화진, 이영흥, 김정길 등 4인의 명의로 이전하여 증산법종교 명의로 명세증명하였다.

 


13) 사해용왕 기우제(四海龍王 祈雨祭)

 


천기 112년(4315, 1982, 壬戌) 4월경부터 윤5월까지 전국에 걸쳐 심한 가뭄 때문에 농작물이 고사지경에 도달하고 민심도 흉흉하였다. 이에 본부에서는 사해용왕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전국 각 지부에 공문을 발송하여 윤 5월 5일 정오에 동서남북 사해에서 일제히 용왕치성을 올리도록 지시하였다. 동해치성은 포항에서 봉행하니 포항, 안동,의성지부가 참가하였으며, 서해치성은 강화도에서 봉행하니 서울, 여주지부가 참가하였으며, 남해치성은 부산에서 봉행하니 대구, 밀양, 창녕, 부산지구가 참가하였으며, 북해치성은 속초에서 봉행하니 태백, 봉화, 사북지부가 참가하였다. 윤 5월 5일 정오, 사해에서 일제히 치성을 봉행하고나니 오후 1시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전국의 가뭄이 모두 해결되었다.

 


14) 만고종(萬古鐘) 주조(鑄造) 및 종각건립(鐘閣建立)

 


천기 110년(4313, 1980, 庚申) 12월 25일, 김대수 법종사님의 제의로 종각을 짓고 종을 주조하기로 각 지방대표회의에서 결의되어 각 지부에서는 고철을 수집하였고 모든 도생들의 성금을 모아 종을 주조하게 되었으니, 주조자는 김제에 사는 임삼수였다. 전체 설계는 김대수님이, 문자 휘호는 이태우, 문자 조각은 최종호가 맡았고 박호주, 김외한의 헌성으로 건립된 종각은 도생 최종호가 설계하여 완공하였다.

종원 제원은 무게가 3천 300근(3千 300斤)이며, 높이 5척4촌(5尺4寸), 넓이 3척5촌(3尺5寸)으로 만고종(萬古鐘)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이 종명은 성부님 제세시에 「남아숙인선삼재, 하산불양만고종(男兒孰人善三才 河山不讓萬古鍾)」이라는 문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2년간에 걸쳐 전신도의 정성이 모여 만고종이 완성되니, 천기 112년 (4315, 1982, 壬戌) 4월 12일, 내외귀빈과 전국에서 올라온 도생들의 참석하에 타종식을 봉행하니, 이는 후천선경의 초종성이며, 국운융창의 신종성이며, 선남선녀의 메아리로서 하루 3번씩 타종하고 있다.

 


15) 해왕산군치성(海王山君致誠)

 


천기 112년 (4315, 1982, 壬戌) 9월 21일, 본부와 각 지방대표 24명이 모여 치성물을 갖추어 회문산(回文山) 24혈에 산군(山君)치성을 봉행하고, 이어 변산(邊山) 24혈에 가서 해왕(海王)치성을 올리고, 돌아오면서 동곡약방에서 치성을 올리고 고축하여 치성을 무사히 봉행하였다.

 


16) 천화루(天和樓) 화재(火災)

 


천기 113년(4316, 1983, 癸亥) 5월 9일 밤, 성전문루인 천화루에 화재가 발생하여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문서가 소실되었는데, 바로 인접해 있던 삼청전과 화은당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였으니 신기할 따름이며, 경찰의 화재원인 조사결과 전기누전으로 인해 불이났음이 밝혀졌다. 천화루가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자 영대 앞이 확 터여서 동곡약방과 구성산이 바로 보이게 되었다.

 


17) 국태민안치성(國泰民安致誠)

 


천기 113년(4316, 1983, 癸亥) 10월에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정족격(鼎足格)인 삼개도서(三個島嶼)에서 국태민안치성을 봉해하였으니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강화도 치성은 10월 3일 서울과 여주지부 헌성으로 본부 및 각 지부 도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성을 봉행하였다. 당시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던 태풍이 진로를 바꾸어 강화도 북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올라갔다.

울릉도 치성은 안동, 태백, 봉화, 단양, 의성, 포항지부 헌성으로 본부 및 각 지부 도생들이 참가하여 봉행하였다. 10월 11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치성장소를 숙소인 대동여관 옥상에 정하였는데, 치성시에는 천둥 및 지동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치성장소인 대동여관 옥상에는 빗물 한방울 떨어지지 않았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제주도 치성은 대구, 밀양, 창녕, 부산, 중부, 서산지부 헌성으로 본부 및 지부대표 33명이 10월 27일 제주도에 도착하였고, 숙소는 제주시 대동여관이었다. 10월 28일, 치성장소를 비사봉으로 정하여 그곳으로 향하여 올라가던 중, 수 많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치성을 봉행할 수 없을 지경이라 내심으로 많이 염려하였는데, 치성장소에 당도할 즈음 불현듯 화창하던 천기가 돌변하여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니, 내왕하던 관광객들이 피우하기 위하여 모두 산밑으로 쫓기듯 하산하고 우리도생 일동은 이내 치성장소에 도착하여 가져온 치성물을 진설하여 조용한 가운데에서 치성을 잘 마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천우신조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 지운통일치성(地運統一致誠)

 


천기 114년(4317, 1984, 甲子) 4월 10일, 지운통일을 위하여 본부와 전국의 지부대표 및 도생들이 참가하여 지리산 뱀사골에서 대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을 봉행함에 갑자기 뇌성이 일어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는데, 치성이 끝나자 일기가 다시 쾌청하여 원상으로 회복하였다.

 


19) 수륙대치성(水陸大致誠)

 


천기 118년(4321, 1988, 戊辰) 9월 30일, 본부 및 전국지방대표와 임원 55명이 참가하여 서울지부와 여주지부의 주선으로 강화도 봉천대에서 수륙대치성을 올렸다.

 


20) 망량치성(魍魎致誠)

 


천기 123년(4326, 1993, 癸酉) 6월 24일, 화천절 기념치성을 맞이하여 전국에서 300여 신도가 모인 가운데 자시에 영대치성을 봉행하고 난 뒤, 영대옆 잔디밭에서 경내의 모든 전기불을 소등한 가운데 망량치성을 올렸다. 여기에는 개고기, 막거리, 묵, 찰밥, 오색과일, 어물 등의 제수를 진설하였고, 각 지부에서 준비한 10원짜리 동전 각 얼마씩을 신위전에 올렸다. 그리고 오색으로 만든 오방기와 오색관 50개를 준비하여 치성시에 사용하였다. 교조님 재세시 천지공사에서 천지(天地)는 망량이 주장(主張)케 하시니 그 깊으신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21) 조왕치성

 


천기 123년(4326, 1993, 癸酉) 7월 17일, 전국의 도생 각 가정마다 부엌에 3되 3홉으로 떡시루와 과일 5가지, 술과 포를 준비하여 진설하고 조왕신에게 치성을 올렸다.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일월(日月)은 조왕이 주장케 하시니, 치성의 의의를 교령으로 전국지부에 시달한 별첨 공문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금번 실시하는 조왕치성을 도인 각 가정마다 빠짐없이 실행하여야 천지운로에 적응함으로 각 지방대표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고자 합니다.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좌선 四三八 천지는 망량이 주장, 九五一 일월은 조왕이 주장, 二七六 성신은 칠성이 주장’이라 하신 삼대치성을 오는 구월 기념절 이내에 하기로 여러 도인분들과 같이 뜻을 합하여, 망량신 치성을 지난 화천기념일에 엄숙하게 실행하였으며 조왕치성에 즈음하여 그 중요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하루 세끼를 먹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식사를 장만하는 곳에 조와이 계시어 1일 3식을 보살펴 주신다고 생각할 때 그 은덕이 너무나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다같이 보답합시다.

상제님이 ‘지천태운으로 곤도에 녹을 붙였다.’ 하심은 바로 일월은 조왕이 주장토록 하신 원리라 지천태가 이루어지고, 곤도에 녹이란 바로 조왕이요, 조왕과 더불어 취사하는 각 가정의 가모가 한 평생 성의를 다하여 그 가족에게 식사를 제공할 때 여기에 화복을 맞는 조왕이 계심이라.

과거 우리 조상들은 자손들에게 바로 이런 교훈을 하셨습니다. 선천시대는 너무도 못살아서, 절화지경에 이르러서 불을 때지 않으면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양식이 없어서 밥은 못짓더라도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라. 그래야 우리집 조왕이 연기를 타고 천상에 올라가 조회에 참석하여 복을 타오신다. 불을 아니 때면 조왕이 조회에 못간다.’고 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일월은 조왕이 주장케하사, 선천에서 무척이나 고생하던 주부해원을 위주로 곤도에 녹을 붙이고 지천태운을 정하심에 각성하여 조왕치성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줄 압니다.

주부는 일찍 일어나서 취사처를 소재하고 밥을 지읍시다. 상제님 하신 말씀이, ‘늦잠 자는 사람은 내 눈에 송장으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문명과학에 힘입어 전기밥솥에 스위치만 켜놓고 늦잠 자는 습관을 고칩시다. 상제님이 정하신 인간개벽 시대를 맞이하여 무엇으로 면하리오. 그 심오하고 오묘한 법칙을 공부 없이 알 수 없고 안다고 할지라도 이법 위주라야 하겠습니다. 만시지탄이라 아니할 수 없어 천신만고를 무릎 쓰고 한 가지라도 알았으면 실천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22) 영대에서 천제(天際) 봉행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핵문제가 대두되고, 이로 인하여 남, 북한의 대치상태가 시간이 흐를수록 첨예한 긴장속으로 빠져들면서 전쟁설등이 유포되어 민심이 동요되고 사회기강이 문란하여지자, 김대수 법종사님이 천제를 봉행하기로 결정하시고 교령(敎令)으로 전국의 지방대표들을 소집하여 천기 124년(4327, 1994, 甲戌) 5월 21일, 본부 및 지방대표가 6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대에서 천제를 봉행하였다.

천제를 봉행한 일주일 뒤에 북한을 통치하던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고, 남북 대치정국이 핵문제에서 김일성 조문문제로 옮겨갔으며, 북한 핵문제로 조성되었던 긴장상태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23)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다

 


근래 보기드문 가뭄과 불볕더위가 계속되자 전국의 농토와 식수가 말라 들어가고 민심이 각박해져갔다. 천기 124년(4327, 1994, 甲戌) 6월 24일, 상제님 화천절을 맞이하여 자시에 영대치성을 올리고, 전국의 신도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대옆 잔디밭에서 우사신명(雨師神明)에 기우제를 올렸다. 행사시 창공에 별들이 초롱하게 빛나더니 기우제를 마치자마자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이튿날까지 내린 비는 전국의 가뭄을 해소하고 지나갔는데, 그것은 기상관측소에서도 미처 관측되지 않았던 갑자기 발생한 태풍으로, 태풍피해는 주지않고 비만 주고 갔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를 효자태풍이라고 불렀다.

천기 125년(4328, 1995, 乙亥) 1월 20일,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고 저수지의 물이 말라들어가자 본부 및 전국지부에서 낮 12시에 기우제를 봉행하였다.

 


24) 망량치성(魍魎致誠)

 


천기 125년(4328, 1995, 乙亥) 6월 24일, 화천절 기념치성을 봉행하고 대령전 마당에 개고기, 막걸리, 메밀묵, 찰밥과 과일 5가지, 어물(魚物)3종류로 하여 제수를 준비하여 전국 도생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 경내의 전기불을 켜놓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망량신치성을 올렸다. 위목에는 이매망량귀신귀졸지위(魑魅魍魎鬼神鬼卒之位)라 하였으며 청홍황백흑 오색관 50개와 오색깃발 5개를 준비하여 치성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각 지부에서도 7월 2일 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 각 지방신도들이 참석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망량치성을 봉행하였다.

 


25) 성답(誠畓)의 매각

 


본교의 연례치성의 경비를 일부 충당하던 성답은 중부도생 4인 명의로 되어있고 증산법종교 명의로 명세증명 되어있었다. 본교 소유 성답 중에서 쌍용리에 소재한 275-1, 275-2의 성답은 특조때 증산법종교 명의로 소유권 이전을 하였다.

부동산 실명제 실시가 발표되면서 본교의 4인의 명의로 되어있던 성답을 매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천기 125년(4328, 1995, 乙亥) 12월 25일, 정기총회에서 성답을 매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천기 126년(4329, 1996, 丙子) 5월 5일, 용암리 소재 성답 22.5두락과 성계리 소재 4.5두락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여 총 81,000,000에 매각하였다. 그리고 매각대금은 은행에 예치하여 연례치성행사에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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